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지출’로 ‘최대한의 즐거움’을 끌어내는 것(되도록 많은 동기를 만족시키는 것)을 생물학과 철학에서는 ‘합리성’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합리성은 굉장히 감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긍정적이고 뿌듯한 감정은 최대화시키고, 부정적인 감정은 가급적 회피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거 말고. 너 자신이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니?‘ ‘물론이지!‘ ‘그럼 됐지, 뭘 더 바라?‘ 과연 그렇다. 나는 서툴과 상처 많고 결핍투성이지만 내 일을 사랑한다. 그걸로 되었다.

두려움을 고백하는 일,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일은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최고의 지성을 갖춘 이에게만 허락되는 눈부신 축복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사이에는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이겠는가. 그 어떤 무시무시한 장애물도,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인생을 걸고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

크고 작은 문제를 잔뜩 짊어지고도 우리는 매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문제가 많다는 것은 내가 감당하고 이겨내고 싸워내야 할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도하게 심리학 용어로 우리 삶을 해석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작은 문제를 큰 문제로 고착화해버리는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심리학은 만능해결사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비춰보는 유용한 프리즘으로 작용해야 한다.

심리학적 분석에 매번 휘둘리기보다는 심리학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힌트를 얻으면 된다.

상처 자체는 그 사람을 빛내지 못한다. 상처를 뛰어넘으려 불굴의 노력을 쏟아부을 때 눈부신 용기와 고결함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트라우마가 빛을 발할 때는 오직 우리가 트라우마로부터 치유되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순간들이다.

우리가 숨기고 싶은 모든 불쾌한 감정은 내면의 그림자로 가라앉는다. 에고와 그림자의 관계는, 마치 빛과 그림자의 관계와 닮아서, 에고가 뛰어난 연기를 펼칠 때마다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어두워진다.

우리에겐 줄기찬 방어보다 더 지혜로운 에너지, 즉 내 삶을 내가 가꾸고, 그 어떤 외부의 공격도 내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분명 꿈틀거리고 있다. ‘더 이상 방어만 하지 않겠어. 이제 내 의지와 열망의 부름대로 살아가야지‘라고 결심하는 순간, 진정한 희열이 찾아온다.

세상은 경제적 차원뿐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서도 지극히 불공평한 것일까. 이제 좀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사람들은 지나친 자기애로 온 세상을 자기 것처럼 주무르고, 이제 좀 자신을 마음껏 사랑해도 좋을 사람들이 스스로를 할퀴고 비하하며 자기혐오에 빠진다.

이런 마음의 빈익빈부익부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진정한 자기와의 대면이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려 하지 않고,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빛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심리학을 공부하며 깨달은 점은 내 안의 빛뿐만 아니라 그림자도 편애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차별 없이 보듬어내는 것, 그리하여 내 바람직한 측면뿐 아니라 부끄러운 측면까지 전체성으로 보듬는 것이 진정한 성숙이다. 자신의 가장 증오스러운 측면도, 자신의 가장 멋진 부분도 나 자체는 아님을, 매 순간의 선택과 실천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나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마음챙김이 대면confrontation이다.

대면은 상처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차별 없이 끌어안아, 마침내 더 크고 깊은 나로 나아가는 진정한 용기다.

절단의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나무의 열매와 꽃이 더욱 아름답고 튼실하게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 가지치기는 꼭 필요한 성장통이다.

상처를 꿋꿋하게 이겨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얼까. 단지 불굴의 의지만은 아니다. 상처를 극복하는 내면의 힘은 자신도 모르는 면역력처럼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단련되어온 회복탄력성이다.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일상 속의 길은 뭘까. 나는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내면의 희열, 즉 블리스Bliss를 가꾸는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이라고 믿는다. 블리스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모든 기쁨이다. 시간뿐 아니라 슬픔과 번민, 세상조차 잊게 만드는 내적 희열이 바로 블리스다.

블리스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마음의 내적 자원inner resource이다.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블리스가 있는가 하면, 작가의 글쓰기가 화가의 그림 그리기처럼 인생을 걸어야 비로소 절실하게 만날 수 있는 블리스도 있다. 두 가지 모두 우리 인생에 필요한 내적 자원이다.

