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요시미츠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니체의 인간학”,“비사교적 사교성” 등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어디대학 교수라는데 지금도 재직하시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렇게 일본에서 지명도가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예를 들면 사사키 아타루 같은 철학자는 우리나라 신문지상에도 종종 등장하잖아요.- 저는 “일하기 싫은 사람을 위한 책”이란 책을 통해 이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께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먼 산을 바라보며 흔히 내뱉는 멘트가 있잖아요.

 

“그 날 이후로 내 인생이 바뀌었다”

 

예를 들면 박지성이 차범근 축구교실에 처음 참가한 날, 혹은 김연아가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날 같은 거겠죠.

먼저 “일하기 싫은 사람을 위한 책”을 소개하자면 제목과 달리 이 책은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가 아닙니다. 저자 특유의 인생론이 펼쳐져 있는데, “인생은 부조리다”라는 서늘한 문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저자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서 애기합니다. 대가가 된 사람, 어떤 분야의 성공스토리를 쓴 사람은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그런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어떤 결정적 순간이 “우연하게” 닥쳤다는 겁니다.(여기서 강조점은 “우연”에 찍혀 있습니다.) 저자는 정색하면서 말합니다. 재능이 개화하려면 어떤 사람과의 결정적인 만남이나 우연히 들어온 한권의 책, 우연히 겪게 된 한권의 책이 계기가 된다고. 만약 그 우연이 없었으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고. 책에는 주연배우가 쓰러지는 바람에 우연히 발탁된 모리 히쓰코, 책을 잘못 사는 바람에 평론가가 된 아키야마의 예가 나옵니다. 저자는 거듭 강조합니다. 인생은 부조리라고. 미켈란젤로의 재능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며 그 재능도 우연한 기회를 얻어 발휘된 것이라고. 그러니, 인생에 절망하지도, 열광하지도 말고 끝까지 음미하라고. 어찌보면 상당히 사람을 힘빠지게 하는 애기인데 이것저것 책을 읽다보니 정말 그런 순간을 맞이한 케이스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 야구장에서 시원한 2루타를 보는 순간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었다는 것은 분명 로맨틱한 성공스토리입니다. 그 자신도 “슬픈 외국어”에서 밝혔듯 안타가 날아가는 각도나 그날의 온도, 습도, 그 날 야구장에서 들리던 함성 같은 것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자신도 말했듯 그건 우연이었던 겁니다. 그가 슬픈 외국어에서 인용한 잔인한 대사(오손웰스의 영화라고 합니다.) 까지 나카지마 요시미츠의 허무감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마루야마 겐지.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끼적거리던 글이 아쿠타가와상에 당선되는 (그 때까지 최연소였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그 이후 무카라미 류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경신했습니다.) 문학지망생들이 들으면 열폭할 만한 스토리를 쓴 사람입니다. 실제로 당선 직후 겐지에게 소설가지망생들의 항의편지가 쇄도했다고 하네요.이 사람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묘한 분열같은게 느껴지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소설가라고? 분에 맞지 않아!"라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세이에도 등장하는 편집자의 말처럼 "당신은 문학을 싫어하지만, 문학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라는 느낌입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날 좋아해 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나오겠죠.)그리고, 가장 최근에 읽은 예로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와타나베 이타루입니다. 이 사람은 약간 신기까지 있는데, 회사에 다니며 장래를 고민하다가 어느날 잠결에 “빵을 만들어 보라”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제빵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명하거나 돈을 많이 번건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의 의미를 찾은 사람으로 성공케이스로 꼽고 싶네요. 아, “짚한오라기의 혁명”을 쓴 후쿠오카 마사노부도 있겠네요. 이 사람은 잠들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중 새벽에 별안간 대오각성을 하고 농부가 된 사람입니다. 이 후 자연농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데요, 와타나베 이타루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거짓말을 할 리 없으니 본인의 착각이든 뭐든 대충 진실로 쳐주는게 맞는 것 같네요.

저도 나카지마 요시미츠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만의 결정적 순간이 언제 닥칠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적이 있습니다. 3호선을 타지 않고 5호선을 타면 내 인생이 바뀔까? 혹은 두시 비행기가 아니라 여섯시 비행기를 타면 내 인생이 바뀔까? 두시 비행기는 추락하고, 여섯시 비행기 내 옆자리에서 어썸한 여인네를 만나지 않을까? ..... 물론 그런 일은 없었고, 지금까지 기다려 봐도 저에게 그런 결정적 순간은 없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인생론에서 말한 것처럼 시간이 지난 다음에 우리는 하나의 스토리로 각각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 내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루키에게 다시 기대자면 적어도 그런 순간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저에게 결정적 순간은 어쩌면 이 책을 발견한 것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군 복무 때 휴가나와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서점엘 가서 이 책을 골랐습니다. 휴가 중에 서점에 간 것도 미스테리한데 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저자의 책을 덜컥 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권의 책이 사람을 바꾸진 못하지만, 그 변화의 시작이 될 수는 있겠지요. 이 책을 읽고 나서 “끝까지 부조리를 응시하고 음미하는 삶”이란 태도를 접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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