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천지에 가득한 그 아름거림은 꿈결인 양 황홀하면서도 서러운 하소연양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은 서러움 깊은 사람들의 탄식 같기도 했고, 한 많은 사연 품은 넋들의 승천 같기도 했다. 그건 기실 굶주려 배고픈 사람들의 한숨이고 한탄이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그리도 숨막히게 흐드러지면 보릿고개의 배고픔도 병이 되도록 사무쳤다. 이미 죽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부황이 들고 어질병을 앓았다. 그 배고픈 병이 든 눈으로는 아지랑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은 어질병을 더 도지게 했다. 그 사람들은 속 메스꺼운 어지럼증에 휘둘리며 하늘을 향해 한숨짓고 한탄을 토했다. 배곯고 사는 기구한 팔자를 쓰라려 하고 아파하는 그 한숨과 한탄은 풀릴 길 없는 채 아지랑이에 실려 멀고 먼 하늘로 스러져 갈 뿐이었다.


(90)

만주에 퍼져 있는 일본영사관들이 독립군을 잡아 넘겨주는 중국관리들에게 상금을 주기로 한 것은 사실 그대로였다. 독립군 토벌에 실패하고 군대까지 철수시킨 그들은 중국관리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 계획이 바로 이화제한(以華制韓)이었다. 중국의 힘으로 한국을 제재하자는 것이었다. 그전의 이한제한(以韓制韓)의 수법에다 하나를 더 첨가한 것이었다. 조선인 친일파와 밀정들을 투입하여 독립투쟁 세력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이 이한제한이었다.


(165)

그래, 자네의 판단이 정곡을 찌르고 있네. 여기 서간도가 북간도보다 다소 덜할지는 모르나 여기 동포들의 동향도 대동소이하네. 경신년 참변 때 이곳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생각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세. 그런데 독립군들이 이동을 단행한 것은 무고한 동포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더욱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하려는 작전계획으로, 이는 어느 나라 어느 군대에서나 취하는 군사행동이지. 그 작전에 왜병들은 당당한 작전으로 맞서지 않고 한다는 짓이 양민들을 대량학살한 것이네. 그건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서도 볼 수 없는 비열함이고 잔혹함일세.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네. 그게 무언고 하니, 동포들이 품고 있는 그런 생각이 바로 왜놈들이 대량학살을 자행한 목적이고 노렸던 바란 사실이네. 우리 동포들을 낙담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하고, 또한 독립군을 불신하게 하고, 협조를 못하게 만드는 술수, 그게 바로 왜놈들이 조작해 내는 이간책동술이네. 그러니까 지금 독립군들이 해야 할 일은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동포들에게 무작정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왜놈들의 그런 이간책동을 바르게 알리고 이해시켜 가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일세. 동포들이 곧 조선이고, 동포들이 없고서는 그 어떤 독립투쟁 단체들도 존속할 수 없으니까.”


(210)

저런 인종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종자들인가. 저런 것들이 바라는 것은 도대체 뭔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저런 종자들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가. 영원히 일본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믿는 것인가. 저런 놈들한테 꼼짝없이 끌려가야 하는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왜 튀어나온 것인가. 조선인은 허위와 공상과 공론만 즐기고 게으르며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으니 이를 반대방향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의 주장이었다. 이광수는 왜 저런 못된 인종들을 질타하고 정신차리게 하지 않고 민족 전체를 비하시키고 흉보고 흠집 내고 있는가. 이광수는 3.1운동을 보지도 않았는가. 아니, 지금도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안중에 없는 것일까. 이광수는 왜 그 따위 글을 쓴 것일까. 그건 바로 일본놈들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광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도나 저의는 무엇일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235)

보라, 조선의 사나이 된 자들이, 더욱이 배움을 갖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그건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항일이냐, 친일이냐 하는 것이다. 아니, 또 하나 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항일도 친일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엉거주춤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친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것이 왜 친일인가? 조선인에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일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욱이 배움을 가진 지식인들은 그 책무가 더 커진다. 그런데 왜놈들의 범죄를 방관하다니. 범죄를 방관하는 것은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고 동조하는 또다른 범죄다. 그러니 그게 친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민지가 된 이 땅에서 지금 가장 고통받고 고생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배움도 없고 가난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왜놈들의 착취정책을 피할 능력이 없이 매일매일을 고통에 시달리며 피해를 가장 많이 받고 살 수밖에 없다. 고통과 싸우는 그들의 생활, 그건 바로 항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방관에 비하면 그건 적극적인 항일이 된다. 그럼 그 수많은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 사람들을 구할 책임이 바로 지식인들에게 있다. 그게 지식의 대의며 지식인의 사명이다. 그럼 어떻게 그들을 구할 것인가.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바쳐 그들이 못배운 바를 일깨워야 하고, 깨달음에서 생성된 힘을 한덩어리로 뭉치게 해야 한다. 자각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항거, 그건 그들의 해방인 동시에 조선의 해방이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라. 마음을 크게 열고 세상을 대하라. 식자들이 망친 나라를 식자들이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

