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유산 - 역사와 과학을 꿰는 교차 상상력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획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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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에서 과거 유산과 첨단기술을 연결하여 엮은 책이다. 하지만 책에서 양자가 비중이 비등하진 않고 유산에 더 초점이 가 있다. 그리고 연결도 좀 매끄럽진 못한 편이다. 그럼에도 첨단지식과 과거역사문화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첫 장은 미술이다. 미술은 시점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회화가 평면인 만큼 동서양 모두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찾았다. 서양은 15세기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거울을 이용해 투시원근법을 개발했다. 이후 소실점을 그림에 한 개나 두 개, 세 개도 사용하며 과학적 접근을 한다. 동양은 이를 하늘로 올라가 극복했다. 부감법을 개발한 것이다. 

 한국은 조선시대 부감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리는 대상의 규모에 따라 높이를 달리 할 수 밖에 없었고 고공부감법, 고공경사부감법, 저공경사부감법, 평행사선부감법을 이용했다. 고공부감법은 하늘의 높이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궁궐의 장대함이나 많은 인원을 동원한 행사에 적합했다. 고공경사부감법은 시선을 약간 뒤로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경사각을 표현한다. 정산의 금강전도, 김홍도의 월야선유도가 이 방법을 사용했다. 저공경사부감법은 살짝 만 뒤로 올라간 것으로 규모가 작고 대상을 크게 그려도 되는 풍속화에 적합했다. 서당이나 단오풍정 등이 이 방법을 사용했고 공간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장점이 있다. 평행사선부감법은 고공경사부감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부감법의 최종판이다. 고공경사부감법을 취하되 건물만을 특이하게 정면에서 45도를 비틀어 그려 입체감을 드러낸다. 규장각도나 화성행궁도가 이 방법을 사용했으며 가까운 것을 오히려 작게 그리고 먼 것을 크게 그린다. 

 한국에는 평행사선부감법으로 제작한 대작으로 효명세자가 남긴 동궐도가 있다. 크기가 무려 576*273으로 창경궁과 창덕궁, 비원등 당시 궁궐의 전체를 남겼다. 워낙 대작이었기에 여러 화원이 나눠 그렸는데 그럼에도 하나의 시선으로 그림을 완성한 것이 대단하다.

 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도기와 석기, 자기로 구분한다. 기준은 온도인데 도기는 80-1100도, 석기는 1100-1250도, 자기는 1250도 이상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삼국시대 백제토기는 800-900도였고 통일신라의 토기는 900-1000도, 조선 백자는 1250도 내외로 부합한다. 도자기는 유약을 쓰는데 그 역사는 철분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분이 어느 정도 되느냐에 따라 색이 바뀌는데 흑색은 10%, 붉은 색은 5-10%다.  

 최초의 청자는 중국 한나라에서 1세기 쯤 탄생했다. 중국 항주 인근 절강성이 청자 집단 산지로 이후 1000년이 지나서야 고려에 들어왔다. 청자 생산의 핵심은 알맞은 태토를 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약, 세 번째는 불을 때는 기술이다. 고려 청자의 가마기술은 아마 10세기 경 중국 월주요지역에서 장인을 통해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는 가마 밑바닥에 뒤집어 놓은 듯이 동그란 모양으로 깔려있는 감발이란 것을 쓰는데 이는 보조역할을 한다. 감발을 사용하면 자기에 열을 고르게 전달해 발색이 좋다. 하지만 소수만 소성할 수 있기에 비용이 많이 들고 고급청자에만 쓴다. 

 백자와 청자는 태토가 매우 다르다. 청자는 논밭 1미터 정도 아래의 흙이 적합하고 강진과 부안의 것이 좋으며 양도 풍부하다. 하지만 백자는 돌을 부순 흙이 적합해 산 꼭대기에 태토가 있다. 여러 지역의 태토를 배합하기에 흙의 확보가 매우 어렵다. 유약은 재를 쓰는 것과 납을 쓰는 것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재를 쓰는데 납유약은 인체에 해롭기에 써도 주로 자기의 외부에만 쓴다. 납유약은 중국의 당삼채에 적합하다. 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각종 색상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는데 그래서 당삼채의 색이 총천연색을 띄게된다. 반면 재유약은 채색이 어렵다. 무슨 나무 재를 얼마나 섞느냐가 중요하다. 

 중국의 가마는 상당히 규모가 크다. 높고 길이도 긴데 반면 고려의 것은 높이도 낮고 길이도 짧다. 중국의 가마는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고려의 것은 애초 소량생산 용이었던 것이다. 고려의 것은 대량생산은 어려운 반면 가마가 작기에 온도의 조절이 좋고 소성과 냉각이 쉽고 빠르다. 때문에 색이 좋고 고급청자가 잘 나온다. 청자의 색은 역시 철과 관련하는데 유약의 철이 환원하면 푸른색으로 변화한다. 가마 안의 장작이 타면 탄소가 발생하는데 탄소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가 되어 날아간다. 이렇게 공기 중의 산소를 조절하여 산화환원을 조절해 색을 내는 것이다. 

 처음엔 아궁이에 소량의 장작을 넣고 문을 열어놓는다. 이러면 산소가 들어와 탄소와 결합하고 산소는 유약의 산화철과 결합하여 산화가 더욱 진행된다. 그러다 900도에 이르면 장작을 3-4배 넣고 문을 닫는다. 이러면 산소가 급격히 줄고 탄소가 늘어난다. 그리고 이 탄소가 유약의 산소를 빼앗아 유약을 환원시키는데 이려면서 푸른 색을 띄게 되는 것이다. 

 고려청자의 백미는 색과 더불어 상감이다. 하지만 상감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릇은 구우면 부피가 줄어드는데 청자는 15%, 백자는 20% 정도가 감소한다. 태토와 바른 유약의 열팽창계수가 같아야 같은 비중으로 줄어 균열이 없는데, 이를 맞추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대부분의 청자와 백자는 약간의 균열이 있다. 여기에 상감을 하면 태토와 유약, 그리고 백상감토, 흑상감토 4박자가 맞아야 한다. 고려청자는 중국 청자보다 색이 좋은데 이는 가마와 관련한다. 고려의 가마는 작아 빠른 냉각이 가능해 유약에 결정이 적다. 때문에 난반사가 적어 색이 잘 나는 것이다. 

 조선의 백자는 시기마다 사실 색이 조금 씩 다르다. 순백색으로 시작해 회백색, 백옥색, 청화백자로 이어지는데 가장 최고는 백옥색을 띤 18세기 백자다. 백자가 회백색을 띄는 시기는 나라 경제가 어려워 태토 확보가 어려웠던 시기다. 백자는 청자와 다르게 상감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데 이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초벌구이 한 백자는 표면이 입체이니 당연히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우며 매우 건조하므로 수분을 빠르게 흡수한다. 때문에 한붓으로 빠르게 그리지 않으면 먹이나 물감을 모두 먹어버린다. 여기에 재벌하면 크기가 더 작아지기에 애초에 그림을 그릴때 축소 될 것도 감안해야 한다. 

