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관 1~3 세트 - 전3권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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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내게 라틴어를 가르친 한 스페인인 교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여기에 대해 처음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완전히 바꿔 주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직접 만나기 전의 나는 그것을 로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아주 재밌는 소설이겠구나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아니었다. 산만함을 용납하지 않는 달변의 화술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도록 하는 소설로서의 재미도 월등했지만 더 나아가 뛰어난 역사서로써의 면모마저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2부, '풀잎관'이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로마를 다룬 역사서에서 겨우 몇 개의 문장, 좀 더 나아가봐야 기껏 서너 페이지 정도로만 접했던 사건을 1권은 519페이지, 2권은 595페이지, 3권은 400페이지로 무려 세 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놀랐는 지에 대해 말하려면 일단 제목인 '풀잎관'의 뜻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소설에서 콜린 매컬로가 묘사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흔한 풀잎으로 만든 소박한 관이지만, 개인의 용맹함과 결단력으로 군대나 군단 전체를 구한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로마 역사 전체를 통틀어 받은 이가 겨우 몇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대단히 명예로운 훈장이다. 다시 말해, 풀잎관은 어디까지나 한 단체를 커다란 위기에서 구해내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대로 이 소설에서 로마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선 '동맹시 전쟁(BC 91 ~ BC 88)'으로 기록된, 자신들에게 로마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는 로마를 상대로 이탈리아인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사실 이 전쟁은 로마에게 미증유의 위기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이 때까지 계속 로마와 거의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니발이 침략했을 때, 로마가 지금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니발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던 이탈리아였다. 그만큼 충성스럽게 오래도록 함께했기에 이탈리아는 많은 면에서 로마와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이 말은 이탈리아가 로마와 똑같이 싸울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로마가 지금까지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만의 군대 편성, 전술의 덕이 컸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그 이점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도 똑같은 로마의 군대 편제로 동일한 전술을 구사하며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로마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로마 자신과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찌 위기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 시간을 2부, '풀잎관'은 담는다. 그 전쟁이 어떻게 비롯되었고 경과했으며 무엇을 남겼는지, 그 과정을 세 권에 걸쳐 조목조목 아주 상세하게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읽은 역사서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겨우 몇 줄 혹은 몇 페이지로 밖에는 만나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정말로 이만한 분량으로 다룬 책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 놀랐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나 풍부하게 쓸 수 있었을까 하고.


