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멜랑콜리 Trauer und melancholie
이번 시간에 프로이트의 저명한 애도와 우울증 논의를 바탕으로 강의가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힐링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뗐습니다. 힐링을 '하는' 주체는 무의지적, 무의도적으로 우월, 예외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상처받은 영혼에 다가서려 해도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힐링의 딜레마라고 했습니다.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사랑을 뜸뿍 받으며 자란 아이가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도도 높고, 받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높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결정적'으로 받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
선생님은 자식의 죽음에 대해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너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 또 너를 만져보고 싶다. 한겨레 신문에 유가족들의 편지가 실리는데 저도 거기서 너를 한 번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면 좋겠어, 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삶도 죽음도 아닌 비식별역에서 묻혀 있는 9명의 실종자들,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접촉욕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감각성과 접촉성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자문했습니다. 접촉이 단절된 채 오직 시각으로만 향유하는 온라인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고,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도 양성화되지 않았을 뿐 음지에서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중, 고등학생들 중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야동중독에 빠진 아이들이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서구의 역사는 시각의 역사라 해도 될 만큼 명료하게 사물/자연을 파악해 자연을 인간화, 도구화해 통제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오히려 눈을 찌르는(부정하는) 결말을 통해 눈의 이성이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았음을 승인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는 관점을 보여줬습니다.
본격적으로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요. 프로이트의 말하기-글쓰기에서 두드러지는 아이러니를 활용하는 방식에 유념할 것을 지적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임상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결론을 도출해내긴 했지만 자신이 진찰한 집단 내에서 도출된 결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부정해나가는 방식의 외교적 글쓰기에 능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환자 한 명만으로도 자신의 결론이 무너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프로이트의 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둘을 연결하는 접속사 'und'(영어의 and)에 주목했습니다. 이 등위접속사는 양가성을 띠는데 1 애도와 멜랑콜리를 대치적으로(versus의 관계) 보고자 함을 드러내고, 2 둘의 동일한 영역이 존재함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부분이 재밌었는데요. 환자는 거짓말을 하고, 의사는 탐정 같이 환자의 거짓말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환자는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돌려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데, 거짓에 거짓을 계속 쌓아가다 보면 말실수가 발생하게 되고 의사는 말실수를 통해 우회적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애도와 멜랑콜리에 대해선 저번 글에서 이현우 선생님이 쓴 <애도와 우울증>을 인용하면서 개념 정리를 하고 넘어갔는데요. 이번 시간의 설명이 간명하게 직관적인 느낌을 전달해줘서 부연합니다. 애도는 세상이 텅 비어 있는 것이지만 멜랑콜리는 내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애도는 주체가 있지만 멜랑콜리는 주체가 없다. 멜랑콜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리비도나 내면의 에너지가 외부를 향해 있어야 하는데 내부에 갇혀 있게 되면서 주체가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는데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미분리 상태에서 분리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리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초의 상처, '열린 상처'라고 했습니다.
애도에는 주체 '나Ich'도 있고, 대상도 확실하기 때문에 애도 작업(Trauer Arbeit)이 이뤄질 수 있지만, 멜랑콜리는 대상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사랑의 에너지가 슬픔 자체로 가게 된다. '나는 내 슬픔을 사랑한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내가 사랑했다고 믿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애착 관계의 견고성, 확실성이 제대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Arbeit' - 난제를 이성적으로 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애도는 상실한 대상1에서 새로운 대상2로 넘어가면서 삶의 다음 단계로 진보progress하지만('새로운 사랑') 멜랑콜리는 퇴행Regression한다. 이 퇴행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멜랑콜리커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자기에게로 도피한다. 대상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길/방향을 잃은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스스로에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원초적 나르시시즘,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구강기(구순기)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뱉어낸다, 여자는 삼킨다'
여기서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이 존재하는데 내가 죽은 자를 먹었으나 결국 죽은 자에게 먹히는 격이 된다.
이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은 원초적 나르시시즘 -구강 단계-카니발리즘에 대한 설명으로 보충될 수 있다. 구강단계에서는 타자를 자기화하려 한다. '상상적 자아를 먹고, 상상적 자아에게 먹힘' 자/타의 미분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애니미즘 역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나와 만나는 모든 사물/자연에 투사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을 먹고, 자연에 먹힌 사람'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앞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분리 상태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입/통과한 것을 반대로 보면 그 원초적 세계(어머니의 자궁/탯줄)에서의 추방으로 볼 수 있다. 상징계, 기호 세계로의 진입은 분리의 고통을 수반한다. 오정희는 자신의 작품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의 아기의 입을 빌어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세계로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엄마가 밀어냈다. 그물에 걸려 들었다. 더불어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호출되었다. 이 분리고통은 의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육체에 직접적으로 새겨진다. 인간은 누구나 통과제의를 고통 없이 완벽하게 통과해낼 수 없기 때문에 '열린 상처'를 갖게 된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 <태어나기의 망설임> 우리는 태어나기를 망설인다. 우리를 옭아맬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텨보지만 태어난 이상, 세상에 '던져진' 이상 그 세계의 코드-시스템-언어를 습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이런 운명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까?)
1,2강에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있다는 표현이 3강에서는 오늘날 우리는 모두는 나르시시트가 되었다로 변주되었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타자와의 만남이 어려워진 시대에 길 잃은 사랑이 가엾는 나 자신의 '빈 집'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빈 집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혹은 이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내 사랑이 갇혀 있는데 그 집은 여전히 비어 있다는 것. 이런 빈 집의 사랑을 내가 텅 비어 있다는 멜랑콜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길 잃은 가엾은 사랑이 빈 집을 만들어냈고, 그 빈 집에 사랑이 갇혀 영영 갇혀버린 꼴이라 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