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9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9권을 이야기해줄게. 9권의 이야기 시작은 군산에 퍼진 전염병 이야기란다. 그렇게 심한 독한 감기는 처음이라면서, 약을 써도 속수무책이었고 죽는 이들도 많았어. 손판석의 막내도 독감에 걸렸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단다. 손판석의 집뿐만 아니라 한 집 걸러 초상을 치렀어. 당시 기록에 의하면 평안남도와 전라북도에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이 약 1100명이었다고 하는구나. 이 전염병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돌고 있던 스페인 독감이었단다. 일제 침략기이다 보니 나라에서 전염병에 대한 대책이 없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구나. 안타까운 일이구나.

송중원은 감옥에서 출옥한 후 고향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후유증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쇠잔해 있었단다. 송중원의 동생 송가원은 경성에서 의대에 다니고 있었고, 형의 소개로 알게 된 허탁, 박정애 등과 알고 지냈어.

….

친일파로 돈을 벌어 55세 생일 잔치가 벌였던 이동만 기억나니? 이동만은 돈 욕심에 일본인과 사금 사업까지 벌였단다. 사금이란 것은 광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금을 채취해 내는 것이란다.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잘못하면 망할 수도 있는 사업.. 망해라이동만의 아들 이경욱은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친일파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은 사회주의 활동을 했어. 이경욱은 스승 고서완의 조언대로 판사가 되어 조선의 백성들을 도와주기 위해 판사 시험을 준비했단다. 하지만 두 번이나 계속해서 떨어지고 말았어. 머릿속에 온통 옥비 생각뿐이라서 그런 것 같구나. 옥비는 옥녀가 예인 활동하면서 새로 지은 이름이란다. 아빠가 옥비와 옥녀 이름을 혼동해서 쓸 수 있는데 같은 사람이란다.

이경욱은 계속 옥비의 행방을 찾아 다녔어. 그러다가 옥비가 일본 놈에 의해 순결을 잃었고, 그 일에 자신의 아버지가 깊숙하게 관여되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했단다. 이경욱은 옥비가 서울로 갔다가는 소식을 듣고 그도 서울로 향했단다. 이동만의 사금 사업의 결말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구나. 그 사금 사업이라는 것은 사실 일본인들이 사기를 친 것이야. 이 일로 이동만은 쫄딱 망하고 그 충격으로 논바닥에 쓰러져 죽고 말았단다.

 

1.

김제에서 동척(동양척식회사) 소속의 소작인들이 대규모 소작쟁의를 일으켰단다. 이것의 배후에는 신간회 김제 지부가 있는데, 신세호도 신간회 김제 지부의 간부로 일하고 있었고, 차득보도 참여하고 있었단다. 이 소작쟁의를 통해 소작료 인상 철회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했어.

….

1929 11 3일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단다. 이것은 아빠가 다른 책을 이야기해줄 때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요지는 우리나라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싸움이 일어났는데 우리나라 학생들만 경찰서에 갇히면서 시작되어 이웃 학교들이 동맹 휴학으로 동참하면서 그 동안 쌓여왔던 불만들을 터뜨리면서 항일 운동으로 전개되었단다.

======================

(76)

그런데 광주의 여러 학교 학생들이 그렇게 연대투쟁에 나선 것은 조선 여학생이 희롱당한 것에 대한 감상적인 민족감정의 발로거나 충동적인 젊은 혈기의 폭발이 아니었다. 3.1운동 이후부터 전국의 수많은 학교들은 끊임없이 동맹휴학을 일으켜왔다. 어느 학교에서나 학생들이 내세운 맹휴의 이유는 거의 동일했다. 일인 교사나 일인 교장의 배척,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조선어교육의 강화, 조선인 교사들의 학대 같은 것을 내세웠다. 그건 단순한 교내문제가 아니라 학생의 입장에서 전개한 맹휴투쟁은 사회주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차츰 빈번해지고 격렬해졌던 것이다. 그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비밀조직이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으로 송가원도 참가를 했고, 보름이의 장남 오삼봉도 참가를 했단다. 세월이 빠르게 흘러 보름이의 장남이 벌써 어엿한 청년이 되었구나. 오삼봉은 이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잡혀 징역을 살았단다. 보름이는 서무룡에게 부탁을 해서 징역형을 1년으로 감형을 받았어. 서무룡이 참 못된 놈이지만, 그래도 보름이에게는 진심이었던 것 같구나. 목포에 살고 있던 박건식의 장남 동화도 이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들리고 퇴학까지 당했단다. 우리나라는 나중에에 이 광주학생운동을 기리기 위해 11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단다. 아빠가 어렸을 때 학생의 날, 학생들은 왜 안 쉬는지 불만을 가졌던 기억이 있구나…^^ 지금이라도 쉬면 너희들이 좋을 텐데

 

2.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송수식은 걱정이 많았어. 독립운동 단체의 갈등은 점점 심해지고 통합이 되지 않고 있었고, 이런 와중에 신채호 선생께서 투옥되시고 말았단다. 독립운동의 큰 기둥이었던 신채호의 투옥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좌절감을 주었어. 송수익은 이회영, 김원봉과도 교류하였단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조선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기도 했는데, 코민테른에 위해 1 1당 정책으로 조선공산당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단다. 중국공산당도 11당 정책에 따라야 한다면서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지했어. 어쩔 수 없이 조선공산당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단다. 그러면 조선공산당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김원봉은 개인의 의견을 존중한다면서 각자 판단하라고 했단다. 의열단에서 활동을 하든 중국공산당원이 되든 우리의 목표는 한가지라고 말이야.

======================

(103)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의열단의 정신과 목표를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최고 최대의 대의는 조선의 독립입니다. 그건 우리의 유일한 길이며 최후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쟁취하기 위하여 결속했고, 투쟁해 왔고, 앞으로도 투쟁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투쟁과정에서 상해임정과 협조했고, 중국공산당을 도와 광동코뮌에서 싸웠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도 동참했습니다. 그건 우리의 최우선의 목표인 독립을 성취시키기 위해 모든 세력과 협조하고 연합하자는 우리 의열단의 투쟁방법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우린 독립을 위하여 어린아이들의 힘까지 빌려야 할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모든 항일세력들과 연합하고 결속하고 통일체를 이루는 노력을 변함없이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공산당의 입당은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강압적인 필요는 없고 자율적으로 선택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까지나 의열단이며, 그 문제로 하여 우리 의열단은 추호의 변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것은 인민대중과 결속하여 투쟁을 확대해 나가는 방법과 인민존중의 사상에 공감하는 것이지 의열단의 근본 정신과 목표를 훼손하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좋은 일례가 광동코뮌에서 싸우는 동시에 변절자가 된 박용만을 제거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이 기회 의열단원의 임무와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바랍니다.”

김원봉이 총괄적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단원들을 휘둘러보았다.

======================

그런데 한가지 의아한 것은 의열단이 변절자 박용만을 처단했다는 소식이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국민군단을 이끌었던 박용만이었어. 야비한 이승만과 날을 세우며 국민군단을 이끌었던 이였는데 변절을 했다고? 의열단이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아빠가 좀 찾아보니 박용만의 변절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명확하지 않다고 하더구나. 여전히 논란이 있다고 하는구나. 의열단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

(104)

김원봉이 언급한 박용만은 바로 하와이에서 건너온 박용만이었다. 그는 변절한 밀정으로 판명되어 2년 전에 의열단원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의 변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구구하게 말이 많았다. 그 말들을 간추리면 변절했다, 아니다, 하는 엇갈린 주장이었다. 그것은 박용만이 그만큼 지명인사이기 때문이었고, 변절자로 죽어간 그의 죽음이 또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죽고 없었다. 어쨌거나 의열단에서는 그만한 인물을 죽이기로 결정하기까지는 확실한 근거를 확보했을 것이고, 박용만의 죽음은 실망스러운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

일제의 강압에 살기 어려웠던 우리 백성들하늘도 도와주지 않는구나. 어느 해는 대홍수가 발생해서 간척지에 있던 논과 집이 모두 물에 잠기고 말았어. 그뿐만 아니라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2657명이 죽고, 37438호의 집이 물에 잠겼다고 하는구나.