생명의 순환을 차라리 죽음의 순환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을 것이고, 죽는 모든 것은 먹힐 것이다. 벌레는 파랑새에게 먹히고, 파랑새는 뱀에게 먹히고, 뱀은 매에게 먹히고, 매는 올빼미에게 먹힌다. 이것이 야생의 작동 방식이고, 나는 그걸 안다. 그래도 마음이 아프다.


(20)

사랑의 그늘진 면은 늘 상실이고, 비통함은 사랑 자체의 쌍둥이일 뿐이다. 마마 앨리스가 돌아가셨을 때 내 어머니는 열두 살이었다. 파파 독은 포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길가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자라고 있는 장미 덤불을 응시했다. “내 생각에 파파 독은 그때 죽기로 결심하셨던 것 같아.”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겨우 한달 남짓 사셨으니까.”


(31)

친족들-어머니와 아버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하얀 후광 속에 온전히 차분하게 잠겨 있는 외외증조할머니-이 모두 내 주위에 모여 있다. 너무 일찍, 작고 허약하게 태어난 나는 모든 사진 속에서 잠을 자고 있으며, 그들은 모든 사진 속에서 내 주위에 모여 머리를 기울인 채 내 입술이 또 다시 파래지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 너무도 얇게 숨을 쉬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너무 작고 항상 추위를 탄다. 하지만 친족들은 마차 태양인 양 나를 보고 있다. 내 부모님과 외조부모님 그리고 외외증조할머니, 그분들 모두가 나를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그분들은 내가 태양인 양, 그분들이 그때껏 평생 추위를 탔던 양 나를 보고 있다.


(101)

그렇기는 하지만, 잔혹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공감할 줄 아는 종이다. 2007년에 베트남에서 심한 장애를 가진 선사시대 인간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그 화석 인간의 골격은 클리펠파일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선천성 질병의 특징인 융합된 척추뼈와 약한 뼈들을 보여 주었다. 그 남자는 사지 마비 환자였고, 자기 힘으로 음식을 먹거나 몸을 깨끗이 유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공동체 안의 다름 사람들이 돌봐 준 덕분에 성년기-알겠는가, 석기시대에 말이다-까지 생존했다.


(168)

하지만 겨울이면 플라타너스의 헐벗은 가지들이 자기들이 여름 내내 보호한, 내 머리 30센티미터 위에 있는데도 거의 보이지 않던 흉내지빠귀 둥지를 보여 준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너무도 많이 흩어져 있어서 가로등만이 유일한 방해물이다. 붉은꼬리말똥가리가 차가운 노란 발 위로 깃털을 부풀리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맹세할 수 있는 너무도 고요한 태도로 땅을 조사한다.


(186)

모두들 알다시피 안개는 소리 없이 낀다. 하지만 시()에서 그러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내려앉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안개는 분주하다. 그것은 귀찮게 쫓아다니는 고양이와 할퀴는 참새를 마찬가지로 감춰 준다. 그것은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무디게 만들고, 구부러진 잔가지를 펴 주며, 섬세한 녹색 그늘 속에서 모든 나무를 더 부드러운 모양으로 만들어 준다. 숲 깊은 곳에서 안개는 어린 가지와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보석들을 하나하나 깔아 두면서 숨어 있던 거미줄을 꿈의 풍경 속으로 일깨운다. 하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침 해가 타오른다. 하지만 세상은 당분간 안개에 속해 있다. 안개는 감추고 보여 주고 하느라, 우리가 아는 것을 감추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우리 눈에 드러내느라 분주하다.


(235-237)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말해도 된다고 내게 허락한 단어.

빌어먹을.

제기랄.

젠장.

