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카버의 아우라를 느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하루키는 카버의 여파를 자기 스타일로 잘 소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드디어 카버의 아우라가 듬뿍 느껴지는 단편을 만났다. 그냥 누가 쓴 것인지 모르고 만났다면 '이거 혹시 카버 소설 아니야?'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바로 '도쿄 기담집'에 두 번째 단편인 '하나레이 해변'이다.


 카버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상실의 파문' 같은 것이었다. 카버의 세계란 썰물에 끊임없이 모래가 쓸려나가는 해변이랄 수 있었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열심히 달리다 보니 문득 자신이 허공 위에 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만화영화의 캐릭터처럼 어느 순간 시간을 잃었고, 기억을 잃었으며, 소중한 존재를 잃었고, 자신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카버가 해부하는 것이 '상실' 자체는 아니었다. 카버에겐 바로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 상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카버의 소설은 화두처럼 던져진 그 질문을 풀어나가는 여정이었다.



 '도쿄 기담집'도 그랬다. '도쿄 기담집'엔 다섯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물론 '기담'이라는 것은 아니다. 바로 '상실'이다. 다섯 개의 '기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렸거나 잃고 있는 중이다. 소설 어디를 펴 보아도 우리는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라는 세번 째 단편 제목 그대로 상실이 도래했음을 보게 된다. 카버처럼 하루키도 상실의 물방울이 삶이라는 수면으로 떨어질 때의 그 접촉의 순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하루키의 돋보기가 향하는 곳은 그 접촉이 바깥으로 그려내는 파문의 무늬다. 처음의 진한 아픔을 동반한 선명했던 파문의 동심원이 어떻게 차츰 묽어져 다시 고요한 삶의 수면과 하나가 되는지, 그것이 하루키가 들려주고자 하는 기담이다.


 혹은 그래서 정말 '기담'이다. 도저히 잊힐 것 같지도 않고, 극복될 것 같지도 않을 상실이 어떻게 하다 보니 껴안고 살면서도 더 이상 마음에 폭풍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사납게 울부짓던 바다가 아침에 보니 언제 그랬나 싶게 잔잔하게 변해버린 것처럼 상실을 잉태한 삶도 결국엔 그렇게 되기에 '기담'인 것이다.


 "제가 한 가지, 부인에게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요." 사카타라는 초로의 경관은 헤어지는 참에 사치에게 말했다. "이곳 카우아이 섬에서는 이따금 자연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곳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때때로 거칠고 치명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런 가능성과 함께 여기서 살아갑니다. 아드님의 일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부디 이런 일로 우리 섬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부인 입장에서는 주제넘은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드리는 부탁이에요. (중략) 대의가 어떻든 전쟁에서의 죽음은 양측이 각각 갖고 있는 분노나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내 편 네 편 따위는 없습니다. 부인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아드님은 대의나 분노나 증오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p. 51~52)


두 번째 기담인 '하나레이 해변'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기담의 주인공 사치는 오래전에 남편을 여의고 외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런 아들이 서핑을 하러 하와이에 있는 하나레이 해변에 갔다가 거북이를 쫓아 해변까지 들어온 상어에게 다리를 물려 놀란 나머지 익사해 죽는다. 소식을 듣고 놀란 사치는 바로 하와이로 달려왔고 아들의 시신을 인도받기 위해 찾아간 경관에게서 저 말을 듣는 것이다. 사실 읽다보면 경관의 이 말은 다소 맥락없이 느껴진다. 불현듯 어디선가 날아와 뒤통수를 때린 테니스 공 같기도 하다. 아마도 경관은 머나 먼 타국에서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을 위로하려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말은 꼭 그것만은 아니라 하루키가 사치처럼 언제 뜻하지 않게 상실을 안게 되어버릴지 모를 독자에게 보내는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핑 장소인 '노스 쇼어'에서 가장 커다란 곳이 바로 '하나레이 베이'이다.

           큰 파도가 많아 서브 포인트가 정말 많아서 서핑을 즐기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한다.