 김정호는 평생 지도를 제작했다. 그는 30대였던 1834년 청구도를 제작했고 1859년 동여도를 완성하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한다. 대동여지도는 동여도를 초고로 삼아 판각한 것이다. 김정호는 지도제작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지리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여 지도와 지지를 항상 같이 제작하였다. 지도에는 정보를 담는데 큰 제약이 따르기에 그는 지지를 같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대동여지도의 지지편이 대동지지다.

 대동지지는 32권은로 1권이 서울, 2-24권은 8도의 각 군현, 25도는 산수고, 26도는 변방고, 27-28권은 정리고, 29-32권은 방여총지다. 정리고는 각종 도로망이고 방여총지는 단군에서 고려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영역을 담은 것이다. 

 김정호에 대한 오해는 세간에 널리 펴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도를 평생 전국을 돌며 실측해서 만들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옥사설이다. 이는 과거 교과서에 이렇다할 근거없이 짧게만 실렸던 것이 널리 퍼진 것으로 아마도 내용이 극단적이어서 였을 것이다. 책의 저자는 이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실측이다. 아무리 공간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도라도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를 그냥 걸어서 지도로 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아파트단지는 단순하기로도 한데 경계가 복잡하고 산과 물이 접하고 고저가 있는 과거 조선의 군현은 어떨까. 물론 산 등 높은 곳으로 올라가 조망하는 방법도 있으나 전국을 이렇게 하기도 힘들고 막상 높은 곳은 시계가 나쁜 경우도 많다. 때문에 저자는 김정호가 실측이 아닌 방대한 자료를 얻어 이를 토대로 종합하여 지도를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기에 옥사설도 말이 안된다. 방대한 자료를 관으로부터 얻어 지도를 제작할 수 있던 자가 정부와 갈등관계이긴 어렵다. 저자는 사실상 김정호가 정부의 의뢰 혹은 관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정보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목판제작하였다. 목판은 약점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단색 표현으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필사지도와는 다르게 많은 정보를 넣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 동여도에는 지명이 1만 8천개인데 대동여지도에는 1만 2천개로 줄어든다. 김정호는 심사숙고하여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고 중요도를 기준으로 6천개를 떨군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에는 특이하게 산과 강등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도로망만은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대에도 직선도로가 매우 드문데 조선에 직선도로가 웬말일까. 여기엔 김정호의 의도가 담겨있다. 목판본은 언급한 것처럼 단색이기에 도로망마저 실제로 그리면 산맥 및 하천 등 다른 것과의 구분이 매우 어려워진다. 이에 김정호는 도로를 직선표기하고 거리를 알려주기 위해 눈금표기 하였다. 때문에 지도를 보는 사람은 군현간의 실제 거리를 매우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또한 김정호는 실제 도로가 연결되지 않은 군현 사이에도 도로를 그려넣었는데 이는 도로는 없더라도 각 군현간의 관계망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여러모로 머리를 많이 쓴 셈이다. 

 조선에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은 편지와 봉수, 필마가 있었다. 이중 가장 빠른 것은 봉수인데 속도가 시속 100km였다. 하지만 봉수는 매우 단순한 의도만 전달 할 수 있었는데 봉화가 5개여서 개수에 따라 정보가 달랐다. 하나면 평시이고 두 개면 국경에 접이 출몰, 세 개면 적의 침범, 네 개면 척의 침공, 다섯 개면 전투였다. 하지만 정보전달이 매우 단순하고 실수가 잦았으며 봉수꾼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필마에 더 의존했다.

 조선은 말을 통한 소식연결을 위해 전국에 역을 운영했다. 말은 시속이 60km로 빠르나 지구력이 약해 대충 30리 간격으로 역을 배치했다. 이로 인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15-20일이면 소식이 도달했고 실제 임진왜란때 선조는 3일 반만에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큰 규모의 역은 전국 41개 작은 역은 504개 였다. 찰방이라는 관리가 역의 총책임자였고 그 밑에 역리가 있었다. 큰 역에는 역리가 20-30명, 작은 역에는 2-3명 배치되었고 그 아래 역노비가 다수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암행어사가 동원하는 인원이 바로 이 역노비다. 1808년 전국 역에서 보유한 말의 수가 5380필에 달했다 .상당한 수인데 아마 전란이 일어나면 군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역에서 말을 사용할 권리를 증빙하는게 마패다. 마패는 세 가지 역할을 했는데 역에서 말을 빌리고 ,신분을 증명하고 , 공문서에 도장으로 쓰인 것이다. 10마패는 왕, 7마패는 대군, 6마패는 정2품이상, 5마패는 종2품 관리이고 그 아래는 1-5마패를 썼다. 마패는 나무나 철로 초기 제작했는데 부식을 막기 위해서 나중에는 구리 마패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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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역사 기행 - 한반도에서 시베리아까지, 5천 년 초원 문명을 걷다
강인욱 지음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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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4대 문명을 지금 사회의 시원으로 보지만 이는 농경사회, 특히 서구적 시각에 가깝다. 채집 및 유목은 농경보다 오래되었고, 특히 반건조지역인 초원은 화약의 발명으로 무력화되기 전까지 적은 인구수에도 인류문명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다. 많은 문화 및 기술의 전달 통로 역할을 하였고 단절된 농경지역을 교역로로 연결했으며 때론 막강한 군사력으로 농경제국을 허물고 세계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때문에 저자는 초원은 적어도 5대 문명쯤 취급받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 초원 문명중 농경사회에 삼켜지지 않고 이렇다할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보니 초원의 역사 역시 제대로 발굴되지 않는 측면이 상당하다. 

 농경문명을 계승한 지금의 국가들은 초원에 대해 두 가지 정도의 관점을 갖는다. 우선 대국들은 과거 초원에 당한 것을 생각하며 야만이나 이질적이고 공포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도 그들이 이룬 대제국을 이중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 한다. 그리고 주변부의 국가들은 초원을 웬지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고 싶어한다. 동아시아로 치자면 전자는 중국, 후자는 한국과 일본의 태도다. 하지만 둘다 옳지 못한 태도이며 기본적으로 초원이 농경국가와 꾸준히 교류하고 기술문화적으로 상호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우린 초원을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하지만 인구가 적은 만큼 그 지역은 인구부양력을 갖지 못한 매우 혹독한 지역이다.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혹독하고 길다. 초원은 이 짧은 여름에 자라난 풀에 의존한다. 식량이 없기에 유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효과적 가축 통제와 목초지로의 빠른 이동을 위해 식량수단이던 말을 이동수단으로 길들였다. 장성한 아들이 먼저 분가하여 새로운 목초지로 떠나기에 초원에선 마지막까지 남은 막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한다.