 물론 여기에 대해선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소설이니 소설가가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만한 분량쯤은 어렵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럴 경우 위험이 따른다.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상상력은 쉽게 허황과 그것을 설득력있게 만들려다가 장황의 늪에 빠지고 그러다 그만 설득력을 잃고선 오히려 독자들의 차디찬 외면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풀잎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연설에서와 똑같이, 두말할 것도 없이 설득력이다. 그것이 작품의 성공을 좌우한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설득력으로 가득하다. 어떤 사건이든, 로마 원로원의 어떤 연설이든, 중요 인물들의 어떤 심리이든, 모두 있음직하고 그럴만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솔직히 실제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만한 설득력이 그저 콜린 매컬로의 상상력, 필력으로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어마어마한 자료 조사와 충실한 검토, 그 의미에 대한 숙고가 있었으리라. 그래야 가능한 것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감히 이 소설이 그 어떤 사건이든 인물의 초상이든지 간에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또 감히 이 소설을 뛰어난 역사서의 면모마저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동맹시 전쟁'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풀잎관'을 읽는 게 가장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앞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아주 개략적인 소개만 있다. 설령 인물이 등장해도 '어디가서 무엇을 했고 결과가 이렇다'라는 정도의 '행위와 결과'만 있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잘 나오지 않는다. 행여 나와도 깊이 서술하진 않는다. 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오히려 거기에 더 주안점을 둔다. 이 인물이 어떤 연유로 그러한 선택을 하고 행위했는지 그 과정을 더 충실히 복원하여 독자를 깊이 참여토록 하는 것이다. 마리우스와 술라만이 아니다. 필리푸스, 카이오스, 루푸스, 드루수스, 술피키우스 그리고 킨나만이 아니다. 정치에서 소외되었다고 할 수 있는 여인들인 율리아, 리비아 그리고 아우렐리아만도 아니었다. 3편에서 마리우스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작은 도시 민투르나이의 일개 촌부의 마음마저도 콜린 매컬로는 독자들에게 깊이 체험토록 한다.(아아, 이 장면은 '풀잎관'에서 가장 멋진 장면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저마다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독립적 인격으로 다가오고 그런 까닭에 마리우스의 성공과 파멸을 동시에 가져온 예언에 대한 집착도, 술라의 질투와 고독도, 루푸스의 정치에 대한 환멸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기 위한 드루수스의 절박함도, 미트리다테스의 학살로 문득 자신이 가야할 길에 눈을 뜨게 된 술피키우스의 회심도 다 생생하게 다가왔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풀잎관'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대의 역사를, 역사란 무엇보다도 생생한 인간들이 활약하는 장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역사라는 말을 쓰니까 문득 영화 '변호인'에도 나와서 더욱 유명해진 역사학자 E.H 카아가 떠오른다. 그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그가 '대화'란 말을 쓴 것은 과거의 사실이라고해서 고정불변의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선에 따라 그 의미가 늘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이 바로 '풀잎관'이었다.(아마도 그래서 갑자기 그를 떠올리게 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제 동맹시 전쟁을, 당시 주된 행위자였던 마리우스와 술라를,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과거와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콜린 매컬로의 이 책을 통해 바뀌게 된 것들이 참 많았다. 특히나 예전엔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권력에 눈이 먼 이들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로마와 이탈리아 반목의 원인이 되었던 로마 시민권 역시도 그것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되어 그것도 모르고 마냥 로마 편만 들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카아의 '대화'는 과거의 역사가 동시대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풀잎관'은 여기에도 해당되었다. 솔직히 이것은 소설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말로 '풀잎관'은 당대의 긴급하면서도 긴요한 문제에 대해서 좋은 참조가 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이 '풀잎관'을 한 번은 꼭 벗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 역시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해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이주(移住)의 문제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바로 최근에도 시리아 난민 사태가 있었다. 난민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로 유럽 곳곳이 격한 논쟁과 갈등으로 시끌벅적했다. 더욱 난민을 통크게 받아들인 독일에선 올 새해 첫날에 난민들이 일으킨 쾰른 대성상 집단 성폭행 사태로 더욱 찬반양론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심각한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해 일찍 이주민을 유입시킨 유럽 사회에선 항상 그런 갈등이 있어왔다. 실제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유럽의 우익화는 늘어나는 이주민과 상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주민이 유럽의 정치 지형마저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 미래가 현재의 미국일 지도 모른다. 이주민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트럼프가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려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 역시도 모두 알다시피 고령화 사회로 착착 나아가고 있고 심각한 저출산을 겪고 있다. 유럽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북한도 있다. 만일 통일이 되면 우리도 필연적으로 '풀잎관'의 문제를 겪을 것이다.


