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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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원하는 것을 적어볼까요? 음... 크루즈타고 세계일주하기? 샥스핀과 캐비어로 식탁을 한달동안 도배하기? 오늘은 청담동 그녀와, 내일을 홍대그녀와 함께 놀기?... 이런 일을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살면 금세 질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삶의 공허가 닥칠 거라고 주변에서 지금껏 나를 가르쳐 왔다. 인간은 원래 삶의 의미를 찾고,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고 싶어하며, 그래서, 아마도 죽음 직전에는 “그래도 잘 살았다”라는 충일감을 가지고 눈을 감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나의 SNS에는 이런 경구가 떠 있었다.

 

“출근했으니까 영혼아 이따 봐.”

 

물론 일부의 행운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이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 직장인들의 심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전에 김지룡씨가 “차라리 병렬형 삶을 살아라”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성공한다” 중) 해야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병행해서 살아가라는 취지의 글이었는데 그 당시에 공감했었다. 대체 일과 삶이 함께 가는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될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앞의 경구가 유행하는 것처럼 현재는 일과 삶의 균형은 둘째고, 자신의 영혼을 어딘가에 저당잡혀야만 삶이 보장되는 시대다. (아니면 내가 지금껏 터프한 삶을 살아온 건지도 모르지만) 때문에 내가 지금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하라면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채워줄 수 있는,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무언가를 찾는 일”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얄밉게도 와타나베 이타루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서 그 일을 해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중간에 작두타는 것 비스끄레한 애기도 나온다. 삶의 고민에 지쳐 잠이 든 어느 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타루, 너는 빵을 만들어 보렴”하고 속삭였다고 한다. 이 말 한마디에 제빵사가 되기로 인생노선을 수정했다는 애긴데, 너무 꼬투리를 잡지는 말자. 무라카미 하루키도 데이브 힐턴의 2루타를 보고 작가가 되기로 했다지 않은가. 지은이가 진로문제로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구원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제빵사가 되기로 했다면 파리***나 뚜레** 체인점 하나 열어서 가정을 일구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게 해피엔딩일텐데(맞나?) 이 책의 저자는 자연과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견딜 수 없었다. 시스템을 탈주하여 “나답게, 자유롭게”,“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고, 그것을 생활의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과정이 이 책의 주요 줄거리이다.

지은이는 빵을 만드는 과정과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중첩시킨다. 이윤을 위해 인공적으로 배양된 이스트가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케 했다면, 발효하고 부패하는 균은 “순환” 속에서 삶을 유지시킨다. 부패하지 않는 돈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가능케 했고, 삶과 자연을 왜곡하는 모순을 만들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열심히 일할 수 있고, 좋은 음식과 술을 맛볼 수 있다면 누구나 즐겁고 넉넉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부패하지 않는 이윤 때문에 일과 먹거리를 파괴하는가? 중간 중간 막시즘과 자신의 경험을 섞어가며 지은이는 자신이 체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하고,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대안과 그 대안을 시행하기까지의 과정을 풀어놓는다. 책에는 단순하게 쓰여져 있지만- 예를 들어 “마음이 참 복잡했다” 같은 문장- 실제 저자에게는 인생의 큰 파도였을 것이다.

“힘들기도 힘들고, 지치기도 지친” 직장인들을 위한 책들이 있다. “아, 보람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사표의 이유”,“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 ”,“3만엔 비즈니스”,“적당히 벌고 잘 살기”,....... 한 쪽에서는 일 때문에 숨이 막힌다고 난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일이 없다고 난리다. “전부 자본주의 때문이야”는 만화 “엘리트 건달”에 나오는 농담이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토대를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왜 부장은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걸까? 왜 야근은 일상인 걸까? 월세는 왜 내야 하는 걸까? 지구를 자기가 만들었나?

마지막으로 행여라도 다른 삶을 꿈꾸는 내리막 시대를 사는 노마드들에게 저자의 충고를 전한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진리는 당장에 무언가를 이루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될 턱이 없다.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끝장을 보려고 뜨겁게 도전하다 보면 각자가 가진 능력과 개성, 자기 안의 힘이 크게 꽃피는 날이 반드시 온다.”

