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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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엔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범죄를 처벌하는 형법은 편파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해자의 인권만 너무 보호하려 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사실 범죄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요즘엔 가해자 보다 피해자 보호에 더 중점을 두는 '피해자학'이라는 것이 각광받고 있으니까요. 사실 피해자가 특히나 살인의 경우는 가해자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오래도록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피해자학'은 그동안 형사정책이 추구해오던 범죄 예방과 범죄인 갱생 문제 보다는 피해자의 보호, 상처 치유, 삶의 복귀 문제 같은 것에 더 중점을 둡니다. '천사의 나이프'로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으면서 데뷔한 야쿠마루 가쿠는 이를테면 미스터리에서 이런 '피해자학'을 추구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범죄로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이고, 그들이 범죄가 가져온 상실로 인해 얼마나 길고도 커다란 고통을 갖고 있으며, 세상에 증오밖에 가지지 않은 그들이 또 어떻게 다시 세상과 화해하게 되는가를 소설에서 더 많이 그리고 있으니까요. '천사의 나이프'도 그랬고, 이번에 나온 '악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줄거리부터 간단하게 설명해 보죠.

 

 주인공의 이름은 사에키 슈이치. 현재 탐정입니다. 탐정이라고 해봤자, 명탐정도 아니고, 집단 강간을 행하던 범죄자를 현장에서 체포하는 와중에 그만 권총을 용의자 입안에 넣는 과잉 행동을 하는 바람에 폭력 경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경찰에서 쫓겨나 할 일도 없고 살 길도 없어, 역시 법정에서 변호사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경찰을 그만둔 고구레의 권유로 일하게 된 탐정사무소의 조사원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그 탐정사무소도 조사원이 슈이치 하나밖에 없는 아주 영세한 규모입니다. 소장은 물론 고구레이구요. 그 밖에 온갖 사무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육중한 몸매의 아줌마 소메야가 있습니다.


 슈이치가 그렇게 과잉 진압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6세에 경험한 아주 커다란 상처 때문입니다. 16세 생일 날, 슈이치의 소중한 누나 유카리가 강간 살해 당했습니다. 범인들은 모두 세 명으로 다 십 대였습니다. 주범인 에노키에는 징역 10년을, 공범 데라다와 다도코로는 징역 3년에서 5년 사이의 부정기형을 받았습니다. 지금 슈이치는 서른 살. 이미 14년 전의 일이니 범인들은 모두 사회로 복귀했습니다. 이 사실이 슈이치를 미치게 합니다.


  그놈들의 현재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놈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이 솟구친다. 절대로 용서 못 한다. 설령 형무소에 들어가 죗값을 치르고 나왔을지라도, 우리들 앞에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다며 눈물을 흘릴지라도, 사회적으로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p.  32)

 범죄 피해자가 가장 괴로운 순간은 가해자가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알았을 때다. 가해자가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를 눈곱만치도 반성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다.(p. 75)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비단 슈이치만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범죄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가족들은 하나같이 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슈이치가 누나를 살해한 범인들이 사회로 복귀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듯이, 피해자 가족들도 똑같이 궁금해하며 가해자의 현재를 조사해 달라며 의뢰해 옵니다. '악당'의 진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폭행하고 죽도록 방치한 사카가미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과연 그는 부모인 자신들의 용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조사해 달라고 호소야 부부가 슈이치에게 의뢰해 온 것입니다. 소장 고구레는 이것이 가난한 사무실을 먹여살릴만한 좋은 먹거리가 된다고 생각하고 아예 범죄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가해자의 근황을 조사해 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광고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호소야 부부와 같은 제2의, 제3의 의뢰인들이 사무실을 찾아오고, 슈이치는 계속 가해자의 오늘을 조사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의뢰자와 같은 처지인 슈이치는 조사를 하면서도 객관적으로 되기가 어렵습니다. 자꾸만 누나 유카리를, 그리고 누나의 죽음으로 자신과 가족이 받은 길고도 질긴 고통을 상기하게 됩니다. 결국 슈이치도 가해자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렇게 소설은 의뢰를 받은 가해자의 조사와 자신이 직접 누나를 살해한 이들을  조사하는 이야기가 병행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구성은 슈이치가 조사하는 사건이 남의 이야기이자 슈이치 자신의 이야기이도 하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합니다. 


 난 날마다 썩어 가는 쓰바사를 바라보면서 보냈어. 시체 냄새로 가득한 집 안에서 딱딱한 생쌀을 십으며, 생쌀이 다 떨어진 뒤에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잡지를 뜯어 먹으면서 악착같이 버텼어. 그래서 질긴 목숨을 이을 수 있었지만... 동생의 울음소리와 말라비틀터져 가는 동생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애인이랑 함께 있을 때도, 동생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힌다고. (p. 73)


 두 번째 이야기 '복수'에 나오는 의뢰인 쓰요시의 절규 입니다. 그에게는 세살 때, 엄마가 남자와 사귀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동생과 자신만 집에 남겨두고 문을 잠근 채로 나갔다가 2개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극심한 기아를 겪은 끝에 동생은 결국 죽고 혼자만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과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픽션화한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일본 열도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었죠. 사건의 피해자 쓰요시는 16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때의 고통과 동생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헤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식을 낳아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자신이 부모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지라, 자기 자식도 그렇게 만들까봐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을 그렇게 만든 엄마를 용서할 수 없게 되고,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건 그 여자한테 복수하는 거예요. 동생을 죽이고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그 여자가 행복하게 지내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해요. 자기가 저지른 죄를 잊고서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 여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여자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어디 길거리에서 비명횡사라도 한다면 이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죠. 하지만...(p. 74)


