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1일 1식. 나같은 독신 남성에겐 복음과도 같은 애기다. 하루 한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간편하고 좋을까? 단식에 관한 담론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나구모 요시노리가 새로운 바람을 일키고 있다.

 

  나구모 요시노리 1일 1식, 50대에도 30대로 보이는 생활습관, 혹은 이시하라 유미의 공복의 힘

 

 

누가 들으면 배부른 헛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영양과잉의 시대라는 게 진실인지도 모른다.

 위의 책이 말하는 공통점: 소식할 것, 걸어다닐 것(이시하라는 근육운동도 강조한다) 아래를 따뜻하게 할 것(두한족열) 등등

 

 

위의 두 책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실험이 있다. 배불리 먹은 쥐보다 60%만 먹은 쥐가 오래 산다는 것. 이 실험은 <대머리를 기만하지 마라>라는 책에서도 나온다. 그러고 보니 소식열풍이라는 느낌도 든다. 따지고 보면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소식과 두한족열은 엣날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개백수 티비에서 진행자가 클로징멘트로 했던게 기억이 난다. 그 민큼 흔하고 우리가 알고 있던 비법(?)이라는 애기다.

오히려 하루 한번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에게 어필하나보다. 하지만, 나구모 요시노리도 책 안에서 "너무 엄격할 필요는 없다" 라고 말했듯 포인트는 하루 한번이 아니라 적게 먹는다라는 것  그 자체인 듯 싶다.

결국 1일 1식은 어떤 주간지에서 표현했듯 물리적인 한 번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생활태도이다.

요시노리가 말하는 생활태도는 어떤 면에서 구도자와 비슷하다. 배불리 먹지 않고 과자같은 미식을 좇지않으며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불금" 같은 건 없다.

 

나는 오히려 동의보감과의 관계가 신기했다. 동의보감에서는 사람의 수명이 120살이라고 한다. 재밌게도 요시노리는 사람의 수명이 120살이라는 애기를 서구의 이론을 예로 들며 설명한다. 요시노리가 동의보감을 읽었을 것 같지는 않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인간의 수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에서는 날 때부터 인간의 호흡수가 정해져 있어서 호흡을 조절하지 못하면 빨리 죽는다고 한다.반면 요시노리는 인간의 심장은 세포분영하지 않는다는 애기를 하며 (그래서 심장은 암이 없다)인간의 맥박 수가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운동을 하지말고 차라리 걷기를 하라고 한다.

 

다른책과으 공통점도 찾을 수 있었는데 도올릐 사랑하지 말자에서 도올은 수승화강의 원리를 설파한다. 블은 아래로 가고 물은 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이사하라 유미는 유독 반신욕과 하반신을 강조한다. 혈액순환이 안되는 곳은 손발이기 때문에 따뜻하게 하라는 것이다.두한족열이 어쩌면 수승화강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또 도올은 근대화이전의 우리 농촌 현실을 묘사하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은 가볍게 먹고 빨리자는 농촌을 묘사했다. 근데 이게 어딜 가나 똑같나보다. 이시하라도 이런 식으로 농촌 현실을 묘사한다.

책에 나오는 코카서스 장수마을의 일상도 별 차이가 없다. 도올과의 차이점이라면 도올은 다섯시 이후론 불식하라고 했다. 하지만. 두 명 다 저녁이 주식이다. 나구모 요시노리는 밥 먹으면 졸리기 때문에 그런 것 같고 이시하라 유미는 현대사회의 생활 스케쥴을 고려하는 것 같다.

 

다른 공통점 하나:  도올은 "꿈이 없는 잠"이 좋은 잠이라고 한다. 동의보감에서도 진인은 꿈이 없는 잠을 잔다고 한다. 나구모 요시노리는 잠은 시간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고 한다. 잠을 렘수면과 비렘수면으로 나누며 10시 ~2시의 비렘수면을 자라고 한다. 그리고 비렘수면은 꿈이 없다. 10시는 코카서스의 노땅들이 잠드는 시간이란다. 

 

하나의 차이라면 이사하라 유미는 체온을 강조한다. 옷을 두텁게 입으라고 하는 반면에 나구모 요시노리는 옷을 얇게 입으라고 한다. 추위를 느껴야 내장지방이 연소해 몸안이 따뜻해진 다나 뭐라나.

