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 - 맥락이 보이는 한국사 60장면
남경태 지음 / 산천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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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식 역사 읽기의 이해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를 읽고

 

남경태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종횡무진 세계사』와 『종횡무진 동양사』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세계사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서 세계사 대중 서적들을 뒤적이다 발견한 이책들은 나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물론, 역사전공자가 아니기에 일정한 한계는 있었으나, 상당한 내공의 역사서적을 집필했다는 것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남경태의 또 다른 책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를 읽게 되었다 . 남경태식의 역사읽기에 다시 한번 빠져보았다.

 

1. 냉철한 비판과 다른 시선

남경태식의 역사읽기의 한가지 특징은, 너무도 냉철한 비판적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한국의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서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친일 독재의 시선으로 한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은 예외이다.)

남경태의 이러한 냉혹한 시선은 ‘진경시대’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혹독하다.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조선이 택할 길은 말뿐인 ‘북벌론’과 ‘소중화 의식’이었다. 한때, ‘북벌론’은 마치 자주적인 운동인양 배워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소중화 의식’이 있었기에 우리 산천에 대해서 재발견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진경시대’가 출현하였다. 이 시대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남경태는 이를 ‘우물안의 개구리’로 표현한다. 비록 진경산수화로 대표되는 위대한 문화 유산이 탄생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지만, 냉혹하게 본다면 ‘진경시대’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자신을 기형적으로 자각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남경태는 ‘권지국사’라는 표현도 냉혹하게 지적한다. 중국이라는 강국에 인접했기에 외교상에 중국의 책봉을 받아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고려와 조선의 초기 지배층들의 모습을 냉혹하게 ‘자주’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어찌보면, 자주적인 국가로서 너무도 치욕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러한 남경태의 냉혹한 시선은 때로는 독자를 불편하게도 한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사랑으로만 보아서 일까.....

 

2. 남경태식의 한국사 맥락

이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남경태 식의 한국사를 바라보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대’, ‘중화사상’이라는 단어로 이를 표현할 수 있다.

남경태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삼국통일을 ‘굴욕적인 삼국통일’로 평가한다. 단순히 ‘불완전한 삼국 통일’을 넘어 ‘굴욕적인 삼국통일’이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신라가 중국의 한 지방과 같은 입장이었고, 스스로도 그런 관계를 원했다는 점, 나아가 당시 동양의 국제 질서가 그랬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중국과 독립적이고 상당 부분 자주적인 것으로 보는 ‘현대적’관점은 과거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을 오히려 감추고 있는 것이다. (중략)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릎을 꿇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1천 300년간 한반도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게 아니라 중국이 동아시아를 통일하고 중국 중심의 고대적 국제질서를 확립한 사건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삼국통일에 대한 남경태식의 새로운 관점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점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역사학계의 견해와는 달리, 사대주의 역사관으로 평가하며, ‘조선’과 ‘화령’이라는 국명중에서 ‘조선’이 근세 조선의 국명으로 낙점된 것을 지적하며, 조선왕조의 국호 조차도 사대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서양인이 조선에 오지 않은 이유가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굳이 조선에 까지 올 필요가 없었고, 조선도 스스로 중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다고 여겼기에 굳이 별도로 서양인과 접촉할 통로를 열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다. 일본을 ‘왜’로 낮춰부른 것도 중국을 본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사대주의를 떨쳐 버리고 일어선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라고 평가한다.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이다.

이러한 한국사를 보는 남경태식의 관점이 한편으로는 새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에 대한 지나친 비약적 폄하로 읽혀지기도 한다. 내치에서는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군사와 외교는 중국에 맡겼다는 남경태의 비약적인 지적은 동의할 수 없다. 분명, 고려는 ‘내제외왕체체’라 하여, 안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밖으로 중국과 외교를 할 때만 왕을 칭하였다. 그래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황상’, ‘황도’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고려의 왕의 곤룡포 색깔이 황제의 색인 ‘황색’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또한, 조선도 대외 평화를 위한 목적으로 명에 사대를 했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면 실력으로 맞서려고 까지 했다. 단지 조선 후기에 와서 ‘재조지은’이라 하여 명을 부모의 나라로 받드는 모습들이 나왔을 뿐이다.