‘지킬 박사의 페르소나(눈에 보이는 성격)‘와 ‘하이드의 그림자(보이지 않는 콤플렉스와 사악함)‘ 문제는 극소수의 특별한 환자들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집단무의식에 드리운 어둠이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 상황에 부딪힐 때 자신도 모르게 섬뜩한 하이드의 본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하이드, 우리 안의 그림자와 어떻게 화해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개인의 내면에 도사린 그림자가 폭력이나 범죄로 폭발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까. 나는 그 대안을 그림자를 보살피는 삶에서 찾는다.

그림자를 보살피는 법, 즉 자기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되돌아보며 도사린 상처와 그늘을 찾아내는 방법은 매우 느린 길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폭력성과 숨은 그림자와 대면하는 법을 훈련하면 분노가 우리 자신을 집어삼켜 초래하는 비극을 분명히 예방할 수 있다.

평소에 어떤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지, 어떤 사람을 보면 분노의 방아쇠가 당겨지는지, 어떤 상황에서 습관처럼 온몸이 떨리고 혈압이 오르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계 상황에 닥쳤을 때 훨씬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여기서 승화가 중요하다.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에 더 큰 분노로 화답하는 것은 사태를 악화시키므로, 우리는 다른 배출구를 찾아야 한다.

분노를 다른 감정으로 해소하거나 창조나 예술의 에너지로 승화시킬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당신의 분노가 거의 포화 상태에 다다른 감정의 물통에 떨어질 마지막 물방울이 되는 순간, 감정의 물통은 쏟아져버린다.

당신의 쓰라린 그림자마저도 다정한 친구로 만드는 슬기로움, 그 마음속에 진정한 치유의 에너지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징계는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는 어른들의 세계다.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고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더욱 성숙한 사랑은 시작된다. 인어공주가 인간이 되기 위해 감수하는 고통,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견디는 것이 바로 상징계의 사랑이다.

나에게 과연 그런 무시무시한 잠재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 안의 낯선 자아가 튀어나오는 순간, 매너리즘에 사로잡힌 현실의 자아를 뛰어넘어 내 안의 가장 빛나는 힘이 무지개처럼 용솟음치는 순간. 그때 우리는 ‘너는 해낼 수 없을 거야‘라고 속삭이던 자기 안의 괴물과 마침내 싸워 이길 수 있다.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힘들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건강한 아이로 자라게 하려면,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다‘라는 뿌리 깊은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더 많이 웃어주고,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칭찬해주는 부모의 사랑 앞에서 아이는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에서 가장 긴 10장에서는 셸러, 후설, 스타인, 슈츠 등의 글에서 발견되는 다층적 공감 분석을 상세하게 탐구한다. 여기서는 이들이 신체화와 표현성에 부여하는 중요성을 논의하고 공감과 정서 전염, 동감, 정서 공유 같은 관련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해명한다.

비록 이 사상가들이 모든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별개의 현상학적 공감 설명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 각각의 이론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충분히 존재한다.

오히려 이들의 설명은 공통적으로 반영, 모사, 모방, 정서 전염, 상상적 투사, 추론적 귀인 등에서 공감을 설명하는 최근의 시도와 현격히 다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현상학자들은 공감을 독특한 타자지향적 형태의 지향성으로 개념화했는데 이것 때문에 타자의 경험이 타자의 것으로 드러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들 제안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은, 이 제안이 의식의 1인칭적 특성을 확고히 지지하면서도 또한 타자의 주어짐의 독특한 점을 조명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에게 글쓰는 삶이란 이른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뜨는 삶, 오후 늦도록 햇살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삶이 되었다. 속도를 늦추어 매순간과 교감하는 삶이었고, 내면의 원천으로 더욱 깊이 파고드는 삶이었다.

글쓰는 삶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성의 원천으로부터 솟아나온다. 이것은 모든 영적 전통에서 다루는 것과 똑같은 원천이다.

일기 쓰기는 글쓰는 삶을 향한 첫걸음이자 토대다. 글을 잘 쓰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달리기선수가 달리고 무용가가 춤을 추듯, 작가는 글을 쓴다. 일기 쓰기는 글쓰기 연습이면서 그 이상이다. 글을 통해 당신은 보고 듣고 만진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