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에게 10의 힘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기업에 직원 10명이 있다.

조직의 실패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기업에는 100의 힘이 있다.

이게 최대치다.

그런데 경쟁이 심해지면,

사람들이 5의 힘만 회사를 위해서 사용하고

5의 힘은 경쟁자가 된 동료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

그러면 이 조직이 최대한 쓸 수 있는 힘은 50으로 내려간다.

50의 힘을 쓰는 조직과 100의 힘을 쓰는 조직이 경쟁하면,

당연히 100의 힘을 쓰는 조직이 이긴다.


우석훈,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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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한 목사 부부의 대화로 시작한다. 그들은 한 사내아이를 입양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들은 아들을 사고로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또 아이를 입양하려는 것부터가 무리였지만, 왠지 남편인 석호(김민재)는 재촉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이미 다른 아이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입양하려는 아이인 이삭(박재준)는 시력에 문제가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 결국 실명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름부터가 뭔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 복선인가 싶었지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던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싶었지만, 이 역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 것도 없었다.


새로운 아이가 집에 들어오자, 이미 있던 부부의 아이들은 새 아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 속 어디에도 부부는 아이들에게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거나, 갈등이 일어날 때 적절한 개입과 조정을 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이쯤 되면 감독이 가정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




그렇게 입양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이상한 존재를 느낀다. 공포 영화 답게 안경을 벗고 있을 때 조금은 희미한 모습으로 나와 영화를 보는 사람도 함께 헷갈리게 만드는 수법을 사용하는데, 이미 앞서 이 부부 사이에 죽은 아이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던 이상 아이의 귀신일 가능성이 높게 제기되는 상황.


그럼 이 영화는 귀신을 다루는 공포영화인가 싶지만, 또 그걸 제대로 그려내지는 않는다(어쩌면 “못 한다”였을 지도). 시종일관 뭔가 있다는 느낌만 잔뜩 부여하지만 정작 그게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영화는 느릿느릿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또 이상한 성격을 드러내는 캐릭터는 부부의 맏딸인 주은(경다은)이었다. 새로 들어온 남동생을 처음부터 밀어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계속 악마라고 소리치며 이상한 행동을 하는 모습. 덕분에 꽤나 민폐 캐릭터가 된다.


그리고 또 갑자기 등장하는 이웃집 청년. 그는 목사의 아내인 현우(박효주) 앞에 불쑥 나타나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여자가 보인다느니 하면서 뭔가 분위기를 잡는다. 그런데 또 그의 아버지는 주인공 목사에게 와서 아들이 귀신에 들렸다느니 도와달라느니 하는 말을 하고,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하던 그는 또 영화 후반에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면서 나타나서 역시 미심쩍은 말을 던지는... 영화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





사실 영화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배우 박효주 때문에 보기 시작했는데, 몇몇 드라마에서 인상적이었던 연기를 보여주었던 그녀였지만, 이 영화에서는 영화 속 캐릭터처럼 처음부터 혼돈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그녀는 자신이 맡은 배역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주인공 부부를 목사 부부로 설정해 두고, 아이들이 알 수 없는 기도문을 외우도록 시켜둔 감독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마찬가지. 이건 어디서 배워온 관행인지... 대충 귀신, 축귀, 목사 가정, 입양 뭐 이런 것들을 조합하면 뭔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전반적으로 정신이 없었던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잘 집중이 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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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무엇이냐 - 사탄, 그 존재에 관하여
전원희 지음 / 이레서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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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탄’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듣게 된다. 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좀 더 자주 듣거나, 가끔 듣거나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소위 순복음 계열의 교회들에선 우리의 일상의 세세한 부분에도 사탄이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고, 반대로 현대주의적 사고에 익숙한 계열이라면 성경 본문에 나오는 사탄이라는 용어를 상징적으로 읽으려고 애쓸 것이다.


사실 성경 본문에서 사탄의 존재는 생각만큼 선명하지 않다. 그 기원에 관한 설명으로 자주 사용되는 에스겔서의 문학성 짙은 구절들처럼(의외로 이 책에서 그 부분은 다루지 않는다), 본문들은 사탄의 정체에 대해서는 별 단서를 주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 언급도 그다지 잦은 편이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이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부터가 왠지 곤란해진다. 아는 게 부족하니 그 부족한 자리를 다양한 상상력이 채우곤 한다. 사탄의 능력과 영향력에 대한 온갖 소설들이 난무하게 된다. 당연히 이런 것들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이 책은 신구약 성경 본문과 중간기 문헌 속 사탄에 대한 언급들을 뽑아 종합해 놓은 작업물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탄에 관한 초기 언급인 스가랴서에서 사탄은 제한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못살게 구는 것을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다.


하지만 욥기에 이르면 사탄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의 문제에 개입한다. 물론 이 때도 하나님의 제한 아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경향은 역대기에 이르면 좀 더 강해져서 사탄은 거의 독립적으로 다윗을 충동해 인구조사를 하게 만드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 안에서 사탄이라는 이미지가 점점 독립성을 갖는 존재로 발전되어 왔다는 주장이다.