 말을 길들이는데는 3가지 중요한 마구가 필요했다. 우선 재갈이다. 재갈은 말의 이빨을 뽑아서 끼우거나 어금니를 갈아낸 후 끼우는 것으로 약간의 힘으로도 고삐를 당겨 말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재갈이 개발되고 나서야 말에 탄 인간이 안정적으로 말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안장이다. 말의 등뼈는 울퉁불퉁하여 등에 타면 탄 사람에게 상당한 부상과 불편한 감각을 준다. 때문에 안장을 개발해 등뼈를 덮고나서야 사람은 안정적으로 승마를 할 수 있게 디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병이 등장한다. 마지막은 금속제 등자다. 등자는 이전에 개발되었지만 금속제 등자는 3-4세기 고구려고 처음 개발했다. 금속제 등자로 중무장 기병이 등장한다. 말위에서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거나 말 자체를 무겁게 무장시키면 승마자가 안정적일 수 없었는데 금속제 등자의 등장으로 큰 훈련없이도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바로 이 금속제 등자의 발명으로 탄생한 것이다. 

 말을 어느정도 다룰 수 있게 되자 전차가 등장했다. 전차는 무기이면서 신과 인간을 잇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전차는 매우 비싼 무기였는데 바퀴살이 개발되고나서 더욱 활성하한다. 유명한 카데시전투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맞붙었는데 히타이트는 바퀴살을 개발해 전차를 경량화한 덕에 3명이 전차에 승선했다. 한명의 방어, 한명의 공격, 한명의 운전이다. 반면 이집트는 기존처럼 한명 공격방어, 한명 운전으로 크게 불리했다. 전차는 기원전 11세기가 되어서야 중국 상나라에 전파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에선 별로 쓰이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한반도와 만주에 큰 전쟁이 없던 중교중심의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과 산악지형이 많아 전차가 별로 쓸모가 없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초원 민족은 승마를 하기에 생식력이 낮았다. 승마는 위험한 것으로 격렬하게 오래 말을 타면 자연거세 확률이 높았다. 유목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여 보상하였고 생식과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전투에 집중해 무서운 전투력을 가진 전사로 거듭났다. 유목사회는 인구유지를 위해 생식력을 보존한 다른 사람들이 많은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입양시키는 방법과 전쟁포로를 집단에 유입시키는 방안을 썼다. 

 사슴은 초원에서 생활에 필수적인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에 매우 중요한 문화적 모티프가 된다. 사슴을 숭앙하는 풍습이 초원이 널리 분포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도 이어진다. 기원전 9-5세기 초원에는 사슴돌이 만들어진다. 이는 2미터 정도 크기로 자바이칼, 알타이, 몽골 등지에 분포한다. 전면을 사슴문양으로 채운 이 돌은 전체가 초원전사를 의미한다. 귀부분엔 그래서 귀걸이가 허리부분엔 허리띠와 칼 문양이 등장한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역동적인 형태의 사슴을 새긴 청동이나 목제 장식품을 애용했다. 그들이 그린 사슴은 종류만 10종 이상에 자세도 매우 자세하여 사슴에 대한 상당한 관찰과 관심을 보여준다. 한편 사슴문화는 한반도에도 펴졌는데 그래서 기원전 3-1세기 사슴문양 청동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사슴문화가 크기 않은 지역이다. 

 중국에선 초원 세력을 야만시하고 적대하지만 그들의 역사에 초원은 역시 깊이 자리한다. 중국은 초원세력인 원과 청, 요와 금을 겪었고, 몇몇 한족(?)왕조는 사실상 초원과의 연합세력이다. 우선 주나라를 들 수 있다. 주는 중원에서 서북방면으로 건너간 일파가 현지에서 주변 세력과 연합하여 힘을 키운 후 다시 중원으로 진출해 상을 멸하고 세운 나라다. 전국시대 조나라도 있다. 조나라의 무령왕은 인근 약소국인 중산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다. 중산국은 유목문화를 받아들여 강한 기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당하지 못한 것이다. 무령왕은 당시 중원인이 남여 모두 치마를 입던 것을 호복인 바지를 스스로 입고 명령하며 기병을 키웠다. 결국 이들은 중산국을 멸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다. 다음은 진이다. 진은 위치 자체가 중국 서북방면으로 애초에 중원과 거리가 멀다. 진은 오래된 국가인데 기원전 7세기에 묵공이 서융을 제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비로소 세력을 떨치게 된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특이한 양식으로 4세기 갑자그 등장해 200년간 유지된다.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고분이 매우 유사하다. 파지릭 고분은 무덤 주변에 둘레돌을 두르고 무덤 위로 돌을 쌓고 안에는나무 무덤방을 놓는다. 둘 다 유라시아에서 매우 드문 방식이다. 신라와 가야에는 후발주자이고 고구려 백제와 달리 북방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짐에도 북방 문화가 많이 나타난다. 신라의 천마도와 황금보검 가야에서 출토되는 철제무기나 마구등이 그러하다. 학계에서는 한때 이들 지역이 북방기마민족의 후예가 내려와 강하게 영향을 미쳐서 그렇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저자는 그런 인구이동의 흔적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소국인 이들에게 이런 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강한 힘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스스로가 북방과 대결하며 교류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고구려와 강한 문화적 정체성과 폐쇄적 농경문화의 백제에 비해 바다를 접해 개방적이고 오히려 교류가 원거리로 가능했던 이들 지역이 영향을 받기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로 추정한다.

 한국의 대표적 먹거리 문화인 불고기는 사실 농경과 유목문화의 결합품이다. 초원에선 샤슬릭이란 꼬치구이가 오래전 부터 유행인데 그들은 양고기를 꼬치에 끼워넣고 다니며 불에 쉽게 구워먹곤 했다. 이를 발전시킨게 고구려의 맥적이다. 맥적은 반농반목 국가인 고구려에서 콩류의 양념을 고기에 재워 꼬치 형태로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고기와 양념이 없는 고기는 아무래도 비린내가 나기 마련인데 맥적은 양념을 하여 이것을 잠재운 것이다. 맥적은 중국과 초원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고, 조선의 설하벽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산적과 너비아니로 이어졌다. 지금의 불고기는 콩과 고추장류 양념에 채소를 곁들이는 것으로 완벽한 초원과 농경의 융합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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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7-05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기병이 등장하자 전차도 등장했다’는 의미는 전차가 기병 이후에 나왔다는 의미인지요?
그렇다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전 전차가 먼저 나오고 한참 후 기병이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닷슈 2022-07-05 22:01   좋아요 1 | URL
아니요, 북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차 이후 기병입니다. 어느 정도 말을 쓸 수 있게 된다음 전차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좀 문제가 있네요. 고쳐야겠습니다.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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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의 책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초년 시절 본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었다. 지금 보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당시만 해도 간신히 읽고 잘 이해도 안갔었다. 전공이 경제학이었음에도 말이다. 책에서 유시민은 경쟁과 그를 위한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경제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소위 자유주의 계열의 부자의 경제학과 평등과 복지,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빈민의 경제학'을 나눠 제시하였다. 

 이번 '역사의 역사'도 그렇게 나눴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오직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입장과 주관적인 서술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물론 당연히 저자는 이 정도 생각은 해보았을 것이고 그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서술을 했을 것이다. 

