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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안받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럴 때면 궁금해진다. 언제나 곁에 휴대하고 있는 전화를 왜 안받을까? 물론 회의를 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외의 이유가 훨씬 더 많은 듯하다. 내가 경험한 일들을 적어본다.
1. 오늘 아침에
난 비발디의 ‘사계’를 가장 싫어한다. 왜? 같이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중 꼭 늦게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컬러링이 ‘사계’라서. 그가 늦는 이유는 아침잠이 많아서다. 내가 미리 전화를 해서 깨우면 되지만, 통화가 된 적은 별로 없다. 오늘이 그 하이라이트. 다섯시 십분부터 30분간 약 50여통을 걸었지만 비발디 음악만 열나게 듣다 말았다. 친구와 상의한 끝에 114로 전화를 해 “일산 사는 xxx"를 문의했다. 특이한 이름 덕분에 일산에 그런 이름이 딱 하나만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연락이 되었고, 그는 그때서야 일어났다. ”깜빡 잠들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전화를 왜 안받았냐고 물었다. ”벨소리가 작아서요...“
평소에도 전화를 잘 안받는 걸로 보아 벨소리가 정말 작나보다. 이제 집전화를 알았으니까 비발디의 ‘사계’를 오늘처럼 많이 듣는 일은 없겠지.
2. 내 친구
뭘 좀 물어 보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받는다. 오기가 생겨서 몇통 더 했지만, 그래도 안받는다. 원래 잘 전화가 안되는 친구라 그러려니 했는데, 알고보니 일부러 안받은 거였다. 해주기로 한 일이 펑크가 나는 바람에 전화상으로 잠적을 한 것. 다른 사람의 전화로 통화를 했더니 역시나 받는다. 난 마음 쓰지 말라고, 그리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40분간 설교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전날 술을 먹고나서 했던 행동들이 기억나지 않을 때, 관련자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무섭지 않겠는가. 전화를 안받아 버리긴 하지만, 그래도 난 메시지로 “무슨 일이예요?”라고 물으니 위의 친구처럼 사악하진 않다. ‘사악’이 아니라 ‘소심’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3. 술
다른 대학 회의에 참석한 뒤 낮술을 마셨다. 낮술은 원래 금방 취하는데다 독한 술을 엄청 퍼마셨으니 집에 가자마자 쓰러져 잔 건 당연했다. 저녁에 또 술약속이 있었기에 알람을 크게 틀어놨지만, 고량주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잠에서 깬 시각은 밤 10시쯤, 난 내 전화기를 보고 기절할 뻔했다. ‘부재중 전화 33통’
신뢰회복을 위해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밥을 샀고, 그 덕분에 사고를 친지 일년이 지난 지금은 무디스 등급 AAA를 회복했지만, 그때의 일은 아직도 내 가슴에 생채기로 남아있다. 하여간 술에 취해 잘 때면 난 어떤 소리에도 잠을 깨지 않는다.
4. 엄마
그래도 아는 사람 중 가장 전화를 안받는 분은 어머니다. 오늘도 드릴 말씀이 있어 십여차례 전화를 했지만, 절대로 받지 않는다. 언젠가는 당연히 안받을 줄 알았는데 어머님이 “여보세요!”라고 하는 바람에, 놀라서 끊은 적도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엄마 친구들은 어머님께 “전화가 안된다”고 아우성이다. 대체 어머님은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일까. 바로 큰 목소리 때문. 어머님은 소리의 강도를 잘 조절하지 못하는 편이라 가까운 거리에서 얘기를 하실 때도 큰 목소리를 내신다. 언젠가는 50미터 밖에 있는 택시를 불러세운 적도 있는데, 급정거를 하고나서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택시기사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친구분들 중 어머님이 가장 목소리가 작으시단다. 그러니 제 아무리 벨소리가 크다한들 엄마가 전화온 걸 알아채실 리가 있겠는가. 아침잠과 술, 사고와 더불어 큰 목소리도 전화를 안받는 큰 이유다.
5. 기타
전화가 잘 안되는 또다른 친구, 그는 집에 있을 때면 늘 진동 모드로 해놓는 탓에 전화온 걸 모른단다. 그의 말이다. “전화도 잘 안오는데 뭘”
하지만 전화가 잘 안되는데 누가 전화를 하겠는가. 전화가 안올수록 전화기를 가까이 하자. 전화 횟수는 결코 인기의 척도가 아니며, 전화가 안온다고 낙담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