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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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베라는 남자'를 쓴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소설 '베어타운'은 세월호 참사 후, 1년 동안의 우리나라를 많이 생각나게 한다.

 이 소설은 우리와 결코 먼 얘기가 아니다. '오베라는 남자'를 읽었을 땐, 어쩌다 운이 좋아 원더 히트를 치게 된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베어타운'은 그런 생각을 버리게 만든다. 그저 운이 좋아 성공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내공이 심후한 진짜 작가였다. '베어타운'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이야기와 문장 모두가 감탄스럽다. 집단이 온갖 이유와 논리를 내세워 한 개인의 불행을 철저히 무시하고 배척하는 이야기가 이토록 설득력 있고 깊이가 있다니.


 소설이 하나의 전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바로 집단 대 개인의 전선이다. '베어타운'은 한 때 화려한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는 몰락한, 말하자면 겨울잠을 자는 곰 같은 형국의 마을이다. 불행과 절망, 무기력은 만연한데, 부활의 희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마을.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하키 팀에 전적으로 매달린다. 오직 그것만이 마을을 재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키 팀에 마을의 사활을 걸다 보니 방해 혹은 장애가 되는 인물은 족족 버려진다. 대표적으로 하키 팀 코치 수네가 그렇고, 감독 페테르의 딸 마야가 그러하다.


 대도시의 시끄러운 새끼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조그만 하키팀에서 정말로 재능 있는 선수를 키울 때의 기분을 말이다. 그건 마치 얼어붙은 마당에서 꽃을 피운 벚나무를 보는 느낌이다.(p. 51~52)


 수네, 그는 그렇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페테를 발굴하여 세계적인 선수로 키웠으며 어디로 갈지몰라 방황하던 다비드에게 청소년 아이스하키팀 감독을 맡게했을 뿐만 아니라 열정 넘치는 케빈을 잘 조련시켜 마을의 미래마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훌륭한 선수로 만들었다. 이처럼 그는 팀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에게 몰두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에게 열정과 관심을 기울여 제 몫의 삶을 충실히 채워가도록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집단의 이익에 쫓겨 오래도록 있었던 코치 자리에서 쫓겨난다. 집단이 개인에게 우선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베어타운'은 변했다.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하나의 가능한 수단으로만 존재했던 하키가 그것이 없으면 삶조차 불가능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하키는 이제 단순히 팀 경기가 아니다. 마을 사람 전체의 삶을 주관한다. 그들 모두가 선수고, 한 팀이다. 다비드가 강조하듯, 승리를 위해 똘똘 뭉친다. 개인은 없다마야의 강간은 그렇게 변해버린 '베어타운'을 극명하게 드러낸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시합은 전부다 다름없다. 그 뿐이다.(p. 22)


 소설은 처음부터 마야가 하키에 시큰둥 하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기타 연주를 더 사랑한다. 기타, 홀로 칠 수밖에 없는 그 악기는 팀이 아니라 개인의 상징이다. 그런 마야가 청소년 하키 팀의 케빈에게 강간 당한다. 청소년 하키팀 감독 다비드는 언제나 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다비드의 말에 충실했던 케빈이 마야를 강간했다. 개인에 대한 집단의 일격이다.


 마야의 부모인 페테르와 미라는 자식을 한 번 잃은 적이 있다. 그 일로 내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 노심초사 한다. 그런 부부에게 또 한 번 커다란 비극이 닥친 것이다. 페테르와 미라 역시 개인의 영역에 서 있다. 페테르는 수네의 퇴출을 거세게 반대하고, 미라는 변호사로 개인의 권익을 위해 싸운다.(미라 역시 하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하키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할 뿐이다.(p. 23)) 무엇보다 그들이 가진 아픔이 집단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소설 초반은 페테르와 미아 부부 생활을 보여준다. 그런 가족의 모습은 여지없이 사랑스럽다. 가장 진정한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서로에 대한 상호 존중과 배려 그리고 가없는 책임이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초반에 이런 가족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마야의 강간 뒤 나타나는 케빈 가족의 모습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이제와 얘기지만, 소설은 다양한 인물을 담고 있고 저마다 목소리를 가지도록 허용한다. 그 어떤 인물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다.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한다. 판단은 독자에게 돌린다. 그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 이 소설의 훌륭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래서 배크만은 진짜 작가인 것이다.