 '풀잎관'은 바로 그럴 때 능히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인에 대한 로마 시민권 부여 때문에 로마 원로원에서 일어난 갈등이 지금과 진정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은 3부에 걸쳐 내내 재현된다. 리키니우스-무키우스 법이 발단이었다. 이 법은 '마스터 오브 로마 가이드 북'에 따르면 'BC 96년 인구조사에서 가짜 로마 시민 발각 사례가 급증한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라 높아지자(p. 124)' 이에 대응하여 가짜 시민을 가려내어 신규 등록자를 처벌할 것을 목적으로 한 법이었는데 그렇게 가짜 시민으로 등록한 대부분이 바로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 도시들의 사람인 지라 특히 처벌 조항 때문에 로마가 이탈리아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가 원로원에서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법을 옹호하는 자들, 즉 차별을 주장하는 자들과 그 법을 반대하는 자들, 즉 포용을 주장하는 자들의 언설이 지금의 논쟁과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 보면 포용을 주장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일례로 포용 편에 섰던 루푸스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디 리키니우스-무키우스의 법의 처벌 조항을 더 진지하게 들여다봅시다! 어떻게 우리가 군대와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우리가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사람들을 매질할 수 있습니까? 이 의사당의 일부 방종한 무리가 이곳 동료들의 혈통에 대해 비방할 수 있다고 한들, 우리가 이탈리아인들과 그렇게 다른 존재입니까? 이 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 여러분이 숙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때려서 아들을 훈육하는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입니다. 그 아들을 자란 후에 아버지를 증오하지, 사랑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반도에 사는 우리의 이탈리아인 친족을 매질한다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로마 시민권 획득을 막는다면, 속물적인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막대한 벌금으로 벌한다면, 탐욕스러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집에서 쫓아낸다면, 냉담한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을 모두 합치면 얼마나 큰 증오일까요? 원로원 의원 여러분, 퀴리테스 여러분,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품게 하기에는 너무나 큰 증오입니다.”(1권, p. 373~374)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라면 증오만 부추기는 수단 보다는 사랑과 존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루푸스의 말은 우리의 현실에서 증오만 부추기는 정책을 폈던 국가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설득력이 있다. 비근한 예로 과거 일본이 재일한국인에게 했던 '외국인지문등록법'이 있다. 범죄가 일어났을 경우에만 필요한 지문을 그것도 하필이면 재일한국인만 등록하게 했던 그 법은 재일한국인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었고 하여 일본의 재일한국인 사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마저 엄청난 공분을 자아내어 그 여파로 일본 사회마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또한 2005년 프랑스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이주민들의 폭동은 이주민들에게만 가혹한 경찰이 처사와 그것을 정책적으로 방관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사회들이 이렇게 이주민들을 배제하면서 얻으려고 했던 것은 오직 안정이었다. '풀잎관'에서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 주는 것을 결사적으로 거부했던 필리푸스와 카이오스가 내내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 정책이 가져다 준 것은 더 커다란 혼란 뿐이었다. 특히나 독일은 여기에 대해 명확한 반대 증거가 되고 있다. 독일도 프랑스와 비슷한 규모의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프랑스와 같은 혼돈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범국가였던 독일은 노동력이 되는 남성들이 아주 많이 사망하여 전후 독일 경제 부흥으로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자 바깥 국가에서 이주민들을 대폭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 때부터 이미 그들을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이 독일 사회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루푸스 말로 하자면 독일을 사랑할 수 있도록, 태도와 제도에 있어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서 그것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정비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일의 모습은 루푸스의 방법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풀잎관'이 좋은 참조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뜨거운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는 '풀잎관'에서 그 문제를 두고 등장하는 다양한 주장들을 우리가 있는 현재의 실제 사례들에 비추어 어느 것이 어리석고 또 어느 것이 현명한 것인지를 판단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풀잎관'은 결코 한 번의 감상으로 그치는 작품이 아니다. 반드시 오늘의 문제와 결부하여 몇 번씩 곱씹게 만든다. 카아의 '대화'엔 역사적 사실이 수동적인 습득의 대상이 아니고 적극적인 사유 참여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런 면에서도 '풀잎관'은 합당한 면모를 보인다. 누구의 주장이든 그것은 우리의 사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콜린 매컬로는 뛰어난 필력으로 그 주장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담아내고 있기에(2권에서 필리푸스가 로마에 나타난 상서롭지 못한 현상들을 증거로 내세우며 드루수스를 공격할 때조차 그렇다. 거기서 필리푸스가 내세우는 많은 증거들은 설령 그것이 스카우루스의 말마따나 조작된 것임을 안다 해도 전혀 허무맹랑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긴 목록은 그야말로 콜린 매컬로를 대단하게 보도록 만든다. 특히 그 목록을 빼곡히 채운 상상력과 왠지 납득하게 만드는 필력을. 소설에서 가장 증오를 받을 인물의 말조차 그렇게 세심하게 구성하다니, 이런 존중과 배려를 보면 콜린 매컬로야 말로 루푸스와 드루수스의 정신을 진정 실천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절로 거기로 이끌려 들어가 자신의 사유를 가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콜린 매컬로가 은근히 초대한 대화에 어느 순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루푸스가 현실적인 측면에서 든 포용의 이유를, 2권의 드루수스는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밝히는데,


