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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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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미모를 갖췄지만 갖가지 스캔들을 일으켜 유명해진 톱 모델 미오리 레이코가 독살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경찰은 그녀의 파혼남인 전직 의사 사사하라 노부오를 체포하지만 그는 범행을 절대 부인합니다. 그러던 중 한 기업의 대표가 자신이 레이코를 살해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패닉에 빠진 여섯 명의 남녀가 있습니다. 이들은 레이코를 살해한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자살한 기업 대표의 유서에 담긴 살해 상황과 방법이 자신이 레이코를 살해했을 때와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에 이들의 공포심은 극대화됩니다. 한편 무죄로 풀려난 사사하라는 후배 의사 하마노에게 여섯 남녀에 대한 조사를 부탁합니다. 분명 그들 중에 진범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광회귀천 정사를 읽고 팬이 되어 저녁싸리 정사’, ‘조화의 꿀’, ‘열린 어둠등 한국에 출간된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들을 사들였지만, 아끼며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본의 아니게 책장에 방치하고 있던 중 2023년에 출간된 ‘71을 먼저 읽게 됐습니다.

원제가 という變奏曲’(나라는 이름의 변주곡)인 이 작품은 1984년 출간된 이후 현재까지 여러 대형 출판사에 의해 다섯 차례나 복간되어 불사조 미스터리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뜻일 텐데 그래선지 이렇게 뒤늦게 한국에 소개된 게 다소 의외이기도 합니다.

 