 

3. 옥의 티

남경태는 역사를 전공한 학자출신의 저술가가 아니다. 더욱이 이책은 저술된지 꽤 오래된 책이다. 그러기에 한국사 교과서와 다른 서술, 혹은 최근의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못하고 오류를 범한 흔적이 있다.

첫째, ‘중국의 영향을 일직 받은 고조선은 곧 청동기 문화로 접어들었’다는 표현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표현으로 읽혀진다. 특히 최근의 중국 고고학계에서 요하강을 중심으로 황하문명과는 다른 별개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한국사학계에서는 이를 고조선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식 동검과 한국의 세형동검이 제작방식이 다르고 별개의 청동기 문화라는 것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분명이 적혀있다.

둘째, 대한제국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세워진 제국이라고 지적한 것은 어이가 없다. 대한제국은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셋째, 선덕여왕이 처녀의 몸이었으니 아들은 커녕 딸도 있을리 없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 - 선덕여왕 기사에 “이름은 덕만이다. ……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선덕여왕은 결혼을 하였다.

넷째, 발해가 당이나 일본과는 교류하였는데, 건국한 뒤 100년 동안이나 통일신라와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국사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를 무시한 서술이다. 교류의 증거가 많은데, 그중에서 ‘신라도’라는 길이 있을 정도로 신라와 발해는 교류하였다. 이는 한국사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 고려는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서술도 학계와 교과서 서술과 배치된다.

다섯째, 고구려와 백제를 제거하고 200여 년 동안 한반도의 단독 정권을 통일신라가 유지했다는 서술도 오류이다. 통일신라 북쪽 즉, 대동강 북쪽에는 엄연히 발해가 있었다.

여섯째, 이승만 정권에서 추진한, 농지개혁의 결과 ‘지주-소작 관계가 그대로 온존’ 되었다는 서술도 한국사 교과서 서술과 배치된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농지개혁이 되었고, 그래서 농민들이 북한에 동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며, 농지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을 지주가 6.25 전쟁 중에 헐값에 팔아버렸고, 이 때문에 지주가 산업자본화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사 전공자에게는 상식이다.

이책이 보다 더 좋은 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오류는 수정되었으면 좋겠다. 더욱이 한국의 독자가 읽어야 하니까....

 

역사에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고, 이러한 관점들을 통해서 자신만의 역사관을 정립한다. 이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대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교과서에서만 제시되던 한가지 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때로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불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면, 한번쯤은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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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지음, 류한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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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세계사를 위한 또하나의 고민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고-

 

세계사 수업을 준비할 때면 언제나 ‘우리의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유럽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역시 유럽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에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받아들었을 때, 약 6백 쪽에 달하는 양장본에 압도되어 과연 제대로 읽어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기우였다. 학술 서적 같기 보다는 한편의 박진감 넘치는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덧 나는 이 책에 빠져들었고 첫장을 펼쳐든지 5일만에 책을 손에서 내려 놓았다. 그리고 한동안 나의 머릿속은 이슬람으로 가득 찼다. 진정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내러티브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음을 깨닫고 혼동과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트였다는 희열을 느꼈다. 세계사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확신에 차있는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선사해 주었다.

1. 중간세계 - 자신을 타자화한 ‘용어’에서 탈피하다.

타밈 안사리는 책의 첫장에 ‘중간 세계’라고 제목을 붙였다. 상당히 낮선 지역명에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사람을 사귈때에는 그 사람의 정확한 이름을 알아야 하듯이, 역사를 서술할 때는 그에 걸맞는 정확한 용어를 선택해야한다. 우리는 너무도 ‘중동’, ‘극동’ 등의 유럽을 중심으로 한 용어에 익숙해져있었다. 그리고 이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용하고 있다. 타밈 안사리는 이러한 유럽중심의 용어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확한 용어의 사용에서 출발하여 타밈 안사리는 역사의 또 다른 페이지였지만, ‘기타사’ 혹은 ‘주변사’로 취급해오던 이슬람의 역사를 당당히 세계사의 중심에 놓고 서술하고 있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곳, 그러나 사막으로 둘러 쌓인 이곳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무지했다. 중간세계를 무시했다기 보다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너무나도 무지했던 이슬람의 역사를 타밈 안사리는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역동적인 이슬람의 역사에 푹 빠져 들어갔다.

