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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참고되는 책들을 보면서 읽었기에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걸린만큼 얻은 것은 많다. 그만큼 의미있는 책이 분명하다.

 

먼저 이 책의 계보를 찾아보자. 수많은 아감벤의 저술 중에서 이 책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어디일까? 이 책 <벌거벗음>은 아감벤의 중요한 사유 <호모 사케르>의 연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호모 사케르>를 필두로 하여, <예외 상태>등 다른 저작을 거쳐 이제 <벌거벗음>에 이르고 있다.

 

 

1. 동시대인

 

 

이 책의 저자를 둘러싼 논의를 추적하다 보면, 라캉, 지젝, 그리고 알랭 바디우가 보인다. 마침 그런 논의에 관심이 있던 차에, 이 책은 종으로 횡으로 연결이 되어 나의 독서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 있다.  ‘동시대인이란 개념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어떤 경우든 텍스트들과 동시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번 세미나에서 검토하는 텍스트나 작가들과 반드시 동시대인이 되어야 한다.> (22)

 

롤랑 바르트: 동시대성이란 반시대적이다.

 

니체: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교양을 내가 여기서 시대의 폐혜로, 질병과 결함으로 이해하려하기 때문이다.(23)

 

진정으로 동시대적인 사람, 그의 시대에 진정 속해 있는 사람은 시대와 일치하지도,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의미에서 비시대적이다. (23)

 

문제는 이런 동시대적이란 말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반시대적이며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의 시대를 잘 보고 파악할 수 있기에 그렇다.(23)

 

동시대성은 한 사람이 그의 시대와 갖는 독특한 관계이다. 즉 동시대성은 시대에 들러 붙어 있지만 동시에 시대와 거리를 둔다. (23- 24)

 

특정시대에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24)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동시대인이란 개념이 대략 그러하다.

그렇게 이 책에서 동시대인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니, 전에 읽었던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조금 자세하게 이해하며 다시 읽을 수 있었으니, 이 책을 읽은 유익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장이 바로 바울, 우리 시대의 동시대인이다.

 

2. 비잠재성과 무위

 

이 책 5,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라는 장은 매우 흥미로는 부분이다,

 

<잠재성은 어떤 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척도이다.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을 가능성을 유지하는 능력인데, 이것이 인간 행동의 등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불꽃은 불타는 것 밖에 못하며, 인간 이외의 생물은 스스로의 고유한 잠재성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생물학적인 소명에 각인된 단순한 행동만을 할 수 있다. 반면 인간은 고유한 비잠재성의 역량을 가진 동물이다.> (75)

 

그러나 이런 비잠재성을 아감벤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 다음의 발언에 있다.

 

<권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주로 인간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한다. >

 

<비잠재성으로부터의 소외만큼 우리를 빈곤케 하고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은 여전히 저항할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스스로의 비잠재성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 저항 능력을 상실한다.> (76-77)

 

그래서 이런 아감벤의 사유는 결국 호모 사케르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아감벤이 말하고 있는 잠재성무위를 역자는 아감벤 사유의 핵심’(187)이라 지칭하니, 내가 읽기는 제대로 읽은듯 하다.

 

3. 벌거벗음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흥미를 가지고 읽은 부분은 제 7벌거벗음이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차지하고 있는 분량도 제일 많다. 전체 180여 쪽에서 이 부분이 50여쪽이 되니 말이다.

 

벌거벗음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벌거벗음의 개념은 무엇인가?

옷은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동물과 구분짓게 해주는 핵심장치이다. 또한 옷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부족함, 결여의 상징이다.

