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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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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의 '제7일'은 절망의 소설이다.

 달리 뭐라 말할 수 없다. 만일 위화에게 데스노트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는 거기다 '희망'을 적었을 것이 분명하다. 위화의 판도라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자를 다시는 열지 않았다. 세상은 광막한 어둠 속에 한 점의 불빛도 없이 사위어만가고 그 무게에 짓눌린 우리들은 압력으로 말려들어가는 몸처럼 침묵한다. 차마 신음마저 낼 수 없을만큼 말을 빼앗긴 우리들은...

 

 더욱 아파한다. 이건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거기서 유령이 된 자들은, 아니 되어야 했던 자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해서. 초등학생 소녀는 아침에 학교 갈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학교 갔다온 사이 철거 용역들에게 완전히 헐려 폐허가 된 그 곳에서 숙제를 하며 엄마와 아빠를 기다린다. 바로 자신의 발 밑 콘크리트 아래 그녀가 기다리는 부모님들이 깔려 죽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고향의 가산을 정리해서 낯선 도시로 일가족이 옮겨와 식당을 열었던 탄가네는 공무원들이 밥값을 내지않고 가는터라 늘 적자에 허덕인다. 장밋빛 꿈은 철면피 같은 정부의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가 더 가혹한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 끙끙 앓기만 하다가 화재가 일어난 날, 그 억울함과 분노가 사무친 나머지 정작 화마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밥값을 내지 않고 달아나는 사람들만 보여 그들을 막다가 그만 몰살당한다.

 

 희망은 없다.

 모든 희망을 가진 존재들은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의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어주려고 없는 살림에 과외까지 하려고 했지만 정작 주인공이 과외 선생을 하러 온 첫날 죽음을 당한다. 탄가네와 똑같이. 뭐가 있으랴. 태어날 때 우연한 사고로 기차 바깥으로 버려진 주인공은 또한 어떠한가? 하지만 그는 근처 선로에서 작업하던 지금의 아버지에게 주워져서 보살핌을 받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그였지만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한다. 물론 단 한 번, 그도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생겨서 어린 주인공을 버리긴 했지만. 하지만 버린 당일 밤, 그는 그걸 뼈에 사무치게 후회했고 바로 달려가 주인공을 데려왔을뿐 만 아니라 다시는 주인공을 버리지 않기 위해 아예 여자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여자와 인연을 맺지 않는다. 그는 오직 아들인 주인공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다. 그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었고 그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었다. 그만한 헌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답은 하나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그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그러던 아버지도 죽는다. 불치병에 걸려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홀로 사라진다. 대학을 나와 원했던 회사에 취직하여 어려움없이 살던 주인공은 한 여인을 알게되면서 급변한다.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듯이. 그녀의 연인 리칭은 남자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만큼 미인에다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로는 아예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임을 짐작하고 거리를 두었지만 어느새 그녀와 가까워진 자신을 깨닫는다. 둘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3년의 결혼 생활 동안 주인공의 리칭에 대한 헌신은 변함없었지만 애초에 그녀는 그가 독차지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상대였다. 미모가, 능력이 그녀를 한 평범한 사내의 아내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기 위해 주인공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사랑은 변함없으나 그 사랑이 높은 곳에 대한 욕망을 잠재워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욕망을 이해하는 주인공은 순순히 거기에 응한다. 어차피 언젠가 닥쳐오리라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은 자본이라는 현실 앞에서 깨어진다. 그러던 아내도 죽는다. 한창 잘나가던 아내는 사업이 실패하고 그동안 저지른 비리 때문에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자 자살한다. 주인공이 탄가네의 식당에서 우연히 그 기사를 본 날, 식당의 폭발로 인해 그 역시 생을 마감한다.

 

 모두 죽는다. 제7일은 유령들의 이야기다.

 선한 일을 했듯, 악한 일을 했듯 차이는 없다. 흔히들 죽음 후엔 평등하다고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꼭 죽어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위화의 저승은 그렇지 않다. 죽음 후도 여전히 살아있을 때만큼이나 불평등하다. 죽은 주인공은 빈의관이라는 곳에 간다. 죽은 자들이 스스로 화장하여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 서로 있게 되는 곳들이 다 다르다. 주인공처럼 뭐하나 없는 이들은 소파에 앉지 못하고 서서 기다린다. 소파에 앉아 편하게 기다릴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살아 생전에 한 재산을 가졌던 무리들 뿐이다. 그들은 없어서 서 있는 자들을 조소하며 자신의 재산을 자랑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또 한 곳이 있다. VIP 룸이다. 거기는 오로지 권세 있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그 날, 그러니까 주인공이 도착한 날, VIP룸에 들어가는 유령이 하나 온다. 시장이다. 부동산 비리 때문에 시끄러웠던 시장. 소녀의 부모를 돌아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시장.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VIP 룸에서 홀로 차례를 기다린다.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죽어서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떤 선행도 보상받지 못한다. 설령 사랑하는 연인의 내세를 위해 무덤 자리를 마련해 주느라 자신의 신장을 파는 바람에 죽었어도 여전히 헐벗은 채 배회하는 것엔 차이가 없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그래도 그런 자들을 위한 장소가 있다. 주인공은 어떤 울음에 이끌려 그 곳을 찾게 된다. 신록은 푸르고 과실들은 풍성하며 살아있는 해골들로 가득한 땅. 거기서 그는 엄마가 없었던 그를 위해 자신의 아이들 보다 더 자주 젖을 물려 주었던 정말 자신의 엄마와도 같았던 이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병원에서 불법적으로 강물에 유기한 모두 27명의 태아들 시체를 발견하고 병원의 잔혹한 처사를 당국에 고발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려 했지만 그만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  27명의 태아들과 함께 영안실에 안치되었던 그녀의 사체는 미스터리한 힘에 의해 태아 27명의 사체와 함께 사라진다. 시민단체는 그 사라진 시체들을 두고 이는 모두 병원과 정부가 짜고 은폐시키려는 음모라 비난하고 늘어나는 시민단체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은 다른 이들의 사체를 화장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준다. 그래서 태아 27명과 주인공의 아줌마는 무덤 없는 자가 되어 그 땅에 온 것이다. 그 곳은 그러한 자들로 넘쳐나는 땅이다. 거기는 모두 평등하다. 그리고 자유롭다.

