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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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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저가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의 제목은 '살(Flesh)과 영혼'이었다고 한다.

 '시스터 캐리'라는 제목은 출간되기 1년 전, 드라이저의 친구인 아서 헨리의 조언으로 바꾼 것이었다. 원래의 제목으로 유추해 보건대, 드라이저는 이 소설을 캐리만의 이야기로 쓸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보다는 대도시의 출현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정착된 당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군상들에 대한 초상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자체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표면상의 주인공이라 할만한 캐리 못지 않게 이 소설에서 허스트우드가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한 까닭이다. 전반부는 캐리가, 후반부는 허스트우드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마냥 허튼 소리는 아닌 것이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윌리엄 와일러 역시도 캐리 보다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분한 허스트우드에 더 비중을 두고 영화 '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황혼'이란 제목으로 개봉되기도 했다.



 분명 허스트우드 말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읽어보면 캐리의 이야기보다 허스트우드의 이야기가 좀 더 세밀하고 입체적이다. 드라이저는 출판 계약이 이뤄진 뒤에도 정식으로 출간될 때까지 계속 원고를 수정했다고 하는데 후반에서 보여주는 깊이가 초반에 비해 상당한 것을 보면 역시 허스트우드 부분을 많이 수정, 보완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어쨌든 내게 이 이야기는 캐리와 허스트우드의 양 갈래 이야기로 읽힌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캐리와 허스트우드 사이에 상당히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경로의 유사성.

 캐리가 걷는 길은 나중에 허스트우드가 걷는 길과 같다. 캐리는 처음으로 본 도시의 모습에 넋을 잃고 드루에의 외모가 대변하는 화려한 도시적 삶에 매료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잠시 장밋빛 미래의 꿈을 선사하지만 이내 비루한 현실 앞에서 쉽게 시든다. 환경을 이루는 살(flesh)는 너무도 비대해서 영혼은 쉽게 초월의 자유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은 타협. 현실과의 부단한 타협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 날개를 쪼아 날 수 없게 된 새 키위와도 같이 욕망의 대가로 자유를 지불한 영혼에게 남은 것은 고독 밖에 없다.


 허스트우드도 다르지 않다. 캐리에 대한 그의 매혹은 언제 찾아왔던가? 연극에서 캐리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처음 캐리가 본 도시가 실제라기 보다는 환영에 가까운 불빛으로 환한 밤의 도시 모습이었듯이 허스트우드도 실제 캐리가 아닌, 연기로 만들어진 환영인 캐리의 모습에 반하는 것이다. 캐리와 허스트우드 둘 다,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실제 아닌 환상이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시작이 같았으니 그들이 걷는 길 또한 유사하다. 둘다 그들을 이끄는 것이 환상인 것이다. 캐리는 드루에게서 발현되는 환상을, 허스트우드는 캐리에게서 발현되는 환상에 이끌린다. 물론 그들을 유혹하는 환상은 같지 않다. 캐리를 유혹하는 것은 안정의 환상이고, 허스트우드를 유혹하는 것은 자유의 환상이다. 허스트우드는 보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 캐리라는 환상에 취한다. 그는 이미 캐리가 꿈꾸는 것을 이룬 사람이다. 하지만 드라이저는 캐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른 그조차도 환상의 노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통해 가지게 되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끝도 없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대표하는 계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 가정에서의 위치 등등. 그는 자신이 속한 그 어느 자리에서도 타인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환상에 맞춰 살아야 한다. 즉 연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허스트우드는 캐리와 똑같다. 캐리가 연기를 통해 자신의 성공을 일궈낸 것과 똑같이 허스트우드도 정교한 연기를 통해 현재의 성공을 이뤄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캐리와 허스트우드는 돌림노래와 같으며 캐리의 미래는 허스트우드의 현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언젠가는 캐리도 더이상 타인을 위한 연기에 지쳐 허스트우드처럼 몰락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해피엔딩도 열린 결말도 아닌 것이다.


 환상과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한 연기.

 내가 보기에 '시스터 캐리'에서 정말 중요한 키워드는 욕망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캐리가 하필이면 연기를 통해 자신의 안정을 획득하도록 설정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캐리와 허스트우드 모두 애초에 환상에 대한 매혹이 있다는 말을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욕망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을 통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라캉을 떠올리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주체에게 특정 대상을 욕망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환상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에게 존재하는 결여를 메우고자 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자면 먼저 동일시하려는 자신부터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정립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답은 나온다. 그 때의 우리들에게 거울에 비친 내가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보증해줄 참된 실재는 없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을 통합한 것이 얼굴이며 팔과 다리가 붙은 것이 신체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 줄 언어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언어가 우리의 인식을 어느 정도 구조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주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재가 아닌 언어라는 허구, 그런 면에서 환상에 기대어 주체를 보정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욕망 또한 환상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생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언어가 먼저 있어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었듯이 태초에 환상이 있었다. 욕망은 그 빅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정확히 캐리와 허스트우드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왜 연기까지 끌어와야 했을까?