따라서 에덴에서의 삶은 벌거벗었지만 거기에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범죄 이후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벌거벗음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옷은 아감벤이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부족한 것, 결여된 것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에게 있어서 벌거벗음은 단지 그러한 정도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다. 벌거벗음은 결국 주권 권력에 예속된 벌거벗은 생명- 삶과 연결되어 있다. (184)

 

벌거벗음은 신학적 사유로부터 시작되어 결국은 주권 권력과의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으로 귀착이 된다. 그렇게 아감벤은 그의 호모 사케르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책이란 책 그 자체에서 끝이 나는 것이라면 무언가 부족한 책이다. 그 책을 읽고 그 곳을 기점으로 다른 넓은 곳으로, 혹은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시작점, 남상(濫觴)이 되어야 책다운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바로 이 책이 그러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호모 사케르>에 대해 천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으며, 또한 이 책에 언급된 카프카 등등 나의 시선을 돌려 더 깊고 넓은 세계로 향하게 되었으니, 이 책의 고마움은 또한 거기에도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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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홍의 황금시대 -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
추이칭 지음, 정영선 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그래도 사랑받는다면, 황금시대>

 

제목이 주는 시사점, 하나

 

먼저, 제목이 샤오홍의 황금시대라는 말을 염두에 두자.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녀의 생애 속에서 황금시대로 분류할 수 있는 시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상하다. 모두다 힘들고, 어렵고 보는 사람들마저 안타깝게 생각하게 만들고, 어찌 위태위태하다며 걱정할 만큼의 인생을 살았는데, 그 인생이 황금시대라니?

저자는 여기에서 한 인생의 삶을 결코 우리 평범한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흔히 평안하고, 손쉽게 살아가는 인생을 그리고 남들 보기에 부럽게만 보이는 시절을 황금시대라 부르지만, 그녀의 인생을 결코 그런 안목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녀의 인생을 거꾸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인생 중 어느 시절이 황금시대였을까? 길지 않은 생애 중에서 특별히 어느 시절을 황금시대라 꼽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녀의 인생중 어느 한부분만을 꼽아 그 시절만 황금시대라 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매 순간이 모두다 황금시대였다. 다른 사람들 - 설령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이 원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매순간 살았기에 그녀의 인생은 매순간이 모두다 황금시대인 것이다.

 

왜일까? 그녀가 자기만의 인생을 살았기에 그렇다. 그녀는 그런 자기만의 인생을 고집했다. 아무리 다른 단어를 찾으려 해도 고집이라는 단어 밖에 달리 다른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고집이라 표현한 의미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판단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그 저변에는 고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고집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사랑에 관한 고집이다.

애정 결핍으로 인한 상실감을 메꾸기 위해 그는 사랑을 원했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그녀는 원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았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래서 그녀는 사랑 받았기에, 그녀의 인생은 황금시대였다.

 

제목이 주는 시사점,

 

그녀에게 사랑을 준 사람은 이 책에 소개된 사람만 해도 네 명이 된다. 샤오쥔, 두안무, 뤼빈지, 그리고 본의 아닌 약혼자 왕언지아.

 

그런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이 책은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라는 광고 카피를 책의 표지에 싣고 있다. 실상 이것이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사랑을 찾아 헤맨 한 여인의 기록이다. 그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난 기록이 바로 그녀의 삶인데, 그녀가 찾아낸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녀는 생을 마감하면서, 그 사랑을 찾았고, 그 사랑에 만족하고 눈을 감았을까?

 

병상에 누워있는 샤오홍에게 두안무는 드문드문 나타난다. 입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때문이다. 그러나 샤오홍은 그런 두안무에게 마냥 섭섭함을 느낀다.

 

<뤄빈지는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갔다. 두안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샤오홍은 혼자서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걸어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사랑인지 사랑이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서로가 상대방에게 따뜻한 위로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준다면 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가.’>(265)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시간일망정 곁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과연 샤오홍이 꿈꿨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샤오홍이 가지고 싶었던 사랑, 받고 싶었던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은 그런 의문을 남겨둔 채, 끝이 난다.

