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드브레스트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평점 :
2차 대전 막바지인 1940년대 중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어있던 노르웨이의 지리적, 정치적 상황 덕분에 수많은 개인들이 ‘전쟁’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볼셰비키에게 조국을 내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나치의 군대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 반대로, 나치에게 항거했던 레지스탕스에 투신한 사람들. 그리고, 일신의 안위를 위해 조국을 버렸던 왕족들. 전쟁은 끝났지만 이들의 가슴 속에는 서로 다른 형태의 복수심과 배신감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수십 년간 불발탄 상태로 잠복해 있다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에 이르러 그 뇌관을 터뜨리면서 엄청난 비극을 낳습니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일련의 살인사건들이 해리 홀레의 레이더 속에서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하고, 수십 년을 잠복해온 뇌관은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진 후에야 그 실체를 조금씩 드러냅니다.
‘레드브레스트’는 ‘해리 홀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알려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앞선 ‘박쥐’와 ‘바퀴벌레’의 배경이 각각 호주와 태국인데다 사건이나 조연들 모두 스탠드얼론에 가깝다 보니 오슬로를 무대로 해리 홀레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이 작품을 ‘실질적인 시리즈 첫 편’으로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압도적인 ‘벽돌 분량’이지만 그에 걸맞은 역사적 배경과 잔혹한 사건들이 실려 있어서 마지막 장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다만, 초반에 꽤 애를 먹었는데, 2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지점까지 1942~1944년의 에피소드와 1999년~2000년의 에피소드가 한 챕터씩 교차하면서 수많은 인물들과 지명들과 사건들을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북유럽 작가의 작품 또는 북유럽이 무대가 되는 작품을 통해 그쪽의 지명이나 인명에 어지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레드브레스트’의 무수한 인명과 지명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외국의 독자들도 초반부의 복잡함과 느린 전개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고들 하니 이런 점은 미리 감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흡입력은 거의 진공청소기급이긴 하지만 나름 아쉬운 점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방대한 역사적 배경 설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드러난 범행 동기는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모호하게만 느껴집니다. “아, 그렇군!”이 아니라 “어... 음... 그런 거겠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또 인물들의 관계가 워낙 복잡한데 막판에 이르러서도 선명한 정리가 잘 안된 느낌이고, 후반부 사건 해결 과정이나 범인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묘사에서는 작위적이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적잖이 끼어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미제인 채로 마무리되는 사건도 있는데, 아마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Nemesis’에서 전모가 밝혀지리라 예상되지만, 어쨌든 좀 찜찜한 느낌으로 책을 덮은 건 사실입니다.
사족이긴 하지만, 읽는 내내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가 떠올랐습니다. ‘유럽을 휩쓴 전쟁의 광기가 남긴 현재의 비극’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성격이나 패턴은 전혀 다르지만,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치즘의 광기’ 혹은 ‘2차 대전 중 유럽의 역사적 상황’을 서로 비교해보면서 읽는다면 그 자체로 독특한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