 그런데 이런 마음은 슈이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역시 유카리 누나를 그렇게 무참하게 죽인 자들이 사회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쓰요시와 똑같이 복수를 꿈꿉니다. 이렇게 슈이치가 각 에피소드마다 하게 되는 조사는 슈이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유품'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가해자 가족의 마음처럼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널 보고 싶어 했어. 마지막으로 번듯한 인간이 됐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다고. 하지만 만약에 네가 아직도 죄를 저지르고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확신했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널 죽이려고 했겠지. 바보 같기는.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앙상해진 그 손으로는 널 죽일 수가 없는데. 하지만 15년이나 떨어져 살았어도 가족이니까. 피를 나눈 자식이니까. 임종의 순간까지 제 자식이 저질렀던 죄에 책임을 느꼈던 거라고."(p.110)


 이런 식으로 슈이치는 자신과 비슷하지만 다른 양상을 갖고 있는 사건들을 점점 더 접하고, 관계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마장의 말처럼 증오와 복수 밖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시야를 차츰 넓혀 나갑니다. 소설이 담고 있는,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은 사실 슈이치가 변화해 가는, 그렇게 성장해 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슈이치는 결코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증오의 속박에서 헤어나와 누군가를 다시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작가 야쿠마루 가쿠가 원하는 것이 비단 슈이치의 성장만은 아닙니다. 실은 독자도 이 이야기에 깊숙이 참여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언론을 통해 수많은 범죄를 접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분명 초래되었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선 정작 언론들도 깊이 있게 잘 다루지 않고 그래서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갈수록 범죄나 많은 인명이 희생된 사건, 재난 등에 대해서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웬만큼 많이 죽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희생자는 단순히 수치 상의 존재로 전락하고, 그의 삶이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 같은 것들은 고려조차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쉽게 남의 일이라 여기고 그만큼 서둘러 망각하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토란 '영원한 현재'입니다. 과거는 얼른 잊고 미래만 보고 나아가자는 것이 이 시대의 지상명령인 것이죠. 과거를 자꾸만 상기시키는 것은 촌스럽거나 옹졸한 짓이 되었고, 아무리 커다란 과거의 상처라 해도 돈이면 그저 다 완치된다는 식의 천박한 생각마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지금 사회의 일반적 경향이기에, 작가는 독자의 공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슈이치를 매개로 하여 독자를 피해자의 삶에 깊이 끌어들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타인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절망에 대한 공감과 그것이 결코 나와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이 결국은 타인만이 아니라 언제라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나 자신도 구하는 길이기에 말이죠.


 스탠리 밀그램이란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복종 실험'으로 유명합니다. 그 실험을 토대로, 이제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된 '권위에 대한 복종'이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밀그램의 실험은, 설령 도둑질, 살인, 폭행 등을 너무나 혐오하여 그런 짓을 절대 나쁜 짓으로 보는 내적 확신마저 갖게 된 사람이라 해도 권위자의 명령을 받으면 비교적 쉽게 얼마든지 그런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밀그램의 실험에 의하면 악당은 악당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회의 모습이 아주 평범한 남녀를 악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폭력이 일반화되면 쉽게 폭력을 자행하는 악당이 되고, 사기와 도둑질을 범해도 제재나 비난이 따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면 언제든 태연히 그런 짓을 저지르는 악당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겐 범죄지만 그들에겐 비일비재하고 사소한 흠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토록 태연하게 장관이 되겠다며 청문회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이 소설의 제목은 '악당' 입니다. 소설은 이 악당의 뜻을 사카가미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악당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용서라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걸 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아. 악당은 자신이 빼앗은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기어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마는 인간, 그게 바로 악당이라는 거다.(p. 243)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지르는 악당이 된다고 하는 사카가미의 말은 밀그램의 결론과 유사합니다. 내가 변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사카가미도 다시 악당이 안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맹목'의 사와무라처럼 한 번 악당이었지만 다시금 선하게 살 수 있다는 인상을 진작에 받을 수 있었다면 슈이치의 삶도 훨씬 더 빨리 편해졌을 지 모릅니다. 소설엔 이런 순간이 가득합니다. 슈이치의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들이. 슈이치가 변한 것도 그런 순간들 때문이었죠.


 사회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 그것이 때로는 우리가, 특히나 윤리적인 측면에 있어,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하게 될 그 모습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실은 나 하나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타난 모습이 모자이크 그림처럼 모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머랭과 같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하나가 사회 전체의 인상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내가 선택할 윤리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덜어줄 책임을 느끼고 실천하는 일은 결국 내게로 다시 돌아와 내가 아픔과 절망을 느낄 때 누군가 공감해주며 그 짐을 덜어주려 하는 것을 겪게 할 것입니다. 아주 순진한 낙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밀그램의 결론을 굳게 믿어보고 싶군요. 그것이 야쿠마루 가쿠가 '악당'을 통해 언젠가 도래하도록 만들고 싶은 세상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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