 

그녀의 삶은 뤄빈지의 회상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고, 그녀가 얼마나 힘겨운 삶을 견뎌냈는지, 하늘은 왜 그녀에게 행복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270)

 

결론하여, 사랑은 힘든 것일까? 사랑을 주고 받고, 겸하여 같이 있는 사랑, 영원한 사랑은 얻기 어려운 것일까? 그러한 사랑을 찾아 다닌 한 여인의 생애를 읽으면서, 가슴에 남는 것은? 슬픔이다.

 

기타, 몇가지

 

이 책의 서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짚을 게 있다.

첫 번째는 기록 면에서, 작가의 전지적 시점에서 기록하는 것은 나무랄 수 없지만, 너무 과하게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독자로서 따라가기 어렵다.

 

예컨대, 그의 두 번째 남자, 샤오쥔은 이 책의 서술 시점에 의하면 77쪽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등장하는 모습도 샤오홍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일단 독립적으로 등장하고, 그 다음에 그의 인생에 샤오홍이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틈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샤오홍의 인생에 샤오쥔이 개입하는데, 맨처음에는 샤오쥔의 인생에 샤오홍이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독자들에게는 77쪽 이후에나 같이 등장하는 것이 이야기의 전개상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 책에서 샤오쥔은 그 전에 이미 등장한다.

 

<장슈커는 1936년 친황다오에서 배를 탔다. 화물칸에 숨어서 상하이로 밀항 한 후 샤오쥔을 찾았다. 샤오쥔은 그가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61)

 

독자로서는 (그 시점에서) 알지 못하는 인물인 샤오쥔이 이때 벌써 등장하는 셈이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 사람이 누구지? 하는 생각에 잠시 소설의 맥을 놓치게 된다. 그런 경우가 뒤에서 몇 번 더 나타난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타나서 - 독자에게는 이름만 언급된 채로 - 샤오홍의 삶에 관련을 하고 난 다음에, 그가 누구인가 하는 설명은 뒤에 나타나니, 독자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화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이 책의 화자는 제 3, 그러니 작가인 셈이다. 그래서 작가의 전지적 관점에서 소설을 끌어가는 것이 이상할게 없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 우리라는 화자가 등장한다. 165쪽과 175쪽이다.

 

<두안무가 게으른 사람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165)

<여기서 우리가 잊어선 안되는 것이 샤오홍은 이 때 임산부였다는 사실이다.>(175)

 

이 때의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화자의 변동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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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우의 집>을 읽고

 


심봤다~”라는 구호를 아시는지?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했을 때에 그것을 발견했다고 외치는 감탄, 신호의 말이다.

이 책을 얼마쯤 읽었을까?

무심히 첫 페이지를 열고 심드렁하게 읽어가던 나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215쪽이다.

순분의 혼잣말, “그 죄를 다.......어떻게 받으려고....”를 읽었을 때다. 

나의 가슴에 짜릿한 그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페이지마다, 소설속의 상황과 또 등장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는 비수가 되어, 한번은 찔림으로 또 한 번은 울림이 되어, 번갈아가며 나를 휩싸기 시작하였다. 


, 이거다! 소설은 이런 맛에 읽는 것!

저절로, “심봤다!‘라는 울림이 내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제야, 내가 이 책을 무심코 펼쳐 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심코 펴들었다는 것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우의 집? 인형? 무슨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아니면 혹시 중국의 어느 시대엔가, 임금의 무덤에 같이 묻었다는 흙인형! 


