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매미 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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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강직한 관리였던 슈코쿠는 자신이 모시던 번주의 측실과 밀통했다는 죄로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무카이야마에 유폐됩니다. 당장 할복해야 할 죄목이지만, 번주는 자신의 가문에 관한 기록(미우라 가보)을 완성하라며 10년의 유예를 줍니다. 7년 후, 슈코쿠를 못마땅해 하던 세력들은 그를 감시하기 위해 쇼자부로를 보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쇼자부로는 슈코쿠의 인품에 빠져들고, 마을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을 지켜보면서 본연의 임무에 회의를 품게 됩니다. 그러던 중 슈코쿠를 유폐시켰던 10년 전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 비밀을 지키려는 세력들은 갖은 방법을 통해 슈코쿠를 압박합니다. 하지만 슈코쿠는 번주 가문에 관한 기록을 마침과 동시에 중대 결단을 내립니다.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늘 책읽기의 만족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쯤 서점의 서가에서 꺼내보게 만드는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저녁매미 일기의 경우 나오키상 수상작이면서 동시에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매력이 끌렸던 작품입니다. 작품 제목인 저녁매미 일기는 유폐된 10년 동안 슈코쿠가 쓴 일기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과 감상이 실린 일기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그날그날의 기록일 뿐입니다. 각주를 보면 일본에서는 저녁매미가 하루살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설명돼있습니다. 슈코쿠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뜻으로 일기 제목을 그리 지었다고 진술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일기는 큰 비중 없이 다뤄집니다. 슈코쿠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조그마한 소품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읽는 동안 그의 인격과 신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일기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슈코쿠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온 쇼자부로에게 해준 이야기 가운데 무사는 명예를 중히 여기라고 하지만, 명예를 버리고 임해야 하는 것이 바로 봉공(奉公)이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겠다.”와 함께 그의 일생을 함축한 적확한 표현으로 보였는데, 사실 그처럼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 슈코쿠에게 감화 받은 쇼자부로처럼 기득권을 포기해가면서 감춰진 진실에 다가가려 애쓰거나 옳다고 믿게 된 바를 목숨 걸고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은 것은 산다는 것에 대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대해, 내 주위 사람들에 대해 한없이 가볍고 하찮게 여길 뿐인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억지 교훈이나 계몽과 달리 피부에 와 닿는 온기가 남다르다고 할까요?

 

가장 아쉬웠던 점은 가독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슈코쿠가 작성하는 미우라 가보는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족보보다 상세한 인명사전으로 아주 복잡하고 세밀한 책자입니다. 미우라 가보의 내용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인명과 지명, 복잡한 중세 일본의 관직명 등이 무수히 등장합니다. 양자나 양녀로 들어가면서 이름이 바뀌고, 관례(성인식)를 치른 후 이름이 바뀌다 보니 한 인물에 딸린 이름이 두세 개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낯설기만 한 관직이나 직책 역시 좀처럼 익숙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 주변 조연들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메모 없이는 앞부분을 다시 읽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각주마저 거의 없어서 수시로 짜증이 났는데, 맨 마지막 장에 (약간이긴 하지만) ‘관직에 관한 도움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를 위해 조금은 친절한 배려가 아쉬웠던 부분인데, 내용만 보면 별 4개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별 3개에 머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움들 때문에 작품 자체의 미덕이 가려질 수도 있겠지만, ‘나오키상 수상작이자 역사소설에 관심도 있고 약간의 노력과 수고를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라면 슈코쿠와 쇼자부로의 삶을 통해 나름 묵직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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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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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향이자 원적지를 벗어나는 것이 중죄이던 시절,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가족들을 남겨놓고 고향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늑대의 무리라 불리던 도쿠가와 막부의 친위부대 신센구미에 몸을 의탁합니다. 살인과 할복이 난무하던 신센구미에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돈이라면 자존심도 팔아먹는 기인으로 손가락질 받습니다. 유신세력이 힘을 얻고, 대세는 막부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지만, 신센구미와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끝까지 저항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마지막 전투에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도망을 치게 되고, 오사카에 있던 고향의 번 저택으로 숨어들지만, 그곳에서 그는 애초 고향을 떠났던 탈번의 죄 때문에 할복을 지시받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팬으로서 칼에 지다는 비교적 그의 책 가운데 뒤늦게 읽은 편에 속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의 마니아라 자처하면서도 막상 두 권으로 된 적잖은 분량의 소설을 통해 막부, 사무라이, 신센구미라는 소재들을 읽는다는 게 어딘가 내키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다 지로가 만들어낸 막부 말기의 이야기에는 전형적인 영웅적 사무라이 활극외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오랜 주저 끝에 결국 하드커버로 된 상권을 집어 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단숨에 하권까지 읽어 내렸습니다.

