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 - 부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11가지 액션플랜
로버트 라이시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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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의 원서 제목은 'BEYOND OUTRAGE'이다.

 우리말로 하면 '격노를 넘어'쯤 될 것이다. 분노보다 더 강도가 센 격노다. 그는 왜 이런 제목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안다. 아니 대번에 느낀다고 해야 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절대 1%에 속할 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 이 책을 읽고 정말 격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왜?

 당신이 1%의 거짓말에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의문을 가졌으리라. 열심히 일하는데 왜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못하는 걸까?

 연례 행사처럼 보도되는 연봉 서열을 보면서 어쩌면 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지도 몰라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보도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현재가 오로지 당신 탓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괜한 음모론 아니냐고? 지금의 언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군. 푸코의 통치성에 관한 강의를 읽어보자.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근대 이후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집단 행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세밀하게 통치 기술을 조련해 왔는지.


 일례로 보험이 있다.

 보험이 순수하게 언제가 당할지 모르는 리스크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보험이 나왔던 진짜 목적은 원래 사회가 맡았어야 할 리스크의 책임을 오로지 개인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 노동 계급이 똘똘 뭉치지 않을 테니까. 모든 리스크, 현재 삶의 상태를 순전히 개인 책임으로 돌려버리면 지배 계급은 그만큼 더 수월해진다. 노동자들은 실은 구조적 모순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인데도 어리석게도 자기 탓으로만 생각해 더 지배 계급이 하라는 대로 할 뿐, 뭉쳐서 뭔가 변화를 이루어내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계급 의식은 저지 되고 그만큼 집단 행동도 와해 된다. 제도 변화의 핵심은 주로 그런 쪽으로 섬세하게 튜닝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파업이 마냥 나쁜 것으로만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파업이 노동자들에게 해가 되는 경우는 없다. 설령 귀족 노조의 파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사실 귀족노조란 노동자들이 분열하길 바라는 프레임에 불과하다.) 어떤 파업이든 종국엔 노동자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층은 더욱 파업이 양성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제는 재판을 통해 노조에 천문학적인 배상 판결을 때린다. 실직한 노동자들에게까지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상금을 내도록 한다. 쌍용자동차의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이 연속적으로 자살한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러니 사법살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얼마전 또 하나의 사법 살인이 있었다. 대법원이 외주로 돌린 KTX의 여승무원을 한국철도공사의 직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결하는 바람에 복직이 좌절되었을 뿐만아니라 1심과 2심의 승소로 받게 된 과거 4년간의 임금과 소송비용(1인당 8640만원)을 다시 토해내게 되어 절망한 나머지 다섯 살과 세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여승무원이 그만 투신 자살한 것이다. 엄마가 가장 필요했을 나이의 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녀에게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가족을 위해 뛰어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토해내야 하는 배상액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커다란 고통을 겪을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투신 자살로 내몬 것은 바로 대법원이다. 그녀의 유언은 '빚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해.'였다.


 이게 비단 그녀만의 비극일까?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닥쳐올 수 있는 일이다.  그녀들이 이런 비극에 처해졌던 것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유연화는 앞으로도 더욱 거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전에도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정규직 과보호로 비정규직을 양산한다며 정규직 과보호를 개선해야 한다고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언제든 쉽게 쳐낼 수 있고 가급적 노동자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의 소망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실업자가 있어서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부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언젠가 앨런 그리스펀이 말했던 대로다. 그는 말했다. '미국의 노동자에게 너무 많은 임금을 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되니 노동자들에겐 그저 삶이 약간 아슬아슬할 정도의 임금만 줘야 한다.'고.


 굳이 그런 임금 정책을 펼 것도 없이 실은 지금도 계속 노동자들은 원래 자신이 가져야 할 몫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 무엇보다 그건 당신의 노동생산성과 실제로 받는 임금의 격차에서 나타난다. IMF가 터지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이 오르면 오른만큼 실제 임금으로 돌려 받았다. 그랬기에 영화 '국제시장' 같은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당신의 노동생산성과 실질 임금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일한 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부분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앞에서 말한 그 '왜?'에 대한 답을 해야겠다.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이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은 당신이 일하는만큼 전혀 돌려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선진국들은 그 격차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심하므로 우리 역시 앞으로도 점점 더 빼앗길 것이 뻔하다. 그렇지 않으려면 1%가 아닌 99%를 위해 일하는 정권을 창출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의 주머니는 빈약하게 될 것이고 내수가 결코 살아나지 않을 것이니(정말 지금의 불경기가 세월호와 메르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갈수록 더 가볍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아무리 자기 계발서를 읽고 용을 써도 바라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그냥 그 돈으로 몸 보신이나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의료민영화를 대비해야 하니.


 희망?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있다면 오로지 하나 당신의 행동 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로버트 라이시도 격노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뜻에서 'BEYOND'를 쓴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다른 게 아니다. 착취의 노골화다. 더 뻔뻔하고 더 무제한으로 노동자들의 몫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러다 노동자들이 화내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푸코가 정확히 내다봤듯이 기업가 마인드를 전 노동자에게 파급하여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삶을 기업가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게 경영자 코스프레를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결코 해당될 리 없는 종부세를 가지고 반대했던 어리석은 이들이나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걱정해 그들을 위한 정당에 투표하듯이. 그런 존재로 만들어 일체의 저항을 무력화 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목표인 것이다. 순응주의자들의 양산. 지금 보니 아주 잘 되고 있군 그래.