그렇게 무심히 읽어가던 나는 215쪽에 이르기까지. 그저 원(안원)이라는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살이, 간난신고(艱難辛苦)한 세태를 그려내는 줄 알았다. 또 하나의 성장소설? 그래도 참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구나. 그래서 이 책의 결말은 그 원이네 가족이 조금 형편이 나아져 삼벌레 고개 여기가 딱 중간이지 싶은 마을, 순분네 셋집에서 벗어나 어딘가 조금은 형편이 좋은 곳으로 옮겨가는 작별의 장면을 기대하며 읽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트릭이었다. 그 트릭에 나는 완전히 속았다. 아기자기하게 봄의 악장을 연주하던 이 책은 어디쯤 갑자기 그 조가 바뀌더니, 광란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여름으로,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눈보라를 동반한 혹독한 추위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니, 그 변화가 실로 무쌍하였다. 그 즈음쯤 변화는 되돌이표를 반복하며 끝이 났다. 그러니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 이러면 안되는데....안되는데......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초반에는 아지자기한 아이들 소꿉놀이같은 묘사에, 또한 등장인물들을 이야기의 요소요소마다 배치해 놓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플롯을 구사하는 솜씨에 경탄하고, 이어서는 작가가 그 속에 숨겨놓은 그 무시무시한 이빨에 경악하는 재미 - 이런 것도 재미라 표현해도 되는지? -에 빨려들어가, 두 시간을 몰아지경에서 지냈으니, 참 작가의 힘은 세다, 놀랍도록 세다. 이것이 소설의 힘이런가? 무릇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일까? 


먼저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힘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인물 배치. 보험아줌마(성계희)는 왜 등장시켰을까? 운문원의 임보살 - 온갖 신앙을 잡탕으로 섞어 기복화하는(59) - 은 왜 등장시켰을까? 


먼저, 성계희, 보험여자다. 물론 이 여자의 역할은 다양하지만, 그로 인하여 보험에 대한 언급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데, 결국은 이런 말도 하기에 이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드는 보험은 왜 없느냐...> (269) 


말인즉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질병, 죽음, 사고 등등에 대비하는 보험은 존재하는데, 왜 이렇게 간첩사건에 연루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처지를 대비하는 보험은 없는지, 한탄하는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 중 하나이다. 보험 여자, 성계희의 존재가 이런 말로 시대를 묘사하는 역할도 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 놀랍다 


다음, 임보살은? 그는 은철이가 사고를 당한 후에 순분이 의지할 도피처로 작동을 한다. 그런데 그 도피처는 과연 안전한 곳인가?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 그 보살님이 숱해 고쳤어. 굿 힘으로 우리 은철이, 멀쩡하게 다시 걸을 수도 있잖아, 새댁?” (207) 


그렇게 순분은 임보살을 의지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굿의 효험으로 깨진 무릎이 매끈한 도자기처럼 회복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12)



이것은 순분이 새사람으로 바뀌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남의 험담을 즐겨하던 순분은, 이제 남의 험담을 듣고도 "이상하리만큼 아무 관심도 생기지 않“(215)게 된 것이다.


그 대신 이런 발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 죄를 다....어떻게 받으려고..” (215) 


이렇게 임보살은 순분을 쥐락펴락 하면서 그를 옭아매는 장치로 출연한다. 결국은 그 굴레를 떨치고 나오는 것으로, 순분은 거듭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순분이라고 생각한다. 초반에 주인공은 순분네 집에 세들어 사는 전직 교사 새댁이었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주인공은 순분으로 바뀐다. 


이유는? 순분이 비로소 세상이 어찌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임보살을 배치하여 순분네를 옭아매었다가 풀려나게 한 것은 결국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다가, 이제 진정한 눈을 떠 다르게 보기 시작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 즉 그렇게 눈을 뜬 사람이 주인공 되는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순분의 변화는 이렇게 실현되고 있다.

<순분은 김밥 하나를 집어들고......예전처럼 식구가 몇인데 누구 코에 붙이라고 이런 알량한 것을 가져왔냐는 둥, 필체가 활달하면 뭐할 것이냐고 손이 이렇게 잘 생겨서 잘 살기는 틀렸다는 둥 하는 험담은 일절 하지 않았다.>(245) 


그리고 원의 집안에 불어닥친 피눈물나는 사건 가운데에서, 동네 사람들은 모두다 원이네를 핍박해도, 순분만은 감싸고 보살피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깨달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등장 인물들 하나 하나는 이 소설의 곳곳마다 이야기를 요소요소마다 변곡점을 찍어내는 인물들로 만들어간다 


, 삼벌레 고개 중턱 소년들의 사소한 행동인 높이의 모험넓이의 모험이 서두에 언급된 이유는? 처음에는 그저 아이들의 철없는 놀이를 소개하려는 추억거리의 소개쯤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뒤의 사건 하나를 꺼내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장치를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듯이, 무심한 듯 배치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금철이가 은철을 끼고 개울을 건너뛰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데, 없어서는 안될 전주곡인 셈이다. 그 놀이가 없었으면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요소요소마다 언급된 것들은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은 이야기를 완성하는 하나씩의 벽돌 노릇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다. 


