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 방랑'. 제목처럼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앙카라와 흑해, 티벳과 버마, 치앙마이와 상하이, 홍콩과 청량리, 도쿄로 이어지는 여정을 다룬 여행서다. 하지만 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작가의 얼굴에 책에서 인용한 글로 꽉 채운 것이 예쁜 풍경을 주로 쓰는 전형적인 여행서 표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표지부터 이 책은 네가 알던 여행서와 많이 다르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 같다. 읽어보니 과연 그랬다. 당신이 만약 여행서를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다면 이 책엔 당신이 기대하는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랜드마크는 물론, 예쁜 거리의 모습이나 풍경은 고사하고 그 곳의 먹음직스러운 대표 요리 또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의 것들이 가득하다. 여행지에서 일부러 가지는 않는 곳들. 허름한 선술집, 버려진 항구, 인적 드문 빈민가의 시장이나 골목, 사창가 등등. 매끈하게 꾸며진 외관의 여행 엽서 같은, 그 곳의 삶이 아니라 우리네 삶처럼 신산하고 질척하며 땀에 절은 살내음이 물씬 풍기는 삶을 담는다. 


 어느새 여행이 떠도는 풍수처럼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실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수많은 도시의 인간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인도 콜카타에 도착해 질리도록 악취를 맡고, 이제 슬슬 동남아시아로 떠나려는 단계에서  심호흡을 하고 싶어졌다.

(p. 249)

 생각해 보면, 여행은 심호흡을 하기 위해서다. 꽉막힌 일상의 악취에서 벗어나 낯설고 이국적인 곳에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엔 그런 공기가 없다. 어딜가든 코 끝에 진하게 배여드는 건, 이 곳과 그리 다르지 않는 허무와 비애 그리고 고통의 진한 내음 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대지의 곳곳마다 감돌고 있는, 삶 자체에서 눅진하게 풍겨오는 악취를 맡기 위해 400여일의 여행을 떠난 것 같다. '인도 방랑'과 '티벳 방랑'에 이어 '방랑 3부작'을 완결짓는 '동양 방랑'은 그런 여행의 기록이다. 인간을 떠나 인간이 없는 곳에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인간 사이로 들어가 그들의 육신에 새겨진 삶이 남긴 생채기들을 더듬는 것. 자유가 아니라 속박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동양 방랑'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붙박이처럼 한 자리에 머물면서 힘겹더라도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며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게 된다. 때가 되면 연례 행사처럼 목을 매면서도, 구출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명랑하게 되는 여인이라든지, 낯선 손님이 식당에 찾아오면 무작정 합석해 손님에게 많은 음식을 사달라 하고는 모조리 먹어치우고 나중에 식당 주인에게 리베이트를 받는 거구의 이스탄불 여성 같은, 정말 그저 한 번 보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물면서 그 삶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이 책엔 참 많이 나오는 것이다. 특히 저자가 앙카라에서 우연히 한 창부의 사진첩을 보고 사진 속 여성이 내뿜는 광기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 주인공을 찾아 앙카라의 온갖 곳을 헤매고 다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에게 여행이란 찾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책에서 내내 냄새를 얘기한다. 어디를 가면 꼭 맡게되는 냄새가 있다는 것이다. 냄새, 그건 육신을 가진 존재가 내뿜는 살내음으로 저자에게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가상이 아니라 실상이라는 걸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냄새란 실존의 증거였고, 깃털처럼 무작정 떠다니고 있는 것만 같은 자신의 발을 대지에 단단히 묶어둘 수 있는 중력 같은 것이었다. 그런 냄새의 출처와 만난다는 것. 그것이 그에겐 구원이었고 그런 면에서 1년 넘에 이어진 여행은 구도의 여정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앙카라에서 그가 했던 추적 또한 그가 여행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은 여자도 아니었다. 마침내 사진 속 여자를 알고 있는 남자를 만난 저자는 그에게서 그녀는 실은 성전환한 남자이며 이미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얘길 듣는 것이다. 일전에 저자가 보고서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바다에. 거긴 해마다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내던지는 곳이라면서...


 보는 건 겪는 것과 다르다. 저자에게 여행이란 어쩌면 그걸 깨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는 어디를 가든 매순간 자신의 상식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먼저 공감과 헤아림의 시선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앞서도 말했듯 그는 서울의 청량리도 여행한다. 때는 1981년의 겨울이다. 광주의 항쟁이 있고나서 1년이 지난 뒤의 서울. 그는 서울에 오자마자 택시 기사가 틀었던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된 판소리에 매혹된다.


 전라남도는 한반도 남단에 위치하는, 일본으로 치면 현이다.

 판소리는 전라남도의 노래다. 예로부터 전라남도 사람들은 중앙으로부터 멸시와 학대를 받아왔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판소리는 그런 풍토에서 태어난 가시 돋친 잡초 같은 노래다. 주로 부조리에 대한 원한, 권력에 대한 강렬하고 외잡한 풍자를 담고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전라도 사투리로만 불려진다.

 "작년에 폭동이 일어난 광주는 전라남도의 중심 도시죠?"

 "맞아요."

 "그럼 이마에서 피를 흘리던 그 청년들은 함께 목이 터져라 판소리를 불렀던 거군요."

 ".... 손님. 그런 이상한 말은 서울에 도착하면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아요."(p. 244)


 그런데 그 때 광주는 어떤 곳이었던가? 그만한 비극을 당했으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수 없었던 도시요, 아예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폭력적으로 금지된 곳이었다. 그건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버려진 육신이나 다름 없었다. 어쩌면 저자가 얘기하는, 청량리에서 저자를 느닷없이 덮쳐 여관으로 끌고 가 저자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행위할 것을 강요했던 곰치 할멈은 광주를 비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자신을 찾아와 주지 않고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은 그 때의 광주도 다르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저자가 곰치 할멈의 얘기를 이렇게 끝맺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효자손이 눈에 띄었다. 그 낡고 반들반들한 대나무 손가락을 보면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빗소리에 섞여 여자의 오열과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p. 461)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여행의 빙점'이란 글에서 그는 말한다. '동양 방랑'은 아무리 낯선 곳에 가더라도 무심해지는, 그렇게 빙점이 되어버린 자신의 여행을 기사회생 시키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고. 그는 자신의 여행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어 버린 것을 인간을 피해 풍경만 찾아다녔기 때문이란 걸 깨닫고 '동양 방랑'에선 정반대로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눈 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일생일대의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하며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어떤 인간이든 철저히 사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야 왜 '동양 방랑'이 눈 보다 코를 더 자극했는지 이유를 알겠다. 이 책은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가를 증명이라도 하듯 인간이 지닌 저마다의 살냄새로 자욱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언한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다.

어쨌든 사귀어보라.

 '인간은 살덩이죠. 감정으로 가득한...' 


 여름이다.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중엔 저자처럼 여행의 빙점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동양 방랑'을 권해본다. 어쩌면 좋은 자극이 되어  빙점이 되어버린 여행을 저자처럼 기사회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