 

얼마전 황대권 선생님의 두 번째 첵에는 앞으로 굶주림과 추위를 참는 자가 살아남는다고 했다고 한다.어쩌면 이 두 저자는 혹시나 혹은 아마도 닥쳐올 궁핍의 시대를 예견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직접 소식을 해본 경험은 이렇다. 전투력이 상승하고 모소리가 가라앉고 진중해진다. 머리가 띵하긴 한데 묘하게도 술마셨을 떄 같은 흥분이 느껴졌다. 다시 밥을 조금 많이 먹는다 싶으면 바로 소호불량이다.

 

어쨋든 소식과 배고픔이 진실이라면 허탈할 것 같다. 기껏 배고픔을 잊기 위해 지금껏 달려왔는데 "이 산이 아닌개벼" 같은 애기 아닌가.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가지고 있은 것의 대부분은 쓸모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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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씨네21 터줏대감 중에 오은하 기자라고 있지 않았나요?  정훈이 만화에도 종종 등장하곤 햇는데, 이 분이 만화평론집도 냈죠. 제 기억으론 남편되시는 분이 <친구가 대부보다 낫다>고 말해 화제가 됐고 경제신문인가 근무하셨다가 숫자에 영을 하나 더 붙이는 만행을 저지르신 분이죠(쓸데 없는 게 왜 기억이 날까요) 각설하고, 이 분이 씨네 21에 쓴 칼럼 중에 <프렌즈>를 평론하신 글이 있는데요. 지금 생각나는 내용은 20대가 바라본 30대엿습니다. 보통 20대들은 30대를 엄청 멀리 느끼고, 서른이 지나면 인생이 끝장나는 줄 안다는 거죠. 하지만, 30대에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고 <프렌즈>를 보면 30대만의 공감대가 있다?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아마 삽화가 필자가 프렌즈의 등장인물들과 어꺠동무하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밑에 30대라고 쓰여 있었죠)

 

(여기부터 스포)

 

어제 <미래는 고양이처럼> 을 봤습니다. 음.. 소감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건조했습니다.<미 앤 유 앤 에브리원>에서 워낙 따뜻함을 보여 주었던 미란다 줄라이라  (지금도 마지막에 자막 보면서 화들짝햇던 기억이 납니다. 머야, 저 여자가 감독이었어?)   이 번 영화도 훈훈한 내용이 아닐까 했는데요. 영화 끝나고 전체적으로 객석은 뜨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제 5년 뒤엔 마흔이고 그 이후의 인생은 잔돈같은 거라고 (뭐야 이것들 나보다 더 젊잔아)  엤날엔 이 나이에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그래 후루야 미노루의 그린힐도 그런거야 5년 뒤엔 내가 뭐가 될 수 있을까같은 거)  하지만, 헤어드라이기를 파는 할아버지가 말하죠 " 난 62년동안 아내랑 살았는데 4년 산 자네들은 이제 시작이야. 잘 지냈어도 앞으로 상처주는 일이 생길거야. 자네들은 이제 시작이니까"  그 노인 말마따마 소피가 바람을 피우고 둘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고양이를 분양받기로 한 이들은 결국 <아버지,어머니>가 되지 못합니다.( 샘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생각나네요. 거기서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끝내 아버지가 되지 못합니다)   영화는 짐을 챙기는 소피를 제이슨이 멀거니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들은 다시 화해 할까요?  글쎄요, 아마 영화 오프닝에 "주인들이 웰컴 백이라고 말했어요"라는 꾹꾹이의 나레이션이 흐르는 걸로 보아 아마 이들이 다시 화해하지 않았을까요? 결국 이들은 <리틀 칠드런>일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진짜 어른이 될지도 모르죠. 근데 한번 생각해 보자구. 왜 꼭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가져야 어른인걸까?  혼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쩌구? 또 맨날 혼자 방바닥만 긁을 수 밖에 없는 나는 죽으라구?