 환상의 정체 때문이다. 이 환상은 진실로 누구에게서 온 것인가? 캐리는 도시에게서, 허스트우드는 캐리에게서 얻었다. 하지만 정말은 거기에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까 환상이 이미 주체 성립 그 자체에서부터 기입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배우는 언어다. 언어는 내재의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내 외부의 것이다. 즉 우리의 주체는 이미 성립 당시부터 언어를 매개로 바깥의 시선에 노출되며 그에 맞춰 조형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자동인형처럼 조종하는 외부의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대타자'다. 환상은 거기서 비롯되고 그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 대로 살게 된다. 남들이 바라는 것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곳에서 연기의 숙명 또한 도래한다. 대타자는 주체 성립 당시에만 명령하지 않고 평생 내 옆에서 나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그의 언질을 기피하거나 시선에서 숨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가진 정체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말이다. 즉 정체성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대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살면서 자주 이렇게 묻곤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하지만 좀 전 주체 성립 자체에 이미 대타자가 관여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질문은 그대로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이기도 하다. 즉 나의 정체성은 순수하게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타자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대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박이 바로 연기로 나타난다. 허스트우드에게 보듯이 정체성이 확고하면 할수록 우리의 연기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배우들은 자주 배역에 엄청 몰입하다보면 연기가 끝나더라도 그 배역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해 일상마저 힘들어지는 후유증을 겪는다고 고백한다. 헐리우드에서는 이를 위해 따로 정신과 상담의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네 삶도 배역이 본질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꾸만 추동시키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알고 보면 불안은 욕망의 좌절이 아니라 욕망을 뒷받침하는 틀이라 할 수 있는 환상이 뒤틀릴 때 생겨난다. 캐리의 불안은 도시에서의 삶과 드루에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멋진 곳과 남자가 아니라는 것, 그렇게 환상이 깨어질 때 생겨났고 허스트우드 역시도 가정이 자신이 꿈꾸던 것과 더이상 맞지 않다고 여겼을 때, 즉 환상이 좌초되었을 때 피어 올랐다. 그 때, 캐리는 연기와 허스트우드를 욕망했고 허스트우드는 캐리를 욕망했다. 환상의 틀이 뒤틀리면 은폐된 결여가 드러나고 불안은 거기로 흘러드는 물과 같다. 대타자는 주체가 완전히 물에 삼켜지기 전에 서둘러 그것을 메우려 하고 그럴 때 가장 좋은 효과를 나타내는 욕망의 진흙을 사용한다. 환상과 욕망 그리고 연기는 이렇게 연결되며 때문에 환상에 취하면 취할수록, 욕망에 따른 연기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우리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두 포식자 대타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스터 캐리'에는 캐리도 허스트우드도 패배자인 것이다. 진정한 승리자는 오직 하나, 그들에게 환상을 주고 연기를 강요한 대타자 밖에 없다. 드루에가 바로 그런 대타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드루에는 단 한 번도 대타자가 원하는 대로 연기를 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루에에겐 진정한 자아라는 게 없다. 자아라는 반대정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타자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란 어디까지나 동일시가 불가능한 대상을 말한다. 때문에 타자는 욕망을 낳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거울이 되어 대타자가 은폐한 내게 있는 결여를 비출 뿐이다. 진짜 자아는 오로지 그 결여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드루에에겐 복사된 자아, 가짜 자아 뿐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불안 또한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다. 환상의 뒤틀림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은 오히려 그래서 진정한 자아로 향해 가는 해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결국 영화 '매트릭스'에서 환상에 취한 파란 약을 먹을래, 아니면 결여를 가져오는 빨간 약을 먹을래 문제인 것 같다. 허스트우드는 결국 빨간 약을 먹는다. 그는 캐리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있었으나 거부한다. 캐리도 빨간 약을 먹는다. 자신을 매혹시켰던 허스트우드의 세계가 더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매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런 세계에 행복은 더이상 없다고. 


 이렇게 보니, 앞서 내가 한 말과는 달리 허스트우드와 캐리가 승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1900년에 벌써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현대인들을 가장 힘들게 할 것이 바로 욕망을 잉태하는 환상과 그 실현으로써의 연기라는 것을 간파한 드라이저가 매일 캐리와 허스트우드만큼이나 힘든 연기를 해야 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아는 사람만 보라며 슬쩍 내놓는 조언인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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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0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보면, 허스트우드나 캐리나 19세기 말의 인물이지만,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보다 한단계 더 나간 인물이군요. 자본주의 사회를 힘겹게 버텨내야하는 우리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파란 약을 꿀꺽꿀꺽 먹지 않습니까. 헤르메스님의 눈으로 보니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라캉 이전에 이미 라캉 철학에 정통(?)했었는듯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리(re)뷰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근데 혹시 저 영화 보셨어요? 저는 보고 싶은데...(영화에서는 허스트우드의 비참한 결말보다 그를 더 로맨틱하게 그리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더군요.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ICE-9 2016-04-07 00:26   좋아요 0 | URL
읽다보니 아, 이거 라캉 식으로 읽으면 재밌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라캉이라는 주머니에 작품을 마구 우겨 넣어 보았습니다. 그래도 허점이 많죠? 하하^^
영화는 봤습니다. 영화는 정말 허스트우드 관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의 예로 캐리가 배우가 되는 것도 소설과 다르게 허스트우드와 사랑의 도피를 하고 허스트우드가 아직 이혼이 되지 않은 관계로 자신의 결혼이 중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의 충격으로 유산까지 한 뒤, 다시 말해 절망의 절망을 맛 본 끝에 도전하거든요. 거기다 허스트우드 또한 소설과 다르게 자신이 사랑하는 캐리에 대한 책임감으로 어떻게든 먹여 살리려 자존심까지 내던지고 일을 얻으려 정말 발버둥을 칩니다. 영화는 그 과정을 자세히 그리는데 그래서 마지막의 포기가 더욱 납득되죠. 그렇게 캐리 보다는 뒤늦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사랑과 몰락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식으로 dvd가 나왔습니다. 파라마운트로요. 슬프게도 저는 미소장입니다. 예전에 알라딘 직배 중고로 나온 것을 보고 구매했는데 불법 리핑 dvd가 와서 반품했거든요. ㅠ ㅠ (중국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있더군요. 원하시면 주소 알려드릴게요. 화질도 별로고 중국 자막이 거슬리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