….

공허 스님은 서울에서 송가원을 비밀리에 만나는데 그 자리에 옥비를 데리고 갔어. 옥비는 한남권번에서 소리꾼으로 일하고 있었단다. 송가원은 옥비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옥비도 송가원을 보고 한눈에 반했단다. 이경욱은 옥비를 보려고 경성에 왔다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선배 홍명준을 만났단다. 홍명준으로부터 만보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작년에 강준만의 <한국근대사 산책> 이야기를 할 때도 해주었는데 기억나는지 모르겠구나.

만보산 사건은 1931년 만주 지역에서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의 일상적인 충돌이 있었는데, 일본경찰이 개입하여 과잉 진압을 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단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과 조선의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일부로 개입한 것이었어. 일본 경찰의 의도대로 국내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단다.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을 공격하고안타깝게도 일본의 이간질이 제대로 성공했구나.. 중국까지 차지하려고 야심을 품은 일본은 1931 9 18일 일본관동군을 이끌고 만주를 침략했단다. 독립운동은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단다.

======================

(250)

송수익은 눈을 내리감았다. 이회영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분은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만주의 상황은 돌변하고 있었다. 독립군들이 처한 입장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바로 후방이 전방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무정부주의 투쟁도 새롭게 계획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직의 총력을 만주에 집중시킨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구체적인 투쟁사업을 정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회영은 작년 11월에 만주를 향해 상해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대련에 내리자마자 수상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에서 밀정에게 탐지되어 미리 연락이 취해져 있었다. 이회영은 고문을 못 이기고 다음 달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분은 떠났지만 그분과 함께 세운 계획은 남아 있었다.

======================

 

3.

하와이에서 일하고 있는 방영근. 고국에 꼭 돌아가겠다는 의지로 계속 결혼을 미뤘는데, 주위의 소개로 늦장가를 들게 되었고, 아들을 셋이나 낳았단다. 하와이에도 박용만의 변절 소식이 전해지면서 큰 파장이 일었어. 그들도 박용만의 변절에 믿을 수 없다는 이들도 많았어. 그러면서 그들이 낸 세금과 헌금이 또 이상한 곳에 쓰였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세금과 독립헌금을 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도 있었어. 얼마 뒤 김구의 한인애국단 특별헌금 모집이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로 인해 이 특별헌금도 어렵게 마련되었다고 하는구나. 김구의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후에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소식으로 전해졌단다.

다시 국내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가끔씩 이야기해주는 삼형제 정재규, 정상규, 정도규의 이야기도 해줄게. 정재규는 결국 논과 집을 모두 날리고 초가집에서 지내면서, 아내가 바느질삯으로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지냈어. 그런 형을 거들떠보지는 않는 정상규는 여전히 소작인들을 갈구면서 논을 넓혀갔단다. 막내 정도규는 사회주의 활동으로 감옥에 갔다가 3 6개월만에 풀려나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여전히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고 회유와 협박이 이어졌단다. 그런 감시에도 정도규는 고서완과 함께 계속 공산주의 활동을 비밀리에 했단다.

송가원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어. 옥비가 보름마다 찾아와서 공허스님의 심부름이라고 하면서 용돈을 주고 갔단다. 겉으로는 서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 둘을 훼방 놓는 이가 있었어. 박정애의 동생 박미애였단다. 박미애는 그야말로 돈만 많고 무식하고 사치덩어리 여자라고 생각하면 돼. 하지만 송가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쓰는 그런 여자였단다. 옥비를 찾아가 자신이 가원의 약혼녀이니 만나지 말라고 협박도 했어. 결국 송가원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동침까지 해서 송가원에게 족쇄를 채웠단다. 당시는 그런 시절이었지. 가원은 여전히 옥비를 그리워하고 있었지만, 미애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단다.

여기까지가 <아리랑> 9권의 이야기란다. 등장인물이 많다 보니 정리해서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구나. 아빠가 이야기해준 인물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단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너희들이 커서 직접 읽어보는 것으로이젠 <아리랑> 세 권이 남았구나. 아빠가 부지런히 이야기해줄게. 그나저나 이런 아픈 역사의 이야기가 채 100년도 안되었다는 것이 가끔 믿기지 않는구나.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군산부두에는 포근한 햇살과 함께 봄바람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러면서 그는 털퍽 주저앉고 있었다.



차득보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담배를 깊이 피웠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해가 막 떠오르는 순간 바람결이 휘익 스치고 지나갔다. 그 문득 스치는 바람결을 한두 번 느낀 것이 아니었다. 햇살이 쫙 비치면서 일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바람이었다. 그건 해가 내뿜는 힘이었다. 누구에게 들은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농사를 지어 갈수록 해가 얼마나 오묘하고 큰 힘을 지녔는지 깊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농사는 사람의 힘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가 해의 힘으로 지어졌다. 사람의 힘은 그저 잔일을 거들 뿐이었다. 해와 땅과 물, 그것들이 어우러져 벼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이삭을 맺게 했다. 그것을 한문으로 하면 火•土•水였다. 신세호 선생 앞에서 늦공부를 하며 뜻인지 잘 몰랐었다. 그런데 농사짓는 세월이 쌓이면서 그 뜻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 P69

송수익은 지금도 독립투쟁의 가장 효과적인 방략은 모든 세력들이 화합적으로 뭉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만주의 삼부는 29년 3월에 제2차 통합회의를 개최하여 다행스럽게 자치기관으로 국민부를 조직했다. 그런데 7월에 신민부의 군정파를 이루고 있는 김좌진의 다시 한족총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어 분리되어 나갔다. 또 통합체의 한쪽이 허물어진 상태가 된 것이었다. 국내에서 발족된 신간회의 영향으로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은 그 상태로 끝나고, 사회주의 단체들과의 연합이란 막연한 일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만주와 같은 시기에 한국유일독립당촉진회를 만들었던 상해임정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여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 P95

하와이의 조선 사람들은 세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그 누구든 자식들에게 다시는 농장생활을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들의 고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들의 고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님들의 마음이었다. 농장생활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학교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열은 더없이 뜨거웠다. 둘째, 법에다 김치를 먹듯이 조선사람으로서의 생활과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여름뿐인 땅이었지만 해가 바뀌면 꼭 설을 쇴고, 비록 양주를 따라올리더라도 꼭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셋째, 어떻게 해서든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만이 아니었다. 실생활에서 노란둥이라는 차별에다가 나라 없어서 당하는 설움이 겹쳐지고 있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무시와 멸시 그리고 손해를 언제나 당하며 살고 있었다. - P161