 사실 저 말은 소설의, 아니 같은 상실을 다루고 있는 '도쿄 기담집'의 주제라 해도 좋을 정도다서핑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게 서핑의 매력을 처음 알려준 영화 '폭풍 속으로'에서 삶의 의미를 오로지 거대한 파도를 서핑하는 것에 두고 있는 패트릭 스웨이지는 이제 겨우 서핑을 시작한 키아누 리브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탈 수 없어.' 결국 '도쿄 기담집'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나 '하나레이 해변'이 그러한데 이 소설은 상실이 주는 아픔을 과장하지도 않고, 상실을 억지로 피하려 하거나 극복할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상실이라는 욕조에 몸을 푹 담근다. 그대로 가라앉아서 상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다. 하지만 버둥거리지 않는다. 조용히 바닥으로 이끄는 중력의 손길에 몸을 내맡길 뿐이다. 소설의 시간은 그런 시간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스쳐 지나가는 물결과 하나가 되는 시간. 거부가 아니라 받아들임의 침전.



 서핑과 같다. 파도를 받아들여 하나가 되지 않으면 파도를 잘 탈 수 없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활의 명수인 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말한다. "바람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극복은 바람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걸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말하는 상실의 치유도 그것이다. 온전히 받아들여 그 안에서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 상실에 극복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실을 극복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레이 해변'은 그것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만들어 준다. 카우아이 섬 경관의 말처럼 늘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섬사람들은 그러나 자연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위험이나 상실마저 모두 자연의 순리 안에 있는 것이라 여긴다. 사치는 아들을 화장한 뒤, 아들이 죽은 하나레이 해변으로 간다. 경관의 말대로 하나레이 해변은


 몇 년 전에 들이닥친 거대한 태풍 탓에 섬의 수목은 대부분 크게 변형될 만큼 타격을 입었다. 지붕이 날아가버린 목조가옥의 흔적도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산의 형태가 변해버린 곳도 있었다. 자연이 혹독한 땅이었던 것이다.(p. 53)


 하지만 그 곳에서도 사람들은 여유롭게 살고 있었고 하물며 아들이 상어에게 물려 죽은 서브 포인트조차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서퍼들은 여전히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사치는 아무래도 그게 이해되지 않는다.


 사치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상어가 무섭지도 않은가. 아니면 내 아들이 며칠 전에 이 자리에서 상어 때문에 죽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한 것일까? (p. 53)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사치조차 모래사장에 앉아 한 시간쯤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나리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게 된다. 방금 아들의 시신을 화장하고 왔는데도 그러하다.


 사치는 모래사장에 앉아 그런 광경을 한 시간쯤 무심히 바라보았다. 윤곽이 잡히는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었다. 무게를 지닌 과거는 어디론가 어이없이 사라져버렸고 미래는 아득히 머나먼 어둠침침한 곳에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의 그녀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녀는 시시각각 이행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주저앉아 파도와 서퍼들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반복의 풍경을 그저 기계적인 눈으로 따라잡고 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구나. 그녀는 어느 시점에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p. 53 ~ 54)


 거대한 태풍이 할퀸 상처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고 갑작스런 상어의 출몰로 아들이 익사한 '하나레이 해변'은 사실 상실을 안고 있는 삶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루키는 상실을 안고 나아가는 삶을 '하나레이 해변'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치는 오래도록 거기에 머무는데 그건 그대로 상실을 억지로 피하거나 쳐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앞서 말한 조용히 가라앉는 '침전'인 것이다. 사치가 필요하다고 느낀 시간도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특별히 가라앉는다는 말을 쓰는 것은 온 몸이 젖어 그만큼 물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말하는 상실을 받아들임은 바로 그러한 젖음이다. 그런 상태로 하지만 단조롭게 상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시간. 그것이 사치가 원했던 시간이다. 하나레이 해변은 그런 시간을 준다.


 하여, '하나레이 해변'은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치는 거기서 삶에서 무엇하나 원하는 것이 없었던 그녀가 그나마 가장 좋아했었던 피아노 연주를 떠올린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음악실에서 재미삼아 쳐보고 매료되었던 피아노는 결국 그녀의 생계 수단이 되었다. 한 때는 타고난 엄청난 재능에 비해 독창적인 면모가 부족하여 프로 피아노 연주가가 되지 못하리라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그만 지금까지도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사치는 '하나레이 해변'에서 피아노 연주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일까?