2. 오리엔탈리즘으로 부터의 해방

서구의 편견에 의해서 만들어진 오리엔탈리즘에 우리는 우리를 규정짓고 이웃국가들을 오리엔탈리즘의 창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이 있었다. ‘왜? 동양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답변하려 했고, 그리고 답변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서양인들은 ‘동양은 서양의 도움이 없이는 근대로 진입하지 못했다’라는 결론을 도출하여 그들의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양인은 ‘우리는 너희의 도움이 없었어도 자본주의의 싹을 틔웠을 거야!’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어니스트 볼크먼은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에서 이슬람의 학문은 칼리프나 술탄을 위해서만 존재했고 그들에게 독점되었기에 지식확산이 일어나지 못했으며, 서구와 같은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니스트 볼크먼의 이러한 주장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나는 타밈 안사리에게 보기 좋게 한방을 얻어 맞았다. 이슬람의 학문이 한사람에 의해서 독점되고 그를 위해서 존재했다는 것은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그렇다면 왜? 동양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타밈 안사리는 이렇게 말한다. 증기기관은 영국에서 보다 일찍 이슬람에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이를 양을 통째로 구울 때 사용했을 뿐, 이를 산업혁명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산업혁명 직전 영국보다 좋은 직조기계를 갖고 있었던 중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의 맥락 속에 발명품이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그 발명이 사회의 혁신을 촉진한다. 무슬림들은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이룬 반면, 유럽인들은 종교개혁 후, 오랜 세월 무너져 있던 사회 질서가 회복되기 시작할 때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이루었다. 이것이 서양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했고, 동양은 그러하지 못한 이유였다.

3. 또 다른 아프리카 - 중간세계

아프리카의 지도를 보면, 국경선이 일직선으로 그어져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란다. 바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지도에다 선을 그어 아프리카를 나누어 가졌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대사의 불행을 중간세계에서도 보았다. 프랑스는 자신의 신탁 통치령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나눴으며, 영국은 메카 셰이크의 둘째 아들에게는 이라크를, 첫째 아들에게는 요르단을 주었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의 장난질의 극치는 오늘날도 진행되는 팔레스타인 문제일 것이다. 현대 중간세계의 모순은 이미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그 씨앗이 뿌려졌다. 서구 국가들이 중간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테러리스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을 서구 국가가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인류 문명의 시작이며, 세계 4대 종교 중의 하나인 ‘이슬람’과 ‘기독교’가 발생한 이곳이 이제는 세계인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복잡한 지역이 된 것은 너무도 안타깝다. 아프리카의 부족간 갈등과 분쟁, 그리고 저개발 상태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듯이, 이슬람의 문제도 같은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너무도 씁쓸했다.

4. ‘자스민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서구의 내러티브에 익숙한 우리는 역사는 한명이 다스리는 전제군정에서 현대 민주정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증거 중에 하나가 지금 중간세계에 불고 있는 ‘자스민 혁명’이다. 나 또한 이러한 서구의 내러티브를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슬람도 민주주의의 빛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이슬람의 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하지 못했다.

이슬람은 종교이며 다른 종교들처럼 윤리와 도덕, 신, 우주, 필멸의 운명에 대한 독특한 믿음과 수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동시에 사회적인 프로젝트여서, 정치와 경제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이자 민법과 형법의 완전한 체계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이슬람인들은 독재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부활을 꿈꿀지도 모른다. 크리스트교가 개인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면, 이슬람은 이슬람 공동체의 구현을 목표로 하기에 그들이 꿈꾸는 것은 우리가 그리는 현대사회와는 다를 수 있다. ‘문명의 충돌’,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을 너무도 경솔하게 사용하는 서구인들에게 너희의 관점이 틀리수도 있음을 이 책을 말하고 있다.