은철이와 원이가 하던 스파이 놀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화자의 입을 빌어 독자들에게 해 줄 말을 두 아이의 스파이 놀이로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스파이 놀이는 결국 원의 아버지, 안덕규씨의 간첩 사건으로 이어진다 


<스파이는 비밀을 알아내는 간첩이야.

간첩? 간첩은 나쁜 사람이야. 신고해야 돼

간첩 중에는 나쁜 간첩이 있고 좋은 간첩이 있어. 스파이는 좋은 간첩이야.> (28)


두 아이 사이에 오고간 이런 말들이 뒤에 등장하는 간첩사건을 예리하게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소설가의 예리한 표현력, 하나만 짚고 가자.


<원도 산에서 먹는 김밥의 맛을 잘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신발 밑창에 닿는 돌의 딱딱한 감촉과 가파른 경사면을 오를 때 종아리에 알이 배는 뻐근한 쾌감, 잠깐의 휴식 동안 흥건히 고였던 땀이 산바람에 식으면서 돋는 작은 소름의 맛까지 죄다 알고 있었다.>(248) 


종아리에 알이 배는 뻐근함이라니? 땀이 식으면서 돋는 소름? 이 정도의 표현이라면 정말 소름이 돋는 표현이 아닌가 


또 원이 생각하는 사태. 자기 집안에 일어난 사태, 그 사태는 원이 언니인 영의 교과서에서 보았다는 산사태와 눈사태를 연결시켜 그 사태가 그 어린 것에게 눈사태만큼이나 산사태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262)


그런 문장들이 다 모여 이 소설을 이루고 있으니, 이 소설은 정말 한군데도 허투루 된 구석이 없다. 재미, 문장, 그리고 거기에서 뽑아내는 의미, 그리고 인생에서 지켜야 할 깨알 같은 도덕 등이 골고루 뭉쳐있는 맛있는 요리같은 소설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작중의 이런 대목으로 이 소설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리고 (새댁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원도 그 옆에 앉아 같이 울었다.>(103) 


어머니인 새댁이 울 때에 같이 옆에서 울어주는 딸 원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렇게 여성은 어릴지라도 남의 아픔에,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한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이 대목으로 이 소설의 끝이 끝이 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그렇게 끝이 난다면? 우는 것으로 끝나면, 너무 아리다, 가슴이. 해서 몇 문장을 더 잇고 싶다.

<저녁 비는 거리에 어두운 막을 씌우며 가늘고 줄기차게 내렸다. 한참 만에 새댁이 코 막힌 소리로 말했다.

그만 울자, 원아

, 어머니.”

비를 좀 맞아도 괜찮겠지?”

, 어머니.”

그럼 우산은 사지 말고.”> (104) 


그렇게 두 모녀는 비 뿌리는 저녁 우산도 없이 길을 뚫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소설가의 바람이 아니다. 작가는 매몰차게 나의 바람을 물리친다. 그렇다면? 소설은 그리 아니 끝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라도, ‘응 그것은 완전 소설이야, 현실은 그렇게 끝나, 봐, 아름답지 않아? 모녀가 비를 맞으며 집에 돌아갔대, 좋지?’ 라고 끝이 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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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나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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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저자의 책 읽기와 글 쓰기

 

마냥 부러웠다. 저자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성이. 그리고 그 정리되어 나온 내용들이. 더군다나 저자의 약력 및 하는 일을 살펴보니, 더더욱 부러워졌다. 책 읽는 일, 그게 그의 일이니 무슨 말을 더 할까? 나는 그저 부러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내가 마치 그가 된 것처럼, 그가 책을 앞에 두고 읽는 것처럼 해보자, 하면서 읽어보자, 했다.