"그려, 나가 공산주의 변호인도 아닝게 그 말언 그만 허세. 근대 우리가 한 가지 명심헐 것이 있네. 자내가 나나 멀라고 만주짱서 요 고상덜얼 허고 있능가? 그야 천번 만번 물어도 대답언 똑겉이 독립, 독립얼 위해서 아니여?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무정부주의자든 조선사람이먼 그 목적은 다 똑겉이 한나여. 단지 목적얼 달성허는 방법으로 서로 다른 주의럴 택런 것뿐이란 말이시. 근디 주의가 다르다고 혀서 서로 미와허고 등지고 싸와서야 되겄능가. 아니여, 서로 돕고 손얼 잡고 연합혀야 혀. 우리 의열단이 중국공산당이나 조선공산당얼 도운 것언 다 그런 뜻 땀시여. 자네넌 공산주의자덜얼 원수 대허디끼 허는디, 나넌 시방 송 선생님 밑에서 무정부주의 투쟁얼 허세만 언제 또 공산주의자로 활동헐란지 몰르네. 독립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허먼 주의야 언제든지 바꾼다는 것이 내 주의잉게로. 글먼 그때 가서 자네 나 가심에다 총질헐랑가?" - P174

다시 말하면 조선농민들은 긴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투쟁의 방법과 기술도 다양하게 가지고 있다 그겁니다. 그건 바로 무엇입니까? 혁명적 잠재력입니다. 총독부가 발표한 것을 보면 지난 10년 동안에 노동쟁의보다 소작쟁의가 세 배 네 배로 많이 일어났던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그 혁명적 잠재력의 폭발인 동시에 우리의 운동을 그만큼 빨리 흡수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해왔습니까? 그저 무조건적으로 쏘련의 이론을 우리에게 적응시키려고 급급하면서 노동자 우선, 농민 경시의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건 우리가 저지른 큰 불찰이고 오류입니다. 물론 운동지도층이 도시 중심의 지식인들이었으니까 농민들의 그런 특질을 잘 모르고 소홀히 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도 쏘련이론의 맹목적이 추종과 무조건적인 대입을 심각한 문젭니다. - P2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1-42)

헐버트 눈에 비친 서울은 자연의 상쾌함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첫 편지(1886 7 10)에서 서울은 쾌적한 도시입니다. 제가 얼마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면 어머니는 안도하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그는 또 신문 기고문에서, “서울은 높이 치솟은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원형극장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산 정상을 따라 만들어진 서울의 성벽은 거리가 5~6마일 정도가 된다. 높이는 몇몇 곳에서는 2,000 피트도 더 된다. 도시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이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라며 서울의 공기를 반복적으로 칭찬하였다. 서울에는 매가 머리 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맴돌고, 밖에 나다니면서 정신을 못 차리다간 뱀이 목덜미에 떨어질 판이라고도 했다.

 

(47)

헐버트는 영어에서 학생들이 ‘f’‘r’, ‘v’, ‘th’ 등의 발음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발견했다. ‘will not’‘willot’으로 발음하는 등 연어 발음에서도 어려움이 나타났다. 헐버트는 학생들이 장치 국제무대에서 영어를 원활하게 구사해야한다면서 발음 교정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문장 암송이 영어 공부의 첩경이라며, 학생들이 문장을 완전히 암송해야만 집에 갈 수 있게 했다. 학생들은 한문 서예를 공부해서인지 펜으로 영어 쓰기는 아주 잘했다. 일부 학생은 심지어 자신보다 더 잘 썼다고 회고했다.

 

(59)

헐버트는 조선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제대로 볼 책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이 직접 서양에서 가르치는 근대 서적을 출판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1890 1 27)에서 저는 조선인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이 저를 붙들도록 하겠습니다.(I am going to make myself so valuable to Koreans that they can afford to let me go.)”라면서 조선에 계속 남아 종교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정치경제, 국제법 등을 망라한 서양의 근대 서적을 조선 글자로 소개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조선의 전설과 신화를 수집하고 있으며 앞으로 책을 낼 예정입니다. 조선어와 여타 언어 사이의 유사성도 연구하고 있습니다.”라며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뒤이어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에만 관심이 있다면서 자신은 수학책도 소개하고 학교용 교과서 출판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헐버트의 이러한 결기는 조선이 근대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진정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사민필지>의 저술과 교과서 편찬 등의 결과물을 낳는다.

 

(77)

그는 또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했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글자 하나당 발음 하나의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 수백 년 동안 존재했다. 감히 말하건대 아이가 한글을 다 떼고 언어생활을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영어 ‘e’하나의 발음과 용법의 규칙과 예외를 배우는 시간보다 적게 든다.”라고 조선어가 영어보다 우월함을 설파했다. 그는 이어서 어떤 문장에 영국인들이 스무 단어를 써야 할 때 조선인들은 열세 단어만 쓰면 된다.”라고 조선어의 언어학적 우수성을 갈파하였다. 또한, 동사의 어형 변화 형태를 설명하면서 영어 ‘give’와 우리 말 주다를 비교하였다. 그는 “’준다의 어근이며, ‘주게는 미래시제의 어근이고, ‘주어는 과거시제의 어근이다. 직설법 형태의 어미는 모두 이지만 어간과 어미 사이의 음절 이 들어가 주난다가 되고, 이를 준다로 줄여서 말한다.”라고 풀이하여 언어학의 천재성을 과시했다.

 

(86)

<사민필지>는 단순한 세계지리 책이 아닌 각 나라의 사회제도를 폭넓게 담은 일반사회책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서양에서 출판된 지리, 사회책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회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사민필지>는 머리말에 이어 태양계, 땅떵이(지구)를 설명하고, 이어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순서로 각 대륙의 나라를 개별적으로 소개하였다. 각 나라 설명에서 조선인들의 상식이 미치지 못하는 종교, 군사력, 정치체계, 사회제도 등을 담았다. 헐버트는 각 나라의 정치체계를 설명하면서 정사를 임금이 마음대로 하는 나라와 백성의 주장을 존중하는 나라로 구분하였다. 미국은 대통령을 4년마다 선출하고, 국민 대표기관인 의회가 있고, 재판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하였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 주권재민 사상을 심어주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여긴다. 헐버트는 또 각 나라를 4등급으로 분류하여  정치체계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였다. 1등급은 미국을 포함해 12개 나라이고, 러시아, 일본은 2등급에, 조선은 청나라와 함께 3등급에 분류되었다. 조선은 전제군주의 나라로 신분제가 있고, 한자를 힘써 공구부하고 유고만을 준행하며, 신앙의 자유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124-125)

헐버트는 한국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과서 체계를 갖추는 일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한성사범학교에 재직하던 1900년 봄 새로 부임하는 학부대신을 만나 교과서 편찬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여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고 한 편지에서 밝혔다. 여름에는 수학책을 완성하여 학부에 넘겼다며 곧 책이 출판될 것이라고 했다. 학교들로부터 여러 종류의 교과서 중문이 쇄도하고 있다고도 했다 관립중학교 시절인 1902년에도 교교서 발간을 위해 자금을 댈 단체를 고위 직급의 한국인들과 함께 구성하였으며, 보통학교에서 사용할 12권의 책을 결정하여 곧 인쇄에 들어갈 것임을 밝혔다. 그동안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책 발간이 어려웠는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뻐하였다. 각 책 당 5,000부를 찍고 책값도 비용을 감당하는 수준에서 책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책들이 전부 한글로 출판되기에 한자에 대한 오랜 투쟁의 승리하고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책들이 어떤 형태로 출판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그가 교과서 편찬에, 그것도 한글로 된 교과서 편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127)

헐버트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주권을 잃지 을사늑약 다음 해인 1906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면서 한국인들에게 교육에 전념하여 힘을 기르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은 미개해서 자치 능력이 없다고 국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일본인들의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라며 한국인들에게 교육을 통해 일본을 따라잡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는 또 미국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 정신을 위배했다며 지금이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한국에 교육 투자를 강화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교육에 대한 투자에서 가장 크게 효과를 낼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이 말은 한국인들의 깊숙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라며 한민족의 성공 잠재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142)