 

아마 마흔이 되어도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내 인생은 여전히 시시껍질한 문제로 차 있고 삶은 그냥 그렇게 내 앞에 펼쳐져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나는 심드렁한 기분으로 나의 30대를 돌아보겠죠.그리고 다른 30대들을 바라보며 니네도 한철이야하고 읆조리지 않을까요. 먼 옛날 30대의 오은하기자가 그 글을 썼던 것처럼, 그리고 그 때 20대의 내가 그 글을 읽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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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장면- 

1. 중무장한 군인이 영화에서처럼 대오를 갖추고 들판에서 경계하면서 전진한다.. 순간 노인이 뛰어나와서 외친다. "이봐요 거긴 양귀비밭이요. 당신들이 지금 밭을 짓밟고 있어요. 다른 길을 안내해 즐테니 따라와요"

순간 총을 들고 바짝 긴장하며 전진하던 군인들은 <비현실>이 되고 <애들장난> 이 된다. 밭을 가는 노인들은 <현실>이 되고 총을 든 군인들은 전쟁놀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건 전쟁놀이가 아니다. 나중엔 실제 시체가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지구 한 쪽에 존재했었던 어떤인간의 역사와 일대기를 보는 것과 같다. 탈레반과 덴마크군이 전투 준비를 하자 민간인들은 대피를 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보면 꼭 탈레반이나 덴마크군이나 불청객처럼 느껴진다. 아무 관계도 없는 심술궃은 아이 둘이 서로 땅따먹기놀이를 하며 심통을 부리는 통에 어른들이 짜증내며 피하는 느낌이랄까. 영화속에 등장하는 아프간 노인의 말마따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다.

 

2. 아마도 아리안인 같은 느낌?  잘생기고 젊고 건장하고 몸에 문신을 한 군인이 탈레반  네명을 사살한 후 의기양양해서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손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 총을 쏘는 소리를 낸다. "틱틱틱틱틱틱"(자동소총연발음).... 이상하게도 내가 이 장면을 보며 느낀 감정은 그 군인이 <비참하다> 내지는 <측은하다> 였다. 후에 시상을 받는 장면에서도 왠지 이들이 김이 빠져 있다 내지는 아르마딜로 기지가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 뿐이었다.

 

3. 아주 옛날에 나왔던 영환데 샘 멘데스 감독의 <자헤드>란 영화가 있다. 난 이 영화를 보고싶었지만 아직 보지 못했다. 아마 이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내용 같았는데, 만약 사실이면 허구를 사실이 입증한 꼴이 되겠군. 더불어 예전 미군이 탈레반 시체에 오줌을 누던 사진이 생각났다. 이제 그 장면을 왠지 이해할 것 같다. (아, 물론 그 미군이 잘했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 다큐에 등장하는 미남 아리안 군인이나 오줌누던 미군이나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나에게 느껴진다. 오줌 미군은 단지 아리안 군인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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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마쓰모토 하지메) vs 돈 한 푼 안쓰고 일년 살기(마크 보일) vs 호모 코뮤니타스(고미숙) vs zero에서 시작하는 도시형 수집채집생활 (사카구치 교헤)

 

자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

일요일날 저녁 개콘을 보면서도 웃다가도 내일 출근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는 사람.  하기 싫은 일을 하며 그렇다고 일을 그만 둘 용기는 내지 못한다. 왜? 불안하니까. 그리고 돈이 없으니까.

 

그래서,아예 노숙 매뉴얼을 가르쳐 주는 책까지 등장. 정 안되면 노숙자들의 도시 채집이라도 배우세요. 이렇게 외친다. 회사 다니면서 우등반이라고 자신하는 당신! 당신 역시 각 잡힌 가난뱅이에요! 진짜 부자들은 몇 년 씩 놀아도 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구축한 사람이에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해요! 이런 체제로 자연을 소비하다간 전부 공멸할 거에요!.... 근데 지지리 궁상으로 살 각오를 하지 않는 담에야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럴때 가난뱅이의 선구자 마쓰모토 하지메한테서 다른 사람 한테 빌붙는 법을 배우자. 아니면 사카구치 교헤로부터 도시라는 정글에서 타잔처럼 물자를 채집하는 법이나 상자로 집 짓는 법을 배우자.

 

이들이 전부 주장하는 것은 시스템에서 벗어나세요!!

응? 그럼 난 어떻게 먹고살지? 그럴 때 대안으로 외친다. 공동체를 구성하세요!(호모 코뮤니타스),

증여하세요, 그렇게 해서 공동체를 만드세요!(돈 한 푼 안쓰고 일년 살기),사실 이 주장은 마쓰모토 하지메나 사카구치 교헤의 책에도 기본적으로 깔린 주장이다. 복잡하고 규모가 큰 사회는 결국 그것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계층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계층이 지배하는 시스템에 부속품처럼 관리된다. 그래서, 대안은 자율적인 소규모 공동체다.

 

웬만하면... 모두 좀 맘 편하게 살자...

