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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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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 소설은 '손'에 관한 얘기일까 아니면 '이빨'에 관한 얘기일까? 

 소설은 처음 '이빨'에서 시작한다. 한 남자가 가지고 있는 이빨. 그것은 삶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살기 위해 와구와구 씹어댔을 이빨. 그 이빨이 남자에게 묻는다. '미칠 수 있겠니?' 소설의 제목은 바로 이러한 이빨의 물음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여기 앞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는 이내 알 수 있다. 바로 '삶에'라는 것을... 

 다음, 여자의 얘기가 나온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런데 둘의 이름이 똑같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언제나 맞잡은 손이다. 그녀의 사랑은 손으로 시작했고 손으로 지속되었고 결국 그 손을 놓음으로써 헤어졌다. 그 손이 묻는다. '미칠 수 있겠니?' 여기서 생략된 말은 이빨과 다르다. 묻는 것은 타인의 손에 이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니까...

  남자는 이빨을 여자는 손을... 

  이빨은 삶에 대한 집착을 손은 관계의 집착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둘은 다르고 사실은 반대다. 남자는 인도네시아(최근에 쓰나미가 일어났던 곳이라서 그저 추정한 것일뿐. 확실한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하긴 어디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대한민국만 아니면 되니까.)인이다. 그는 택시기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최근에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자와 강제로 헤어졌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여자는 한국인. 칠년 전 필리핀에 와 있던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한 여자를 죽이게 되었다. 칠년만의 귀환은 그 속죄를 위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은 그 죽음으로 인해 더욱 더 속박되어버린 전 남자친구와 완전히 결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주인공 남자에겐 친구가 있다. '만'이라고. 유일한 친구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노리고 늙은 외국인 여자의 아들 노릇을 한다. 지극히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친구. 이빨과 같은 존재다. 남자는 사랑의 상실로 늘 자살을 꿈꾸지만 그의 주위엔 이렇게 삶의 집착으로 가득하다. 여자는 그 죽음으로 인해 칠년 동안이나 전 남자친구에게 집착했지만 그녀의 주위엔 온갖 버려짐으로 가득하다. 그녀가 일하는 도서관 원장의 별명조차 '쓰레기통'이다. 

 살고 싶진 않지만 살아야하는 남자와 가지고 싶지만 버려야하는 여자. 인도네시아와 한국이라는 그 거리적 격차만큼이나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남자와 여자 사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라인이 존재한다. 바로 그 '월리스 라인'을 추적하는 것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삶의 집착과 그 포기 사이를... 

  그렇게 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빨에 관한 얘기이자 손에 관한 얘기이다. 남자와 여자 둘의 이야기이다. 둘은 완전히 대등한 존재들이고 그렇게 서로 어떻게 변해가는가가 이 소설의 관건이다. 마치 저마다 주어진 화두를 풀어나가고 있는 듯한 소설이랄까... 그렇게 파편화된 소설. 독자가 마치 고고학자처럼 이야기의 도편들을 끼어맞추어야 하는 소설이다. 여자가 왜 먼저 남자를 유혹하여 정사를 나누게 되는지. 그리고 그 정사를 나누자마자 왜 거대한 쓰나미가 덮치는지, 어쩌다 남자도 그 여자를 애틋하게 여기게 되는지... 소설에는 그 결정적 얘기들 모두에 침묵한다. 감정의 발로는 왠지 즉흥적으로 보이고 재난 조차도 여기선 우연적이다. 그리고 모든 게 아련하개 느껴진다. 재난의 급박한 상황에서 조차 어쩐지 꿈을 꾸는 듯 조금도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에두르듯 흘러가는 미려한 문장들이 물기를 마구 자아내어 시야를 흐리게 만들고 있는 탓이리라. 마치 빗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유리창을 통해 바깥은 내다보는 것 처럼... 

  파편화와 흐릿함... 좋다 싫다를 말하기 전에 참으로 리뷰 쓰기 어렵게 만드는 특징들이 아닐까 싶다. 오래도록 이 소설을 입안에 넣고 굴려봤는데 도대체 언제 내어놓아야될지 알수가 없었다. 재난에 중점을 둬서 최근 한국 소설과는 다르게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소설이다라고 말 할 수도 있었다. 삶의 집착과 집착의 버림은 사실 다른게 아니라 하나다 라고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남는 찜찜함. 뭔가 뚫리지 않는 답답함. 그래서 여전히 지금도 오도독거리고 있다. 

  이 소설은 그렇다. 마치 제비뽑기를 위해 내밀어진 여러 개의 줄로 가득한 다발과도 같다. 나는 그 중 하나를 뽑았고 거기에 대해 조금 지껄였을 뿐, 어쩐지 아직도 거기엔 남아있는 다발만큼의 많은 이야기들이 가능할 것 같다. 누구도 바닥을 흘러가는 물길의 경로거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없듯이 이 소설 역시도 문장과 문장의 틈 사이로 어떻게 해석의 물줄기가 길을 내어 이어갈지 정의내리기 어렵다. 이 리뷰는 그런 나의 난처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혹시 당신이라면 이 보이지 않는 의미의 '월리스 라인'을 제대로 짚어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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