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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평점 :
자신의 고향이자 원적지를 벗어나는 것이 중죄이던 시절,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가족들을 남겨놓고 고향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늑대의 무리라 불리던 도쿠가와 막부의 친위부대 신센구미에 몸을 의탁합니다. 살인과 할복이 난무하던 신센구미에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돈이라면 자존심도 팔아먹는 기인으로 손가락질 받습니다. 유신세력이 힘을 얻고, 대세는 막부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지만, 신센구미와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끝까지 저항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마지막 전투에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도망을 치게 되고, 오사카에 있던 고향의 번 저택으로 숨어들지만, 그곳에서 그는 애초 고향을 떠났던 탈번의 죄 때문에 할복을 지시받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팬으로서 ‘칼에 지다’는 비교적 그의 책 가운데 뒤늦게 읽은 편에 속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의 마니아라 자처하면서도 막상 두 권으로 된 적잖은 분량의 소설을 통해 막부, 사무라이, 신센구미라는 소재들을 읽는다는 게 어딘가 내키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다 지로가 만들어낸 막부 말기의 이야기에는 ‘전형적인 영웅적 사무라이 활극’ 외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오랜 주저 끝에 결국 하드커버로 된 상권을 집어 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단숨에 하권까지 읽어 내렸습니다.
할복을 명예처럼 여기는 무사도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극도 아닙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은 아버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던 한 평범한 ‘가장’이 죽음이 지천에 널린 격변의 시대에 태어난 덕분에 겪어내야만 했던 지난한 일대기입니다.
숙명처럼 칼을 지니고 살아가야 했던 사무라이지만, 그에게 있어 대의는 메이지 유신도, 도쿠가와 막부도, 무사도도, 할복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것, 그들이 굶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목숨을 지키고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치욕도 감내할 수 있다는 신념. 이것이 주인공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대의’였습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 수많은 목숨들이 한없이 가볍게 사라져야했던 격변의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아사다 지로 특유의 따뜻함과 애틋함은 오히려 그 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나가면서 아사다 지로는 ‘시대’와 ‘개인’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시대가 개인을 어떻게 규정지었으며, 개인은 운명처럼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갔는지, 또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죽음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개인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소화해냈는지, 어느 하나 사소하게 넘기지 않고 찬찬히 짚어나갑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중에는 몇 번씩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져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민망한 상황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가끔씩 겪는 일이긴 하지만, 막부 말기의 한 무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그날로 새 책을 주문했습니다. 삶이 힘들어질 때,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허망해질 때,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게 될 때, 그럴 때마다 찾아 읽게 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의지처가 되는 책이 몇 권 있지만, ‘칼에 지다’는 조금은 더 묵직한 존재감으로 그 리스트에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일본 근대사에 대한 지식이 미약했던 탓에 당시의 역사적 사건, 지방 제도, 유신지사 대 도쿠가와 막부의 갈등, 신센구미의 역할 등 무시하고 읽기엔 좀 어려운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냥 읽어도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약간의 사전 정보라도 습득하고 읽는다면 훨씬 더 의미 있는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