교회에서도 구약의 이런 이미지는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사탄은 하나님의 제한을 받는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로 묘사된다. 때로 사탄은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 그리고 성도를 악으로 꾀어내는 존재로 여겨지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에 의해 제압되고 만다.





언젠가 말했듯이 내 기준에 좋은 책은 어떤 내용을 아주 잘 정리해 놓거나, 생각지 못했던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굳이 따지자면 전자 쪽에 속할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면도 몇 가지 보이는데, 우선 저자가 구약 성경 속 사탄 개념의 발전으로 언급한 구절이 겨우 세 구절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세 구절로 정말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사탄에 대한 관점이 발전해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간기 여러 문헌들에 나오는 사탄과 그것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들을 정리, 소개한 부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다만 그런 나열식 소개가 책의 전반적인 논지를 강화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약간 회의적이다.


사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에서는 사탄 개념의 이해를 시간적 순서대로 설명하는 부분이고, 2부는 갑자기 축귀사역, 즉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으로 넘어간다. 그리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실제로 경험하긴 했으나, 자선을 베풀고 섬기는 것으로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알았을 것이라면서, 오늘날에도 그들을 따라 제대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짓는다.


내가 이해를 제대로 못한 게 아니라면, 여기엔 제대로 된 논리적 긴밀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저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얼기설기 늘어놓다가 급히 결론을 지은 느낌이랄까. 저자가 결론부에서 주장하는 삶의 중요성을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그저 이 책 전체의 결론으로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었던 작업물이었다. 물론 결론의 어색함을 빼더라도 참고자료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할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원전 속 기록들을 정리해 둔 부분은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현대 저자들(가끔 이 사람이 이 분야의 전문가 맞나 갸우뚱 한 경우가 보인다)의 해석을 늘어놓은 부분보다 좀 더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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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헌법 - 국회의원 박주민의 헌법 이야기
박주민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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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국회의원 박주민이 쓴 헌법 전문 소개서이다. 헌법 전문에 이어 제1조부터 제130조까지, 그리고 부칙까지 헌법에 실려 있는 모든 조항들을 실었고, 여기에 간단히 저자의 안내 코멘트가 덧붙여 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법 용어를 비법조인인 평범한 시민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어내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헌법은 오랫동안 그저 상징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모든 권력기관에서 제정하는 법과 규칙들의 가장 상위에 있는 원칙과 비슷한 느낌인지라, 실생활에 막상 어떤 영향을 끼칠까에 대해서는 큰 효능감을 보여주지 않았다. 개헌 논의가 종종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은 권력구조, 그러니까 대통령 임기를 어떻게 바꾸고, 단임제를 중임제로 하고 뭐 그런 얘기만 크게 보도되는 지라, 더더욱 그들만의 이야기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었다.


하지만 실제로 헌법 조문에는 우리의 삶에 꽤나 밀접하게 다가오는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얼마 전 대통령이 추천한 대법원장 후보자가 낙마를 한 적이 있다. 다양한 의혹들이 제대로 소명되지 않았기에 다수인 야당에서 임명제청안을 부결시켜버린 것인데, 비슷한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의 부적격의견을 받았던 여러 장관후보자들이 결국 대통령에 의해 임명 강행된 사례들을 보면 결과적으로 좀 다른 모양새였다.


이유는 헌법에 대법원장의 경우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내용(104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케이스는 국무총리(86조)와 감사원장(98조)도 포함되는데, 현대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행정부 권력의 비대화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서도 국회의 임명동의권이 좀 더 강화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회 동의를 받아 임명된 감사원장이 지난 1년 반 동안 저지른 일들을 보면 국회의 동의가 또 만능은 아니겠지만.





헌법 조항 중에 흥미로운 내용들이 꽤 보인다. 농지에 관련해서 121조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만 농지의 소유권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고, 123조에는 국가가 중소기업을 보호, 육성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두고 있기도 하다. 근데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만 짜는 건 위헌 아닌가?


또, 같은 조문에는 국가가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를 개선해 가격안정을 통해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농수산물과 관련해서 자주 제기되는 게 중간유통업자들의 폭리인데, 헌법에 따르면 이런 부분도 국가는 손을 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같고.


여기에 현재는 운영되지 않는, 흥미로운 위원회가 하나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제90조에 나오는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기구다. 의무설치 기구가 아니긴 한데, 이 회의의 의장이 전직 대통령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정권교체가 되었다면 상대 당 출신의 전직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에게 자문을 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만들어지는 셈인데, 잘만 운영 된다면 협치의 좋은 통로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또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는 듯하다.



물론 완전한 법이라는 건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헌법에 규정된 내용들만이라도 제대로 실천된다면 꽤나 괜찮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좀 더 자주 헌법을 이용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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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중립성의 신화 - 학문 이론과 종교적 믿음의 상관관계
로이 클라우저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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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이 두툼한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다 읽는 데 3주나 걸리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중간에 서너 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건 이 책이 워낙에 까다로운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겸 읽었던 것들이었다. 내용만 그런 게 아니라, 170*235mm라는 사이즈도 일반 책들에 비해 훨씬 크고, 미주만 100페이지인 전체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들고 지하철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손목이 아플 정도였다.