우라질.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말해도 된다고 내게 허락하지 않은 단어.

콧물.

아버지가 좋아한 농담의 마지막 문장.

  , 제기랄. 내가 개똥을 밟았어.

아버지가 좋아한 시의 첫 문단.

   토요일의 저녁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있다,

   오말리가 바의 문을 닫고 있다,

   그가 몸을 돌리고

   붉은 옷을 입은 여자에게 말했다.

   나가요, 당신은 여기 머물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한 마지막 말.

   고맙다.

아버지가 한 마지막 말.

   그만해.

부모님이 죽어 가던 방에서 내가 한 말.

   사랑해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사랑해요.

부모님이 죽어 가던 방에서 내가 하지 못한 말.

   빌어먹을. 제기랄. 젠장. . , 우라질.


(246)

어머니의 장례식 2쥐 뒤, 그 개가 가출했다. 얼룩배기 털을 가진 그 개는 제멋대로이면서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부르면 절대 한 번에 오지 않았고, 가장 낮은 덤불 밑, 꺾어진 가장 작은 나뭇가지 뒤로 몸을 감추었다. 겁에 질린 나는 정원을 뒤집어 엎으며 그 개를 찾았다. 마침내 길 건너편 어머니 집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뒷문 앞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뛰어오르고 할퀴고 있는 그 개를 발견했다. 얼마나 절박하게 할퀴었는지 문설주의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다.


(252)

내 꿈속에 나올 때 엄마는 저승의 유령 혹은 나 자신이 느끼는 비통함을 반영하는 표정이 아니라, 항상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다. 꿈에 엄마가 나올 때마다 나의 첫 반응은 항상 안도감이다. ,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착각했어요. 당신은 살아 계십니다. 꿈속에서 내가 엄마를 붙잡고 꼭 껴안으며 몇 번이고 엄마가 왔네요. 엄마가 돌아왔어요. 하느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항상 놀라고 어리둥절해한다.


(261-262)

우리가 늘 느끼는 것에는 그 자체의 진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은 아니다. 어둠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 약간의 선량함을 숨기고 있다. 예기치 않던 빛이 반짝이기를, 그리하여 가장 깊은 은닉처에서 그것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면서.


(281)

어머니는 서른 살에서 서른여섯 살 사이에 아이 셋을 가졌고, 나도 서른 살에서 서른여섯 살 사이에 아이 셋을 가졌다. 지금 내 몸은 정확히 어머니 몸의 복제품이다. 내 굵어진 허리에서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의 발이 나를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안 나는 지켜본다. 내 목의 접힌 부분과 눈썹에서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준 반지를 낀 내 손가락의 곡선에서 어머니를 느낀다. 어머니가 절대 빼지 않던 그러나 남겨 줘야 했던 반지.


(296)

그 모든 해를 지나온 후 모성은 여전히 내 안에서 맥박처럼 똑똑 소리를 냈고, 긴 줄에 서 있을 때마다 나는 유령 아기를 팔에 안은 채 안절부절못하며 흔들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 아들들을 본다. 이제는 전부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다. 때때로 그 아이들의 머리가 내 엉덩이 근처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그 아이들의 축축한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에 얽혀 있거나 블라우스 뒷자락을 움켜지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때로는 저녁 식사 중 아이 한 명이 유리컵을 입술에 가져갈 때, 그 아이의 손이 빨대 컵을 붙잡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사벨 아옌데의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세피아빛 초상>을 읽었단다.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긴 하지만, 시간 상으로는 <운명의 딸> <영혼의 집>의 사이에 해당하는 시간이란다. 먼저 쓴 <운명의 딸> <영혼의 집>을 연결해주는 작품이자 삼부작을 매조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세피아빛 초상>에는 <운명의 딸>에 나오는 등장인물도 나오고, <영혼의 집>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나와서 읽는데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단다.

소설 제목에 있는 세피아빛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자동차 브랜드가 자꾸 연상이 되는데, ‘세피아빛이라는 것은 오징어 먹물로 만든 암갈색의 안료가 내는 빛이라고 책의 마지막 문장의 주석으로 설명이 나와 있더구나. 이사벨 아옌데의 이번 작품도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았단다. 삼부작을 다시 정리하면 지은이 아옌데가 쓴 순서는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순서이고, 시간 순서는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 순서란다. , 그럼 <세피아빛 초상>의 이야기를 해줄게..

..