5.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가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의 몰락이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승리했으니 이제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덤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에서 타밈 안사리는 고개를 가로 젖고 있다. 아프카니스탄의 무슬림은 소련을 물리쳤다. 두 초강대국과의 대결에서 하나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이제 나머지 하나만 남았다. 이 급진파 무슬림들의 눈에는 역사는 이제 겨우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국을 궁지에 몰아 넣고 있지 않은가? 타밈 안사리는 2001년 9월 11일, 두 개의 세계사가 충돌했다면서 끝을 맺고 있다. 서로 다른 내러티브를 갖고 있는 세계사가 충돌한 것이다. 서로 대화가 되고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마주보아야한다. 그리고 같은 주제를 놓고 의견을 말해야한다. 그러나 저자 후기에서 말하듯이 서구의 세계사와 이슬람의 세계사는 너무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들의 말만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두 개의 세계사가 충돌한 현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저자는 해답을 내놓지 않고 끝을 맺고 있다. 그 해답을 찾는 것을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 놓았다.

대학시절 ‘무하마드 깐수’라는 교수님의 ‘아시아사’ 수강신청을 했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방학때 신문을 보고 나는 나의 눈을 의심했다. 한국말에 서툴렀던 그가 간첩 ‘정수일’이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A 폭격기’라는 별명 때문에 그의 강의를 수강 신청했던 나는 허탈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나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그런데, 임용고사 준비에 힘들게 지내던 나는 그가 전향서를 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재판을 받으면서도 컴퓨터 속에 담겨진 자료만이라도 출판하게 해달라며, 이것이 시대의 소명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순간! 그는 왜? 동서 문화 교류의 역사를 시대의 소명이라고 하며, 남과 북의 이념보다도 ‘동서 문화 교류사’라는 학문에 강한 애착을 느꼈을까? 나는 정수일 교수의 말에서 이 책에서 던져 놓은 해답을 찾고자한다. 정수일 교수는 세계사는 ‘문명의 충돌’의 역사가 아니며, 교류의 역사라 주장한다. 고대 스키타이인들의 교류에서부터 현대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문명은 서로 교류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교류가 있을 때, 문명은 사멸하지 않고 발전한다. 정수일 교수는 이것이 자신의 시대적 소명이라 말했다.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내러티브를 강요하는 관점에서 탈피해서, 서로 교류하며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세계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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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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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자’를 위한 노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님웨일즈의 아리랑은 상당히 유명한 책이다. 일제시기 항일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보았을 책을 나는 아직껏 읽지 못했다. 이번에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리영희 교수가 이 책을 국내에 들여와 처음으로 국내에 알려진 이 책에는 치열하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다 쓰러진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져있다. 패배 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승리를 꿈꾸며 패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내일로 돌진해간 혁명가들의 삶을 뒤따라가 보자.

1. 실패한 자에 대한 기록

조선의 혁명가 김산! 그는 책의 마지막장에서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 뿐이다.”라고 썼다. 김원봉이나 김구 처럼 항일 투쟁에 확실한 성공의 족적을 남기지 못한 그를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좋아하는지 이해 못할 수도 있다. 모든 역사를 성공한 자들을 찬양하기 위하여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끊임 없는 실패를 밑거름 삼아 찬란한 성공이 가능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수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갔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광복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게 쓰러져간 많은 사람 중에 김산(본명 장지락)이라는 한 사람에 관한 기록이다. 님 웨일즈와 연안에서 만남이 없었던들, 김산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2. 실패가 그를 강하게 만들다.