 하루키가 사치에게 하필이면 '피아노 연주'를 가지고 온 것은 그것이 아들의 '서핑'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핑이 부드러운 곡선의 파도를 타는 것이라면 피아노 연주는 부드러운 곡선의 선율을 탄다.


 한 마디로 피아노 연주란 손으로 하는 서핑이다. 이런 서핑과 피아노 연주의 유사성 때문에 하루키는 사치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져다 준 것이다. 거기다 둘은 행위의 단조로운 반복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사치는 하나레이 해변에서 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서퍼들을 본다. 그들처럼 사치 역시도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친다. 사실은 그게 바로 그녀의 재능이다. 무심하게 쳐가는 것. 이러한 사치의 재능은 서핑과 피아노 연주의 유사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피아노를 치는 것 자체가 좋았던 것이다. 건반 위에 열 개의 손가락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툭 트였다. 그것은 재능이 있고 없고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도 아니다. 아들도 아마 파도를 타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라고 사치는 상상했다.(p. 70)



 바로 이것이 하나레이 해변이 가진 치유의 힘이었다. 아들의 서핑도, 사치의 피아노 연주도 함께 가지고 있는 단조로운 반복. 그 단조로운 반복의 궤도가 결국엔 상실이 안겨준 절망에서 스스로 기어나오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리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하루키 소설 속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나오는 주인공 쓰쿠르이다. 쓰쿠로도 사치처럼 아주 커다란 상실을 경험한다. 완벽한 공동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의 모임에서 혼자 버려진 것이다. 그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절망했지만 결국 그 어둠에서 헤어나오게 만든 것은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쓰쿠르는 그 단조로운 반복을 성실히 행했고 그러다 끝내 그 아픔을 무심히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 소설이 쓰쿠르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순례라고 한다면 진짜 치유는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었다. 진짜 치유는 다른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 속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쓰쿠르가 바로 사치의 연장이라는 걸 이제 깨닫는다. 아마도 사치가 없었다면 쓰쿠르도 없었을 것이다. 사치와 쓰쿠르라는 분신을 통해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바라는 치유란 어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이리라.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와도 같이.


 상실을 주는 삶은 치유도 준다. '하나레이 해변'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모든 것엔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 조르주 깡길렘이라는 프랑스 학자에 따르면 질병도 사실은 치유를 위해 몸이 새롭게 적응해 나가는 징후라고 한다. 삶에는 저마다 자기 치유 능력이 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시간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상실을 그토록 힘들어하는 것은 어떤 조급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둘러 이 상실감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얼른 이 모든 상실로 인한 아픔들을 없던 것으로 지우고 싶다.'는 바로 그 마음이 상실을 가시처럼 여기게 만들고 상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성급하게 지우려해도 그렇게 안되는 것이 상실이다.


 뜸을 들여야 제대로 된 밥이 되듯이 상실에게도 저마다 필요한 기간이 있다. 사치가 아들에 대해 고백했듯 한 인간으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듯이 이별하는 데도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을 고통으로만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그건 온전히 부정의 경험만이 아니다. '하나레이 해변'은 분명히 보여준다. 상실이 어떻게 또 다른 새로운 삶의 다음 문으로 나아가게 하는지. 상실로 인한 그 침전의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마주하지 못했을 시간들을 삶은 또 어떻게 마련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하나레이 해변'은 기담의 장소가 된다. 부정을 받아들이게 하여 더 커다란 긍정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분명 상어가 있지만 상어를 더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너희, 하나레이에서 상어에게 잡아먹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치?"

 "거기, 상어 있어요? 진짜로?"

 "있어." 사치는 말했다. "진짜로." (p. 81)


 이러한 하나레이 해변을 하루키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는 가을이 끝나갈 무렵의 삼 주일 동안 하나레이에서 지낼 일을 생각한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아이언트리의 술렁임을 생각한다. 무역풍에 휘날리는 구름, 크게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가는 앨버트로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에게 현재 그것 말고는 생각해야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레이 해변. (p. 82)


 하지만 하나레이 해변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당신의 삶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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