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소피는 스스로 미쳤거나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서른 즈음의 여자입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기억 곳곳이 뭉텅뭉텅 사라져버리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벌어진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반복된 끝에 가정은 파괴됐고 직장에서도 쫓겨납니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일은 아무 기억도 없는 상태에서 주위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점, 그리고 아무리 봐도 자신이 죽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결국 도망자 신세를 택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면서 소피는 파리 경찰의 추격을 받기에 이릅니다. 비참한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소피의 마지막 선택은 신분 세탁을 위한 결혼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신분증과 이름으로 만난 그 남자와의 결혼은 소피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맙니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 진실에 한걸음씩 다가가게 만듭니다.

 

이 작품은 크게 네 개의 챕터 - 소피 프란츠 프란츠와 소피 소피와 프란츠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서평 쓰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첫 번째 챕터 외에는 내용 소개가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살펴보면 첫 번째 챕터 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내용을 언급한 서평은 피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실, 같은 작가의 작품 알렉스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 때문에 한동안 읽기를 주저했던 작품입니다. ‘알렉스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한 초반부와 기분이 상할 만큼 엉망인 번역 때문에 결국 중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읽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알렉스의 안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소피가 도망자 신세가 되기까지의 설명은 그녀의 정신 상태처럼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할 뿐이었고, 가끔 힌트처럼 묘사되는 그녀의 과거사는 전혀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도망자가 되어 비참한 삶을 꾸려가는 대목 역시 작위적이거나 억지스러워 보여서 도무지 문장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겨우겨우 두 번째 챕터로 진입한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페이지는 거의 3배속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그대로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달릴 수 있었습니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했던 것들이 선명하게 밝혀지고, 문장과 단어는 더 이상 어렵거나 현학적이지 않았습니다. , 끊임없이 닥쳐오는 위기들과 차츰 정체를 드러내는 추악한 진실들이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앞서 미적미적 갈 길을 헤매던 캐릭터들도 비로소 자기 역할에 충실해지면서 이 작품의 미덕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물론 마지막까지 아쉬운 점들도 있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그와 동시에 현실감은 조금씩 사라져버렸습니다. 극적인 설정도 좋지만 이건 좀 과하네.”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고,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다 해도 전지전능에 가까운 캐릭터는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는 평범한 진리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첫 번째 챕터에서 소피의 상황과 내면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파고든 덕분에 사건 위주의 스릴러라기보다 깊이 있는 심리스릴러에 더 가까운 작품이 됐지만, 반대로 사건이 중심이 된 이야기였다면, 한참 부족한 리얼리티 때문에 아마 호평을 듣기는 어려웠을 거란 생각입니다.

 

어쨌든... 초반의 지루함과 모호함만 잘 견뎌낸다면 마지막까지는 순탄한 책 읽기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든 첫 번째 챕터를 인내심을 갖고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문득, “‘알렉스도 이런 스타일이었나? 조금만 더 참아볼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번역 때문에라도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 한은 다시 찾아 읽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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