님 웨일즈는 김산과 대화를 하면서 그에게 점점 깊게 빠져들었다. 무엇이 님 웨일즈가 김산에게 빠져들게 했을까? 그것은 그의 불꽃 같은 ‘열정’ 때문일 것이다. 조선인 교사가 그에게 불어 넣었던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 그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도쿄로, 상하이로 긴 투쟁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톨스토이에서 공산주의자로 자신의 사상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의 심연에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혁명이 시작되자, 혁명 속으로 뛰어든다. ‘광둥코뮌’, ‘하이루펑 전투’에서 패배의 쓴맛을 맛본다. 이러한 실패는 시작에 불과했다. 뒤이은 두 번의 체포로 그의 몸을 병들게 되었으며, 일제에게서 풀려난 후에는 동지들의 의심 때문에 괴로워하며 ‘자살’과 ‘살인’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을 그는 이겨냈다. 그가 말하듯이, 그는 실패했지만, 그는 실패를 딛고 더욱 강해졌다. 중국혁명의 여세를 몰아, 조국을 자기 손으로 해방시키겠다는 불굴의 신념에 가득찬 김산! 그는 일제의 고문, 동지들의 모함을 이겨냈다. 아니,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였다. 모든 혁명운동이 실패하였고, 자신의 몸은 결핵으로 망가졌지만, 그는 자신에게 승리함으로써 더 강해졌다.

3. 강한자를 녹이는 사랑

김산은 아나키스트들과 어울리면서, 사랑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된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 보다 철저한 투쟁을 위해서 연애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한 김산! 이러한 김산의 모습은 대학시절 역사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연애는 나에게는 사치”라고 생각했으며 “역사책을 끌어 안고 지금 죽는다 해도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열정으로 가득한 혁명가 김산의 무쇠 같은 마음도 여성의 부드러운 손길에 봄눈 녹듯이 녹아 내렸다. 궁핀촌에서 한 여성을 잃고, 일제에 잡혀 사랑하는 류링과 연락이 끊겼다. 수많은 사랑이 스쳐 지나갔지만, 진정한 인연은 따로 있었다. 김산 그의 여자는 고문 후유증으로 결핵을 앓고 있는 그를 돌봐주었으며, 그를 만나러 왔다가 같이 체포되었으며, 김산이 풀려나자 그녀는 그에게로 다시 와서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그의 곁에 있게해달라고 하였다. 사랑은 위대하다. 김산은 위대한 사랑으로 지금까지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연안으로 갔다. 그리고 님 웨일즈를 만나 자신의 삶과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님 웨일즈의 글을 통해서 김산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김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산이 만주로가 항일 무장 투쟁을 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나는 상상했다. 그러나 김산은 캉성의 모함으로 ‘트로츠키주의자’, ‘일제의 밀정’이라는 죄목으로 비밀 처형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의 노력으로 1983년에 누명을 벗는다. 그는 그가 말했듯이, 실패했다. 그가 가고 싶어 했던 만주에도 가지 못하고 억울하게 연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그는 그 자신에게 승리하였고, 영원한 승리자로 우리가슴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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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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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사람들이 좋아할 책을 한겨레 출판부에서 쓰셨네요. 한겨레 출판부여 이책을 보고 한겨레21은 다시는 읽지 않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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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깽이 2012-11-19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근대론적 좌파의 시각에서 이완용을 비판한 책인데... 서평을 보니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셨더군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얼마든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은 합니다만... 이 책을 마치 뉴라이트 서적처럼 완전히 오해하신건 큰 실수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강나루 2014-01-1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오해 아닙니다. 다시 읽어 보세요.
 
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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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발칙한’ 평전을 쓰려다 ‘망칙한’ 평전을 쓰다.
-이완용 평전’을 읽고-

몇 년전에 교사 모임에서 한선생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이○○ 교수가 대학원 수업에서 “내가 보기에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완용이야! 이완용이 3․1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도 이를 일제에 알리지 않았으니까 3․1운동이 일어나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한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순간! ‘아, 저런 괘변을 늘어 놓는 사람이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니...’하는 탄식이 나의 가슴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모든 대학교수들이 지성인이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나보다 나을 수 있다는 환상은 사라졌다. 이때부터 매국노 이완용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다. 진정 나는 그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이완용 평전’을 보았다. 부재가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이라 적혀있었다. 이 부재 또한 이 책을 읽고 싶게 했다. 저자는 왜 이런 부재를 달았을까?