 책 '역사의 역사'에서는 고대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진 시점부터 최근의 역사서술을 망라한다. 물론 중요한 역사서와 사람만이다. 처음으로 다룬 것은 당연히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투기디데서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만큼 역사를 저술했고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했다. 두 사람 모두 문자시대 초기의 사람으로 당시 대부분의 정보는 구술로 전해졌고 문자로 접한 것도 구술을 문자화한 것이었다. 많은 정보가 전달과정에서 즉시 사라졌고 살아남아도 전승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왜곡, 각색, 변형되었다. 이들은 이런 시대를 살았기에 상당히 지금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많은 역사서를 쓸수 밖에 없었지만 매우 의미있는 작업을 해내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당대의 문명이었던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문명에 대한 지리, 인정, 도시 ,민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내었다. 그리스 인임에도 이들 문명에 대해 불편부당하지 않았고 적절한 분량을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그래도 그의 성향은 딱딱한 사실 중심보다는 군데군데의 빈 이야기를 주관적으로 채워나가는 서사꾼이나 이야기꾼에 가까웠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정보의 진위와 가치를 비교적 꼼꼼하게 점검하였고 사실을 시간순으로 배치하며 신화와 전설을 최대한 배제하였다. 그래서 그의 역사서는 현대의 역사서와 비슷한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 여기에 주요사건들이 서로 몇년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서술하여 현대의 역사가들이 해당 사건의 연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시아의 역사가로는 역시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크고 작은 전쟁, 국가의 흥망, 다야한 사회 제도의 특성과 변화, 개인의 생애, 전설과 신화에서 한 왕조에 이르는 수천년 중국 사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중국은 기록을 중시한 나라로 종이가 없었음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었다. 사실을 중시한 사마천은 사기를 쓰며 무려 103종의 책을 참고 했다. 역시 죽간이 없었기에 최초의 사기는 죽간에 남았다. 본기 12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열전70권 총 130권이다. 본기는 황제나 그에 준하는 권력자의 행적과 업적을, 표는 중요한 역사적 서술을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서는 도덕, 음악, 군사, 천문, 치수 등 고대 중국 문화나 제도의 특징과 변화를,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왕과 제후를 비롯하여 황제까진 아니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친 권세가에 대해, 열전은 지식인, 정치인, 강도, 자객, 광대까지 독특한 개인의 생애를 다뤘다. 

 사마천의 이런 역사서술체계는 기전체라 불리며 19세기 후반까지 중국 문명권의 역사서술을 지배한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사마천의 사기도 약점은 많다. 우선 주변민족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비판한 공자의 춘추필법을 따라 부정확하고 단편적이며 편향적으로 서술한다. 여기에 기록된 사실이 빈약한 열전에서는 문학적 상상력도 많이 발휘한다. 물론 이 부분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슬람 세계엔 그 유명한 이븐 할둔이 있다. 그는 역사 서설을 썼는데 그의 특이한 점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7개의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서술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역사서설은 과학과 역사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인지 책 뒷부분에 언급하는 총균쇠 및 사피엔스와 닮았다. 이븐할둔은 뜬금없게도 역사서설 중반중반에 과도할 정도로 신에 대한 찬양을 하는데 유시민은 당시 종교적 압박이 강했던 이슬람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것을 파악한다. 

 유럽으로 돌아가 랑케가 등장한다. 그의 시대는 산업과 과학의 시대로 랑케는 많은 학문들이 전문화하고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태어나 자신의 전문분야에 전문역사학자로 일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보수적 성향으로 군주제를 옹호했기에 유럽의 여러 각종 문서와 왕실 도서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랑케는 과학기술문명은 진보하나 인간의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역사철학을 보였는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니 신학과 군주정이 옹호되었다. 랑케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큰 사고를 불러왔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역사가 객관적 학문이라는 생각을 불러와 많은 역사가들을 정치적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점도 있었다. 

 유시민은 맑스도 역사가로 본다. 그의 공산당 선언이 역사의 주체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있었던 노예, 농노, 노동자, 농민 등의 피지배계급을 사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만드는 주역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유물사관도 매우 이례적이다. 당시만 해도 물질적인 것 보다는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질서나 이성, 법칙에 대한 관심이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맑스는 물질이 먼저이고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나중이라는 유물론을 주장했다. 

 조선의 역사가도 언급된다. 우리의 역사가로 유시민은 박은식과 신채로 백낙준을 거론한다. 박은식은 조선망국과정을 정리한 한국통사와 이순신전, 안중근전을 남겼다. 박은식은 다소 옛 인물로 개명유학자이기에 한문이 가장 편해서인지 순한문체로 저술했다. 때문에 초기엔 보수적인 시각도 남아있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훗날 쓰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한다. 신채호는 고대사 검증에 주력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남겼는데 사실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다루고 싶었으나 무장투쟁운동에 주력하고 체포되고 옥사하게 되면서 단군부터 백제의 패망까지만을 다루게 되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주터전이 한반도로 국한된것이 아니라 만주나 요동까지였음을 밝혀냈다. 

 에드워드 카는 랑케와는 다르게 정확성은 역사가의 미덕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사실은 이야기로 남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다. 역사가가 그 사실을 남기고 다루어야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랑케는 객관적 역사 서술을 위해 문헌을 무척 중시했지만 사실 이 문헌조차 어떤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만을 주목해 기록으로 남긴 것에 불과하다. 크로체는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로고 선언했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평가하는 것이 된다. 역사가와 사실은 평등한 주고 받는 관계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반대로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기도 한다. 즉,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19세기까지 역사가들은 민족이나 가문, 왕조, 사회, 지역,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서술했다. 하지만 토인비가 등장하면서 역사는 문명단위로 승격된다. 토인비는 유럽은 역사가 모두 연결되어 대영제국을 제외한다면 개체로 연구할만한 국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슈팽글러의 영향을 받았는데 슈팽글러는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에서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한물간 천동설과 동격취급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역사도 중시하는 자신의 역사관을 지동설로 취급하고 스스로를 역사학의 코페르니쿠스로 칭하기도 했다. 토인비는 그의 관점을 받아들여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역사를 서술했다. 토인비는 20개가 넘는 당대 문명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였고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찾았다. 그는 인종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하였고 문명은 외부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정과 실패로 흥망성쇠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토인비가 말하는 도전은 다섯 가지로 척박한 땅이 주는 도전, 새로운 땅이 주는 도전,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침공),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사회의 진보는 이런 도전에 대해 소수의 창조적 천재에 의해 이뤄진다. 이들이 이런 도전을 창조적이고 성공적으로 다루면 비창조적 다수가 결국 이를 따르게 되고 사회는 성공한다. 이를 미메시스라고 한다. 하지만 창조적 소수자는 언젠간 그 창조력을 잃는다. 그러면 비창조적 다수는 기존의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것이 네메시스다. 

 창조적 소수자는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망하는데 일시적인 자아의 우상화, 일시적인 제도의 우상화, 일시적 기술의 우상화가 그것이다. 용어는 다르지만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새로운 도전에 적응못해 나타나는 문제다. 토인비의 패러다임에서는 세 집단이 있는데 창조적 소수자와 내적 프롤레타리아트,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다. 내적인 집단 내부의 노예, 농노, 천민, 노동자등 피지배 계급이며 외적은 문명 외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집단으로 야만인이다. 이 세 집단의 상호관계가 문명의 향배를 좌우한다. 

