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속깊은 이성
하용조 지음 / 두란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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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를 일컫어 불혹의 나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40대에 도달하고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다. 생각할 거리도 많고, 나를 지탱해 온 수많은 사고의 기준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주변에서 나를 뒤흔드는 것들도 점점 더 많아지는 나이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신앙생활에서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만한 이 시기를 다른 믿음의 선조들은 어떻게 지났을까?

 

이 책은 고 하용조 목사님이 40대에 깨달은 삶과 신앙의 지혜를 담은 책으로, 1부 어떻게 살 것인가, 2부 어떻게 믿을 것인가, 3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로 나뉘어져 있다. 각 소주제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과 깨달음이 에세이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목사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마음을 콕콕 질렀다. 40대의 나이에 느슨해져버린 내 모습을, 어느 순간 하나님보다 내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내 모습을 책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목사님의 일갈이 귓가에 메아리치면서 눈물이 솟아올랐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지금 애쓰고 수고하고 선한 행동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데 있다. (p.55)

 

그렇다. 모태신앙으로 40여년의 삶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어느 순간 처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그 순간의 사랑을 잊어버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신앙생활에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과 진실함이 사라져버렸다. 때로는 이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얼마나 무서운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이는 행동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비장해서 말할 줄 아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p.60)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 생각, 내 신념, 내 체험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에 더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연히 기도이다. 이 책을 읽으며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특히 기도에 동역자가 필요하는 사실에 깊이 공감했다. 이는 얼마 전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선교사님과 그분의 자제를 보며 깨달았던 것이기도 하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그 분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임을. 이 기도로 그 분이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나아갈 수 있음을.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다시 무릎 꿇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달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니 내가 살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리가 난타당하는 이 시대에 이런 깨달음을 가질 수 있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하용조 목사님께. 그보다 목사님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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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한 번은 동양고전에 미쳐라 : 지혜 - 다시 시작하는 동양고전의 인문학 개론 지혜(知慧) 지식을 베끼는 인문학 클래식
이현성 지음 / 스마트북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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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는 않지만 동양고전을 읽었다. 어떤 고전은 상당히 어려웠고, 어떤 고전은 수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고, 어떤 고전은 사람에 대해 알게 해주었다. 이처럼 고전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나에 관한 이야기,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 세상을 다스리는 이야기 등등.

 

중국 고전은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도 영웅, 장군, 책략가 등 다양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이 책에서는 그런 인물들 중 책사라 불리는 이들 14명에 관해 들려준다. 14명의 인물들 중에는 제갈량, 장양, 관중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도 있지만 자산, 백기 등 처음으로 이름을 접한 인물들도 있다. 이들 14명의 인물들은 1인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모시던 인물이 1인자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백성의 삶이 나아질 수 있었다.

 

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도자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말해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고. 아무리 좋은 지략을 갖춘 책사라 하더라도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 군주에게는 그들이 갖고 있는 수많은 병법과 전략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지도자들은 어떨까 생각해봤다. 제대로 된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고집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을까? 리더의 위치에 있는 자라면 충분히 돌아보아야 할 사안이다.

 

고전은 우리에게 지금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지만 아무리 고전을 읽어도 이를 우리의 삶 가운데 녹아내리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 없는 글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도자이든 그냥 평범한 사람이든지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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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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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면서부터 마음이 불편해졌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라고 하면 따뜻함, 포근함, 안정, 울타리, 사랑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가족이라는 병>으로 정했다. 행복한 이미지에서 끌어내려도 너무 끌어내렸다. 병이라니? 가족이 왜 병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걸까?

 

제목에서 느꼈던 불편함은 책을 읽는 내내 이어졌다.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특히 오늘날 많은 가족들이 겪고 있는 소통의 문제는 결코 가볍게 짚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데 깊이 공감했다. 그렇지만 저자의 말에 충분히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한견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라는 의미가 나에게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저자의 주장이 가족에 한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세상에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가족들이 있다. 특히 돈 문제가 얽혀있는 경우에는 가족 간에 극악무도한 범죄가 발생하기도 한다. TV나 신문에서 이런 사건들을 종종 본다. 최근에는 모 재벌가에서 벌어진 부자, 형제 간 싸움이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과연 가족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마음으로 이어진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일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그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일정한 범위 이상 가까워지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고,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사회적 관심이 적어 상대적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역시 믿을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는 말들을 하는 것이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문제도 한 번 짚어보자. 저자는 독거노인의 문제를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현실이 꼭 저자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어떤 노인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홀로 생활하면서 가족을 그리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한다. 노숙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삶의 또 다른 여파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저자의 주장대로 독거노인이나 노숙자가 가족을 떠나 혼자 살기로 한 결정이 개인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여러 부분에서 저자와 생각이 달랐지만 그렇다고 저자의 생각과 내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도 역시 마음으로 단단히 이어진 사람들과 시간을, 공간을, 삶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저자의 말처럼 가족의 의미가 변해 새로운 가족의 형태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가족의 의미가 조금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함께 살았던, 살고 있는, 살게 될 가족을 사람들이 너무나 가볍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소통의 부재에 대한 문제가 가족 해체의 원인이 됨은 분명하다. 이런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소통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가족을 대해야 한다. 이런 소통의 과정은 가족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결국 자신을 알고 자신을 알리는 과정이다.

