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가족놀이 스토리콜렉터 6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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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품 경제의 허망한 잔해와도 같이, 짓다가 버려둔 건축 현장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몸에 무려 20번의 칼을 맞아 잔혹하게 살해된 남자의 이름은 도코로다 료스케. '하루에'라는 아내와 '가즈미'라는 고등학생 딸이 하나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발견된 두 가지 물증 때문에 이 살인 사건은 연속 살인으로 밝혀진다. 사흘 전, '주얼'이란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던 이마이 나오코라는 21세의 여대생이 교살 당했는데, 거기서도 료스케 살인 현장에 있었던 '밀레니엄 블루' 색의 화학 섬유와 하얀 페인트 자국이 발견된 것이다. 동일인의 범행이라는 게 증거로 뚜렷해진만큼 경찰은 료스케와 나오코의 접점을 확인한다. 그러다 나오코에게 애인을 빼앗겨 원한을 갖고 있었던 'A코'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요 용의자로 삼는다. 료스케는 나오코와 불륜 관계였고 'A코' 앞에 함께 나타나 훈계를 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찰 내부에서 료스케 쪽 인물에게도 살인 동기가 있는 사람이 없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결국 료스케가 인터넷 상에서 '요시에'라는 이름의 아내와, '미노루'란 이름의 아들 그리고 실제 딸과 같은 이름인 '가즈미'라는 딸과 함께 '가상 가족 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료스케는 그들이 처음이자 마지막 오프 모임을 가지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살해되었다. 그들은 인터넷 상에서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가 서로의 고민과 아픔을 나누었고 언제나 따스한 위로를 보냈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구는 료스케에 대해 속으로 어두운 생각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다. 료스케의 친딸 '가즈미'가 사건 얼마 전, 우연히 아버지가 낯선 사람과 함께 차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목격했는데 혹시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경찰은 그들 모두를 경찰서로 불러 모은다. 친딸 '가즈미'가 매직 미러를 통해 지켜볼 수 있는 방으로. 그리고 그런 가즈미 옆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전작 '크로스 파이어'의 주인공 형사 이시즈 치카코가 함께 한다.



 '가상 가족 놀이'는 '화차', '이유' 그리고 '솔로몬의 위증'으로 유명한 미야베 미유키가 200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원래 제목은 'R.P.G'. 역할 놀이 게임이라 풀이할 수 있는 'ROLE-PLAYING GAME'을 뜻한다. 바로 료스케가 인터넷에서 가상으로 즐겼던 가족 게임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 제목인 '가상 가족 놀이'는 그것을 좀 더 풀어낸 것이다. 제목은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마지막의 놀라운 반전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진짜 가족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짜 가족이었다는 것은 98년에 나온 '이유'와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치카코가 활약한 '크로스 파이어'도 98년에 나왔다. '가상 가족 놀이'에는 '모방범'에서 서류 작업만 하고 있지만 놀라운 통찰력으로 범인이 우연을 가장한 증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 다케가미 에쓰로도 등장한다.


 소설은 에쓰로와 치카코가 료스케 살인 사건 때문에 차출되어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두 소설을 읽은 사람에겐 꽤 반가운 장면으로 다가올 것 같다. 다케가미는 여전히 범죄 수사에 직접 뛰어드는 것을 싫어하고 당연히 용의자를 직접 심문하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데, 소설에서 원래 심문을 맡아야 할 형사가 병으로 입원하는 바람에 그 일을 대신 떠맡아버려 입이 밖으로 비죽 나와 있는 상태다. 치카코는 '크로스 파이어'에서의 일 때문에 본청에서 관할청으로 강등되어 순찰이나 도는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전에 가즈미가 누군가 자신을 스토킹 하고 있다고 신고를 했는데 그 때 치카코가 한동안 그 집을 경호한 적이 있어, 가즈미가 아는 얼굴이라는 이유로 차출 되었다. 그녀는 아직 '크로스 파이어' 때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그 때의 범인과 비슷한 연령대의 가즈미와 미노루를 보는 게 심적으로 영 편치 않다. 그들, 에쓰로와 치카코가 싫은 일을 맡아 억지로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이 소설의 잔재미다. 료스케의 용의자들이 가짜로 가족 연기를 한 것처럼, 잡아야 할 그들 역시 연기를 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소설에서 이중의 연극이 펼쳐지고 있는만큼 연극은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다. 바로 그것을 통해 미야베 미유키는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우리에게 그렇게 좋기만한 것일까 의문을 제시한다. 이런 마음은 '가상 가족 놀이'에서 어머니 역할을 했던 요시에의 말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사이버 공간에서 자라나는 인간관계에는 현실 사회의 인간관계와 비슷한 가치도 있고 온기도 있어요. 허위와 거짓말만 횡행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야말로 얼굴을 맞대지 않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나 입장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는 본심도 있고, 거기에서 자라나는 친애의 감정도 있는 거예요."(p. 241)


 요시에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숨막히도록 그녀를 가두고 있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나이가 많은데도 아직 결혼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받아야했던 온갖 비인간적인 시선들.


 "뭐가 욕구불만이라는 거야. 그렇게 여자를 바보 취급하는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불쾌한 일을 겪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이제 젊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남편이 없다거나 아이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인간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데, 그런 소리를 듣는 여자 심정 네가 알아?"(p. 241)


 이런 요시에의 절규는 문득 '화차'의 여주인공 '신조 교코'를 떠올리게 한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사채의 늪에서 빠져나가기 위하여 타인의 신분을 훔쳐, 그녀에겐 가상의 신분인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 그런 그녀에게 가짜의 삶이 구원이었듯이, 우리 역시도 가상에서 진짜보다 더 커다란 위안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가를 밝히기 이전에 어쩌다 그 혹은 그녀가 가짜의 것에서 위안과 힘을 얻을 생각을 했는지 헤아려봐야 하지 않을까? '화차'에서 '가상 가족 놀이'까지 이어서 생각하면, 미야베 미유키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 영화 '화차'에서 사라진 그녀를 찾았던 이선균이 그녀의 진짜 삶을 목도하면서 비로소 그녀의 신분을 상관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인 것처럼. 소설의 비극이 그렇게 된 연유 보다 보이는 현상을 더 중시하는 바람에 일어난 것을 보면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꼭 이 소설을 추천해주고 싶은 이들이 있다. 바로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가짜라고 믿는 사람들, 그게 가짜이면 최순실의 모든 국정 농단과 박근혜의 책임이 면책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 이런 그들이야말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여 진실로 봐야할 전체 그림을 놓치고 마는, 청맹과니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닐지. 지금 우리 주위엔 그렇게 우리의 시야를 좁히려 하고 본말을 전도시키려 획책하는 가짜 뉴스들이 너무나 많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고, 개의 꼬리로 개를 흔들려는 저열한 술책들이. '가상 가족 놀이'는 이런 것에 쉽게 휘둘리는 이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어줄 것 같다.


 손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손톱에 때가 끼어 있는지 없는지에 마치 모든 것이 거기에 걸려있는 듯 천착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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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0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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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2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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