 최근엔 역사서술의 하나로 인류사가 등장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첫 등장에서 가장 최근을 다루는 인류사가 역사서술의 단위로 대두한 것이다. 인류사는 실제 과학과 역사를 전면 통합한다. 그래서 총균쇠나 하라리의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및 그외 여러 학자가 다루는 최근의 인류사 책을 보면 이것이 과학서적인지 인류학 서적인지 헷갈리는 이유다. 총균쇠를 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토인비와는 다르게 환경을 인류사에 주 원인으로 다뤘다. 인간의 차이 및 사회 문화와는 크게 무관하게 인류사는 환경이 좌우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륙마다 가축, 작물의 분포가 큰 차이를 보이고 확산과 이동의 속도가 대륙마다 지형, 기후에 의해 크게 다르며, 대륙마다 고립도가 다르고, 대륙마다 인구과 민족 분포가 다름을 제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4가지는 객관적 증명이 가능한 것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더 나아가 인류사는 사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생물학적 사건이라 말한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혁명인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일어났는데 다른 모든 혁명을 사실상 촉발한 첫번째 혁명인 인지혁명이 인간 뇌의 생물학적 변화로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과학혁명이 인류사의 마지막 혁명이 될 것으로 파악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에서 벗어나 호모 데우스의 길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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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6-28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방대한 내용을 기준점을 잡아 정리하는 능력 참 부럽습니다.

닷슈 2022-06-29 16: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꾸 정리만 하고 제 생각이 잘 안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2-06-29 18:38   좋아요 1 | URL
네엣? 닷슈님 생각이 안 들어가다니요ㅠㅠ 너무 잘 쓰시는데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시다니... 또 부러워하면서 배워갑니다^^
 
BTS와 철학하기 - 소유에서 존재로, 넘버원에서 온리원으로, 진리에서 일상으로
김광식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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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그룹 BTS가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전 세계 아미들이 큰 충격을 받을 만도 한데, 아직 그룹 해체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 군대라는 예상해 왔던 현실적 문제가 있으며, 서로가 새로운 성장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유 등 갑작스런 활동중단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많았다. 그리고 몇몇 구성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혼자 활동을 바로 시작하기도 했기에 활동 중단에 따른 사회적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큰 그룹이 될거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초창기엔 무척 작은 기획사의 그러 그런 그룹이었다. 2014년에 아는 초등학생이 BTS를 좋아한다기에 대체 그것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방탄소년단이라길래 난 박장대소하며 대체 왜 그런 애들을 좋아하냐고, 당시 인기 많던 인피니티 같은 그룹도 있지 않냐고 했었다. 그리고 조롱하며 그 그룹은 무대에 방탄조끼라도 입고 나오냐고 비아냥댔었다. 2018 평창올림픽 때 개막식과 폐회식에 많이 사용된 건 한국 가요였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무대에 섰던 것은 EXO였다. BTS는 그때를 거의 기점으로 세계적 그룹으로 치고 올라갔으니 하나의 분기점이었던 셈이다.

 하여튼 이 책은 독특하다. 세계적 인기 그룹의 노래 가사를 철학과 연결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책이 인상 깊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내가 BTS의 노래들을 잘 모르고, 뭣보다 철학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BTS가 워낙 유명하기에 그들의 노래를 여기저기서 제법 많이 듣기는 했는데 워낙 90년대 느린 노래들의 가사도 잘 듣지 못하는 편이라 그들의 빠른 노래 가사는 사실 전혀 듣지를 못한다. 그래도 이해한 바로 책의 철학 주제를 정리해본다면 문화와 자본주의, 다른 모든 사회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로서 자신의 자유, 그리고 완성을 위한 아픈 성장이라 할수 있을 것 같다. 

 주제가 이래서인지 책은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에서 철학적 핵심어들을 찾아내어 연결해나간다. 저자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은 선과 악, 자신의 문화적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연히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생각의 틀을 넘어야 한다. 이 시도가 방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 답을 강하게 찾고자 하는 욕망이 드는 청소년기와 20대에 사람들은 많이 방황한다. 자유롭기 위해 방황하고 그 방황이 자유를 위한 성장을 낳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한다. 존재는 있음이고 존재자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철학에서 존재론은 있는 것을 연구했기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는 있음에서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두 제거하니 결국 남는 것은 없기에 유와 무가 사실 같아짐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있음인 삶은 없음인 죽음과 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의식해야 하며 그를 통해 살아있음과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제대로 존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적 존재 방식을 실존이라고 한다.

 실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미리 마주보는 실존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렇게 죽음을 미리 체험하는 것은 삶과 존재의 방식을 바꾼다. 주어진 세계에서 사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심이나 목적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가며 본래적인 자유로운 삶은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산다는 것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소유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성취와 소유만 추구하면 정작 나의 삶은 사라지고 나의 존재도 사라진다. 소유할 것이 워낙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화한다. 

 에리히 프롬은 삶을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유지향의 삶과 존재지향의 삶이다. 소유지향의 삶은 삶은 성취, 소유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존재 지향의 삶은 삶은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프롬은 맑스가 사회구조가 변화하면 세상이 변화할 것으로 파악한데 반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프롬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인간의 성격과 성향도 함께 변화하해야 사회가 비로소 바뀐다고 보았다. 실제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이 바뀌지 않았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가 바뀌는데 있어 구조를 바꾸느냐 사람은 바꾸냐는 중요한 문제다. 조선왕조의 개창자 정도전은 왕이라는 변수가 심한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 왕을 철저히 견제하고 보좌하는 관료 중심의 구조를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관료인 양반이 세월이 지날수록 부패하는 모습을 보였고, 세종이나 정조처럼 신하에 의지 않고 개혁을 스스로 이루는 왕들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양자는 같이 가야하는게 아닌가 싶다. 

 책은 사람의 자유를 저해하는 또 다른 요소로 욕망을 꼽는다. 사실 이는 계속 언급하는 소유하는 삶, 실존하지 않는 삶과 관련한다. 욕망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대상에 대한 일반적 욕망과 욕망 자체에 대한 욕망이다. 전자는 직접적 욕망으로 생물로써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본래적이고 생득적인 것이지만 후자는 간접적이고 보다 사회문화적인 것이자 경쟁으로 인해 생겨나는 역시 생득적인 것이기도 한다. 이런 욕망은 매우 다양하지만 후자의 욕망일수록 늘 그것을 채워도 채워도 공허해진다. 결국 나만의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경쟁을 통해 얻는 것이기에 이기고 나면 부질없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만의 고유한 실제세계로 돌아가 온갖 상징의 가면을 벗고 다른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본능에 충실한 삶은 살아야 한다고 한다. 