일곱 번의 살인, 일곱 명의 범인, 하지만 시체는 하나라는 독특한 설정 속에 누가 진범인지를 캐는 과정이 미스터리의 핵심입니다. 한쪽에선 용의자로 체포됐다가 풀려난 전직 의사 사사하라 노부오가 후배 의사 하마노의 도움을 받아 레이코를 죽이고 싶어 한 일곱 명가운데 진범을 찾아내려는 분투를 다루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자신이 레이코를 죽인 게 분명하다고 여기는 남녀들이 의문과 공포에 휩싸인 채 지난 5년 동안 레이코와 맺었던 관계를 돌이켜 보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사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 몸과 마음과 목소리까지 모조리 빼앗긴 자의 절망, 자신의 파멸을 무릅쓰면서까지 사랑을 완성하려는 자의 광기, 그리고 자신 외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여섯 남녀의 바닥 모를 공포 등 살해당한 레이코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지독하고도 섬세한 심리 서사입니다. 36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다 읽고 나면 마치 600페이지 급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농밀하다 못해 숨이 막힐 정도로 빈틈없이 채워진 이 심리 서사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이면서 동시에 모두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인 레이코의 경우 참혹하고 안타까운 유년기와 5년 전의 끔찍한 사고, 그리고 그 직후 톱 모델에 이르기까지의, 화려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연옥 같은 시간들이 상세하게 그려집니다. 그 과정에서 진짜라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녀가 일곱 명의 범인에게 일곱 번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미스터리가 한꺼풀씩 천천히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사진작가, 베테랑 여성 디자이너, 신인 남성 디자이너, 기업 대표이자 광고주, 톱의 자리를 다투던 동료 모델, 음반 디렉터, 젊은 의사 등 지난 5년 간 레이코의 삶을 뒤흔들었던 자들은 자신 외에 레이코를 죽인 또 다른 범인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과 공포에 빠진 채 어떻게든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 노력합니다. 실은 그들은 아무 죄책감 없이 레이코의 몸을 조각내고 살을 샅샅이 먹어치운 자들이자 그녀의 모든 것을 모조리 빼앗아 돈으로 바꾸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레이코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레이코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평온을 되찾기는커녕 살아서는 벗어날 수 없는 진정한 지옥을 맛보게 되는 동정할 수 없는 악인의 처지로 추락합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우수가 짙게 깔린 분위기”, “휘몰아치는 마지막 대반전”, “철저히 계산된 서술등 다양한 코드와 서사가 잘 섞여 있어서 일반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거듭되는 반전 끝에 드러나는 레이코의 죽음의 진상은 정교한 미스터리에 대한 감탄과 함께 애잔함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백광회귀천 정사에서 맛봤던, 섬세하면서도 그래서 더 긴장감과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문장들 역시 여전해서 그의 팬이라면 충분히 열광하고도 남을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2013년에 타계했지만 렌조 미키히코는 장편과 단편집을 포함하여 70여 편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에 소개된 건 10편도 채 안 되는데, 그래도 최근 들어 그의 작품이 종종 출간되는 건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가능하다면 좀더 많은 작품을 만나보고 싶은 욕심인데, 그 전에 아껴뒀던 책장 속 작품들부터 한 편씩 꺼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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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마귀 살인사건
다니엘 콜 지음, 서은경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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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명한 인플루언서의 SNS에 두 장의 끔찍한 사진이 업로드 된다. 하나는 그녀가 목이 졸려 죽어있는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목이 잘려나간 사진이었다. 벌써 세 번째 사건이었다. 모두 머리만 남긴 채 몸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얼굴에는 할퀸 것 같은 다섯 줄의 상처가 남아있었다. 언론에서는 이 살인범을 갈까마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건을 맡은 스칼릿 형사는 단서 하나 찾지 못하던 중 범죄현장에서 불법적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던 자칭 사립탐정 헨리와 만난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헨리가 첫 번째 살인의 트릭을 밝혀내면서 두 사람의 위험한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봉제인형 살인사건 시리즈의 다니엘 콜이 새로운 주인공 스칼릿 딜레이니를 내세워 런칭한 새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사실 4년 전쯤 봉제인형 살인사건에게 별 3개라는 낮은 평점을 준 탓에 이후 출간된 작품은 한 편도 읽지 않았는데,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출판사 소개글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새 주인공 스칼릿 딜레이니는 꽤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20여 년 전 경찰에게 사살된 연쇄살인마의 딸이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은 동료들로부터 돌아버린 딜레이니혹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정신병자라고 뒷담화를 듣는 다혈질 형사입니다.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비아냥을 퍼붓는 동료들에게 제대로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그들의 입을 다물어버리게 할 만큼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는 것임을 잘 아는 스칼릿은 잔인한 연쇄살인마 갈까마귀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합니다. 