 

할복을 명예처럼 여기는 무사도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극도 아닙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은 아버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던 한 평범한 가장이 죽음이 지천에 널린 격변의 시대에 태어난 덕분에 겪어내야만 했던 지난한 일대기입니다.

숙명처럼 칼을 지니고 살아가야 했던 사무라이지만, 그에게 있어 대의는 메이지 유신도, 도쿠가와 막부도, 무사도도, 할복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것, 그들이 굶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목숨을 지키고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치욕도 감내할 수 있다는 신념. 이것이 주인공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대의였습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 수많은 목숨들이 한없이 가볍게 사라져야했던 격변의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아사다 지로 특유의 따뜻함과 애틋함은 오히려 그 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나가면서 아사다 지로는 시대개인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시대가 개인을 어떻게 규정지었으며, 개인은 운명처럼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갔는지, 또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죽음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개인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소화해냈는지, 어느 하나 사소하게 넘기지 않고 찬찬히 짚어나갑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중에는 몇 번씩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져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민망한 상황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가끔씩 겪는 일이긴 하지만, 막부 말기의 한 무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그날로 새 책을 주문했습니다. 삶이 힘들어질 때,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허망해질 때,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게 될 때, 그럴 때마다 찾아 읽게 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의지처가 되는 책이 몇 권 있지만, ‘칼에 지다는 조금은 더 묵직한 존재감으로 그 리스트에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일본 근대사에 대한 지식이 미약했던 탓에 당시의 역사적 사건, 지방 제도, 유신지사 대 도쿠가와 막부의 갈등, 신센구미의 역할 등 무시하고 읽기엔 좀 어려운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냥 읽어도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약간의 사전 정보라도 습득하고 읽는다면 훨씬 더 의미 있는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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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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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막바지인 1940년대 중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어있던 노르웨이의 지리적, 정치적 상황 덕분에 수많은 개인들이 전쟁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볼셰비키에게 조국을 내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나치의 군대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 반대로, 나치에게 항거했던 레지스탕스에 투신한 사람들. 그리고, 일신의 안위를 위해 조국을 버렸던 왕족들. 전쟁은 끝났지만 이들의 가슴 속에는 서로 다른 형태의 복수심과 배신감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수십 년간 불발탄 상태로 잠복해 있다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에 이르러 그 뇌관을 터뜨리면서 엄청난 비극을 낳습니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일련의 살인사건들이 해리 홀레의 레이더 속에서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하고, 수십 년을 잠복해온 뇌관은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진 후에야 그 실체를 조금씩 드러냅니다.

 