 “우리 로마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내에서 우리는 모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왕처럼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느끼는 기분을 좋아하고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들이 우리의 높은 콧대 밑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 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하려면 무슨 핑계라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탈리아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는 그 어떤 자연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2권, p. 120)


“이제는 우리에게서 이 무서운 악을 없애야 할 때입니다! 이 악이란 이탈리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간주되는 것, 우리 로마인들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로마는 이탈리아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로마입니다. 이제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자격을 줍시다!”(2권, p. 123)


 이것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우열의 기준은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한없이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준일 뿐인데 우리 역시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타협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최근에 필리버스터로 더욱 우리들의 관심을 달군 '테러방지법'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도 '풀잎관'은 1권에서 루푸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우리의 사유를 요청한다.

 “유급 정보제공자를 고용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고국을 무기력하게 만들 질병을 수십 년 동안 확산시키는 꼴이 될 것입니다.  첩자들, 옹졸한 공갈범들, 그리고 친구는 물론이고 친척에 대한 끝도 없는 의심이라는 질병말입니다. 어느 공동체든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자들은 공포가 사람들을 지배할 때나 억압적인 법이 제정될 때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제발 이런 비루한 자들이 생겨나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대로 로마인이 됩시다. 공포에서 해방된, 외국 왕의 술수 위에 있는 존재 말입니다.”(1권, p. 376)


 이렇게 '풀잎관'은 과거의 죽은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들을 단순한 감상자로 놔두지도 않는다. 소설에 있는 어떤 말이든, 사건이든 어느 순간 그와 비슷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슬쩍 다가와서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은근히 묻는다. 발터 벤야민은 진리를 향한 읽기란 잠들려는 나를 뒤흔들어 깨우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풀잎관'의 독서가 정녕 그러하다. 되씹고, 곱씹다 어느새 사유의 지도를 그리게 된다. 그 지도는 어쩌면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소마에 준이치라는 일본의 역사학자는 '상실과 노스텔지어'라는 책에서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그 자체는 담론이며 우리의 관념에서 상기됨으로써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상기 책, p. 21)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관념 속으로 지속적으로 들어와 집요하게 대화를 요청하는 콜린 매컬로의 '풀잎관'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로마 역사를 처음 만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된다. 지금까지 겨우 몇 줄이나 얼마 안 되는 페이지 속의 초라한 실체로만 보았던 로마의 인물들인데, 이토록 풍성하고 자세하게 만나다 보니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제대로 알게 되어 마치 처음 만나는 것과 같은 기분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로마의 역사 또한 어떻게 처음처럼 다가오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동맹시 전쟁'을 둘러싼 제반 상황을 '풀잎관'을 통해 지금에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더욱 이렇게 간주할 수밖에 없다. '풀잎관'은 로마 역사의 신대륙으로 인도한다. 인물도, 사건도, 과정도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것도 지금 나의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하여. 그러니 사유 역시 일신(一新)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소마에 준이치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개인을 기점으로 역사를 생각한다는 것은 (...) 자신 안에 과거라는 어둠이 스며들어 내가 해체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몸을 내던지는 것(같은 책, p. 33)'이라고. 이 말대로 역사는 현실을 상대화시켜 지금의 내가 가진 생각을 해체하고 전복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를 느낀다면 '풀잎관'은 한층 더 즐거운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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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8 0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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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1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