분명 정의감이 느껴지는 인물이긴 하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칼릿의 폭주 캐릭터는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불법적인 조사를 벌이다가 스칼릿에게 덜미가 잡힌 자칭 사립탐정이자 해결사 헨리 데블린은 첫 사건의 트릭을 밝혀냄으로써 스칼릿에게 첫 공적을 안겨주는 어딘가 수상쩍은 인물입니다. 그는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외모와 그 이상의 젠틀함까지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은 면모까지 갖추고 있어서 마치 나쁜 주인공같은 냄새를 폴폴 풍기기도 합니다. 독자 입장에선 헨리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직감하고도 사건 해결 욕심에 그와의 공조 수사를 받아들인 스칼릿을 아슬아슬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새로운 커플 주인공의 탄생으로 이어질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이어질지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주인공이라 부를 만한 인물은 스칼릿의 파트너이자 멘토인 노장 프랭크 애쉬 형사입니다. 인연이 닿았다면 스칼릿의 양부가 될 수도 있었던 프랭크는 그녀가 경찰이 된 이후 늘 수호천사처럼 그녀 곁을 지켜온 인물입니다. 그런 프랭크가 스칼릿의 위험한 수사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도, 또 자칫 스칼릿의 경찰로서의 경력을 망칠 수도 있는 수상한 인물 헨리를 가장 경계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프랭크는 스칼릿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갈까마귀를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안고 분투하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몸통은 사라진 채 잘린 머리만 발견되는 연쇄살인 설정은 흥미로웠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박한 평점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큰 건 포장은 그럴 듯했지만 내실은 빈약했던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스칼릿은 언행, 성격, 과거 등 극적인 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깊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인연과 악연이 겹친 프랭크와의 오랜 관계도 마음을 움직일 만큼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만큼 인물을 묘사하는 문장과 서사가 모두 얕아 보였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미스터리 자체가 재미없는 건 아니지만 어느 시점인가부터 평범하고 밋밋하게 전개된 점입니다. 인상적인 변곡점이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두어 군데밖에 없고 그 외에는 딱히 긴장감을 느낄 만한 대목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갈까마귀의 정체가 밝혀지는 지점에서도 이후의 이야기가 그다지 궁금해지지 않은 걸 보면 이 미스터리 자체가 저를 흥분시키지 못한 건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다니엘 콜과는 잘 맞지 않는 저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 기준으로 인터넷서점의 평점을 보니 알라딘은 76.9%, 예스2480%의 독자가 별 5개를 줬습니다. 아무래도 제 취향과 맞지 않을 뿐 다른 독자들에겐 충분히 어필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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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
아쓰카와 다쓰미.샤센도 유키 지음, 김은모 외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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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건 화수분마냥 개성 강한 작가들을 끊임없이 탄생시키는 탄탄한 문화적 기반입니다. 그 기반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하위 장르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기획을 발굴하는 노력일 텐데 그런 점에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은 일본 미스터리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와 샤센도 유키는 각각 94년생, 93년생으로 현재 일본에서 각광받는 신인작가라고 합니다. 아직 작품을 읽은 적이 없어서 두 사람의 장점이나 매력을 잘 알지 못하지만 경작(출판사의 표현인데 아마 겨루기혹은 경쟁의 의미를 담은 競作이 아닐까 싶습니다)이라 부를 만한 독특한 기획에 초대받은 걸 보면 주목받는 신예임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두 작가가 쓴 두 편의 중편이 실려 있는데 동일한 주제로 이야기를 자아내는 앤솔로지와 달리 두 중편은 제목 그대로 서로에게 보낸 도전장에 답한 소설입니다. 즉 미스터리의 일부만 담긴 도전장을 받은 작가는 그 일부를 모티브 삼아 온전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언뜻 재미있어 보이는 기획이지만 비슷한 경력의 동 시대 작가 두 사람이 도전장에 걸맞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집필한다는 건 실은 무척 부담스러운 미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선지 독자 입장에서도 일반적인 책읽기와 달리 꽤나 긴장된 상태로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수조성의 살인은 샤센도 유키가 보낸 도전장에 아쓰카와 다쓰미가 답한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특이하게 생긴 게스트하우스 수조성에서 벌어진 불가해한 밀실살인을 다룹니다. 이웃에 사는 두 부부는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수조성을 찾았지만 원인 모를 화재 이후 칼에 찔린 시신이 발견된 사건 때문에 충격에 빠집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방화셔터와 초대형 수조 사이의 밀실로 어떻게 해도 피해자를 죽인 범인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담 커플을 떠올리게 하는 두 명의 형사가 추리에 추리를 거듭한 끝에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진실을 찾아냅니다.