 

저자가 읽었다고 하면서 이 책을 통해 소개한 내용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다. 아주 주관적인 분류다. 내가 읽은 책 그리고 내가 읽지 않은 책, 이렇게 두 종류다.

 

내가 읽은 책들도 상당수 있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언급된 책은 읽지 않았지만 소개된 책의 저자가 쓴 다른 책을 읽은 경우도 있어, 반가웠다. 예컨대 에쿠니 가오리 말이다. 그가 쓴 책, 소개된 책은 <한낮인데 어두운 밤>인데, 나는 그것은 읽지 못했고, 대신 그의 다른 소설 <냉정과 열장 사이>를 읽었다, 그리고 영화로도 보았다. 그러니 그 책 소개 부분에서 나는 네 가지를 동시에 한 셈이 되었다. 에쿠니 가오리를 상기하게 되었고, 그의 책 <한낮인데 어두운 밤>을 저자의 뒤를 따라가며 저자의 감성을 느꼈으며, 그의 다른 책 <냉정과 열정 사이>를 다시 복기하였고, 또 그 영화를 떠올렸으니, 참으로 책 읽는 일이 이처럼 신기하다. 책을 앞에 두고, 그 책이 열어준 생각의 통로를 통하여 여기 저기 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영화 말이 나왔으니, 영화를 통해 소개된 작품에 새롭게 접근하게 된 경우도 있다.

<인생의 베일>, 서머셋 모옴의 작품이다. 그 책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중에, 저자는 그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내가 책을 읽다가 바로 거기에서 멈췄다. 내가 서머셋 모옴의 작품이 원작인지도 모르고 본 영화. <인생의 베일>을 영화화 하여 내건 제목 <페인티드 베일>. 저자가 친절하게 영화의 제목까지 알려주어서, 그 이름이 눈에 뜨였다. 바로 내가 본 영화였다. 그리고 보니 그 내용이 선연히 떠올랐다. 나오미 왓츠의 모습, 그리고 에드워드 노튼. 저자는 그들의 내면 연기가 일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내게는 아픈 사랑이어서 아프게 보았던 영화, 그 영화가 책을 읽음과 동시에 떠올랐다. 그렇게, 이 책이 아니었으면 서머셋 모옴의 작품 하나가 나에게 아예 나타나지 않았을 것인데, 그저 평범한 영화로만 저장되고 말았을 것을. 아니 애시당초 서머셋 모옴라는 이름은 거기 영화에서 눈치채지 못했으니, 이 좋은 작품 하나가 다른 구석에서 따로 자리 잡고 있었을텐데, 이 책 덕분에 제자리를 찾게 된 것도, 이 책을 읽은 기쁨 중의 하나이다.

 

물론 저자가 소개한 책 중에서 나의 촉수에 잡히지 않은 책들 또한 다수 있다. 그러기에 안타깝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과 그 작품이 영화화된 다른 것들 중 내가 미처 읽지 못했고, 보지 못한 것들은, 그 느끼는 감흥이 저자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런 것쯤은 나중에 내가 다시 그 작품을 읽고, 또 영화까지 보게 된다면, 곧 따라잡을 수 있겠지?

 

그런데 저자는 책을 이야기하면서 중간 제목을 이렇게 붙여 놓았다. <나를 생각하게 하는 당신>, <내게 영감을 주는 당신>, <나를 말하게 하는 당신>, <내게 영원히 기억될 당신>, <나를 달뜨게 하는 당신>.

 

여기에서 당신은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 ‘당신이니 인칭대명사, 그러면 저자가 읽은 책의 저자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책을 의인화하여 당신이라 칭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이 누구일까를 추리해 보았다. 누구인가를 알면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더 분명해질 것이니, 저자의 책 쓴 의도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독자의 자세가 바로 이것이라, 싶었다.

