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        

 

     아침 일찍 가장 먼저 학교에 오는 스탠리. 명랑한 성격에 톡톡 튀는 생각들로 가득 찬 스탠리는 친구들로부터도 인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스탠리의 표정이 어두워질 때가 있었으니 바로 점심시간. 다른 아이들이 싸온 도시락을 열 때 스탠리는 조용히 교실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 그의 어려운 사정을 안 친구들이 자신들의 도시락을 함께 나누어 먹으려 하지만, 아이들이 싸온 도시락을 뺏어 먹는 걸 낙으로 여기는 밉상 베르마 선생 때문에 그마저 쉽지가 않다. 아이들이 스탠리와 도시락을 나누어 먹기 위해 자신을 따돌리자 화가 난 베르마 선생은 마침내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으려면 학교에 오지 말라는 선포를 하는데..

 

 

 

2. 감상평 。。。。。。。                    

 

     점심을 싸 오지 못해서 교실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아이들. 수억의 인구를 자랑하고 인공위성까지 쏘아올리고 있지만 아울러 빈부격차도 커지고 있는 인도의 모습이다. 자칫 무거워질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감독은 스탠리의 명랑함과 친구들의 따뜻한 우정으로 잘 녹여내 휴먼 드라마로 만들어낸다. 당장 최소한의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고기반찬 투정을 하고 고가의 브랜드 옷에 매달리는 우리나라의 개념 없는 아이들의 얼굴은 얼마나 다른지.

 

     틈틈이 스탠리의 몸에 난 상처들을 비추는 감독의 카메라는 예사롭지가 않았다. 스탠리의 약간은 과장스러운 명랑함은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깊은 슬픔으로 바뀐다. 슬픔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그런 친구를 거리낌 없이 받아주는 친구들의 모습은 작은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악한 구조를 바꾸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감은 줄어들지 않는 거니까.

 

 

 

     영화의 메시지는 볼만하지만, 영화로서의 구성면은 좀 아쉽다. 초반 뺀질대는 베르마 선생의 행동의 이유와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퇴장하고 있고, 후반 10분여를 남겨 두고 너무 급격하게 이야기가 전환되어 버린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화의 말미에 주제를 자막으로 넣는 식의 처리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내용을 극 전체를 통해서, 영상을 사용해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알고 느낄 수 있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고작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밥 한 끼 아이들에게 무료로 먹이면 금방이라도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스러워 하면서, 정작 국민 세금으로 닦아 놓은 도로와 각종 편의시설들 때문에 오른 집값, 땅값으로 돈을 벌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각종 혜택을 받아 챙기며 회사를 키워왔으면서도 마치 자기들만이 대단한 노력을 해서 얻은 양 뻐기는 종(種)들은 물론 이런 영화를 안 보겠지만, 어쩌겠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도 이런 영화를 봐주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하고, 애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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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람은 분노하면 칼을 빼어들고 강자에게 향한다.

 

비겁한 사람은 분노하면 칼을 빼어들고 약자에게 향한다.

 

 

- 루쉰, 『희망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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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지음, 김진섭 옮김 / 이레서원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비록 그 실제적인 함의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지도 모르지만, 기독교 설교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막론하고 모든 학자와 목사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기록된 구약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지(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책은 구약 성경 본문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왜 구약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지(1-2장), 역사적으로 이를 위해 사용되었던 방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각각이 가진 장단점은 무엇인지(3-4장)를 되돌아 본 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어떻게 구약의 본문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를 선포했는지(5장)를 거쳐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한 실제적인 지침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른다(6-8장).

 

 

 

2. 감상평 。。。。。。。                  

 

