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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을 처음 읽은 건 2012년 전후, 그러니까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의 일이지만 요즘 들어 밀린 서평을 몰아 쓰는 와중에도 이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고, 취향이 달라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서 한 번에 끝까지 달렸고, (난감한 고백이긴 하지만) 취향도 저와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호기심을 자아내는 제 서평 때문에 쉽게 잊히지 않을 불쾌감을 떠안게 될 불특정 독자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할까요?
그러다가, 문득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욕심과 함께,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다면 당연히 서평도 남겨야 된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발동해서 책장 속에 꽁꽁 숨겨놓은 먼지 쌓인 책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읽는데도 첫 페이지부터 온몸이 경직되는 느낌은 여전했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범인이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어, 이 작품의 세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한 챕터씩 교차되면서 진행됩니다. 죽은 여자에게서만 사랑을 느끼게 된 미노루는 ‘첫 경험’ 이후 점점 더 대담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살인과 사체 훼손을 저지릅니다. 살인에 대한 쾌감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에게 있어 ‘착한 여자’는 오로지 죽은 여자뿐입니다. 한편, 정년퇴직한 형사 히구치는 언니를 살해한 범인을 잡으려는 여동생과 함께 희대의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거리로 나섭니다. 그 시간, 뉴스를 통해 기괴한 살인마에 대한 소식을 접한 마사코는 아들의 방에서 피 묻은 봉지를 발견하곤 무시무시한 의심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된 작품입니다. 우선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살인과 사체 훼손에 대한 잔혹하고 상세한 묘사입니다. 아마 이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았겠지만 성인들조차 역겹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기에 조금이라도 ‘잔혹함’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면 호기심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화제의 이유는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마지막 한 페이지가 준 충격”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실제로는 1~2초 정도밖에 안됐겠지만) 느낌상으로는 꽤 오랫동안 모든 사고가 정지된 경험을 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서술트릭에 맛을 들여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하던 때라, 눈에 불을 켜고 읽었지만 결국엔 마지막 페이지에서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역시 다 알고 읽었는데도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을 피하진 못했습니다.
어느 독자의 서평에서 “혐오감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샌가 미노루의 마음과 함께 하고 있었는지도... 나 자신조차 무서워졌다.”라는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는데, 아마 이 작품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이 작품을 읽은 직후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들이 미노루에 의해 철저하게 ‘해체’되는 모습을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될 거란 뜻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인데, 성인조차 그런 망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 책에 내려진 ‘19금’ 판정은 충분히 공감되고, 또 당연히 그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를 읽을 때도 이 작품의 잔혹성이 떠오르곤 했는데 실은 두 작품 모두 제겐 베스트 10에 꼽을 만한 매력적인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잔혹함에 대한 취향만 따지고 보면 스스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부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읽은 직후 아비코 다케마루의 ‘미륵의 손바닥’을 구해서 읽었는데, 기대만큼 잔혹하거나 독하지 않아서 실망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은근히 ‘살육에 이르는 병 2’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속편이 나오더라도 이만한 만족감을 기대하는 건 분명 무리한 바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