 

흔한 잠은 아쓰카와 다쓰미가 보낸 도전장에 샤센도 유키가 답한 작품입니다. 뛰어난 미술 재능과 외모는 물론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인 여동생 지유리로 인해 가즈히사의 학창시절은 꽤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성인이 되어 독립한 가즈히사는 의식적으로 지유리를 멀리 해왔는데, 어느 날 미대 입시를 치르기 위해 도쿄에 온 지유리가 며칠 묵겠다며 집으로 쳐들어오자 당황합니다. 그리고 하필 그날 밤 가즈히사가 근무하는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특이한 건 범인이 자신이 살해한 희생자 옆 침대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가즈히사는 살해된 자의 정체를 알고 큰 충격에 빠짐과 동시에 직접 미스터리를 풀기로 결심합니다.

 

수조성의 살인이 밀실 트릭에 충실한 본격 미스터리라면 흔한 잠은 애틋하고 안쓰러운 여운을 남기는 감성적인 미스터리입니다. 말하자면 상대가 보낸 도전장에 대해 자기만의 스타일로 요리한 미스터리로 답했다는 점에서 독자는 맛과 모양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음식을 한 번에 맛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수조성의 살인의 경우 트릭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인 점이 아쉬웠고, ‘흔한 잠은 미묘한 관계로 엮인 두 남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 반면 미스터리 자체는 단선적으로 설정된 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내용보다 더 아쉬웠던 건 두 작가의 장점과 매력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이 작품의 진가를 좀더 진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텐데 전작들을 읽어보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친 점입니다.

 

아직 많은 편수는 아니지만 한국에 출간된 두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뒤에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을 다시 읽으면 상대의 도전장에 부응하여 내놓은 두 작가의 작품의 미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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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낭군가 - 제7, 8회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6
태재현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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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를 불문하고 좀비물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장르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한국 좀비소설은 무척 재미있게 읽어왔습니다. ‘광인들’(김중의), ‘난쟁이가 사는 저택’(황태환), 3~4ZA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크르르르등이 대표적인데, 그래선지 표제작의 제목이 단번에 눈길을 끈 제7~8ZA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좀비 낭군가도 남다른 기대를 갖고 읽게 됐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수록작마다 소재도 다양하고 이야기의 개성도 강해서 역시 좀비물은 무한한 확장성을 갖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좀비 낭군가 (태재현)

과거 시험을 보러갔던 낭군이 좀비가 되어 돌아와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활을 익혀온 한씨는 목숨을 걸고 괴물들과 맞서기로 합니다.

 

침출수 (최영희)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16살 도아가 자신을 추행해온 남자를 살해한 날, 오염된 침출수가 일으킨 좀비 바이러스가 온 마을에 퍼집니다. 도아는 망치를 들고 좀비를 처리하러 나섭니다.

 

메탈의 시대 (서재이)

첫 공연을 1주일 앞둔 인디 메탈밴드의 베이시스트 밸지는 홍대 일대를 휩쓴 좀비의 공격에 망연자실해집니다. 동료를 모두 잃었지만 밸지는 사선을 뚫고 공연장으로 향합니다.

 

삼시세킬 (정예진)

감염병이 확산되고 감염자들의 공격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남편의 삼시세끼를 챙기기 위해 분투하는 70대 할머니 보배의 괴물과의 전쟁’.

 

화촌(火村) (경민선)

업무 차 강원도로 가던 구대리는 화촌휴게소에 발이 묶입니다. 휴게소 앞뒤의 터널 두 개가 붕괴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의 공격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 (전효원)

숙취에 시달리며 잠을 깬 채하는 갑자기 변해버린 세상에 놀랍니다. 빠른 사람(속인)과 느린 사람(완인)으로 갈라진 세상은 이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살육장으로 변해버립니다.

 

각시들의 밤 (장아미)