 

가족을 병이라고 표현한 저자의 말에 100%로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렇기에 머릿속에서 저자의 질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가족에 대해 알아요라는 바로 그 질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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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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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신념을 법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무어라 답을 하기에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답이 나올 수 있기에 어떠한 답도 온전한 답이 되지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이런 난해한 판단이 단순한 일상의 일이라면 어떤 답이라도 수긍하고 넘어가겠지만 만약 생명에 관한 판단이라면? 그 판단을 내려할 사람이 바로 나라면?

 

<속죄>의 저자 이언 매큐언은 새로 발표한 <칠드런 액트>에서 바로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수혈을 거부하는 애덤과 그의 가족, 그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병원, 병원에서 요구한 법원명령이 정당한지를 판단해야 하는 피오나. 가족을 대변한 변호인과 병원 관계자는 서로 간에 날선 대립각을 세우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팽팽히 맞선 이들의 대립 속에 결국 해답을 얻기 위해 피오나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애덤을 만나러 간다. 애덤을 만난 피오나는....

 

18세라는 법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애덤에게는 정말 자기 결정권이 없는 걸까? 법적 기본권을 얻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 그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가장 고유한 권한인 생명에 관한 기본권이 정말 나이와 관련이 있는 걸까?

 

물론 나이라는 제한을 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가 내리는 결정이 정말 내 의사에 반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분별력과 사고력을 갖추고 있다면, 오로지 그런 법적인 제약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만 할까? 글쎄다.

 

다른 시각에서 봤을 때, 애덤이 가진 신념이 진정 자신의 신념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을까? 이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종교라는 관념이 자신의 것이 아닌 주변의 것인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지만.

 

영국에서 제정된 칠드런 액트(아동법)에서는 법정이 미성년자(아동)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적으로 아동의 복지를 고려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준조차 때로는 너무 막연해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내면의 깊숙한 부분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피오나 판사가 겪는 개인사의 경우처럼 말이다.

 

무거운 주제지만 한 장 한 장 무겁게 책장을 넘겨야 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생각보다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이토록 쉽게 넘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자 매큐언의 매력적인 능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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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최승근 지음 / 두란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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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의례인가, 의례가 아닌가? 저자의 논거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의례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의례의 정의, 역할과 기능, 기능적 요소들에 비춰볼 때 예배도 의례에 속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예배는 일정하고 반복적이고 목적이 있으며, 공동체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의례다. (p.56)

 

예배가 의례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교회의 리더들이 이런 의례적인 요소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성도들에게 알리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양한 예배의 의례들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저자의 설명을 읽으면서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드리던 예배 풍경이 떠올랐다. 정장 차림의 성도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고 오로지 성경 말씀으로 이루어진 설교를 듣고 합심해서 기도를 하던 그 때 그 예배 풍경.

 

하지만 예배는 의례적인 면만이 강조되는 자리가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예배는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할 수 있도록 예배의 장을 마련하셨다. 우리는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란 결국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을 알아가면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서 왜 예배를 통해서 변화되지 않는가, 라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예배를 드림에도 변화가 없음은 결국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신실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에 빠졌던 저자가 주일 예배와 수련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비교하면서 찾게 된 답은 바로 집중이었다.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한 예배에서는 당연히 하나님과 그 분의 사역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저자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교회 리더들에게 예배의 답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성도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설교, 찬양, 성도의 반응을 위한 시간 등 다양한 부분에도 초점을 맞춰 설명하면서 공식적인 의미 속에서 개인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 예배가 은혜로워진다고 말한다.

 

나 역시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기에 주일예배와 수련회 예배와의 차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저자의 말처럼 집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두 예배에서 받는 은혜의 차이는 예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매일 보는 부모님이지만 명절에 만나는 부모님에게 또 다른 기대감(?)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예배를 고민하는 교회 리더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일반 성도들, 아니 모든 예배자들에게 진정한 예배를 통해 거듭나는 길을 알려주는 정말 귀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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