대한제국의 안녕과 근대화는 나를 비롯한 이곳 외국인들도 마음속 깊이 원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독립은 한국인들에게만큼 나에게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한국인들의 삶과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이란 마음대로 행동하는 방임이 아니다. 타인의 희망과 권리를 무시하는 독립은 무정부상태가 뒤따른다. 진정한 독립이란 국가든 개인이든 자연물이든, 어떤 존재가 추구하는 최상의 목적을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받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아직 자유를 살짝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앞으로 대한제국은 어느 나라로부터도 종속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랜 세기에 걸쳐 응고된 자만심, 이기심, 편견의 족쇄도 걷어차야 한다. 오랜 세기에 걸쳐 응고된 자만심, 이기심, 편견의 족쇄도 걷어차야 한다. 국가의 모든 힘을 인민의 삶의 질 향상에 쏟아부어야 한다. 대한제국은 방해받지 않고 자신이 세운 최상의 목표를 달성하는 길로 들어서고,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교양 있는 충성스러운 인민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들어섰을 때만이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대한제국의 안녕을 참으로 바라는 한 사람이 한민족의 행운을 간곡하게 빈다.” 대한제국이 어떤 독립을 이뤄야 하는가를 명쾌히 제시하였고, 헐버트의 한민족 사랑이 오롯이 담겼다. <독립신문> 영문판은 헐버트의 연설을 대한제국이여 전진하자라고 이름 지으며, “헐버트의 연설은 모든 참석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라고 보도했다.

 

(150-151)

만약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과도한 지적 부담을 주고, 시간을 낭비하고, 반상제도를 고착시키고, 편견을 추구기고, 게으름을 조장하는 한자를 내던져 버리고 자신들이 모든 소리글자 체계인 한글을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데 너무 늦다는 법은 없다. 이제라도 한글을 써야 한다.”

헐버트는 또 1896 10 <조선소식>  “나는 영국인들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조선인들도 결국 한자를 버리리라 믿는다.”라고 하여 이미 백 년도 훨씬 전에 한글 전용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전용하고 한자가 보완적 기능을 하는 현실을 보면서 헐버트의 예지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88-190)

헐버트는 대중음악의 대표 노래로 아리랑을 선택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현저히 빼어나고 듣기에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노래라면서,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음식에서 쌀과 같은 존재이다.”라고 아리랑의 위치를 설정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조선 음악의 최고봉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주식인 쌀에 비유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아리랑에 대한 정서까지도 읽어냈다. 헐버트는 아리랑은 1883년부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의 진짜 마지막 공연은 까마득한 미래의 일로서 아마도 아리랑은 한민족의 영원한 노래가 될 것이다.”라고 아리랑의 미래를 예견하였다. 그는 아리랑 후렴구 노랫말은 서정시요, 교훈시요, 서사시라면서,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이다. 부르는 이들마다 노래가 다르다. 조선인들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바이런이나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조선인들의 예술적 끼를 칭송하였다. 조선 음악이 나라 밖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 헐버트는 한민족의 음악적 재능을 세계에 설파하였던 것이다. 이는 우리 젊은이들이 오늘날 케이팝K-pop으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을 한 세기도 전에 예견한 혜안이었다.

 

(215)

헐버트는 책을 마치며 한민족에세는 참으로 감동의 글을 남겼다. 그는 예언자 흉내를 내는 것은 역사가의 본분이 아니며, 역사가는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예단하려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한민족이 장차 경이적인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희망하는 예단은 허용돼야 한다.”라고 하여 한민족이 세계 속에 우뚝 서리라고 예언하였다. 헐버트가 한민족 역사를 15년 동안 천작하며 내린 한민족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이자 결론이지 않은가.

 

(219-220)

헐버트는 미국인 그리피스가 1882년에 쓴 책 <은둔의 나나(Hermit Nation)>에 대해서도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이 책은 서양에서 조선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책으로 헐버트도 조선에 오기 전에 이 책으로 조선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헐버트가 조선에 와 보니 이 책에 오류가 너무 많았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그리피스가 조선에 와 보지도 않고 일본인이 쓴 글만 읽고 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은둔을 뜻하는 ‘hermit’이라는 단어도 오늘날의 한국인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다면서 한국인들은 그저 편안하게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리피스가 미국의 한 잡지에 한국에 대해 글을 기고하며 <한국, 난쟁이 제국(Korea, the Pigmy Empire)>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기고문 내용도 백제를 히악시(hiaksi)’라고 하는 등 오류가 넘쳐났다. 헐버트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평곤> 1902 7월호에 그리피스 기고문에 대한 반박의 글을 실어 “’pigmy’라는 단어는 아프리카의 왜소한 흑인종을 가리킨다. 미국인들이 이 기고문을 읽으면 한국인을 미개한 열등 민족으로 인식할 것이 뻔하다.”라며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관한 글을 쓰려면 제발 한국에 직접 와서 보고 쓰라고 호소하였다. 1904년 런던의 한 수도원 행사에서 헐버트는 그리피스와 직접 맞닥트리기도 했다. 그리피스가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친일 연설을 하자 헐버트는 그리피스에게 다가가 어디 두고 보자라며 대판 설전을 벌였다고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226)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종말>에서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발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모국 미국의 친일정책을 비난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을사늑약 당시 미국의 처신에 대해 한국에 어려움이 닥치니 미국이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사말도 없이(When the pinch came we were the first to desert her, and that in the most contemptuous way, without even say good-bye.)”라고 공사관을 맨 먼저 철수한 미국을 맹비난하였다.

 

(276)

<재팬크로니클>이 석탑 약탈을 공식화했음에도 다나까는 계속 버티며 석탑을 돌려주지 않았다. 헐버트는 국제 여론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헐버트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에서도 석탁 약탈 사실을 폭로하였다. 1907 7 10일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연설을 하며 경천사 십층석탑 약탈 사건을 예로 들었다. <만국평화회의보>가 헐버트의 주장을 보도하자 <뉴욕포스트>등 국제적인 신문들이 이를 받아 대서특필하였다. <뉴욕타임스>도 헐버트 회견 시가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베델도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계속적으로 일본에 석탑 반환을 촉구하였다. 석탑 약탈에 대한 비난 여론이 국제적으로 들끓자 당황한 일본 외교관들이 석탑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본국에 건의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1918년에 가서야 석탑을 돌려주었다. 두 외국인 헐버트와 베델이 이 문제를 국제여론전으로 몰고 감으로써 결국 석탑이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석탑은 조선총독부 창고에서 뒹굴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과 개관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헐버트가 현장에 가서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면 경천사 십층석탑은 아마도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장 사진 증거가 없었다면 일본이 과연 약탈을 인정했겠는가? 헐버트가 희망한대로 언젠가 석탑이 원래 자리인 경천사에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300-301)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은 나라의 운명은 물론이고 고종 황제와 특사들 개인의 운명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묻는다면서 7 20일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 자리에 앉혔다. 7 24일에는 소위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공식적으로 접수하고,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시켰다. 헐버트는 특사증을 발급한 고종 황제가 퇴위 되어 더 이상 특사 자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1919년 미국 의회에 제출한 한국 독립 호소문에서, 일본이 고종 황제를 재빨리 퇴위시킨 것은 자신이 고종 황제의 특사로 조약상대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친서를 무효화시키기 위한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고 밝혔다.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정사인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미 서거한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헐버트도 일제의 위협에 한국에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308-309)

헐버트는 1907 11월 미국의 서부 지역을 돌면서 한국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 단체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 11 15일 자 기사에서, “헐버트 박사가 한국을 위해 진력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한인청년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헐버트는 강연에서 제군은 낙심하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오. 일심성의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여야 합니다. 일본이 강하다 하나 일본 문명은 뿌리 없는 꽃과 같소. 결단코 오래지 아니하여 한국에서 일인 세력이 패망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수십 년 살았기에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일본의 학정을 눈으로 보았소. 이제 미국에 돌아와서 나의 힘을 다하여 공론을 일으키려고 지금 미국의 각 지방을 다니는 중이요. 한국은 장래에 여망이 많은 나라이오니 제군은 힘을 다하여 독립 준비를 게을리하지 마시오.”라고 한국 청년들에게 호소하였다.

