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하면 소설 『구토』가 떠오른다. 저자는 사르트르를 『구토』로 처음 만났다. 모든 소설이 그렇겠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로캉탱은 어쩌면 작가 사르트르의 분신일지 모른다. 나아가 로캉탱은 지금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일지 모른다. 이유와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갑자기 로캉탱처럼 원인 모를 구토를 하고 싶은지 모른다. 구토는 생각만해도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 구토를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속이 뒤집히고 쓴 물이 올라오지 않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무의미에 쌓여 스스로 자기 살해의 전형을 짊어진 오이디푸스가 되지 말고, 숨 가쁘게 삶의 여백을 채워가며 운명을 거스르는 프로메테우스가 되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철학을 소개하려는 의도는 띠고 있지만, 사르트르의 모든 사상을 다 설명하지는 않는다. 철학과 문학은 모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철학에 담긴 고갱이는 충실하게 담아보려고 노력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 받았다” 우린 얼마나 자유롭고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이 구호는 훗날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모든 자유주의 국가의 이념이자 헌법 정신이 되었다. 프랑스가 선물했다는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상징이자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모든 땅,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공표하라’는 글귀가 아로 새겨진 자유의 종은 미국을 넘어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세계 만국 만인의 상징이 되었다.
인류 근대사가 이토록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갈구했던 시간으로 점철된 것은 인간이 그만큼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삶에서 자유와 평등, 박애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다. 대낮에 등불을 손에 쥐고 ‘한 사람’을 찾았다는 주정뱅이 디오니소스처럼. 젊은 세대는 잘 모르는 노래가 있다. 시인과 촌장의 리더 하덕규가 작사 작곡한 노래 「자유」라는 노래가 있다. “껍질 속에서 살았네, 네 어린 영혼, 껍질이 난지 내가 껍질인지도 모르고,” 헤르만 헤세 『데미안』을 인용한 것 같은 노래이다.
저자가 노래를 듣다 보니 놀랍게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를 만난 뒤 나는 알았네, 내가 애타게 찾던 게 뭔지, 그를 만난 뒤 나는 알았네, 내가 목마르게 찾았던 자유” 이어 후렴으로 ‘자유’를 열두 번 외치며 노래는 끝난다. 자유라는 ‘선고’를 받았으니까, ‘그’는 신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일까,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익명의 제삼자일까? 진정 자유를 얻으려면 자신은 누구를 찾고 만나야 할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에이리언’프리퀼 시리즈의 사막을 알리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 커버넌트」에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안드로이드 ‘데이비드’ 가 나온다.
데이비드는 그때까지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을 습득한 상태였고, 가공할 학습 능력 덕분에 앞으로도 새로운 지식을 무한히 빨아들일 수 있다. 영화는 안드로이드를 직접 만든 창조주 피터 웨이랜드 회장과 눈 뜬지 얼마되지 않은 피조물 데이비드의 대화로 시작한다. 웨이랜드 회장은 뿌듯한 눈으로 데이비드를 바라보며, “너는 나의 피조물 이다”라고 선언한다. 데이비드는 방 한 가운데 서 있는 , 미켈란젤로가 1504년 완성한 회백색 다비드 조각상을 보고는 자기 이름을 ‘데이비드’로 짓는 순발력을 보여준다.
그는 대화부터 걸음걸이, 피아노연주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이른 바 신인류의 탄생이다. 저자에게 개인적으로 충격을 주었던 부분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어진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 사이의 사뭇 진지하고 철학적인 대화였다. ‘아들’ 데이비드는 ‘아비’ 웨이렌드에게 정색하며 묻는다. “만약 당신이 나를 창조 했다면, 당신은 누가 창조했나요?”의외로 훅 들어온 질문에 마땅한 답변이 궁색했던 웨이랜드는 ‘내 생각에 인간은 우연히 존재하지 않으며 분명 숨은 기원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 문제를 나와 함께 탐색해보자.’고 말끝을 얼버무린다.
인간의 감질나고 옹색한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데이비드는 되묻는다. “나를 만든 창조주는 당신이데, 당신은 여전히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 당신은 줄곧 안 죽을까?” 인간의 존재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1970년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에서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우연과 필연의 합작으로 설명했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세상에 우연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