레드브레스트해리 홀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알려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앞선 박쥐바퀴벌레의 배경이 각각 호주와 태국인데다 사건이나 조연들 모두 스탠드얼론에 가깝다 보니 오슬로를 무대로 해리 홀레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이 작품을 실질적인 시리즈 첫 편으로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압도적인 벽돌 분량이지만 그에 걸맞은 역사적 배경과 잔혹한 사건들이 실려 있어서 마지막 장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다만, 초반에 꽤 애를 먹었는데, 2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지점까지 1942~1944년의 에피소드와 1999~2000년의 에피소드가 한 챕터씩 교차하면서 수많은 인물들과 지명들과 사건들을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북유럽 작가의 작품 또는 북유럽이 무대가 되는 작품을 통해 그쪽의 지명이나 인명에 어지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레드브레스트의 무수한 인명과 지명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외국의 독자들도 초반부의 복잡함과 느린 전개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고들 하니 이런 점은 미리 감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흡입력은 거의 진공청소기급이긴 하지만 나름 아쉬운 점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방대한 역사적 배경 설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드러난 범행 동기는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모호하게만 느껴집니다. “, 그렇군!”이 아니라 ... ... 그런 거겠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또 인물들의 관계가 워낙 복잡한데 막판에 이르러서도 선명한 정리가 잘 안된 느낌이고, 후반부 사건 해결 과정이나 범인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묘사에서는 작위적이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적잖이 끼어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미제인 채로 마무리되는 사건도 있는데, 아마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Nemesis’에서 전모가 밝혀지리라 예상되지만, 어쨌든 좀 찜찜한 느낌으로 책을 덮은 건 사실입니다.

 

사족이긴 하지만, 읽는 내내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가 떠올랐습니다. ‘유럽을 휩쓴 전쟁의 광기가 남긴 현재의 비극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성격이나 패턴은 전혀 다르지만,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치즘의 광기혹은 ‘2차 대전 중 유럽의 역사적 상황을 서로 비교해보면서 읽는다면 그 자체로 독특한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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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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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가 활약하는 네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시간적으로는 점성술 살인사건을 해결한 1979년부터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는 시기가 배경입니다. 나름 인정받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론 점성술 살인사건밖에 만나보지 못한 시마다 소지입니다.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 ‘용와정 살인사건등 중고서점을 통해 구입한 작품들은 많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못한 상태에서 우연히 최신간인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부터 읽게 됐습니다. 아직까지 이만한 혹평을 쓴 적이 없어서 여러 가지로 유감스럽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감이 컸기에 앞뒤 안 가리고 일단 느낀 그대로를 써볼까 합니다.

 

숫자 자물쇠

1979년 크리스마스 무렵, 무례하고 버릇없는 미타라이 기요시가 사건 해결 과정에서 친구를 감동시켰다는 이야기. 정작 사건은 평범했고, 결과는 감동을 줄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데, 제목으로 쓰인 숫자 자물쇠는 사건 해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장치였는데, 그에 대한 미타라이의 허접한추리를 보면서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던... 혹시 무슨 말장난이라도 숨어있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바보 취급당했다는 느낌을 받은 독자는 비단 만은 아닐 듯... 첫 작품부터 맥이 풀리는 바람에 계속 읽어야 하나, 잠시 고민...

 

질주하는 사자

파티장에 함께 있던 사람이 갑작스런 정전 직후 방을 뛰쳐나갔고, 잠시 후 고가선로에서 열차와 충돌한 사체로 발견.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연출되지만 미타라이가 보란 듯이 해결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가 범인을 지목하며 설명한 범행 수법은 숫자 자물쇠처럼 억지 혹은 끼워 맞추기였던... 말하자면 결과를 정해놓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미타라이는 증거나 개연성에 대한 설명 없이 단지 추측만으로 복잡다단한 범죄과정을 코앞에서 지켜본 것처럼 설명.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

어김없이 등장하는 미타라이의 설명 불가능한 초능력’. 미스터리라기보다는 한 편의 해학적인 콩트 같은... 그 덕분에 앞서 두 편에 비해 배신감은 덜 들었지만, 여전히 분노의 게이지는 내려가지 않는... 이제 한 편 남았음.

 

그리스 개

그나마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사실감이 조금준수하긴 했지만, 여전히 결과를 정해놓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형식은 전작들과 동일. 훨씬 더 쉬운 방법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범인들이 미타라이의 천재성을 입증해주기 위해일부러 몇 배는 더 힘든 범행 수법을 고안해낸 것 같아 오히려 동정심(?)이 들었던...