 

(342-343)

헐버트는 3.1혁명을 어떻게 정의하였을까.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던 <미구 한국평론> 1919 10월호에 <1차 세계 대전과 한국(Korea’s Part in the War)>를 기고하였다. 헐버트는 이 글에서 인류애가 고상함이나 영웅주의에 묻힌다면 이는 인류에 대한 모반이다. 3.1혁명은 신의 손(hand of God)’이 작용한 것이며 한국의 독립은 천부적 권리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는 또 이듬해 1 <국제관계>지에 기고한 <일본과 한국(Japan in Korea)>에서, 일본과 한국의 반목은 일본이 역사적으로 한국의 군사력을 얕보는 데서 기인한다고 진단하였다. 이어서 한민족은 3.1만세항쟁에서 원한과 증오를 표출하는 대신, ‘자유를 달라(We must and shall be free)’고만 외쳤다면서 3.1혁명의 비폭력 정신을 평가하였다. 이는 한민족의 문명 수준을 말해 준다고 덧붙였다. 헐버트는 1949 7월 죽음을 앞두고 가진 언론 회견에서는 3.1혁명을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정신문화적 가치라고 정의하였다.

 

(364)

2004년 다트머스대학을 방문하여 헐버트 기록을 추적하던 중 헐버트가 졸업 45주년을 앞두고 모교에 제출한 졸업 후 신상기록부가 눈에 들어왔다. 헐버트가 70을 바라보며 친필로 작성한 자신의 삶의 흔적이었다. 필기체로 휘갈겨 쓴 기록부를 세세히 읽다가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헐버트는 신상기록부 나의 일생(My Life Story)>란에 자신과 한민족의 관계를 정의하는 글을 남겼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한민족에 대한 충심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원문 : I have been fighting for the rights and liberties of 18,000,000 people whose love I hold as my most precious possession and whatever the outcome I dream that loyalty to such a cause is worthwhile.

 

(373)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일제의 한국 지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라를 잃었다는 사실에는 무한한 부끄러움으로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독립운동을 거족적으로 펼치고 나라를 되찾았다는 사실에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와중에 공화제도 탄생시켰다. 오늘날 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에 대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면 이렇게 떳떳하게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까?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가 해방으로 맞았지 독립운동으로 맞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는 형이하학적 착시 현상이다. 만약 친일파가 그랬듯이 우리 민족이 일본에 충성만 하고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전승국들이 우리에게 독립을 그저 선서할 리가 만무하다. 영국의 처칠은 실제로 한국의 독립을 반대하지 않았는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펼친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본이 패전하였다 해도 광복을 맞을 수 없었거나, 한참 뒤에나 맞았을지 모른다.

 

(408-409)

먼저 한민족은 보통 사람도 1주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하였다. 한글은 각 글자마다 하나의 소리만 있는 우수한 글자다. 또 하나는 한민족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 전함으로 일본군을 격파하여 세계 해군 역사를 빛나게 했다. 또 하나 한민족을 빼어나게 만든 업적은 오래전 한 왕에 의해 고안된 역사 기록문화이다. 왕은 역사기록청을 만들어 국사를 편견 없이 적도록 하고, 3년마다 기록을 정리하여 3부씩 책을 만들어 각기 다른 장소에 보관토록 했다. 이 기록들은 한민족의 절대적 기본 역사서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록문화는 세계사에서 유일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한민족은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민족 흡수 문화를 보여 주었다. 기원전 1122년 중국에서 기자가 5천 명의 중국인을 이끌고 넘어왔을 때 한민족은 이들을 토착화하여 한민족으로 만들었으며, 어떠한 내분도 없이 1천 년의 역사를 이어갔다. 마지막 이유는 내가 가장 고귀한 가치로 여기는, 1919 3.1혁명 때 보여 준 한민족의 충성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전에 만세 항쟁 계획을 알면서도 일본 당국에 밀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입증하였다. 3.1혁명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이다.”

헐버트는 죽음을 앞두고 우리도 간과한 선조들의 위업을 들어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천명하였다. 우리는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없잖은가.

 

(421)

헐버트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세계주의자이자 영원한 한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한민족은 두뇌가 우수하고, 독창성이 뛰어나다. 교육유전자가 남달라 성공 잠재력이 무한하다. 위기가 닥치면 단결하여 나라를 지켜 내는 끈기와 생존력을 지녔다.”라며 한민족의 우월성을 논리적으로 풀이하였다. 헐버트는 또 생을 마감하면서,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증언하며 한글 등 다섯 가지 예를 들었다. 헐버트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한민족의 미래 가치를 확신한 참 한민족주의자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몇 주 전에 무거워진 몸을 느끼고 운동을 한다고 산책을 했는데, 그 산책의 끝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어서 잠깐 들렀다가 너희들 책과 아빠 책을 두어 권씩 샀어. 그런데 한 권만 더 사면 적립금 2000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떤 것을 살까 살펴보다가 눈에 들어온 책이 백수린 님의 <눈부신 안부>라는 책이란다. 작년에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에 많이 노출되어 책 제목은 알고 있던 책이야. 지은이는 백수린이라는 분인데, 아빠는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단편만 두 편 읽은 작가인데, 작품이 어땠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어. 이 소설은 다른 사람들의 평도 좋고, 요즘 우리나라 작가들의 책들은 신뢰가 많이 가고 해서 구입해서 적립금 2000원을 받았단다.

순전히 적립금을 채우기 위해서 골랐던 책인데,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고, 백수린이라는 작가를 새로 알게 되어 너무 좋았단다. <눈부신 안부> 12년만에 낸 첫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첫 시작이 무척 좋더구나. 백수린이라는 작가의 작품도 계속 눈여겨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소설이었어.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두 가지 이야기가 오가며 진행되는데, 주된 이야기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어 몇 십 년 쭉 이어지는 이야기란다.

, 그럼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

 

1.

주인공 이해미는 기자로 일하다가 한 달 전에 그만두었어. 오랜만에 전시회에 갔다가 대학 문학동아리 친구인 우재를 우연히 만났어. 친구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남자 사람 친구보다는 조금 가깝고 애인보다는 먼 그런 사이였단다. 사랑과 우정 사이라고 할까. 하지만 우재가 군대를 가고 나서 연락이 조금씩 뜸해졌고, 졸업 후에는 거의 얼굴을 보지 않는 되었어. 선후배나 동기들의 결혼식에서 잠깐 얼굴 보는 사이가 되었어.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도 한참 전이었단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우연히 전시회에서 만나게 된 거지. 둘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안부를 전했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지금은 모두 싱글이었어. 겉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옛 감정도 조금씩 일어나지 않았을까.

