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막의 게르니카
하라다 마하 지음, 김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앙리 루소 화가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작품을 두고 두 큐레이터의 치밀한 머리 싸움을 보여주었던 '낙원의 캠퍼스'의 작가, 하라다 마하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암막의 게르니카'란 작품입니다. '암막'이란 검은 장막을 뜻합니다. '게르니카'는 표지에도 나와있듯이,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이죠.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은 한창 내전 중이었습니다. 군부 프랑코가 1933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화파 정부의 개혁 정책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벌어진 내전이었죠.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하여 에스파니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당연히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무력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지원을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곳은 프랑스였지만, 프랑스 역시 섣불리 개입했다가 역으로 독일의 침공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내전과 되도록 거리를 두려 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죠. 그러던 1937년 4월 26일. 공화파 지지자들의 거점이었던 '게르니카'를 독일 공군이 무차별 폭격하여 무려 1,600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런 사정은 2016년에 발표된 영화 '게르니카'를 보면 잘 나와 있으니, 이것을 보시면 게르니카의 비극을 더욱 잘 아시게 될 듯 합니다.


 그 때,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 때 발표할 작품에 매진하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는 언론을 통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조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으니 당연했겠지요.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게 될까봐, 아직 공공연히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지 않은 피카소였습니다만, '게르니카 사태'를 계기로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게르니카' 입니다. 세로 약 350cm, 가로 약 780cm의 크기에 모노크롬으로 그려진 게르니카는 스페인관 맨 앞자리에 전시되어 만국박람회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게르니카의 비극을 생생하게 알리는 동시에 인류가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웅변했습니다. 여기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지요. 하루는 독일군 장교가 게르니카 그림을 보러 와서는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당신이요?"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당신들이요." 이 소설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게르니카'는 그렇게 태어났고 이후 내내 폭력과 전쟁을 고발하고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목소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만국 박람회 전시가 끝난 뒤, 그림의 거처를 두고 파블로 피카소가 한 선택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게르니카'가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이나 독일 나치의 손아귀로 들어가 그림이 지닌 반전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아예 그림을 그로부터 절대 안전할 수 있는 미국에다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스페인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돌아올 때 돌려달라'고. 바로 이 선택과 당부 때문에 '게르니카'가 가지는 반전과 평화의 상징은 보다 더 확고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2003년, 콜린 파월이 UN에서 이라크 공습을 개시하며 기자 회견을 연 때였습니다. 콜린 파월은 그 기자 회견을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서 했는데, 거기엔 '게르니카'가 가진 평화의 목소리를 기리기 위해 '게르니카'의 태피스트리가 원본과 똑같은 규격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월이 방송이나 보도 사진으로 그 그림이 보이지 않도록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입니다. '암막의 게르니카'라는 소설 제목은 바로 이 사건에서 나온 것이죠. 아무래도 전쟁을 선포하는 자리에 강한 반전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 같이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게 좀 꺼림칙했던 모양입니다만 오히려 그로인해 더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게르니카'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뇌리 속으로 들어왔고 자신이 지닌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되새기게 했습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전경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보이는 게르니카를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이죠. 현재는 없습니다.

 2009년, UN이 건물 보수를 할 때 영국에 이송한 후로 내내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하라다 마하의 '암막의 게르니카'는 이 두 사건, 그러니까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는 것'과 '파월이 기자 회견 당시 게르니카 태피스트리를 가린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피카소가 직접 등장하는 과거의 사건과 9. 11 이후의 현재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하는 구성인 것이죠. 과거와 현재 이야기 모두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 인물이 있습니다. 모두 여성입니다. 과거에선 실제 피카소의 연인이자 게르니카 작업 모두를 촬영했던 '도라 마르'라는 여성이 중심이고, 현재에선 어릴 때 게르니카를 실제로 보고 그림에 매혹된 뒤로 평생 피카소를 연구했고 9.11 때 사랑하는 남편을 테러로 잃은 후, 더욱 '게르니카'가 가진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뉴욕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요코'라는 여성이 중심입니다. 


 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 옆에 있는 그림은 소설에서 언급되는 도라 마르의 초상화 입니다.


 하라다 마하는 도라 마르와 요코를 주축으로 과거와 현재의 게르니카 이야기를 번갈아 전개시키면서 '게르니카'에 얽힌 기구한 사연과 어둔 시대일수록 더욱 잃지말아야 할 예술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요소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림 '게르니카'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 얽힌 사연들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은 정말 좋은 벗이 되어줄 듯 합니다. 아마도 하나의 그림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만큼은 분명 느끼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다 하라다 마하가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이 소설을 썼는지 생각해보면 더욱 읽어야 할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201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 때의 일본을 생각하신다면, 하라다 마하가 왜 게르니카를 소재로 소설을 썼는지 그 동기가 어느 정도 짐작되실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일본은, 물론 지금의 일본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베 정권에 의해 한창 전쟁 가능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전쟁 포기가 핵심인, 흔히 말하는 평화헌번 9조를 개정하려고 엄청 노력했었죠. 군비 증강을 통한 일본 재무장이 여기저기서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하라다 마하는 바로 그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아베 정부의 선동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암막의 게르니카'를 쓴 것입니다. 하라다 마하에겐 지금의 일본이 바로 전쟁 선호를 위해 게르니카를 가려버린 암막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소설의 내용 어느 하나 무심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시 김정은와 트럼프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평화가 위협받고 있으니까요. 이런 미치광이 놀음에 현혹되어 섣불리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막의 게르니카'를 통해 '게르니카' 그림이 가진 의미를 다시금 깊이 돌아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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