 

시마다 소지가 이 작품을 통해 대단한 미스터리나 뒤통수치는 반전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품 제목처럼, 독자들이 무례하고 버릇없는 미타라이 기요시와 친해질 수 있게끔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더불어 세계 정상급의 뮤지션을 압도할 정도의 기타 연주력 등 미타라이의 개인기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도 눈에 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탐정의 사건 해결인 만큼 미스터리의 덕목은 갖춘 상태에서 작가의 의도를 담아냈어야 합니다. 물론, 단편이 갖는 스케일이나 깊이에 있어서의 한계도 충분히 고려했지만, 네 편의 수록작은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품질자체에 하자가 있다고밖에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은 지도 꽤 오래 전 일이라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미타라이 기요시가 특이하고 버릇없긴 해도 사소한 단서 하나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꼼꼼한 캐릭터였다는 점, 과장됐긴 해도 그 박학다식함이 작위적으로 여겨지진 않았다는 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었는데, 오히려 그의 인사를 읽고 나니, 그 추억들이 전부 안 좋은 쪽으로 변질돼버린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시마다 소지의 작품들을 쌓아놓고 한편씩 음미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물론 그의 명성이 결코 헛되이 쌓이진 않았을 테니 이런 독후감을 느낄 일은 없겠지만) 왠지 맥 빠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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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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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는 스스로 미쳤거나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서른 즈음의 여자입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기억 곳곳이 뭉텅뭉텅 사라져버리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벌어진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반복된 끝에 가정은 파괴됐고 직장에서도 쫓겨납니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일은 아무 기억도 없는 상태에서 주위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점, 그리고 아무리 봐도 자신이 죽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결국 도망자 신세를 택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면서 소피는 파리 경찰의 추격을 받기에 이릅니다. 비참한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소피의 마지막 선택은 신분 세탁을 위한 결혼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신분증과 이름으로 만난 그 남자와의 결혼은 소피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맙니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 진실에 한걸음씩 다가가게 만듭니다.

 

이 작품은 크게 네 개의 챕터 - 소피 프란츠 프란츠와 소피 소피와 프란츠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서평 쓰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첫 번째 챕터 외에는 내용 소개가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살펴보면 첫 번째 챕터 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내용을 언급한 서평은 피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실, 같은 작가의 작품 알렉스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 때문에 한동안 읽기를 주저했던 작품입니다. ‘알렉스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한 초반부와 기분이 상할 만큼 엉망인 번역 때문에 결국 중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읽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알렉스의 안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소피가 도망자 신세가 되기까지의 설명은 그녀의 정신 상태처럼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할 뿐이었고, 가끔 힌트처럼 묘사되는 그녀의 과거사는 전혀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도망자가 되어 비참한 삶을 꾸려가는 대목 역시 작위적이거나 억지스러워 보여서 도무지 문장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겨우겨우 두 번째 챕터로 진입한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페이지는 거의 3배속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그대로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달릴 수 있었습니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했던 것들이 선명하게 밝혀지고, 문장과 단어는 더 이상 어렵거나 현학적이지 않았습니다. , 끊임없이 닥쳐오는 위기들과 차츰 정체를 드러내는 추악한 진실들이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앞서 미적미적 갈 길을 헤매던 캐릭터들도 비로소 자기 역할에 충실해지면서 이 작품의 미덕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물론 마지막까지 아쉬운 점들도 있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그와 동시에 현실감은 조금씩 사라져버렸습니다. 극적인 설정도 좋지만 이건 좀 과하네.”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고,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다 해도 전지전능에 가까운 캐릭터는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는 평범한 진리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첫 번째 챕터에서 소피의 상황과 내면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파고든 덕분에 사건 위주의 스릴러라기보다 깊이 있는 심리스릴러에 더 가까운 작품이 됐지만, 반대로 사건이 중심이 된 이야기였다면, 한참 부족한 리얼리티 때문에 아마 호평을 듣기는 어려웠을 거란 생각입니다.

 

어쨌든... 초반의 지루함과 모호함만 잘 견뎌낸다면 마지막까지는 순탄한 책 읽기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든 첫 번째 챕터를 인내심을 갖고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문득, “‘알렉스도 이런 스타일이었나? 조금만 더 참아볼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번역 때문에라도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 한은 다시 찾아 읽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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