 

 그런데 과연 평등과 자유가 다른 말일까?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평등은 자유를 해친다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아니다. 위화의 무덤없는 자들의 장소는 평등과 자유가 일치하는 곳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얼굴의 해골이 되었듯이 평등한만큼 자유롭다. 무덤있는 자들을 위한 빈의관과 달리 거기엔 살아 생전 어디에 있었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신을 죽인 사람에게마저 관대해지고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원한은 사라지고 우정과 연대만이 남는다.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고 자신의 몸처럼 아껴준다. 파라다이스. 생각해보면 절대적으로 평등했던 마르크스 용어에 따르자면 원시공산사회는 유목민들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그들은 어떤 곳에도 정주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어떤 땅에도 얽매이지 않은 존재였다. 들뢰즈의 말마따나 탈영토화된 그들이었고 그만큼 자유로웠던 그들이었다. 어디서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건 영원한 자유로움의 이미지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자유로웠던 그들은 평등했다. 같이 생산하고 아낌없이 나누었다. 계급이 없었다. 빈부의 격차로, 권세의 격차로 사람을 나누지 않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과 같은 계급과 사람에 대한 차별은 한 곳에 머무르는 것, 즉 정주하면서 부터 생겨났다. 그만큼 우리가 얽매이자 불평등이 들어온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자유와 평등은 일치한다고. 진실이다. 완전한 평등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준다. 진정한 삶 역시. 사람을 나눔은, 가름은 우리의 평등을 제한하는 것만큼이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다. 완전히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자유도 완전히 없다. 지금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도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그만큼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토록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과 자유는 서로 다르지 않다. 평등을 추구하는 길은 기필코 자유를 추구하는 길이다. 이외에 모든 자유와 평등을 배척하도록 만드는 관념은 거짓이다. 그건 저항해야 하는 악의적 환영에 불과하다. 위화가 그려내는 헐벗은 유령들의 땅은 그것을 보여준다. 결코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그러므로 이토록 불평등한 사회라면 우리는 더이상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함을.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 중국은 사회주의 중국보다 얼마나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는가? 유령이 되어서야 이 땅에 들어갈 수 있다면 위화 스스로 거기에 대해 부정의 대답을 내어놓고 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도 할 수 있다. 과연 경제적 번영이 우리 자유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보다 지금의 시절이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 시절에 있었던 어떤 소중한 자유를 지금 우리는 잃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때보다 우리에게 얽매인 사슬들은 더욱 많아졌을 지 모른다. 초등학생들은 놀 자유를 잃었고 중,고등학생들은 청소년기의 낭만을 누릴 자유를 잃었다. 대학생은 좁은 취업의 문을 뚫기 위해, 높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학문과 삶의 자유를 잃는다. 나와서도 만연된 비정규직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누구나 인정하리라. 삶은 결코 더 쉬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불평등의 척도는 곧 자유의 척도다. 만연한 불평등은 사회가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음을,아니 오히려 퇴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나는 위화의 '제7일'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라 여긴다. 허상에 속지말 것을! 본질을 직시할 것을 말하는 소설이라고. 헐벗은 유령들의 땅에서 모든 이들이 생전의 얼굴이 아니라 해골로 있다는 것이 그 단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이 절망의 소설이 되어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어쨌든 희망이란 아름다운 모습의 거짓말이고 가상이니까 말이다. 절망하고 절망해서 그 늪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비로소 밟은 단단한 바닥에서 본질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 위화의 '제7일'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주인공과 리칭은 가장 행복했던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었던 셋집으로 그토록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둠은 어둠으로... 섣부른 희망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

 

 그러니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는만큼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평등이야 말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위화의 '제7일'은 그를 위한 'PAINT IT BLACK'이다. 그 극심한 불평등 속에서 위화의 유령들이 양산되었듯이 결국은 그것이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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