 

<오늘 나와 함께 동행한 주인공은 ....>(13)

<집 밖을 여행하지 않아도,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여인이 여기 있다.> (17)

 

여기에서 나의 의문이 풀렸다. 저자가 말하는 당신은 책도 아니고 책을 쓴 소설의 저자도 아니고, 바로 작품 속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았다저자는 그렇게 저자가 만난 작품 속의 주인공을 당신이라 칭하며, 독자인 우리에게 그 당신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건네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저자 자신을 생각나게하며, 저자에게 영감을 주기도하며, 저자를 말하게하기도 하며, 저자에게 영원히 기억되며, 저자를 달뜨게만들었으니, 당신은 저자에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가. 그런 존재를 저자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그가 책을 대하는 기쁨이 그중 하나이다.

저자가 책을 읽으며 표현한 기쁨의 광경을 살펴보자.

 

<다시 읽으니,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익숙해서 좋았다.> (67)

<그녀의 소설에는 포기하지 않고 읽게 되는 묘한 분위기가 흘러넘친다.> (67)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지만 나이브한 무드에 취해 가오리상(저자)에게 편지까지 쓰고 싶어졌다.>(71)

 

또 작품을 대하는 저자의 결기를 보라, 이 정도면 저자 역시 '참 좋은 독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한번 읽고 나면 두 번 읽고 싶어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단순히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243)

 

그런 결기를 가지고 이 책을 썼으니, 저자의 글은 그냥 쓰기 위한, 책 내기 위한 글이 분명 아니다. 그래서 모쪼록, 나의 책읽기도 (혹은 글쓰기도) 저자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그저 부럽다, 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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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6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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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로 불리는 이현우가 쓴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세계문학이란 용어가 낯설지 않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보려고 하는 자에게 보인다던가? 그래서 로쟈에 힘입어서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기 시작했으니, 출발은 좋았다. 아니 출발부터 좋았다. 게다가 한겨레신문도 일조를 하였으니, 최재봉 기자가 세계문학이란 제목의 칼럼으로 이 책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가 미처 되지 못한 부분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주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며 읽었다.

 

최재봉 기자의 글은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로 완벽하다 할 수 있다. (관심이 있는 분은 다음을 참조하시라)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63599.html <[유레카] 세계문학 / 최재봉>

 

그 칼럼은 신문의 제한된 지면으로 인한 한계가 있지만, 이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데 가치가 있다.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독자인 우리에게는 <세계문학전집>이란 안경으로 세계문학을 접하게 되지만, 이 책을 통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 세계문학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야기의 진행을 돕기 위하여 먼저 세계문학이라는 말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여기서 말하는 세계문학이란 단일한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각각 이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서평가 로쟈(이현우)의 구분이 맘에 든다.

그는 세계문학을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한 바 있다.

첫째, 세계 각국의 문학을 한국문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의미, 해외문학’ ‘외국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

둘째,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에게 읽히는 문학으로서의 세계 명작 혹은 고전을 뜻하는 세계문학,

셋째, 개별 국가의 국민문학(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 곧 괴테가 정의한 세계문학’,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세계문학, 즉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문학,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문학이 있다. (12,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279 ~280 )

 

이에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세계문학전집>이란 책들이 어떻게 우리 앞에 왔는가에 대한 흥미있는 분석은 이현우의 책 268~277쪽을 참고하시라.