1. 분노하지 않고 이완용을 살피다.
저자 김윤희는 분노하지 않고 찬찬히 이완용의 삶을 서술해갔다. 대표적 매국노 이완용을 이렇게 분노하지 않고 살펴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들 정도로 김윤희는 천천히 이완용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뜻밖에 사실들도 전해 주었다. 이완용이 탐욕스러운 관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김윤희는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벌어진 여러 비리 사건들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그를 탐관오리로 비판하였으나, 당시의 만연한 부정부패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이완용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여자관계도 문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이완용하면 떠오르는 것은 『매천야록』에 며느리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고 이 때문에 아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당시 민중들의 이완용에 대한 시선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이야기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이완용의 삶은 정말 뜻밖이었다.

2. 그러나 저자가 놓친 사실들....
이완용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분노하지 않고 천천히 들여다 보는 것은 나름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진정 분노해야할 때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사람은 없다. 저자 김윤희는 너무도 냉정하게 이완용의 입장에서 그의 삶을 살펴보고 있었다.
‘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 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라고 이완용을 평가하는 김윤희는 을사늑약 체결과정을 서술하면서 그를 합리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김윤희의 침착함은 ‘을사조약은 고종과 9명의 대신들 누구도 찬성하지 않고 결정하지도 않은 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라는 결론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을사오적으로 지목된 이들이 을사 늑약에 찬성을 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발칙’하게도 김윤희는 이것을 정면으로 부인한다. 김윤희는 ‘이완용의 상소’를 근거로 하여 을사늑약의 자구 수정은 이미 고종과 함께 사전에 이루어졌으며, 이완용은 을사늑약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토는 고종의 명령을 따른다면, 동양의 대세를 알고 있다면, 조약 문구를 수정한다면, 그것은 찬성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5명의 대신이 찬성한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이때 이완용은 “신이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성상의 하교를 이미 참정이 성명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안건의 귀결은 이미 판가름 난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조금 전에 연석에서 주달(奏達)하는 일이 있게 되어 이러이러하게 아뢰었을 뿐이다. 그러나 끝까지 찬성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라고 밝혔다. …… 이완용은 고종과 합의된 대책이 이미 깨졌음을 알았고, 그다음으로 조약문을 개정하는 협상의 수순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윤희에게 묻고 싶다. ‘조약 문구를 수정한다면, 그것은 찬성이나 마찬가지’라는 이토의 주장이 잘못되었는가? 그리고 이완용의 논리대로 고종이 ‘하교’를 했다고 자구를 수정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조약 문구를 수정한다는 것은 조약을 찬성한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단호한 부정이 아니면 온건한 찬성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을사늑약 체결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그런데 단호한 반대를 국가 대신으로서 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찬성으로 해석된다. 설사 이완용의 논리대로 고종의 ‘하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나라의 대신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대를 했어야 한다. 그것이 나라의 대신으로서 ‘합리적’인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 김윤희의 ‘발칙’함은 사료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왜? 수많은 사료들 중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죄가 없음을 항변하기 위해서 올린 상소문을 선택했을까? 이완용에게 유리한 사료를 선택하고 그 위에서 당시 사건을 살펴보았으니 이완용에게 유리하게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 김윤희는 역사학자이다. 김윤희가 이것을 몰랐을까? 더욱이 “일본의 요구는 대세상 부득이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원만히 타협하여 한국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라는 이완용의 말은 그의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세상 부득이한 것”이라는 이완용의 말은 그가 을사늑약에 찬성했다고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김윤희는 이 사료를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김윤희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 망국의 책임을 고종에게 돌린다. “여론은 지배 엘리트들이 원하던 방향대로 흘러갔고, 을사5적은 고종이 져야 할 책임까지 모두 짊어져야 했다.”라는 지적에 대해서 나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나라가 망한 책임에서 고종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에도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며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 노력한 사람과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며 이후의 대한제국 병합에 앞장서고 친일의 댓가로 풍족한 여생을 보낸 매국노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설정이다.