 

p.s 슈마허의 <굿 워크>에 나오는 중간기술이라는 것도 이런 흐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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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명제가 있습니다.

1. 죽음보다 못한 삶도 있다.
2.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산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군요. 주인공이 한 나병촌에 들어가서 환자와 애기를 나눕니다. 죽어가는 나병환자는 이런저런 애기를 하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살아오면서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지..하지만 난 더 살고 싶어" (정확한 대사는 아닙니다.본 지가 오래되서) 이 대사를 떠올린 이유는 역시 니체가 자발적 죽음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신을 부정하고 자신이 운명의 주체로 서며 죽음까지도 스스로 결정하는 인간.그런 인간이 니체의 이상향일 것입니다.(중학교 때 들은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장 큰 죄악은 자살이라고 하더군요.감히 신이 내린 운명을 거역했다는 거죠.그 선생님은 아무 맥락없이 이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아마 선생님의 입장에서 학생들의 자살을 막기 위한 배려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스승님인 셈이죠)
 
제가 니체를 읽으면서 떠올린 작가가 있습니다.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입니다. 고졸 출신에 그 당시까지 최연소로 아쿠타카와 문학상에 당선된 사람입니다.(이 기록이 나중에 무라카미 류한테 깨졌나요? 혹시 아시는 분?)  
이렇게 말하면 무슨 엄청난 엘리트 적인... 
마치 엄청나게 섬세하고 천재적인 기인을 떠올리기 쉬우나....

 이 사람은 소설가가 아니면 깡패가 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느니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죠. 학창 시절에 하도 공부를 안 하고 말썽을 피워서 학교 측에서 졸업시험 때 답을 가르쳐 주면서 얼른 학교에서 나가라고 했다는 군요. 회사가 도산할 위기에 처하자 업무가 없어져서 남는 시간에 쓴 소설이 아쿠타카와 상에 당선되는,( 그 전까지 제대로 된 문학잡지 이름도 몰랐다는군요) 그야말로  문학지망생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은 사람입니다. 항상 "소설이라니,분수에 맞지 않아"하고 읊조리면서도 소설을 버리지 못하는 ,본인은 자기가 쓰는 게 아니라 그 누군가가 쓴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소설에는 엄청난 남성성이 흘러 넘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은 어떤 가요? "샐러리맨을 하려고 태어난게 아니야", "그렇게까지 살고싶은가", "삶의 의미 따위를 물어선 안 된다. 그랬다간 영락없이 신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이 사람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운명의 결정과 책임을 전부 스스로 떠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자살도 끼여 있습니다.마치 니체가 덕은 자신으로의 회귀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치의 기준을 철저히 내부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이들이 가장 경멸하는 것은 한 자리에 정착하고 조직에 속하고,회사에 출근하고, 가정을 이루고 편안히 늙어가는 것 입니다. 개인의 끝없는 자유를 추구하고, 삶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완전연소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의 소설에서는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에 대한 본능적인 적개심이 느껴집니다. 그런데,이런 주인공들을 보면 어째 냄새가 니체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됩니다. 어쩌면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그게 뭔지는 정확히 지어 말할 수 없짐나) 제가 둘을 좋아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자에 대한 태도도 같군요. 니체가 여자에게<채찍>을 가지고 가라고 충고한다면  이 사람은 여자가 뭐라고 하면 차라리 한 방 먹여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이 사람이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자신은 무뢰한 삶,완전연소의 삶만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자가 진정으로 산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라고요.  삶이라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에 대한 무한한 애착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원령공주의 나병환자라면 인간답지 못한 삶을 끝내기 위해 (들뢰즈처럼?) 자살하는 게 영웅적인 삶일까요? 아니면 삶 그 자체에 의미를 가지고 더 애착을 가지고 자연사를 기다리는 것이 영웅적인 삶일까요? 그도 아니면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나병환자들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 영웅적인 삶일까요?
여러분이라면 1번과 2번 중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추신:만약 죽음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진다면,,,, 이런 생각은 어떻습니까?  만약 내가 지금 당장 죽는 다면 나의 묘비명엔 어떤 문구가 새겨질까?...이렇게 생각하면 아무래도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아,삶에 관해 떠오른 생각도 있습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사의 삶이다" 저는 이 문장에서 니체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긍정과 삶에 대한 투쟁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과연 최고의 전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떠한 삶의 조건이 닥쳐와도 나의 삶을 축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 자신에게 물어보니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군요.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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