<세피아빛 초상>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1862년부터 1880년까지의 이야기란다. <운명의 딸>에서 등장했던 엘리사와 타오 치엔 기억나니? 그들은 결혼 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을 하게 되었단다. 엘리사는 칠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온 영국계 사람이고, 타오 치엔은 중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중국계 사람이잖아. 엘리사와 타오 치엔은 아이를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아들 럭키였고, 둘째는 딸 린이었단다. 미국에서 살기에는 중국인 성을 따르는 것보다 엄마의 성을 따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엘리사와 타오 치엔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성인 소머스를 붙여주었단다. 타오 치엔은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린 소머스는 커 가면서 엄마의 얼굴와 아빠의 큰 키를 닮아서 뛰어난 외모로 유명했단다. 그래서 공화국 여인상이라는 동상의 모델로도 뽑혔어. 그런 린 소머스가 한 방에 훅 가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마티아스라는 바람둥이를 만나서부터였단다.


1.

마티아스를 이야기하자면 그 집안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구나. 마티아스의 아버지는 펠리시아노 로드리게스 데 산타크루스라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파울리나 델 바예라는 사람인데, 마티아스의 어머니 파울리나의 집안이 엄청난 부자였단다. 칠레에서 살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엄청난 돈을 벌었어. 그들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는데 모두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어. 장남 마티아스는 예술에 관심 있어하지만, 공부에 관심 없고 방탕한 생활을 했어. 행실이 바르지 못했고 술도 좋아하고 심지어 아편까지 했단다. 마티아스의 장점이자 단점은 잘 생겼다는 것. 그에 반해 파울리나의 조카 세베로는 참 성실했단다. 세베로 델 바예는 칠레의 엄격한 보수주의 집안에서 자랐는데 세베로는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었어. 보수적인 성향의 집안에서 보자면 늘 사고만 치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 세베로는 칠레에서 쫓겨나 미국에 있는 파울리나 고모의 집에 오게 된 거야. 파울리나는 그런 세베로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어. 세베로는 고모의 후원으로 변호사가 되었어.

….

마티아스도 린 소머스의 소문을 들었어. 마티아스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린 소머스를 유혹해서 하룻밤을 자겠다고 장담했어. 린 소머스는 너무 쉽게 마티아스의 외모에 빠지고 말았단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세베로는 가슴 아파했단다. 세베로도 린 소머스를 짝사랑하고 있었거든. 마티아스의 장담대로 린 소머스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만 린이 임신을 했단다.

이 일로 엘리사와 타오 치엔이 파울리나를 찾아왔단다. 마티아스는 아기의 아빠가 자신이 아닐 거라고 잡아떼고 유럽으로 도망가 버렸단다. 세베로는 가족의 대표로 린의 집에 찾아가 잘못을 사과했단다. 세베로는 그렇게 얼굴을 익힌 이후 계속 린의 집을 찾아갔어. 앞서 이야기했듯이 세베로는 린을 짝사랑하고 있었거든어느 정도 친해진 이후 세베로는 린에서 청혼을 했지만, 린은 거절했단다. 하지만 세베로는 아기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계속 설득을 했고, 린은 세베로의 진정성을 알게 되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단다.

결혼식은 세베로, 린의 가족들(엘리사, 타오 치엔), 그리고 세베로를 도와준 파울리나 집안의 착한 집사 윌리엄스만 모여서 조용히 식을 올렸단다. 그런데 린은 딸은 아우로라를 낳고 얼마 못 가서 산후열로 그만 세상을 등졌단다. 린이 딸을 낳았다는 소식과 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파울리나도 들었어. 파울리나는 엘리사를 찾아와 아우로라를 데리러 가겠다고 했으나, 엘리사는 거절을 했단다. 파울리나는 격분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어.


2.

2부는 1880년부터 1896년까지의 이야기란다. 세베로는 아우로라의 법적인 아버지였지만, 갓난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어. 당연히 경험도 없었고 말이야. 아우로라는 외조부모인 엘리사와 타오 치엔이 보살폈단다.