 

“ 우리 안의 힘이 당장에 꽃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자신을 키워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쉬지 않고, 싫증내지 말고, 자신을 연마하면 길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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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요시미츠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니체의 인간학”,“비사교적 사교성” 등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어디대학 교수라는데 지금도 재직하시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렇게 일본에서 지명도가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예를 들면 사사키 아타루 같은 철학자는 우리나라 신문지상에도 종종 등장하잖아요.- 저는 “일하기 싫은 사람을 위한 책”이란 책을 통해 이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께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먼 산을 바라보며 흔히 내뱉는 멘트가 있잖아요.

 

“그 날 이후로 내 인생이 바뀌었다”

 

예를 들면 박지성이 차범근 축구교실에 처음 참가한 날, 혹은 김연아가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날 같은 거겠죠.

먼저 “일하기 싫은 사람을 위한 책”을 소개하자면 제목과 달리 이 책은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가 아닙니다. 저자 특유의 인생론이 펼쳐져 있는데, “인생은 부조리다”라는 서늘한 문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저자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서 애기합니다. 대가가 된 사람, 어떤 분야의 성공스토리를 쓴 사람은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그런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어떤 결정적 순간이 “우연하게” 닥쳤다는 겁니다.(여기서 강조점은 “우연”에 찍혀 있습니다.) 저자는 정색하면서 말합니다. 재능이 개화하려면 어떤 사람과의 결정적인 만남이나 우연히 들어온 한권의 책, 우연히 겪게 된 한권의 책이 계기가 된다고. 만약 그 우연이 없었으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고. 책에는 주연배우가 쓰러지는 바람에 우연히 발탁된 모리 히쓰코, 책을 잘못 사는 바람에 평론가가 된 아키야마의 예가 나옵니다. 저자는 거듭 강조합니다. 인생은 부조리라고. 미켈란젤로의 재능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며 그 재능도 우연한 기회를 얻어 발휘된 것이라고. 그러니, 인생에 절망하지도, 열광하지도 말고 끝까지 음미하라고. 어찌보면 상당히 사람을 힘빠지게 하는 애기인데 이것저것 책을 읽다보니 정말 그런 순간을 맞이한 케이스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 야구장에서 시원한 2루타를 보는 순간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었다는 것은 분명 로맨틱한 성공스토리입니다. 그 자신도 “슬픈 외국어”에서 밝혔듯 안타가 날아가는 각도나 그날의 온도, 습도, 그 날 야구장에서 들리던 함성 같은 것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자신도 말했듯 그건 우연이었던 겁니다. 그가 슬픈 외국어에서 인용한 잔인한 대사(오손웰스의 영화라고 합니다.) 까지 나카지마 요시미츠의 허무감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마루야마 겐지.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끼적거리던 글이 아쿠타가와상에 당선되는 (그 때까지 최연소였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그 이후 무카라미 류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경신했습니다.) 문학지망생들이 들으면 열폭할 만한 스토리를 쓴 사람입니다. 실제로 당선 직후 겐지에게 소설가지망생들의 항의편지가 쇄도했다고 하네요.이 사람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묘한 분열같은게 느껴지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소설가라고? 분에 맞지 않아!"라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세이에도 등장하는 편집자의 말처럼 "당신은 문학을 싫어하지만, 문학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라는 느낌입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날 좋아해 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나오겠죠.)그리고, 가장 최근에 읽은 예로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와타나베 이타루입니다. 이 사람은 약간 신기까지 있는데, 회사에 다니며 장래를 고민하다가 어느날 잠결에 “빵을 만들어 보라”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제빵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명하거나 돈을 많이 번건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의 의미를 찾은 사람으로 성공케이스로 꼽고 싶네요. 아, “짚한오라기의 혁명”을 쓴 후쿠오카 마사노부도 있겠네요. 이 사람은 잠들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중 새벽에 별안간 대오각성을 하고 농부가 된 사람입니다. 이 후 자연농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데요, 와타나베 이타루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거짓말을 할 리 없으니 본인의 착각이든 뭐든 대충 진실로 쳐주는게 맞는 것 같네요.