     아브라함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오르던 이삭이 등에 지고 있었던 나뭇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교할 수 있을까? 저자는 오늘날에도 종종 들을 수 있는 이런 모형론에 대해 타당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나뭇단과 십자가 사이에는 재료상의 동질성만 있을 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보아야 할 성경 내적(內的), 또 해석학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해석을 용납하다보면 결국 설교자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성경으로부터 뽑아 낼 수 있다는(주로 이단들에서 하는 식의) 결론밖에 남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바른 설교를 위해서는 바른 해석학적 원리를 먼저 찾아야 한다. 이 책의 주요 공헌 중 하나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전한 해석학적/ (동시에) 실제적 원리들을 제시해주고, 그 실제 적용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설교를 시작하는 사역자들이나, 이미 오랫동안 설교를 해왔던 목회자들 모두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두 번째 공헌은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는 점을 바르게 강조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를 증거하기 위해 성경 내적인 예들과 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예들을 차분하게 따라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가 글을 쓰고 있는 서구 교회와는 달리, 아직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중심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기에 좀 과도한 강조처럼 느껴지는 감도 없지 않다. 오히려 앞서 예시한 것처럼 과도하게 그리스도를 추출해내려는 시도가 자주 발견되곤 하는 상황이니까. 물론 구약성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는 전제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근거를 찾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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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토대를 이루는 세계관과 진리, 도덕이 붕괴하면

그것은 즉시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경제와 사회에 극단화된 개인주의가 나타나는 것은

공통적 삶의 토대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모두가 자신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다.

다양성이 덕목이 되어, 예전에 누구나 존중하고

그에 의해 삶이 조성되던 법칙들은 사라져 버리고 있다.

 

- 신국원,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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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 지음 / 부흥과개혁사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방언을 은혜와 능력을 받는 통로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비밀의 열쇠로 여기고, 그래서 하늘의 언어 운운하는 김우현 씨가 쓴 책 『하늘의 언어』를 겨냥하고 쓴 책이다. 시종일관 체험 중심의 논리를 세워갔던 앞서의 책과는 달리, 이 책의 저자는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며 글을 써내려간다.

 

     저자는 방언을 교회가 설립되는 특별한 시기에, 표적을 중요시했던 유대계 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독특하고 유일한 은사였다고 본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방언이란 오직 외국어 방언뿐이었고, 오늘날 일각에서 말하는 ‘영적 방언’, 혹은 ‘하늘의 언어’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한다. 방언과 관련해 가장 많은 직접적인 교훈/언급이 등장하는 고린도전서를 연구해 볼 때, 이미 교회 주변부에 다양한 종류의 세속적이고 우상을 섬기는 이들 사이에 그런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들이 존재했는데도 바울이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바로 방언에 관한 교훈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교회 안의 방언은 그런 세속적인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종류였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외국어 방언은 점차 그쳐가고 있었는데, 이는 고린도전서와 시기적으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로마서에 은사의 종류로 방언이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방언의 역할은 성경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였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힘을 싣는다.

 

     아울러 오늘날 방언이라고 행하여지는 것들은 사실상 일관되게 통역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어학적으로 무의미한 음성들의 연속일 뿐이며, 나아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방법 상의 문제점들도 지적한다.

 

 

2. 감상평 。。。。。。。                  

 

     앞서 『하늘의 언어』라는 영지주의적 교훈을 담고 있는 책에 관한 서명을 쓰면서 내가 말했던 ‘재미도 없고, 공격적인 말투로 인해 욕먹기 딱 좋은’ 작업을 해 낸 책이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민감한 쟁점에 대해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는 마당에 용기 있는 결단이다. 책의 내용은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나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비판을 할 때는 정확한 이유와 분명한 논리가 필수적이다. 비록 저자가 아직 정규 신학과정을 수료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신대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도 들었는데 어떤지는 모르겠다), 저명한 신학자들의 해석과 성경문맥에 따른 이해를 시도함으로써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와 논리를 확보하고 있다. 내가 경험해 보니 아니더라, 누구에게 들은 얘긴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따위의 한심한 비난은 적어도 이 책에 대해서는 온당하지 못한 평가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논리에 끼워 맞춘 불쌍한 책” 운운하는 밑도 끝도 없는 100자평을 달아 놓은 사람도 있던데, 누가 더 불쌍한 건지.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 중 하나는 반(反)지성주의다. 지성의 사용이 줄어들면 자연히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경험이라는 건 태생적으로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주관성이 강조된다. 쉽게 말해,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의 길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사사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그랬고,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요 16:2-3)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면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냥 느끼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저자의 의견을 단순히 은사중지주의자의 생각으로 치부하고 나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특히 분명한 이유와 명확한 논리도 없이 따지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그건 그냥 자신이 얼마나 성경과 예수님, 그리고 진리의 성령님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증거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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