그래도 이 책을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건, 역시 담고 있는 내용이 흥미로워서였다. 책 제목처럼 이 책은 소위 “종교적 중립성”이라는 것이 신화에 불과하다는(여기서 신화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다)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신앙을 갖지 않았다고 주장하는(책에서는 이런 사람도 결국 특정한 신앙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물론, 신앙인들조차도 오늘날 신앙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대가 있다는 데 공감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영역이 그런 (종교적 중립성이 작동하는) 자리다. 신앙을 가진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1+1=2”라는 수식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분자와 원자, 양자의 세계에 관한 이해에도 별 차이가 없으니까.(물론 “창조과학”이라는 독특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우주의 역사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사실 우리가 중립적이라고 보는 그런 영역들도 알고 보면 종교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믿음의 내용에 따라 이론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해석도 한다고 덧붙인다. 책 후반부에도 설명되지만 1+1=2라는 수식을 인정하더라도 그 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





우선 저자가 말하는 ‘종교’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책 초반에 길게 이 내용이 설명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부분에서 많은 반박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흔히 종교라고 하면 무슨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고 하는 것들을 떠올리는데, 우리가 (피타고라스의 그의 신자들처럼) 숫자나 양자를 그런 식으로 숭배하지는 않으니까.


먼저 저자가 말하는 신적인 것의 핵심은 그것이 인격적인 것인지, 선한지, 예배를 받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무조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지”다. 어떤 것이 “종교적”이라는 말은 이런 “근원적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게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은 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전제로서 우리의 사고에서 작동하기 때문이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1+1=2라는 공식을 바라보는 관점들에도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수-세계 이론에 따르면 이 수식은 실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진정한 실재)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이 “영원하고 필연적인 진리로, 세계가 파괴되어 계산될 수 있는 물체와 그것을 계산할 수 있는 인간이 사라지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진정한 실재”는 분명 종교적인 전제/믿음이다.


반면 존 스튜어트 밀은 숫자를 감각적 지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오직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보았기에, 1+1=2라는 공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관찰할 때마다 그런 결과가 나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앞서의 라이프니츠와 달리 숫자를 계산할 사람과 계산될 수 있는 사물이 사라지면 이 공식은 무의미해진다. 밀의 주장에서는 인간의 감각이 신적인 존재로 올려진다.


버틀런트 러셀은 또 다른 설명을 한다. 밀처럼 러셀 역시 그는 1+1=2라는 수식의 배경에 영원한 무엇이 있다는 식의 설명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지 감각적 경험의 문제로 보면 여기에서 확실성이 흔들린다는 점을 포착했고, 결국 수학을 감각이 아닌 논리로 정의하려고 했다. 즉, 수학은 논리를 개진하는 방식이라는 것. 러셀에게 신적인 것은 논리적 양상이었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영역들에는 각자가 신봉하고 있는 신적인 것이 전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흥미로운 건 기독교인들조차 ‘종교적 중립지대’를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이지 않은 전제를 가진 주장들을 따라가곤 한다는 지적이다. 비기독교적 설명들은 대체로 ‘환원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아닌 무엇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둔다는 의미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이런 환원주의적 전제에 기초한 이론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그건 그들의 신앙을 타협, 혹은 (그 영역에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의 후반에는 사회학 이론이나 국가론에서 어떻게 비환원주의적인(성경적인) 설명이 가능한지 그 예를 들고 있다. 여기에는 도예베르트나 영역주권이론이 짙게 배어있다.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두신 질서가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이라는 전제 아래, 각각의 이론들을 검토해 나가는데 이 부분이 또 흥미롭다.


저자가 종교적 중립성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나 사회, 조직에서 특정한 종교(예를 들면 기독교)를 우대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괴롭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선 앞서 언급했던 영역주권이론이나 도예베르트의 이론에서 국가의 존재 이유는 특정한 종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현대의 세속국가 체제에서는 정반대의 일, 그러니까 환원주의적 이론을 중립적인 양 가장해 신앙인들에게 강요하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또, 과학 이론에서의 성경적 기초를 강조한다는 말이,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성경에서 과학원리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되서도 안 될 것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 관해 몇 페이지에 걸쳐 반박을 하면서, 그런 태도는 성경을 성경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오해라고 말한다.




모든 학문에 종교적 신념이 전제되어 있음을 밝히는 과정, 그리고 어떻게 기독교적 관점에서 학문을 쌓아올려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설명들이 인상적이다. 다만 후반의 적용 부분에서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성경적인 기초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좀 더 설명해 주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든다.


내용도 외형도 묵직해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끝까지 읽어낸다면 분명 사상적 차원에서 균형감각을 갖는데 도움이 될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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