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비교하면서 고종보다 이완용이 덜 잘못했으니, 이완용은 잘못이 없다는 그릇된 논리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고종이 망국의 책임이 있다면, 국가의 대신으로서 이완용에게도 책임이 있다. 더욱이 이후 친일의 죄를 논한다면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고종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조선의 지배층을 무능하고 나약하게 그림으로써 일제의 침략을 합리화하려했던 식민사학자들의 관점을 김윤희가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선 멸망의 책임을 일제에 돌리지 않고 내부로 돌림으로써 일제가 얻으려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저자 김윤희는 이완용을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충성’은 병합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을사조약 체결 때 보여준 고종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완강한 반대만을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 철저히 현실에 순응하는 인물이었던 이완용은 병합을 피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대세를 인정하는 가운데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고민했을 것이다. 또한 왕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그로서는 고종과 순종의 부탁을 저벌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병합을 하더라도 지켜내야할 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과 조약 체결을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짤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김윤희의 글을 읽다보면, 고종과 순종이 나라를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했고 이 악역을 이완용이 했으며, 이완용은 고종과 순종에 대한 충성심에서 이러한 악역을 대행한 것처럼 읽혀진다. 이것이 나만의 오독일까? 고종이 내린 병합조약에 대한 지침과 관련된 사료를 제시하지도 않고 저자 김윤희의 추측에 의해서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완용의 입장에서 천천히 당시를 들여다 보고 있다. 나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더욱이 이완용을 ‘충성심이 남달랐’다고 서술한 부분에서는 무척이나 불쾌한 감정이 복받쳤다.
나는 이완용은 고종에 대한 충성심이 별로 없다고 알고 있다. 『매천야록』에는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기 위해서 이완용이 고종에게 칼을 겨누며 “폐하는 오늘날이 어떤 세상인지 아십니까?” 라는 말을 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종에 입장에서는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는 역할을 하기 보다는 민영환 처럼 자결을 하는 것이 더 충성스러운 신하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3. 친일파에게는 ‘입장 바꿔 생각해 봐!’가 통하지 않는다.
인생사를 살다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너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니?’라는 말이다. 타인을 이해할 때 가장 좋은 이 방법은 매국노를 이해할 때는 예외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역사적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인물의 입장에서 당시를 생각하면 당시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일이 당시로서는 ‘합리적’이었으며, ‘이해’가 된다. 그리고 불행한 것은 당시의 인물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인물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완용이 만약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매국노가 아니었을 거야.”라며 이완용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일제시대를 네가 살았다면 너는 친일파가 안되었어. 당시를 살았다고 모두 친일파라고 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도 친일파 매국노의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그들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든다.
역사적 인물을 바라보려면 당시의 인물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하지만, 다른 선택을 한 인물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정의’에 과연 부합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어떤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것이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따지기 보다는 먼저 그 일이 바른길이냐 어긋난 일이냐를 따져서 결정하라”라는 백범 김구의 말씀처럼 한 인물의 선택을 평가할 때도 그 인물의 선택이 과연 ‘합리적’이었느냐보다는 ‘정당’하였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단순히 ‘합리성’만을 따질 때는 친일파도 미화되기 십상이다. 김윤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한다며 이완용의 ‘합리성’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평가에 물타기를 한다. 김윤희여! 제발, 그러지 말아 주시오.

저자 김윤희는 기존의 이완용 평전과 다르게 그를 서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색다른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나치게 이완용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본 우(愚)를 범하게 한 것 같다. 다르게 서술하려는 고민보다는 책한권을 내기 위해서 많은 나무를 베어야하는데 이 책이 그러한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고민한다는 어느 학자의 말을 저자가 되새기길 바란다. 그리고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기에도 부끄러운 이 책을 많은 나무를 희생하면서 까지 발간한 이유를 한겨레 출판부에게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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