 욕망과 관련해 라깡과 들뢰즈의 욕망도 언급된다. 라깡의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반면 들뢰즈가 언급하는 욕망은 생산적이고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라깡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는 욕망이나 들뢰즈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주체를 넘어선 무생물도 갖는 비인격적 욕망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생산하는 힘을 갖고 에너지기에 혁명적이다. 이것은 끝없이 떠돌고 유랑하기에 유목적이다. 라깡의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이 분명하나 들뢰지의 욕망은 그 대상이 비어있다. 끊임없이 새롭게 무한한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운동장에서 분열증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다른 욕망을 금지하는 영토화돤 보통의 욕망들의 선을 무너뜨린다. 무엇이든 욕망하게끔 부추기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러면서도 다른 욕망의 선을 마구잡이로 넘어서 돈이라는 거대한 욕망의 영토를 만들어 놓고서는 다른 욕망은 그곳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다. 사랑이나 감정, 해방등의 모든 욕망도 돈으로 종속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혁명성에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라는 주체, 가족, 자본주의라는 세 가지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기호가 만들어지고 생산 유통 소비되는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 하고 이 기호는 차이를 본질로 삼는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라는 가치가 중요한데 인기 있는 이미지나 브랜드들은 그만의 기호로써 가지는 가치가 있다. 때문에 그런것들을 소비함으로써 소비자는 차이라는 기호를 사게 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대개 남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성취나 소유로써 으스대는 이미지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나만의 개성이나 고유함이라는 욕망이 억압되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욕망이 이동함으로써 욕망의 미끄러짐 현상에 빠져있다고 보았다. 나라는 고유함을 차이라는 기호에서 찾으려하니 채워도 채워도 밑빠진 독처럼 공허함만 남게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처럼 나만의 고유함보다 차이라는 기호나 이미지를 욕망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시뮬라르크의 사회라 칭했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구별짓기나 시뮬라시옹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교환이나 대체불가능한 본래의 억압된 개성찾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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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폐증은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레인맨으로 유명하다. 워낙 자폐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가장 잘 보여준 사례지만 80년대 영화이니만큼 이젠 모르는 사람도 많다. 최근 자폐 관련 영화나 드라마는 템플 그랜딘을 주제로 한 영화와 드라마 굿닥터 정도가 떠오른다. 굿닥터는 한국판과 미국판 두 개가 있고 한국판은 주원이 미국판은 프레디 하이모머가 주연을 하여 시즌을 이어가고 있다.

 이 작품들은 자폐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 세상의 주목과 지원을 끌어내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등장하는 자폐인이 모두 서번트 신드롬을 갖고 있어 자폐아는 곧 천재이거나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폐아중 천재의 비중은 일반인중 천재의 비중보다 몇 배 높은 것은 사실이나 절대 다수의 자폐인에겐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절대 자폐인은 드러나는 특별한 재능없이 그져 자폐 증상만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폐를 다룬 책은 생각보다 많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는 2000년대 중반 실제 일본의 자폐인을 소재로 나온 만화다. 만화로 보기 편하며 15권까지 나왔으나 지금은 절판되어 중고가 아니면 구매가 어렵다. 십년 정도 전에 관심을 갖고 모두 보고 싶었는데 그 때에도 이미 돌아다니는 신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는 유명한 템플 그랜딘의 책이다. 그녀는 자폐이면서도 교수의 자리에 올랐고 미국에서 도축당하는 소의 심리를 최대한 안정시키는 방법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내일을 기다리는 아이는 민수라는 자폐 소년이 주변의 지원과 적절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렸고, 책 그래 엄마야는 한국의 냉혹한 현실에서 자폐아동을 둔 부모가 정부 사회와 싸워가며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나는 자폐아들을 둔 과학자입니다.는 최근의 논란이 되고 있는 자폐에 대한 관점을 다룬다. 자폐는 증상이나 장애로 취급되지만 요즘에는 자폐를 하나의 개성이자 특성으로 보고 오히려 진화상의 이점으로 보는 생각도 생겨났다. 이 책은 자폐의 여러 측면이 그와 부합됨을 보이는 책으로 강렬한 세계 이론을 주창한다. 이는 자폐인이 주변 감각에 매우 예민하여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오히려 둔감해보이고 세상 및 사람과 거리를 두려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과감각을 뇌가 제대로 소화해낼수 있고 조절할수 있는 쪽으로 진화가 이뤄진다면 자폐는 그것으로 향하는 중간과정정도로 느껴질수도 있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이런 자폐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룬 자폐의 역사다. 자폐라는 개념의 정립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자폐인이 어떤 대우를 받아왔고 그들의 권익이 어떻게 신장되었으며, 최근의 자폐연구 및 자폐의 정의에 대한 변화를 다룬다. 

 정확한 사례는 사실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자폐인은 인류 역사상 오랜 기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개념이나 진단조차 없었던 당시이지만 몇몇 특이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록이나 특성을 살펴보면 지금의 관점에서 그가 자폐인이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폐라는 개념이 자리 잡히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당시는 끔찍한 우생학의 시대였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17개주가 강제 불임술을 법제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당시 충격적이게도 정파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33년 버지니아에서는 1333명, 캘리포니아에선 8504명이 강제 불임시술을 당했다. 1942년 독일도 아닌 미국에선 미국정신의학저널에 정신장애 어린이의 안락사를 진지하게 옹호하는 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이정도였다. 미국정신의학의 수준도 낮았다. 당시의 정신과 의사들은 일반 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 정신병원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는게 고작이었다. 어떤 정신의학에 대한 전문성과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총체적으로 부재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것이 카너였다. 그는 당시 미의학계가 모든 환자를 증후군으로 분류하는 관행이 있음을 깨달았다. 당시 정신병동의 환자들은 구속복을 항싱 입는 것이 관례였는데 카너는 크리스마스에 근무하던 병원 환자들의 구속복을 벗겨낸다. 그리고 그래도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음을 입증함으로써 환자들이 구속복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마련한다. 카너의 최대 업적은 바로 자폐증을 최초로 명명하고 진단한 것이다. 자폐는 그리스어로 자기 자신을 뜻하는 auto에서 파생한 것으로 자폐는 autism이다. 카너는 자폐인들이 제각각 매우 다르나 공통의 두 가지 결정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극단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의 모든 것이 항상 동일한 상태에 있기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너의 이런 자폐에 대한 최초의 명몇과 진단에도 불구하고 자폐에 대한 의학계와 과학계 대중의 관심은 매우 적기만 했다. 자폐의 진단과 더불어 그 증상을 가진 사람의 수는 점차 늘어갔지만 그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게다가 이렇다할 근거도 없이 몇몇 정신의학자들은 자폐증의 원인으로 엄마를 지목하고 그것을 원인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엄마를 냉장고 엄마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개념을 널리 퍼뜨린 건 베텔하임이란 인물이다. 그는 자폐증을 부족한 엄마의 사랑으로 귀결시켰다. 그는 2차대전의 경험으로 인해 강제수용소와 자폐를 연결시켰고, 나치가 수용소 성인의 정신을 망가뜨렸던 엄마가 자녀의 정신을 망가뜨린 것으로 생각했다. 베텔하임은 다만 나치와 엄마의 직접적 비유가 너무나도 잔혹한 표현이었기에 냉장고 엄마란 좀더 온화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런 흐름속에 자폐의 최초 진단자인 카너마저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자폐가 어머니의 잘못이라고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폐가 선천적인 것이라는 최초의 통찰을 스스로 배신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진단과 비유는 역설적이게도 자폐증에 대한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게 된다. 1959년엔 자폐증을 유일 주제로 다룬 52편의 논문과 한 권의 책이 나왔고 네덜란드를 필두로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자폐증 진단이 시작되었다. 