해미는 한 달 전에 기자를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작가를 준비하고 있었고, 우재는 고향인 제주도에 가서 약국을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둘은 옛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우재는 해미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꺼냈어. 해미가 대학 시절에 이야기하기를 이 다음에 자신의 이모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했다는구나. 해미는 전혀 기억에 없었지만, 작가를 준비하고 있던 해미는 이모의 이야기를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

해미는 세 자매였는데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어. 그런데 서울에 이사온 지 얼마 안되어 해미의 언니 해리가 그만 가스폭발 사고로 죽고 말았단다. 당시 해리는 중학생의 어린 나이였고, 가스폭발사고가 난 지점은 평상시 해리가 다니지 않는 길이라서 부모님들은 더욱 이 사고를 믿을 수 없었고, 해리에게 왜 그 길을 갔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어. 이미 별이 되었으니이 가스폭발사고가 1994년에 일어났는데, 소설 속에서 동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실제로 있었던 아현동 가스폭발사고를 모티브를 한 것 같구나. 서울 도심 한 복판에서 그런 가스폭발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랬던 기억이 아빠도 아직 있단다.

아무튼 그렇게 해리가 죽고 집안 분위기는 무척 안 좋아졌어. 엄마와 아빠 사이도 멀어지고, 아빠는 부산으로 발령받아 홀로 부산에서 지내게 되었어. 엄마도 서울에서 살고 있는 것이 하루하루가 고통이었어. 그래서 엄마는 해미와 동생 해나를 데리고 독일로 유학 가기로 했단다. 가스폭발사고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면서 공부를 하다 보면 잊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래서 해미는 1995 13살 때 엄마와 해나와 함께 독일로 갔단다. 왜 독일이냐면, 해미의 이모가 독일에 살고 계셨거든.

 

2.

독일에 도착해서 이모와 만나고 자리를 잡을 동안 이모와 함께 생활했어. 이모는 의사로 일하셨는데, 처음부터 의사는 아니었고, 간호사로 일하다가 의사가 되셨단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의 젊은 노동력을 해외에 보내면서 외화벌이를 했단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독일로 보낸 광부와 간호사였단다. 당시 독일에서는 광부와 간호사라는 직업을 꺼렸기 때문에 그 부족 인원을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에 채웠던 거란다. 일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신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분들께 독일에 정착을 하셨단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현대사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야.

해미의 이모도 파독 간호사였다가 나중에 더 공부를 하셔서 의사가 되신 거야. 그래서 독일에 계신 이모의 지인분들은 대부분 전현직 간호사란다. 해미는 이모의 지인분들의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어. 그 중에 레나와 한수가 특히 친한 친구였단다. 한수의 부모님은 이혼을 해서 엄마와 둘이 살고 있었어. 해미는 한수의 엄마를 선자 이모라고 불렀단다. 선자 이모가 뇌종양 투병 중이신데, 한수는 엄마를 위해서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주고 싶어했어. 그러면 엄마가 그 병을 이겨낼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한수는 그 일을 엄마 몰래 하려고 했고, 해미와 레나에게 도움을 청했단다. 그래서 해미와 레나와 한수는 탐정처럼 조사를 했어. 몰래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훔쳐 보기도 했고, 해미가 소설을 쓴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모들을 인터뷰를 해서 단서를 찾으려고 했어. 하지만 제대로 된 단서는 찾을 수 없었고, 엄마의 첫사랑의 이니셜이 K.H.라는 것만 알게 되었단다.

….

독일에서 2년여 시간을 지내다가 국내 사정이 갑작스레 바뀌면서 갑자기 귀국을 해야 했단다. 1997년말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아버지의 경제사정도 안 좋아지면서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식구들은 다시 만나 부산에서 생활하였단다. 해미는 한국에 와서도 레나와 한수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여전히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으려고 했어. 그런 와중에 선자 이모의 뇌종양은 재발되어 입원하였고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단다. 결국 선자 이모는 돌아가시고, 한수는 선자 이모의 이종 사촌 말자 이모네 집에서 지내게 되었어.

 

3.

다시 오늘날 이야기를 해줄게. 제주도에 자리 잡은 우재를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해미에게 연락해서 만났단다. 해미는 한창 독일의 이모들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어. 이모들의 글을 쓰다 보니 파독 간호사에 대해 조사를 하였고, 당시 국내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도 갖게 되었어. 그리고 오래 전에 한수가 보내준 선자 이모의 일기들을 다시 읽다가 문득 당시에는 찾지 못한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다시 찾아보려고 했어. 일기를 다시 꼼꼼히 읽어보니 어렸을 때 무심히 넘어간 것들에서 K.H.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있었어. K.H.는 작가 지망생이었고, 다니던 교회도 알게 되어 연락도 해보았지만, K.H.의 약자를 가진 사람은 찾을 수 없었어.

….

큰 이모가 오랜만에 한국에 오시게 되어 혼자 지내고 있는 해미와도 2주간 함께 지내게 되었단다. 오랜만에 이모를 만나니 옛날 독일에서 지낸 생활도 기억이 났어. 레나가 변호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듣고, 이모가 레나의 연락처를 알고 있어 정말 오랜만에 영상통화도 했단다. 그리고 한수는 예전에 연락이 끊겼다고 했어.

….

해미는 예전의 일들을 생각해 보았어. 선자 이모가 돌아가시기 전 한수가 전화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의 첫사랑을 꼭 찾아달라고 했어. 한수가 여러 번 전화를 계속 해서 해미는 얼떨결에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았다고 거짓말을 했단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만날 수는 없고 편지를 전해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했어. 해미는 선자 이모의 일기를 참고하여 자신이 K.H인 척 하고 편지를 써서 선자 이모에게 보냈지만 죄책감을 느꼈단다. 그 죄책감 때문에 한수뿐만 아니라 레나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어. 그때 한수가 보낸 편지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그 편지를 꺼내보니, 선자 이모는 그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했다고 했고, K.H.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며 선자이모의 편지도 함께 보냈단다.

….

이제라도 해미는 다시 K.H를 찾으려고 조그마한 단서로 이곳 저곳에 연락을 했단다. 그리고 결국 K.H.라는 사람이 천근호라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또 여기저기 연락하여 만날 수 있었는데, 뜻밖의 분이셨어. 해미는 선자 이모의 첫사랑이라고 해서, 이름이 천근호라고 해서,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여자였단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셨어. 해미는 선자 이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천근호 할머니에게 쓰신 편지를 밀봉한 상태 그대로 전해 드렸단다. 그 편지봉투에서 세월에 많이 묻어 있었지만, 얼마나 값지고 눈부신 안부가 담긴 편지였겠니. 천근호 할머니도 그 편지를 보시고 얼마나 감회가 새로웠겠니. 십대 서로 마음에 두고 있던 이와 헤어지고 나서 할머니가 되어서 그 사람의 편지를 다시 읽는 기분, 울컥할 것 같구나. 해미는 편지를 전해주고 돌아왔단다.

그리고 며칠 뒤 천근호 할머니로부터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선자 이모가 해미의 편지가 거짓인 것을 알고도 천근호 할머니한테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스캔해서 보내주었단다. 천근호 할머니는 선자 이모와 사랑을 비밀로 하고 평생 간직하겠다고 했어. 그러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어. 슬프고도 따뜻하고 아름답고 눈부신 결말이로구나.

해미는 우재를 만나러 제주로도 떠나면서 소설은 끝이 났구나. 해미는 아마 선자 이모와 천근호 할머니 사이를 생각하면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한 선택을 했을 거라 생각한단다.

자기 자신에 맞는 소설이 있는 법인데, 이 소설은 완전 아빠 취향의 소설이었단다. 한 편의 잔잔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었어. 너희들도 이 책을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현대사의 상식도 쌓고, 마음에 힐링도 쌓고

 

PS,

책의 첫 문장: 야자수.