섬의 생활에 환멸을 느낀 진홍은 매년 봄마다 치러지는 혼례의식을 이용하여 섬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진홍은 은밀하게 감춰져온 섬의 비밀을 알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표제작인 좀비 낭군가는 스토리와 구성 모두 정직하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감칠맛 나는 문장과 생생한 캐릭터가 돋보인 작품입니다. ‘침출수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장편 사회파 호러물로의 확장성이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삼시세킬은 영화 킬 빌의 우마 서먼을 연상시키는 70대 노파의 블랙코미디 풍 좀비물이라 흥미로웠고, ‘화촌제발 조금만 천천히는 좀비라는 소재가 얼마나 신선하고 새롭게 구사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 작품들입니다.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은 건 마지막 수록작 각시들의 밤인데, 아이디어는 너무 좋았던 반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 특히 구성이 다소 허술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필요한 정보들을 제때 풀어놓지 않은 채 새로운 인물들을 계속 등장시키다 보니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고, 막판에 한꺼번에 공개된 정보는 왠지 뒷북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구성만 좀더 짜임새가 있었다면 정말 매력적인 작품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진하게 남은 작품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다양한 소재와 개성 강한 서사들로 채워진 덕분에 한국 좀비소설의 특별한 맛을 즐길 수 있었고, 이름을 기억해둬야 할 작가들과 처음 만난 것도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취향과 거리가 먼 장르라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재미있게 읽는 걸 보면 어쩌면 저도 이미 좀비물의 팬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하면서 읽을 만한 한국 좀비소설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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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캡슐 -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윤수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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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관’(2015) 이후 무려 8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오리하라 이치의 신간입니다.(일본에서는 2018년에 출간됐습니다.)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라는 부제처럼 15년 만에 배달된 편지 한 통이 몰고 온 일곱 개의 사건을 묶은 연작소설입니다. 오리하라 이치의 주 무기인 서술트릭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있고, 뒤통수를 치는 반전의 향연과 절묘하게 회수되는 복선의 쾌감 등 그야말로 미스터리의 다채로운 맛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15년 전의 과거가 집 안에 흙발로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 행복한 과거면 괜찮지만 (...) 불행한 과거가 쏟아져 들어오면 당연히 불행해진다. (...) 행복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불행해지고, 불행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한층 더 불행해진다.” (p353)

 

먼 훗날 열어보기로 작정하고 자발적으로 쓴 타임캡슐 속 편지와 달리 포스트 캡슐 속 편지들은 발신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배송이 15년이나 지연된 것들입니다. 그 편지들은 하나같이 받은 사람이 황당해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청혼을 담은 고백편지, 어머니에게 보낸 아들의 유서, 전 직장상사에게 보낸 감사편지, 돈을 요구하는 협박편지, 소설 신인상 수상을 알리는 통보, 가출한 손녀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편지 등이 그것입니다.

 

일부는 편지의 소인이 15년 전임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불과 며칠 전에 발신된 편지로 오해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받은 사람들의 첫 반응은 당황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점차 다양한 감정을 품게 됩니다. 그중 반가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의문을 품거나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고백, 유서, 협박, 수상통보 등 받을 시기를 놓치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답장을 쓰지만 그 답장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초하거나 평온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삶이 무너지는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편지의 당사자들은 편지를 주고받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만나기까지 하는데, 바로 그 지점부터 예기치 못한 사고나 범죄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사건 당사자 외에 편집자라는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15년 전 포스트 캡슐을 기획한 자로 보이기도 하지만 뭔가 의도를 갖고 사건 당사자들을 지켜보는 듯한 묘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당사자들을 미행하거나 지켜보며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물론 사건이 종료되면 후기라는 것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 모든 기록들의 집합체가 바로 이 포스트 캡슐이라는 소설입니다. 독자는 미스터리뿐 아니라 이 편집자의 정체와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일곱 개의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로 묶이는 순간 편집자의 정체와 의도가 드러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오리하라 이치 특유의 서술트릭의 진가를 맛볼 수 있습니다. 눈앞에 빤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단서들이 자동으로 맞춰지는 퍼즐처럼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들어가는 쾌감도 짜릿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주 가끔 애매모호거나 찜찜함이 남는 순간들이 있는 게 사실인데, 대부분은 찬찬히 복기해보면 정교한 설계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막판 총정리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별 4.5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평범한 한 통의 편지가 15년의 배송 지연으로 인해 위험천만한 흉기로 혹은 인간의 악의를 부추기는 불온한 촉매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기발한 발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지금까지 읽은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하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물론 도착 시리즈시리즈를 모두 읽은 것도 아니고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 중 절반 가까이밖에 못 읽어서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직 오리하라 이치를 만나본 적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그에게 입문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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