 냉장고 엄마는 애초에 실패할수 밖에 없는 이론이었다. 우선 의사들의 연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자폐증의 타당한 이유가 후천적으로 의학 외부에 존재하는데 굳이 의학적 연구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폐아를 키우느라 엄청난 부담을 가진 엄마들 그리고 자녀를 수용기관에 보낸 부모에게 고통과 혼란을 부여했다. 자신의 탓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이론은 문제의 원인을 선천적인 것이 아닌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엄마에게서 찾음으로써 의미없는 치료를 하게 만들었다. 원인이 자녀의 선천적인 것임에도 의사들은 엄마를 겨냥한 치료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맞서 루스 설리번과 울버니 엄마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험적으로 이런 이론이 말도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열정과 조직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이들은 대항이론이 필요했으며 찾아낸 것이 1964년에 나타난 버나드 림랜드박사였다. 

 림랜드는 자폐증에 관하여 보고된 모든 증례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 이를 연구하여 자폐라는 장애의 전체적인 모습을 밝혀내려고 하였다. 2년간 증례만 230건을 모았고 그는 이를 모두 과학적으로 검토한 후 냉장고 엄마 이론이 허구임을 밝혀냈다. 우선 자폐 엄마들 대부분이 다른 자녀를 갖고 있었고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정상이었다. 냉장고 이론 처럼 엄마의 초기 정서적 학대가 결정적 자폐 발생 요인이라면 다른 형제에게서도 상당비율로 자폐가 발생했어야 맞다. 하지만 아니었다. 게다가 냉장고 엄마 이론은 엄마에 의한 아동의 초기의 정신외상에 주목했지만 많은 자폐 발현 양상이 그리 초기에만 집중되지 않았다. 림랜드는 이를 바탕으로 베텔하임을 공격하였다. 사실 베텔하임의 주장은 이렇다할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했다. 베텔하임은 대중매체에는 자폐에 대한 글을 자주 기고하면서도 정작 장애학교에서 수행한 연구는 단 한건도 동료심사를 요구하는 저널에 게재하지 못했다. 

 이런 흐름속에서 1965년 전미자폐어린이협회가 탄생했다. 그동안 자폐아동은 방치되어 왔다. 우생학이 판치던 야만의 시대에는 수용소나 시설에 수용되었고, 그렇게 하는 것을 누구나 부모에게 권장했다. 수용소나 시설에 수용되지 않더라도 돌봄이나 교육의 손길은 없었다. 당시의 미국법은 문제의 소지가 될만한 학생을 거부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매우 드문경우가 아니람녀 대부분의 자폐아는 원해도 학교입학이 거부되었다. 

 협회가 설립된 후 많은 자폐 부모들은 교육받을 권리에 집중했다. 미국의 수정헌법 14조는 모든 미국인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다. 자폐라고 해서 교육받을 권리가 박탈된다면 이는 분명한 위헌사항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장애아동의 교육받을 권리에 대한 재판이 이뤄졌다. 재판에는 흠잡을데 없는 자격을 갖춘 교육전문가들이 강력한 증인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지체아동을 교육하고, 그 발달을 연구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교육가들의 증언에 의해 장애아동도 학습하고 학습잠재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소송은 당연히 승소였고 1973년 주정부에서 실행한 각 조정서의 조항은 장애인의 권리와 교육에 대한 기념비적 성과를 담아내게 된다.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전국 각지에서 관련 소송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자폐는 이 와중에도 소외되었다. 

 하비와 코니부부는 자폐부모 활동가가 되었다. 자녀가 자폐로 진단되었기 때문이다. 하비는 전미자폐어린이 협회를 워싱턴으로 이전했는데 권력층과의 접근성이 협회의 발전과 영향력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편 손레이핀 대 캘리포니아 주 소송이 일어났다. 이 소송에서는 처음으로 교육받을 권리 속에 자폐증이 명시되었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였고 당시 주지사였고 향후 미국의 대통령이 될 로널드 레이건이 서명하여 최종통과되었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면서 비용의 절감을 강하게 외쳤던 자라 이 서명은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다. 당시 레이건과 친우였던 사람의 자녀가 자폐였고 법안 통과시점 그와 레이건의 통화가 이뤄졌던게 결정타였다. 

 한편 미국의 시설 수용자수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급감하기 시작했다. 장애아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소송이 잇달아 승리하면서 아아들이 학교로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5년 연방장애아동교육법이 제정되며 연방 보조금을 받는 모든 공립학교는 장애가 있는 모든 어린이에게 평등한 교육접근권을 제공해야 했다. 장애목록이 명시되었고 1990년에는 자폐증도 등재되었다. 