 그러니 행동의 전망은 요원하다. 신자유주의는 체계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와 의지를 기화시켜왔다. 물론 월스트리트의 점령하라 운동도 있었고 지금도 유럽에선 저항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힘들다. 그러니까 미국의 루즈벨트가 했었던 그런 개혁 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그 시기야 말로 미국의 전성기라고 한다. 사실 지금도 옛 세대들은 그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에겐 아니었다. 가장 엄혹의 세월이었다. 흔한 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루즈벨트가 부자들에겐 높은 세금을 매겼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전만 해도 대부분의 백만장자들이 요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루즈벨트 시대엔 그런 부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 돈은 모두 케인즈 이론에 따라 노동자들과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쪽으로 흘러 갔다. 그리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이루었다. 지금의 미국은 힘들다. 행복지수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아주 낮다. 그런데 최상위 1%의 부자들은 행복하다. 세금이 50년간 계속해서 51%에서 26%의 비율로 낮아졌기 때문이다.(p. 49) 미국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한다. 부유층의 세금이 많아질수록 다수가 행복해진다. 그들의 세금이 적어질수록 다수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그건 우리나라의 부자 감세도 마찬가지다.


 하나 더, 대공황 이야기를 해 보자. 대공황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과잉된 탓일까? 그렇다면 왜 수요가 갑자기 줄어들었을까? 그 이유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소비자인 노동자들의 수입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란 걸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수 년간 노동자들의 임금은 제자리였다. 노동시간은 여전했고 노동생산성은 올랐으나 그들은 증가한 만큼 돌려 받지 못했다. 그 대부분의 이익은 기업과 부유층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임금이 더이상 늘지 않았지만 여전히 현재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 했고(대부분 그런 생활의 관성이 있는 고로 어찌할 수 없다.) 덕분에 부채의 늪에 깊숙이 빠졌다. 대공황은 그러다 터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이 계속해서 가계 부채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경고를 보내는 것도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도 대공황과 판박이였다. 그러니 우리만 예외라고 섣불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자면 이런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부채의 지속적인 증가로 지탱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빚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야말로 은행이 가장 혐오하는 고객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정부가 계속해서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그들이 언제나 말하는 국제경제의 불안 때문이 아니다. 부채를 늘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편이 그들에게 훨씬 이익이 되니까.


 우리들은 그저 세금을 내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세금으로 그들은 배를 불린다. MB 시절의 4대강, 사자방. 그렇게 우리의 세금은 그들의 이익으로 전환된다. 이번에도 최경환 부총리는 15조의 추가경정예산을 요구했다. 경기를 진작시키겠다는 게 이유다. 똑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최경환이 가져다 쓴 예산은 3년 동안 모두 90조. 그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다 어디에 썼는지 경기는 3년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살림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내수가 죽어 자영업자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그 돈은 서민이 아니라 기업들에게로 대부분 흘러갔을 것이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낙수효과를 운운하면서. 어떤 은행 광고처럼 기업이 살아나면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 말하지만 실제론 망상에 불과했다. 기업이 얻은 이익은 전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처럼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쌓아만 두었다. 사실 그들이 시설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봤자 아무런 이익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설을 확장하고 고용을 늘려 아무리 생산을 많이 해봐야 사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낙수 효과가 내수를 진작시키지 않는다.

 진실은 거꾸로다. 내수를 먼저 진작시켜야 낙수효과도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늘 제자리다. 수요가 줄어드니 물가는 계속 오른다. 어떤 당의 대표는 애국하는 마음으로 이번 휴가는 외국으로 가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즐기자고 했다는데 과연 외국으로 휴가를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알아는 보았는 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에게 국민이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 해당되거나.


 어쨌거나 최저임금은 겨우 6,030원.(가장 행복한 나라로 늘 꼽히는 노르웨이의 최저 임금은 2만원. 최저 임금은 다수의 행복과 비례한다. 극소수의 행복과는 반비례하더라도.) 앞은 깜깜하다. 그래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나만은 예외일 것이란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분노해야 할 때 침묵하고 행동해야 할 때 무임승차만 바랄 것이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우리나라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예외이길 꿈꾸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무자비한 현실로 밀어닥칠 것이다.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처럼 뽑은 그 순간엔 아무리 저항해도 이미 늦었다.


 * 로버트 라이시의 책을 읽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새벽의 멜랑꼴리한 기분도 돕고 해서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생각하던 것들을 마구 써버리고 말았는데(그래도 책의 기본 논지와는 통하기는 하는데...) 어쩌면 나중에 이 글을 지워버릴 지도 모르겠다. 이런 글은 써봤자 기분만 꿀꿀해진다. 보면 꿀꿀해지는 글을 일부러 놔 둘 필요는 없겠지. 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나중에 이 책의 리뷰를 다시 쓸 지도 모르겠다는 말만 해 놓기로 하자. 가급적 적은 분들이 이 글을 보기를...(뭐, 어차피 내 서재는 메르스 때의 평택처럼 인적이 뜸한 곳이니 괜한 바람 같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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