당시 칠레는 1879년부터 주변 국가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어. 애국심이 뛰어난 세베로는 칠레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칠레로 돌아왔단다. 세베로가 린 소머스와 결혼하긴 했지만, 사실 칠레에 약혼녀가 있었단다. 약혼녀 이름은 니베아였어. 니베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세베로를 용서하고 여전히 세베로를 사랑했단다. 세베로는 니베아와 만남을 뒤로 하고 전쟁에 참여했어. 하지만, 전쟁 중에 중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했단다. 이 소식을 들은 니베아는 전쟁터에 와서 세베로를 지극히 간호했단다. 니베아의 계속된 구애로 니베아와 세베로는 결혼을 했단다. 이후 그들의 사랑은 아이를 열다섯 명이나 낳았단다. 니베아와 세베로의 막내딸 이름이 클라라였는데, 많이 익숙한 이름이었어. <영혼의 집>의 주인공 이름이 클라라였던 거 같은데…. 하면서… <영혼의 집>을 읽고 쓴 독서편지를 찾아보니, 맞더구나. 그리고 독서편지를 읽어보니 클라라의 부모님 이름이 니베아와 세베로였어. 그제서야 <세피아빛 초상>이라는 소설이 <운명의 딸>뿐만 아니라 <영혼의 집>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약간의 희열도 느꼈단다.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랄까. 그리고 책 읽고 독서편지가 써놓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다시 아우로라 이야기를 해볼게. 아우로라는 외할머니 엘리사와 외할아버지 타오 치엔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 그런데 아우로라가 다섯 살 때 타오 치엔이 죽고 말았단다. 엘리사는 타오 치엔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를 타오 치엔의 고향인 중국에 가져가려고 했어. 오랜 여행이 될 거라는 생각에 엘리사는 아우로라는 친할머니에 맡기기로 했단다. 파울리나라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우로라가 온 날 이후로 아우로라에게 헌신을 다했단다. 아우로라의 뿌리가 칠레이므로, 파울리나는 아우로라가 칠레의 교육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오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모두 칠레로 가기로 했단다. 오랫동안 집안을 완벽하게 해준 집사 윌리엄스와도 헤어져야 하는데, 집사 윌리엄스는 뜻밖에 파울리나에게 청혼을 했단다. 파울리나의 남편이 이미 오래 전에 죽어서 혼자였어. 윌리엄스는 칠레에 가면 어떤 식으로는 집안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할 테고, 형식적이지만 남편도 필요하지 않겠냐면서 평생 보필하겠다고 하자, 파울리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단다.

그들은 칠레에 가기 전에 잠깐 유럽에 들러서 아들 마티아스를 잠깐 만나고 칠레에 도착했단다. 아직 아우로라는 자신의 친아빠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해변 따라 내려오면 칠레인데, 칠레 오기 전에 유럽을 들렀다가 온다는 것이 파울리나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려주는 듯 하구나. 칠레에 도착한 파울리나 일행은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잘 지냈단다. 아우로라는 마틸데 피네다라는 가정교사한테 공부를 배웠단다.

.

당시 칠레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단다.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었는데, 독재 정치를 기획하고 있어서 반대파의 거센 항의로 내전이 일어났어. 세베로 역시 목발을 짚고 반대파 진영으로 이 전쟁에 참여했단다. 니베아는 파울리나의 집에 머물면서 반대파의 유인물을 몰래 인쇄했단다. 이 일은 윌리엄스가 도와주었고, 가정교사 피네다도 적극 관여했단다. 파울리나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유인물 전달책이 정부군에 잡히면서 알게 되었다. 일단 파울리나의 집에서 모두 피신해야했어. 윌리엄스는 자신은 영국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못할 거라면서 남겠다고 하고 파울리나와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피신했다가 사태가 안정되었을 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단다.

얼마 후 유럽에 있던 마티아스가 악성 성병에 걸려 휠체어에 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단다. 이미 회복할 수 없는 몸이었어. 그나마 생애 마지막을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아우로라와 지낼 수 있었지. 아우로라도 이제서야 마티아스가 자신의 친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십대 소녀가 된 아우로라는 사진을 배우고 자신이 어느 정도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한편 윌리엄스는 유럽에 갔다가 포도씨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파울리나에게 칠레에서 포도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단다. 프랑스의 날씨와 칠레의 날씨가 비슷해서 성공할 거라면서파울리나는 포도 사업을 알아보기 위해 유럽에 식구들과 가기로 하고, 아우로라도 함께 갔단다. 파울리나는 사실 이때 몰래 수술을 받기 위해 유럽에 간 것이었어. 병이 생겨 몸이 많이 안 좋았거든


3.