책의 끝 문장: 나는 지금 막 도착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0)

그날 아침 우리 농가를 나설 때만 해도 나는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내 안에 어떤 새로운 지도가 펼쳐졌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이제 비범한 소녀가 되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탐험가들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저 멀리 신비로운 해변의 존재를 보았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내 안에 갑작스럽게 마젤란이 등장했지만, 나는 아직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윌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윌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왔을지, 떠돌이라면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일지 궁금해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66)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한 건 꽃피는 사랑에 관해 조언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날 밤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건, 여자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도 내 편을 들어줬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딸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머릿속에서만큼은 어머니를 확고한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43)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164-165)

나는 일평생 착한 딸로 살아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어른들을 공경했다. 성경책을 읽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복숭아를 수확할 때면 얇디얇은 유리 공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서 부셸 바구니 안에 살포시 담았다. 항상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남자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끼니를 챙겼고, 빨래를 깔끔하게  정돈했고, 빈틈없이 농장을 관리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내 울음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오롯이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그렇게 착한 딸로 살던 내가 노스 로라와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꾀죄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한 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은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188)

거대하고 신비로운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숲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문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밤이 두렵지 않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277)

세스는 나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괴로워하는 얼굴이 그를 스물두 살이 아니라 여든 살의 노인으로 보이게 했다. 세스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순간 나는 한때 동생을 아꼈던 어린 누나의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두려움과 혼란을 풀어내고 애틋함만 남기고 싶었다. 동생을 구해주고 싶었다. 동생의 악함과 세상의 악함을 내 선한 행동으로 상쇄하고 싶었다. 나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내 모습이 내 안에 있었다고, 그러니 네 안에도 생각지 못한 면이 존재할 거라고 세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284)

긴 진입로를 벗어나는 내내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트럭을 세우고 밖으로 나와 나를 만들어준 이 공간을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트럭으로 돌아와 차를 몰았다. 나는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었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토양이 충분히 강인하기만을 바랐다. 뿌리채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로운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16)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것도 사실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고 우리 땅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가능한 일 아니겠어요? 아무리 모른 척, 아닌 척 한다고 해도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윌은 자신이 어느 부족인지 말해준 적이 없었고, 너무 소심하고 어둑했던 나 역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젤다에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원주민들이 끔찍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젤다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게 똑같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말은, 정부에 이익이 되면 정부는 국민들이 고통받더라도 그냥 해버리니까.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거죠.”


(322)

초여름 빗물로 불어난 하얀 강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자신의 운명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 매우 아름다웠다. 곧 저수지가 될 거니슨강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댐이 건설되고 거니슨강 하류에 수문이 개방되어도, 지금 흐르는 강물의 일부는 변함없이 아래로 흘러갈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느리더라도,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아무리 적은 양이더라도 강물은 어떻게든 물길을 찾아내 꾸준히 흐를 것이다. 그러면, 노스포크강을 따라 새로운 삶을 꾸린 나는 그 반대편에서 흐르는 강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385-386)

그러나 지난 4월에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 앞에 달라 붙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아폴로 13호의 드라마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전쟁 때문에 매일 수십 명씩 죽어나가는 와중에 겨우 세 명을 위해서 온 나라가 숨죽이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폴로 13호 승무원들이 무사히 그들이 귀환할 때까지 여드레라는 긴 시간 동안, 나도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귀환한 이후로도 뉴스 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뉴스를 틀어놓고 앉아 베트남 특파소식을 지켜보았다. 미군 지상군이 캄보디아로 쳐들어가는 장면을 지켜보았고, 닷새 뒤에는 켄트주립대학교의 푸른 잔디밭에 쓰러져 죽은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보도는 계속되었고 이전의 비극은 새로운 비극으로 가려졌다. 내가 아들들에게 선물한 세상은 두려워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적이고 혼란스러웠다. 그냥 외면하고 눈을 돌려버릴 수가 없었다.


(415)

서늘한 소나무 그늘에 앉았다. 바닥에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흙 두 줌을 퍼 올렸다. 퍼 올린 흙에는 시커먼 흙, 솔잎, 조약돌, 잔가지, 나뭇잎, 자그마한 달팽이 껍데기, 솜처럼 하얀 깃털이 들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탄생, 성장, 그리고 죽음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 쓰러진 나무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모든 굴곡을 이겨내고 틈을 뚫고 빛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간 생명들을 둘러보았다. 숲에 깃든 태곳적 혜안은 너무 깊고 복잡해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게 꼭 필요했던 지혜를 다시금 떠올릴 만큼은 헤아릴 수 있었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415-416)

그랬다. 젤다의 말이 옳았다. 내 과수원이 그랬듯 나 역시 새로운 토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뿌리째 뽑히고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그러나 셀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두려움에 웅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강인함은 이 어수선한 숲 바닥과 같다는 걸 배웠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류시화 님의 신간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책 이야기를 해줄게. 류시화 님은 시인이지만, 시만큼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수필도 많이 쓰신단다. 아빠도 류시화 님의 산문집을 여러 권 읽었는데, 새로 산문집이 나와서 무척 반가웠단다.

아빠가 책을 읽을 때 좋은 구절이 나오면 해당 페이지를 책 앞면지에 적어두고 그것을 타자기로 다시 한번 두들기면서 마음에 새기는 독서습관이 있어. 나중에 이 책을 다시 펼 때도 앞면지에 적혀 있는 페이지만 간단히 읽어볼 수도 있고그런데 지금껏 류시화 님의 책의 앞면지에는 늘 많은 페이지가 적혀 있었단다. 이번 책은 어땠냐고? 이번 책도 시작부터 계속 페이지 적느라고 앞면지와 읽고 있는 페이지를 오갔단다. 시작부터 마음에 새겨야 할 글을 던져주었는데, 공부하기 힘들어 하는 너희들도 읽어보면 좋겠구나.

===================

(12)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

책 제목이 책을 대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책도 책 제목만 읽어도 힘을 얻게 되더구나. 책 제목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는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수필의 제목과 같은데, 실패하거나 불행한 일을 겪었을 때 지은이가 건네주고 싶은 말인듯했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

아빠도 젊었을 때는 왜 인생이 이렇게 안 풀리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많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공자가 왜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을 이야기했는지 조금씩 이해가 가더구나. 인생은 내가 생각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진리. 문득 이 글을 읽다가 작년에 너희들과 많이 들었던 아이브의 <I AM>이라는 노래 가사도 생각나는구나.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어도 차라리 날아올라 그럼 네가 지나가는 대로 길이거든.’

===================

(19)

삶에서 불행한 일을 겪은 후, 그 불행 감정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을 압축하면 이번 생은 틀렸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감정은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 또한 그 확증 편향이 진리인 양 마음을 닫아 건다. 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자기 삶의 심리학자가 되지 못할까? 우리는 한때 얼마나 옳았는가? 또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틀린가?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


1.

아빠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렇고 좀 예민한 사람들이잖니. 예전에 읽은 책 일레인 N. 아론의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이라는 책을 비롯하여 민감하고 예민한 성격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내용에 힘을 얻기도 했는데, 류시화 님의 글에서도 앙리 마티스의 말을 빌어 예민한 사람이 더 세상을 심층적으로 보고 감응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예민한 성격으로 인해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기를

===================

(31)

예민한 영혼으로 태어난 것은 신의 실수가 아니라 축복이다. 관계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예민함은 바로잡아야 할 심리 상태가 아니라 특별한 재능이다. 섬세한 감각으로 다른 이들의 놓치는 현상의 이면을 보고, 울림 있는 내면세계를 가지며, 문학과 예술에 감동받는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뛰어난 감응력을 갖는다. 예민한 사람은 그 예민함으로 인해 고통받기도 하지만 그 예민함 덕분에 세상을 더 심층적으로 바라본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에서 꽃이 보인다. 화가 앙리 마티스의 명언이다.