저도 나카지마 요시미츠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만의 결정적 순간이 언제 닥칠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적이 있습니다. 3호선을 타지 않고 5호선을 타면 내 인생이 바뀔까? 혹은 두시 비행기가 아니라 여섯시 비행기를 타면 내 인생이 바뀔까? 두시 비행기는 추락하고, 여섯시 비행기 내 옆자리에서 어썸한 여인네를 만나지 않을까? ..... 물론 그런 일은 없었고, 지금까지 기다려 봐도 저에게 그런 결정적 순간은 없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인생론에서 말한 것처럼 시간이 지난 다음에 우리는 하나의 스토리로 각각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 내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루키에게 다시 기대자면 적어도 그런 순간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저에게 결정적 순간은 어쩌면 이 책을 발견한 것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군 복무 때 휴가나와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서점엘 가서 이 책을 골랐습니다. 휴가 중에 서점에 간 것도 미스테리한데 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저자의 책을 덜컥 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권의 책이 사람을 바꾸진 못하지만, 그 변화의 시작이 될 수는 있겠지요. 이 책을 읽고 나서 “끝까지 부조리를 응시하고 음미하는 삶”이란 태도를 접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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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는 어쩌면 사기꾼인지도 모른다.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장면을 꼭 써야 했다면 특별한 의미나 의도가 있어야 했지 않았을까. 어쩌면 일반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을 표현했다는 것 자체가 의도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이 영화를 본 동기는 이랬다. 섹스란 것이 ‘감춰진’ 상황에서 여자들은 섹스를 원할 때 어떤 방식을 취할까? 라스 폰 트리에는 어떻게 상상력을 발휘할까? 남자라면 쉽게 성을 구매하겠지만 말이다. (하긴 이것도 정답은 아니다. 신시티에 등장하는 캐락마냥 창녀들한테도 거부당하는 캐릭이 있을 것이다. 창녀라는 단어를 일단 써보자. 라스 폰 트리에가 니그로라는 단어를 쓴 것 처럼. 좀 나가자면 그는 위선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의 유태인 발언과 상황이 겹친다.)

그런데, 그게 너무 간단했다. 그냥 남자들과 눈을 맞추지고 웃는 것만으로도 주인공은 쉽게 섹스를 조달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그게 이해가 가는게 섹스에 적극적인 건 항상 남자쪽이고, 섹스에 능동적인 여자는 희소성이 있다. 그게 문화적인 학습의 차이때문이던, 씨를 뿌리고 싶어하는 남자의 유전자와 아이를 임신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여자의 유전자의 차이 때문이던 말이다. 내가 여자에게 눈을 맞추며 웃음을 짓는다 해도 섹스를 조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영프로다.( 혹시 내게 눈을 맞추며 웃는 여자가 있나? 주의해서 검색해 봐야 겠다.

1부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흥분하는 설정은 이미 <바람난 가족>에서 나온 것이다. 이해는 안 가지만 말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그리 파격적이거나 개성적인 감독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가 섹스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 태도나 그에 대한 셀리그먼의 반응은 이미 익숙한 것 아닌가? “구멍을 채워줘”라고 말하는 조의 모습은 배두나가 출연한 “공기인형”에서 “모든 인간은 내면에 빈 곳이 있어서 바람으로 채워야 한다”라는 대사에서 설명된 것 아닌가?

마지막에 개과천선을 다짐하며 기존 질서에 편입하려는 주인공을 또 다른 가부장적인 폭력(?)이 끼어들자 남근의 상징인 총이 등장하는 장면은 좀 블랙유머이긴 했다.