3부는 1896년부터 1910년까지의 이야기란다. 다행히 파울리나의 수술은 잘 끝냈어. 프랑스에 가서 포도와 와인 사업에 대해 알아보고 칠레로 돌아왔단다. 파울리나는 몸이 안 좋게 되자, 자신이 죽기 전에 아우로라의 결혼을 봐야겠다면서 아우로라에게 결혼을 종용했단다. 그래서 파티에서 만난 디에고 도밍게스라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단다. 할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 결혼처럼 보였어. 그런데 사람을 좀 잘못 고른 것 같구나. 디에고 도밍게스의 집은 상당히 보수적인 농장 집안이었단다. 결혼하고 나서 아우로라는 시골에서 생활하는데 적응이 쉽지 않았어. 그리고 모든 면에서 남편과 맞지 않았어. 답답함과 지루함의 연속이었지. 그나마 시누이 아델라와 마음이 맞아서 아델라와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어. 이 결혼으로 얻은 것은 아델라라는 친구뿐.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단다. 이때 시누이 아델라도 함께 왔어. 할머니가 좀 나아지셔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 밤마다 어딘가 나가는 남편을 뒤따라 갔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단다. 남편이 자신의 형수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거야.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남편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할거냐고 했어. 그 즈음 다시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단다. 다시 할머니 집에 왔어. 다행히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단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냥 할머니 집에 머물기로 했단다. 형수와 불륜 관계인 남편에게 돌아가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어. 할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할머니의 담당의사였던 이반 라도빅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단다. 사실 그 전부터 서로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호감으로만 머물고 있었지.

….

그러던 어느날 외할머니 엘리사가 찾아오셨단다. 티오 치엔의 유해를 가지고 중국에 가서 묻어주고, 영국에 가서 엘리사의 고모인 로스 스머스를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 주셨대. 엘리사의 고모 로스 스머스도 <운명의 집>에서 등장했던 분인데 기억나니? 로스 스머스가 돌아가신 다음에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아들 럭키와 지내다가 아우로라 생각이 나서 칠레로 왔다는구나. 엘리사 할머니는 여전히 정정하셨어. 파울리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아우로라에게 다시 든든한 버팀목이 나타나신 거란다. 아우로라와 엘리사 할머니는 함께 지내기로 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났단다.

아빠가 메모를 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중간중간은 기억을 바탕으로 이야기한 부분도 있어. 기억을 잘못하여 내용이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우로라, 파울리나 할머니, 엘리사 할머니 모두 강단 있고 자신감 넘치는 그런 캐릭터로 나오는 것 같구나. 그런 강단 있고 주장이 강한 그들의 성격을 배우고 싶더구나. 그런 이들이 모두 여자여서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구나.

아빠가 읽은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들은 모두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들이었단다. 최근에 이사벨 아옌데의 신간이 한 권 출간되어 읽었는데, 그것도 조만간 이야기해줄게. 그 책에도 또 다른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단다. ,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나는 1880년 가을 어느 화요일, 샌프란시스코의 외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났다.

책의 끝 문장: 그리하여 내 인생의 이야기는 세피아빛 초상의 색조를 띤다.


카메라는 간단한 기계여서 제아무리 바보라도 사용할 수 있는데, 도전이라면 그것으로 예술, 곧 참된 것과 아름다움의 결합을 창조하는 데 있다. 그러한 탐색은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일이다. 나는 투명한 가을 낙엽과 해변의 완벽한 모양의 소라에서, 여체의 등허리 곡선과 오래된 나무둥치의 결 조직에서 참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포착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형태들에서도 찾는다. 때때로 암실에서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작업하다가 한 사람의 영혼, 한 사건의 감동 또는 한 사물의 생동하는 본질을 만난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치솟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렇게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내 일의 목적이다. - P142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보의 메아리는 우리에게 들려왔고 사회의 변화를 모르고 지낼 수 없었다. 산티아고에서는 이미 실외 스포츠와 실외 게임, 산책 등 카스티야 이레온 귀족의 느긋한 후손들보다는 외향적인 영국인들에게 맞는 놀이들을 광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유래한 예술과 문화의 바람으로 칠레의 분위기가 새로워졌고, 독일산 기계들이 중후하게 돌아가는 소리에 칠레의 오랜 식민기적 낮잠은 중단되고 말았다. 벼락부자에 교육도 받고 부자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새로운 중산층이 탄생했다. 파업, 폭행, 실업, 칼을 뽑아 든 기마경찰의 공격 등으로 국가 기강이 흔들리는 사회 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여서 칼레우푸의 생활 리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 년 전에 같은 침대를 썼던 고조부들처럼 여전히 농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20세기는 찾아들었다. - P348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순한 그리움일 따름이다. - P4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9)