 자폐증의 치료방법도 다양하게 등장했다. 초기 맹위를 떨친 것은 ABA로 대표되는 행동주의적 요법이었다. 강화와 처벌 두 가지 요소로 이뤄지는 행동주의 요법은 자폐아동을 강하게 억압하거나 때리고 충격을 주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이런 방법은 효과도 있었지만 비도덕적인 측면이 강해 부모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또한 행동주의적 요법은 많은 인적 자원을 요구했기에 비용이 비싼 단점도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런 혐오치료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쇼플러가 등장했다. 그는 자폐증이 선천적인 기질적인 원인으로 생겨나며 엄마는 이 증상에 관해 비난받을 존재가 전혀아닌 치료의 강력한 협력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쇼플러는 자폐어린이들이 가까운 감각(촉각, 고유감각등 내부의 감각)을 이용하여 정보를 잘 받아들이고 먼감각(시각, 청각, 후각등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감각)보다 의미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연구결과로 이를 입증했으며 이는 자폐증에 신경학적 독특함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자폐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다. 폴스타인과 리터는 영국의 쌍둥이 자폐를 연구하였다. 쌍둥이 중 하나이상이 자폐인 경우는 21건이었는데 이중 둘다 자폐인 경우는 4건으로 모두 일란성 쌍둥이였다. 이는 유전이 자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였다. 가족내에서 두 명의 어린이가 모두 자폐인 경우는 1/50정도였지만 일란성 쌍둥이라면 무려 1/3까지 확률이 올라갔다. 마음이론도 자폐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마음이론은 다른 사람의 정신상태가 자신의 정신상태와 전혀 다른 독립적인 실체임을 알아내는 능력을 말한다. 마음이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름의 지각과 관점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이론에 대한 연구 결과 지적장애인은 마음이론이 있음이 밝혀졌고 이는 지능지수와도 무관함이 밝혀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폐인은 지능지수가 지적장애보다 높은 경우에도 마음이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또한 자폐인은 패턴과 시스템을 인식하고 각 부분을 조작하는데 뛰어는 능력을 보였지만 각 부분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어우러져 작동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을 부족했다. 배런-코언은 자폐인은 체계적 사고 경향을 두드러지지만 공감능력을 희생하는 남성형 뇌로 이해할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72년 윙은 들쭉날쭉은 자폐인의 수를 정확히 하고 싶었다. 윙과 굴드는 15세 이하 자폐증 진단을 받은 어린이를 모두 확인하고 그들을 가르친 교사 900명과 1:1면담을 시행하였다. 132명 어린이와 그 가족을 직접 찾아가 어울리고 시간을 보내며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윙은 자폐증 진단범위가 너무 좁게 설정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윙과 굴드는 자폐증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사회적 기술 장애, 언어적 소통 관련 장애, 사회적 상상력을 결여였다. 그리고 자폐인은 이 세 가지 증상이 무한히 다양한 조합과 강도로 나타나므로 정확히 정상과 경계선 상에 걸쳐있을수도 있었다. 처음으로 연속선이란 단어가 등장했고 1988년 지금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자폐 스펙트럼 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19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 들어 자폐증은 일반인에게도 더 이상 생소한 분야나 용어가 아니었다. 여기엔 영화 레인맨과 템플그랜딘이 큰 역할을 하였다. 레인맨은 사상 최초로 자폐증을 정확히 그려내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수 있었다. 1986년 발간된 템플 그랜딘의 첫 책은 최초로 경험의 형태로 자폐인에 의해 서술된 책이었다. 이처럼 자폐가 널리 알려지면 지원과 관심도 크게 늘었지만 이에 대한 공포도 늘어갔다. 2000년대 들어 자폐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1987-1998년 사이에 자폐인의 수는 이전 보다 무려 273%나 늘어났다. 이를 두고 현대사회의 병폐나 디지털 문명과 기기등이 원인으로 제시되기도 했지만 사실 궁극적 원인은 자폐 스펙트럼 개념의 대두로 인한 폭넓은 자폐의 진단이 그 이유였다. 실제 1980년대의 환자를 지금의 기준으로 진단하면 그것만으로도 환자의 수는 25%가 증가한다. 

 하지만 자폐인의 증가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 대표적 사건이 지금도 상흔을 남기고 있는 웨이크 필드의 사건이다. 1998년 2월 영국 의사 웨이크 필드는 당시 새로 개발된 MMR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조심스러웠지만 매우 파급력이 컸다. 사람들은 안그래도 백신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편이었는데 그의 주장은 이런 경향을 부채질했다. 그의 논문 발표후 4개월이 지나자 MMR백신 접종률은 무려 14%가 떨어졌다. 사람들의 공포는 수은물질은 티메로샬로 까지 이어졌다. 이 물질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사용금지까지 되었다. 하지만 웨이크 필드의 주장과 이후 이어진 모든 논란은 정확한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웨이크 필드의 치부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MMR논문과 관련하여 웨이크 필드는 조사과정중 변호사와 관련하였고 논문 발표후 그를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적이 있었다. 또한 그는 논문 발표전 새로운 홍역 백신을 만들어 특허 출원도 해놓은 상태였다. MMR이 대중적 신뢰를 잃는다면 크게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이런 모든 상황으로 2009년 미국에서 자폐 부모는 백신 재판에서 패소한다. 백신이 자폐를 일으켰고,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었다. 또한 웨이크 필드는 2010년 의사면허를 취소당한다.

 이 모든 논란은 어이없게도 하나였던 자폐 공동체를 둘러 찢는 상흔을 남겼다. 많은 수의 자폐 부모가 웨이크 필드와 백신 논란에 낚여 자폐에 대한 원인을 백신과 티메로샬에서 찾았다. 그들은 매우 힘든상황이었고 뭔가 책임을 물을 만한 것이 필요하기는 했다. 한편 다른 부모들은 자폐의 원인을 비과학적 미신 같은 것에서 찾는 것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들은 이런 비과학적 시도는 자폐에 대한 원인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지원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오히려 안좋은 결과를 낳은 것이라 우려했다. 이런 입장 차이로 두 집단을 대립한다. 

 하여튼 백신가설은 과학계에서 배척당하고 소송에서도 패하면서 2010년대 들어 지지경향이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회자될만큼 그 영향력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 신경다양성 이론이 등장한다. 이는 싱클레어와 에세이에서 우리를 위해 슬퍼하지 말라는 선언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부모운동에서 자폐증의 모습은 항상 슬픔으로 채색되었고 자폐는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자폐를 그저 한 사람이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신경다양성 운동은 자폐증의 완치법을 발견하고자 하는 과학적 노력을 거부한다. 애초에 장애나 병이 아니기에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박도 많이 불러왔다. 사실 싱클레어 같은 자폐인은 매우 드물다. 고학력을 가질 수 있고 자기 주장을 여러 사람앞에서 할수 있으며, 언론활동까지 할수 있는 자폐인은 아무리 스펙트럼이 넓다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다. 자녀가 중증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자녀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지지하지 않는다.

 한편 자폐에 대한 현대의 연구는 더 많은 것을 밝혀내고 있다. 자폐 어린이는 뇌의 크기가 20%정도가 클 수 있고,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때 뇌에서 쾌락과 만족에 반응하여 분비되는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폐인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등 감정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시가적 과제를 수행하는 전두엽과 후두엽의 혈류 조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수면때 급속안구운동이 1/3정도 적었고, 일일 수면시간도 일반인보다 1시간 부족했다. 엄마가 임신 전 엽산을 복용하면 자폐인이 태어날 확륙은 40%나 줄어들었다. 한편 고열이 나면 자폐 증상이 크게 완화되는 보고가 나타났다. 그리고 멜라토닌을 복용하면 평상시보다 잠이 잘 들고, 리스페리돈을 복용하면 반복행동과 과다행동이 줄어드는등 약물 치료 연구도 이뤄졌다.

 하지만 자폐에 대해 갈길은 아직 멀다. 그 발현 스펙트럼이 복잡한 만큼 이렇다할 원인도 전혀 밝혀지지 않았고, 따라서 치료방법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신경다양성 운동에서 더 나아가 자폐인이 사실 지나치게 고성능이기에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지능이 낮아보인다는 주장부터, 자폐가 인류의 다음 진화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폐인을 키우는데 부모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고 이렇다할 성과도 얻기 힘들다는 오래된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자폐인의 지원에 대한 한국의 지원은 매우 열악하다. 자폐인 및 발달 장애인에 대한 지원은 대개 학생신분일때만 유지된다. 아이가 학교를 다닐때면 그래도 부모는 낮에 시각을 확보할수 있고, 직장도 다닐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졸업하면 모든 지원이 종료된다. 성인 발달 장애인을 수용할만한 시설이나 기관도 거의 없는 편이며, 이들을 자립시킬만한 직장도 거의 없는 편이다. 일부 부모가 자구책으로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정부 지원은 전무하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발달 장애 및 자폐 부모는 자녀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것이 소원인 상태다. 이런 정부는 정부도 아니라는 그들의 외침에 귀를 많이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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