===================

사람은 후회의 동물인 것 같구나. 결혼을 고민하는 이에게 결혼을 해도 후회이고 안 해도 후회이니 하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있단다. 이렇듯 어떤 것을 함에 있어 해도 후회할 것 같고, 안 해도 후회할 것 같은 경우가 있을 때 너희들은 어떻게 할 것 같니? 류시화 님께서는 해 버리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특히 너희들처럼 청소년들은 처음 해보는 것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류시화 님은 해 버린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고,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고 말씀하시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빠 경험상 정말 그랬던 것 같구나.

===================

(122-123)

해 버린 일에 대한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지만,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생의 저녁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은 하지 않은 일이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뒤로 미룬 일, 주위의 만류와 일반화의 논리 때문에 포기한 일,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을 감춘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흥미진진하고 의미로 채워진 영화 같은 삶을 유예시키고 관객석에서만 살아간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최초로 시도한 삶인데도.

===================

너희들은 자라면서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 중에는 너희들의 직업과 관련 있는 일도 있겠지. 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그것들을 모두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란다. 평행우주가 있고, 그 우주에 있는 나와 소통을 할 수 있다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다른 길을 간 나를 볼 수 있겠지만 우리 인생은 그렇지가 않네. 많은 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가끔은 잘못된 길인가, 하면서 다른 길을 선택을 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그 잘못된 길에 나를 맞추면서 가는 경우가 있단다.

나에게 맞지 않는 상자에 나를 맞추고, 나에게 맞지 않는 길에 나를 맞추는 일이 책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단다. 상자 안이 맞지 않으면 상자 밖으로 나오라고, 죽지 않는다이 충고는 아빠가 생각하기에 이삼십 대 젊은이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빠의 경우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 지금 하는 일들이 맞지 않는 옷을 입을 기분이 많이 들었어. 결국 아빠는 그 옷들을 벗지 못했지만 말이야. 이제는 그 옷이 편안해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 옷에 아빠를 맞춘 것 같구나.,

===================

(186-187)

사람들은 상자 안에 살면서 그 상자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문제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수성이 날카롭고 낯가림이 심해 사회 적응자처럼 살아갈 수 없을 때, 아무리 해도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에 접근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상자 안에 맞지 않으면 상자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나간다고 죽지 않는다. 강물은 강폭이 좁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넘쳐 자신의 길을 만들 뿐이다.

세상의 기분이 자신의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한다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자신을 그 사람에게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 미움받는 것이 덜 위험하다. 다른 사람들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실 적응자가 되지 말고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


2.

아빠는 계획하지 않고 무작정 떠난 여행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민한 성격이라서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은데, 그렇다 보면 실패를 맛보는 경우도 있단다. 하지만 그 여행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여행을 간 것을 잘했다고 생각할 거야. 실패를 통해서 얻은 값진 경험들이 있으니계획을 잘 짜고 그것에 맞춰 떠난 여행도 아빠는 참 좋더구나.  그런 여행도 계획과 틀어지면서 실패를 겪기도 하지만, 아빠의 계획 속에서도 그런 실패도 고려되어 있기 때문에 플랜 B를 향해 나아간단다. 여행은 무엇이든 옳다..

===================

(240)

나는 곳 그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그 후 두 사람이 어떤 여행을 펼쳐 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낯선 여행을 주저하던 여성도 잘못된 여행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배낭끈을 단단히 여미고 떠났을 것이다. 훗날 자신의 여행을 뒤돌아 볼 때, 망설이며 시간을 보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여행이 불완전한 자유라 불리는 이유는 여행은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 길들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실패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여행이 아니다.

===================

류시화 님은 재미있는 우화도 많이 알고 계시는데, 이 책에서 소개해준 우화 중에 기억하는 우화가 하나 있어. 속 좁은 아빠가 귀담아 들으면 좋을 것 같았어. 어떤 힘든 일이나 불행한 일이 생겨도 그것을 담는 그릇이 크다면 불행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가르침. 아빠도 그릇을 키워야겠구나. 주식이 폭락해도 의연할 수 있는 큰 그릇^^

===================

(247-248)

어느 날 스승이 그를 불러 물 한 잔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그 물에 소금 한 줌을 타서 마시게 하고는 물었다.

물 맛이 어떤가?”

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이 근처 호숫가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맑은 호수에 똑 같은 소금 한 줌을 뿌리고는 호수의 물을 한 모금 맛보게 했다. 물맛이 어떠냐고 묻자, 제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시원합니다.”

짜지 않느냐?”라는 스승의 물음에 제자는 전혀 짜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제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 차이를 알겠는가? 불행의 양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다만 그것을 어디에 담는가에 따라 불행의 크기가 달라진다. 유리잔이 되지 말고 호수라 되라.”

===================

이상으로 아빠가 발췌한 글들 중에서 특히 좋았던 글들을 소개해 주는 것으로 독서편지를 마쳐야겠구나. 이 책에는 아빠가 소개해준 글들 이외에 대부분의 글들이 너무 좋았단다. 이 책은 이삼십 대 때 읽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너희들도 굳이 이 책을 읽을 거면, 좀더 기다렸다가 이십 대 되어서 읽어보면 좋겠구나.

그나저나 류시화 님은 어떻게 끊이지 않고 좋은 문구들을 생각해 내시는 걸까. 보물단지라도 갖고 계신가. , 오늘은 여가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J.D.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책의 끝 문장: 저의 인생 영화에 독자로 등장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저 역시 한 번쯤은 당신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아픔이 너무 크다). 신도 내가 생각한 신이 아니다(때로 인간에게 가혹하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 P18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준다고 느끼고, 지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친절은 상담료를 받지 않는 심리치료이다. 칼 융이 말했듯이, 모든 이론을 알고 심리 기법에 통달한다 해도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는 단지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했다. 상실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상실감은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 P44

때로는 온 존재가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라는 굳센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고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불행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불행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우는 인간이 아니다. 단지 우는 순간, 웃는 순간이 교차할 뿐이다. ‘불행한 사람, 화난 사람, 과거의 어떤 사람’이 나라는 고정된 생각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 P103

반복해서 하는 행위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특출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의 결과이다. 창조적이 되는 비밀은 ‘창조적이 될수록 더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미국 팝아트 선구자 앤드 워홀은 말했다.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완성하라.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게 두라. 그들이 결정하는 동안 더 많은 작품을 만들라."
- P130

그렇다. 한 가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길을 ‘가지 않은 길’로 남겨 두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선택인 동시에 포기의 길이다. 나는 결국 시인의 무화과를 선택했고, 특파원이나 사진작가나 다른 멋진 미래들은 신문지처럼 접어 안쪽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은 단지 열 편이나 스무 편의 시를 쓰고 나서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글을 써야 함을 의미했으며, 정오부터 저녁까지 다음 글에 대해 고민해야 함을 의미했고, 병원 신세를 지든 자신의 예민함에 질리든 단어들을 수정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 P191

‘사람들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죽으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좌뇌에서 간단히 처리되는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훨씬 많은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뇌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감정보다 불쾌한 감정과 사건을 묘사할 때 더 논리적이고 강한 말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달한 우뇌는 부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 그것이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동화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 - P218

통증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통증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고, 그 통증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일이다. 트워스키 박사는 말한다.
"불편함과 갑갑함을 느끼는 시간들은 당신이 성장할 시기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다. 이 역경을 제대로 활용하면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 P23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4-05-10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민하다는 것은 더 많은것을 느끼고 볼 줄 안다는 것에 강력 공감합니다. ^^

bookholic 2024-05-10 23:1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그 말에 공감도 되고, 위안도 되고 그랬답니다~~^^
바람돌이 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