 

그래서, 우리가 <세계문학전집> 차원이 아닌 세계문학이란 개념을 접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는 괴테, 마르크스가 각각 말한 바가 있고, 더 나아가서 파스칼 카자노바의 이론을 통하여 점점 더 깊숙한 논의를 들어볼 수 있다. 최재봉의 정리를 빌려 말하자면, <특히 카자노바는 <세계문학공화국>(1999)이라는 책에서 세계문학 공간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같은 개념을 통해 불평등과 경쟁을 기반으로 삼는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괴테가 생각한 세계문학이 여러 민족문학들 사이의 평화적 교류와 소통, 연대라는 순진한 이상에 가까웠다면 카자노바 쪽이 한층 냉정한 현실에 가까운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카자노바 역시 유럽과 비유럽 사이에 불평등한 위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가령 비문자적 구술 문학과 같은 다른 형태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제시한 민족 알레고리개념은 시사적이다. 현대 서양문학이 낡은 형식이라며 폄하하는 알레고리가 제3세계 문학에서 개인의 이야기와 집단 경험을 아우르는 공통된 미적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제임슨의 관찰이다.>

 

그 정도로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리를 끝낸다면, 이제 2 4<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이란 글과, 35<디아스포라 여성서사와 세계/보편의 가능성>이란 글을 빠트리지 말고 꼭, 읽어볼 일이다.

 

보편적-평범한-인 독자들은 세계문학이 무엇이냐라는 문학이론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문학의 현실적인 모습에 관심이 갈 것이기 때문에, 세계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하다. 세계문학이 평범한 독자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구체적인 예가 바로 위에 언급한 두 글이다.

 

24, 조영일(동덕여대 강사)이 쓴 <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어떻게 취급하여 왔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해 놓고 있다. 여태까지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왠지 자신의 수준이 떨어져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금기’(301)가 있었는데, ‘일단 국내에서의 지속적인 인기와 국외에서의 높은 평가 때문’(303)에 재평가받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더하여 만일 하루키가 노벨상이라도 타게 된다면? 조영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21세기는 하루키의 세기가 될 것 같다.”

 

이글의 요점인즉, 하루키에 대해서 그간 과소평가해 왔다는 것이다. , 하루키가 단순히 서브컬처적 요소(292)를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이기 이전에 비평가이자 미국문학 전문가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308)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세계문학으로서의 하루키를 논하며, 우리 문학의 편향성을 나무라고 있는 점이 이글의 좋은(?) 점이다.

 

또한 35, 김경연의 <디아스포라 여성서사와 세계/보편의 가능성>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뜨겁게읽어낸 글이다. ‘뜨겁게라는 말은 가슴 벅차게 감격하며 읽었다는 말이다. 강경애의 소설 <소금>을 전에 접한 적이 있었지만, 김경연이 말하는 바와 같은 기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 글은 세계문학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의 아픈 곳과 여성의 질곡사를 폭로하는 글이다. 다무라 다이지로의 <메뚜기>, 문금분의 시 <지문에 대하여>와 송신도의 기록, 그리고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 허련순의 <누가 나비를 보았을까>, 강영숙의 <리나> , 그냥 지나쳤던 그들의 기록에 대한 미안함과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이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이글에서 주목했던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란 작가의 정체성이나 소재의 동일성이 아니라 이산 여성들의 편력을 추적하며 그들의 열망과 저항을 읽어내는 공감의 공동성에 지지된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란 이산 여성들을 단지 희생자로 연민하고 그들의 수난을 기록하는 서사가 아니라, 가부장적 근대 체제의 야만을 증언하는 서사이며 세계의 변혁을 독자들과 공모하려는 서사이다.> (501)

 

여기까지 읽다가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바로 이게 세계문학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이론보다도, 실제적으로 인생을 기록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기능으로서의 세계문학! 그래서, 나에게 누가 세계문학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려보라 한다면, 유수한 분들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계의 변혁을 독자들과 같이 하려는 문학작품이 '세계문학'이라고 말이다.

 

 

 

 

 

 

 

 

 

 

마저 그의 글을 읽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가 요청하는 다른 세계의 실현은 이제 전적으로 우리 몫으로 넘어왔는지 모른다.> (502)

 

그런데 왠일인지, 나는 그의 말, ‘넘어왔는지 모른다는 말이 넘어 왔다로 읽혔다. 그렇게 나는 이 책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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