감독은 오히려 섹스에 대한 강박이 있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만든 것 아닐까? 섹스란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에서는 이해를 못할 것 같다. 여자 감독이 님포매니악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성이 얼마나 위력적이고 기존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지는 이미 많이 들어왔다. <영 앤 뷰티풀>의 주인공은 마치 김동리 소설(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사가 서로 싸움을 하는) 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처음 인생을 접하는 사람 특유의 고지식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 이사벨은 주변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매춘을 하는 건가 이 영화는 아직 이해를 못하겠다. 영 앤 뷰티풀한 시기에는 왜 몸을 팔고 싶어지는 걸까?

제목이 좋다. 영 앤 뷰티풀. 내겐 영한 시절은 있었지만 뷰티풀한 시절은 없었다.

음 그런 거구만 몸도 아무나 팔 수 있는게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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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참 잘 지었어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얼마전에 강호동이 가슴을 내밀면서 아빠니까라고 말하던 광고도 생각이 나구요(누군가에게는 아주 짜증나는 광고였을거라고 예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 비열한 광고였다는 느낌도 드네요) 저는 이 영화를 두 번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영화의 제목과 내용이 매치가 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영문제목인 LIKE A FATHER.LIKE A SON 이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버지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 것인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항상 비상했던 료타는 이번에도 빠르게 머리를 굴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 가출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있었을 테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아내의 상태를 고려할 때 자칫 두명의 아이를 전부 잃을 수 있는 가능성도 고려했을 겁니다. 때문에 확률적으로 자신의 품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케이타를 선택한건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끝에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아니면 류세이를 돌려보낸 게 진짜 부성인지도 모르지요. 류세이가 겪을 혼란을 피를 나눈 아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런 가정의 모습은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나오는 군요 그 영화의 료타 역시 남의 아들을 키우고 료타의 아버지는 이 영화의 료타처럼 사람을 차별하는 캐릭입니다.(“역시 그랬었군이라는 대사를 떠올려 보세요) 그 영화에서 똑같이 할머니로 출연하는 배우는 네가 진짜 자식을 가지면 달라질거다라고 료타에게 말합니다.

저에게 느껴진 료타의 변화라면 영화속 료타 친구의 대사처럼 료타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를 원하게 됐다일 겁니다. 어쩌면 료타는 자신의 아내조차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결혼해야 한다는 필요성, 그에 걸맞는 사회적 조건 등을 고려해서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고른 건지도 모르지요 . 더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얻어왔던 료타는 그 과정에서 상대방에게서 거부받은 경험도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런 료타가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대를 만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 상대는 자신과 가장 가까워야 할 아들입니다. 여기서 료타는 진짜 타자를 만나게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왜 아들을 사랑할까 하는 생각했습니다. 영화 초반 료타는 케이타에게 더할나위 없이 자상한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케이타가 닮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 순간 케이타를 류세이와 바꿔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료타가 케이타에게 보여 준 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 자기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료타는 케이타를 사랑한게 아니라 자신의 피를 받은 또다른 자기를 사랑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케이타가 타자로 드러난 순간 그를 버립니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분신인 류세이가 자신을 거부하는 순간 타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 아닐까요. 좀 묘한 상황인데, 료타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일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료타는 누군가에서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을 겁니다. 그래서, 케이타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운 것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아버지라는 카테고리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자신밖에 모르던 사람이 타자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에 관한 영화인지도 모릅니다.(“타자라는 표현 싫어하는데 자꾸 쓰게 되네요 단어에 너무 기름기가 느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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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카이지> 완결됐나요? 예전에 씨네 21의 오은하 기자가(요새 다시 글을 쓰시던 것 같던데) “아카데미 외국어 만화상이 있으면 주고 싶다라고 말한 만화이니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는 그림은 조악하지만 농담이 아니고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조잡한 그림으로 그려진 만화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려니 좀 묘하네요.

