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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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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단념한 인간이다. 나와 오에를 처음 만나게 했던 문장이다. 매미들조차 더위에 짓눌러 침묵하던 여름날. 더위를 피하러 들어갔던 서점에서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오에의 책을 처음 만났다. 제목은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핵의 위험이 결코 몽상만은 아니던 시절을 배경으로 집필된 이 소설은 내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고 그랬기에 매혹되었다. 그렇게 오에를 만났고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니나 참 오랜 시간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자선 단편집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현대문학에서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단편선으로 나온 오에 겐자부로 단편선엔 1957년과 1992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 가운데 오에 자신이 직접 뽑은 23편이 초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누어 실려있다. 당연하게도 이미 만난 것도 있고 처음 보는 것도 있다. 오에를 생각할 때 언제나 떠오르는 단어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변신, 다른 하나는 타자다. 변신은 그의 소설들은 자주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 있으며 그 인물이 예전과 다른 모습이 되기를 원한다는 측면에서 떠오른 단어다. 타자는 오에의 아들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자폐아이다. 여기에도 실린 '조용한 생활'에 등장하는 자폐아 이요는 오에의 아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그의 아들을 소설에 기입하는데 그것은 그대로 오에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 실은 변신의 욕망도 그와 관련있다. 타자가 다름아닌 아들로서 기입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리라 보는데, 소설에서 타자는 절대 자신에게로 올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는 탓이다. 나는 그를 내 의지로 규정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이것이 오에의 타자다. 그런데 그 타자는 혈연인 아들처럼 임의로 지워버릴 수도, 배척할 수도 없는 존재다. 한 마디로 공존이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오에는 그렇게 여긴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상생하는 길을 찾는 것밖에는 없고 변신은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타자와 합일하려는 바람의 표현이다. 물론 여기의 타자엔 타인만이 있지 않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세계가 그 대상이다. 초기의 단편들은 그가 작가로서 첫 발을 뗄 때부터 이미 타자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개나 '사자의 잘난 척'의 해부용 시체가 그러하다. 하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이미 죽었다는 점에서 소설가의 전부라 할만한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들이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그는 커다란 당혹감을 안는다. 그는 자신 앞에 갑자기 출현한 이 정체불명의 세상을 두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그는 낯선 세계에 억지로 의미를 붙이거나 해석하지 않으며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결말에서 주인공이 바꾸려고 참여했던 세계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런 결의의 표현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점점 그것을 어렵게 한다. 일본 내에서는 전공투가 일어나고, 프랑스에선 68혁명이, 베트남에선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자폐아인 장남 히카리가 태어난다. 이제 그는 관찰자만을 자임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72년에 발표된 '공중괴물 이구이'에서 그런 위치는 주인공에게 우연히 날아온 돌맹이와 함께 끝장난다. 그 단편에서 주인공은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는데 그는 더이상 예전처럼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것을 가져온 것이 이구이라는 타자임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대로 이제 타자에게로 먼저 참여해야 한다는 표명으로 보인다.


 중기의 단편들은 타자와의 윤리학을 정초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타자는 한 세계를 대표하기 보다는 한 개인으로 집약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표정과 목소리를 가지고 작가에게 말을 걸어온다. 더구나 그들은 작가와 개인적인 인연까지 가지고 있다. 기피가 불가능한 상황. 그렇게 타인과의 연대는 더욱 끈끈해지고 그 타인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표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무조건적이면서 불가항력적인 참여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중기의 단편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타인과의 나, 그 의무와 책임을 조명한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엔 아들과 오에의 관계가 깊게 침윤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뒤따르는 태도의 변화는 어쩌면 아들의 성장에 따른 아버지로서의 오에 자신의 변화가 투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중기에서 오에는 세계에서 개인으로 들어간다. 그에게 소설은 거창한 세계를 담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삶과 결부된 것들만 말할 수 있는 영역이 된다. 이것은 타자와의 윤리라는 것이 쉽게 뭐라고 치부하기가 어려운 탓이요, 심해만큼이나 깊이를 가지고 있어 모든 측면에서 성실히 탐색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보다 정밀한 관측을 통해 혜안을 찾고자 그는 소실점을 오로지 자기에게로 좁히는 것이다.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는만큼 한층 더 내면적이 된 그의 글은 이제 글마저 타자가 된다. 중기까지 오에가 있던 자리에 후기에 가선 이제 독자를 거기로 불러 앉히는 것이다. 중기의 오에가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든 타자를 만났듯이 후기에선 독자가 그만큼 당황스러운 오에를 대면해야 한다. 결국 이 끝엔 뭐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지극히 낯선 것과의 대면이 자신을 무엇으로 변신시킬지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오에는 낯선 것을 낯선 것 그대로 놓아두길 원하며 불안과 불가해를 지향한다. 그의 언어는 분리와 균열을 일으키길 욕망한다. 전체가 될 수 없는 파편, 종합할 수 없는 산포. 우리가 마주하는 오에의 세계다. 오에는 후기에서 자크 마리탱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전인격이 참가하는 행위다.' 독자도 그렇게 참여하기를 후기의 오에는 원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초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의 오에를 한 권으로 주욱 만나고 보니 변신과 타자라는 말이 더욱 또렷해진다. 내가 이렇게 확인했듯이, 이 책은 오에에게 관심 있던 분들이라면 오에가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어떤 경로를 걸어왔는지 확인해 보는 좋은 경험이 되어줄 것 같다. 추천드린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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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1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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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0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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