 이 모든 파노라마에서 우리는 집단의 이익 때문에 쉽게 버려지는 불행한 개인을 본다. 그건 언뜻 벤담의 공리주의 같지만, 케빈 가족과 마을 유력자로 구성된 하키팀 이사회의 모습은 그들이 주장하는 공익이라는 게 사실은 사익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키팀 응원단 '불곰'처럼 팀의 승리에 방해되는 이들에겐 폭력을 불사할 정도로 하나로 똘똘 뭉치는 마을 사람들조차 실은 저마다 사익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란 게 드러난다.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마을 전체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마야는 세월호 참사로 보이고, 그 마야를 위해 마을과 맞서 싸우는 페테르와 미라는 유가족으로 보이는 것이다. 참사 후 1년 동안 우리나라 역시 '베어타운'의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삼성이 준 돈으로 일베가 유가족 단식 현장 바로 옆에서 치킨과 피자 폭식 투쟁을 하는 등, 세월호 유가족들을 얼마나 무시하고 핍박했던가. 이것은 비단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다. 공동체라면 어디나 빠질 수 있는 어둠이다. 그렇기에 그런 위험에 대해 사유의 시간을 가져오는 '베어타운'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하기사 작가가 있는 스웨덴도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히 옹호하는 우익들이 널리 지지받고 있는 형편이 아니던가.


 공동체는 어려울수록 약한 존재를 배제해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다. 현재 미국, 일본, 유럽 할 것 없이 횡행하고 있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베어타운'은 이처럼 약한 누군가를 배제해서 이뤄지는 연대란 그것이 제아무리 거창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다만 지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것도 억지로 독자를 원하는 자리로 끌고 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는 비단 공동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시 얼마든지 자신의 이익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타인을 지옥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이었다. 그는 도움을 구하려 새벽에 홀로 찾아온 프란츠 파농을 오직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천착한 철학이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중력을 없애버리려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러한 모습은 자유의 추구의 이면엔 이기심이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때문에 이 소설의 개인은 그런 개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이 페테르와 미라가 자식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이유다. 또한 마야와 아난의 관계가 소설이 마지막에서 강조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여기의 개인은 책임을 기반으로 한다. 책임이란 내 것을 내려놓고 타자를 떠맡는 모습이다. 페테르가 이제 막 아버지가 된 다비드 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그들의 가족과 마야와 아난의 관계가 마을 사람들이 이루는 집단 보다 훨씬 더 강했던 것 역시 책임이 반석이 된 연대였기 때문이다.


 결국 '베어타운'은 우리들에게 '무엇이 진짜 연대인가?'를 묻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답하고 있다. 가장 강한 자를 위해 뭉치는 게 아니라 가장 약한 자를 위해 뭉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연대라고. 우리는 나만의 이익과 자유를 무리의 힘에 기생하여 타인에게 강요하고픈 유혹을 쉽게 받는다. 이렇게 하는 게 쉽고 덜 귀찮기 때문이다. 사랑은 힘들고 귀찮다. 내가 내려놓아야 할 이익과 자유가 많고 짊어져야 할 책임은 큰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말고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의 아픔 또한 내 아픔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를 통한 연대야 말로 진짜 연대라는 것을 '베어타운'은 강조한다. 눈 위의 난 곰 발자국이 아니라 새 발자국처럼 조용하게...


 지난 4월 27일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더 큰 공동체를 바라고 그것을 목전에 두고 있다. 다시금 연대의 모습에 대하여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다. 그 사유를 '베어타운'을 길잡이 삼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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