<은과 금>, <도박묵시록 카이지>, <무뢰전 카이>를 보면 조직이나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립하면서 독자적으로 삶을 헤쳐나가는 캐릭이 주인공들입니다. 그 주인공들이 위기를 헤쳐나가면서 자본주의와 세상에 대해 개똥철학이라고 하기엔 무거운 통찰들을 쏟아냅니다. <카이지>는 영화로도 제작됐죠. 주연이 후지와라 다쓰야 였을 겁니다. <은과 금>에서는 삼류건달이 이런 대사를 내뱉는 장면이 있습니다.

정의란 편의야... 그런 건 당연하잖아....”

 

이 장면이 떠오른 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봤을 때였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카메라가 의외로 조던 벨포트에게 친근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자기절제를 못하면 이렇게 X된다>라고 훈시하는 느낌이 없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벨포트는 감옥에서 테니스를 치고, 출소 후에는 자기계발강사로 살아가지요. 여기에 비참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관객이 벨포트의 삶이 비참하다고 느껴도 그는 그리 개의치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뼛속까지 상스럽고 천박하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들의 공통점은 천박함입니다. 스위스의 은행가부터 심지어는 엠마 이모까지 속으로는 fu..을 내뱉지요) 그는 정말로 자기 인생을 자기 식으로 산 겁니다. 마약과 섹스라는 쾌락을 좋아, 그 쾌락을 유지시켜주는 이라는 쾌락을 좋아서요

오히려 이런 점에서 그는 위선이나 기만이 없습니다. 심지어 아주 에너지틱하고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농구코트를 떠나지 못하는 마이클 조던처럼 자기 직업에 대한 애착도 대단합니다. 요즘 직장에서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지요. 상류층하면 번들로 나오는 우아함 혹은 위선이라는 이미지가 그에게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는 상류층이 아니라 늑대거든요. 영화에서 벨포트가 컨트리 클럽을 잘난 척 하는 부자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할 때 그가 그 곳에서 국외자임이 드러납니다. 씨네21에서 지적한대로 그와 <좋은 친구들>은 사자나 호랑이가 아니라 늑대입니다. 왕이 될 만한 힘과 기득권은 없고, 근성하나만 가지고서 틈새시장에서 남은 고기를 사냥하는 늑대들이죠. 때문에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막판에 배신을 때리긴 하지만) 무리를 짓는 연대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필패의 정공법은 피하고 편법으로 승부를 걸지요.

 

제가 <은과 금>을 떠올린 건 이 대목이었습니다. 영화 초반에 매튜 맥너커히가 연기한 벨포트의 상사가 벨포트에게 장광설을 늘어 놓는데 요점은 협잡입니다. 좋게 말하면 영업이지만 까놓고 말하면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지요. 로스차일드에서 쫗겨난 후 벨포트는 이 원칙을 충실히 지키며 오크몬트 어쩌구 하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근데 로스차일드에서 하는 협잡과 오크몬트 섬딩에서 하는 협잡이 차이가 있나요?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벌포트 같은 늑대들의 협잡을 정의의 이름으로 잡는 것 아닐까요? 어쩌면 미국이란 사회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협잡이란 이름으로 돌아가고 있고 정의는 힘있는 자들의 편의 같은 것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덴햄요원이 신문에서 벨포트의 체포기사를 보고 난 후 타고 있던 지하철의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봅니다. 혹자는 이 장면에서 권선징악의 안도감을 느끼겠지만 저는 오히려 쇼가 끝난 후의 공허감이 느껴졌습니다. 조던 벨포트는 사자나 호랑이가 아니라 늑대와

이리들의, 늑대나 이리조차 되지 못한 이들이 마음 한구석에서 꿈꾸는 것들을 실현시켰으니까요. 근데 영화에서처럼 허구한 날 마약하고 섹스하면 지겹지 않을까요? ? 그렇게 해보지도 못한게 꼴값하지 말라구요?

 

P.S. 영화를 보는 내내 트레인스포팅을 보는 것 같았다. 스콜세지 감독님, 회춘하시나 봐요? 근데 디카프리오 이 새낀 왜 이리 연기를 잘 하는 거야 얼굴도 잘 생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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