방실판막은 심방에서 심실로 들어가는 혈액을 조절하지만, 동시에 심실이 수축해서 온몸으로 혈액이 심방으로 역류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혈액의 역류를 방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질긴 섬유인 힘줄끈(건삭)을 흰김수염고래의 심장에서 열 줄 이상 볼 수 있다. 진짜 끈처럼 생겨서 심금이라고도 부르는 이 끈의 주요 성분은 콜라겐이라고 하는 구조단백질이다. 힘줄끈의 한쪽 끝은 심실 바닥에 튼튼하게 박혀 있고 반대편 끝은 판막첨판에 붙어 있어서, 심실이 수축할 때 판막첨판이 심방까지 밀려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심방과 심실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47-48)

이렇게 작은 동물들이 조증환자 같은 행동을 유지하려면 세포에 극단적으로 많은 에너지와 산소를 공급해야 한다. 그만큼의 에너지와 산소를 공급하려면 심박수를 늘려서 혈액을 더 자주 펌프질해 산소와 영양분을 신체의 각 부위로 보내주어야 한다. 그 결과 이런 동물들의 심박수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높다. 벌새의 심박수는 분당 1260회에 달하고 뒤쥐는 척추동물 중에서 최고에 속하는 분당 1320회에 이른다. 대략 35세 인간의 최고 심박수의 일곱 배에 달한다.


(74)

하지만 투구게는 회복력이 뛰어나다. 가장 로해된 쿠구게의 화석기록은 4 45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최초의 공룡 출현보다 대략 2억 년이나 빠른 시기다. 투구게는 삼엽충을 포함해 한 때 번성했던 절지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며, 아마도 가장 유명한 고대 무척추동물일 것이다. 투구게만큼 지구상에서 오래 존재해온 동물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이들을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부르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다.


(85)

헤모글로빈은 철을 함유하고 있어, 산소가 철과 결합한다. 또 헤모시아닌과는 달리, 헤모글로빈은 혈액 안을 자유로이 떠다니지 않는다. 헤모글로빈은 적혈구라는 세포에 의해 운반되는데, 적혈구의 수명은 대략 4개월이다. 또한 헤모글로빈의 중요한 구성 성분은 구리가 아니라 철이기 때문에, 혈액은 산화되어도 파란색을 띠지 않는다. 산소와 결합하는 분자의 색깔 변화는 우리 환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경계나 출입제한을 표시하기 위해 설치된 철조망이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면 붉게 녹이 스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176)

박쥐를 비롯해 동면하는 동물들은 겨울철에 산소와 영양분을 덜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온도 외에도 위와 같은 대사율 하락은 동면의 중요한 특징이다. 동면하는 곰의 심박수가 급격하게 떨어지듯이, 평소에 분당 500~700회까지 올라가는 박쥐의 심박수도 동면 기간에는 분당 20회까지 떨어진다. 이 기간에는, 추위에 또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박쥐도 혈액을 사지로 보내지 않고 몸의 핵심부로 보내 가장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고 온도를 유지한다. 추위에 떠는 사람과 동면하는 동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동면하는 동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동면하는 동물의 심장은 저온저산소 조건에서도 세동을 일으키지 않고 정상적으로 가능하도록 진화했다는 점이다. 세동은 심장근육 섬유가 불규칙으로, 동기화되지 않고 수축을 일으키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186)

돼지의 심장은 크기나 해부학적 구조, 기능에 있어서 인간의 심장과 매우 비슷하다. 암퇘지는 한배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는 점도 중요했다. 조직부적합성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실험용 돼지의 장기가 사람의 면역계에 의해 거부당하는 사태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돼지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PERV)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유전자 시퀀스를 제거할 수도 있다. PERV는 사람에게도 감염될 수 있기에 이는 매우 중요한 진보다. 최근 들어 연구자들이 이렇게 유전자를 재조합한 돼지의 장기를 인간이 아닌 영장류에게 이식하기 시작했고, 2021년 이후에는 임상 전 연구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된다.


(252)

다윈이 사망한 이후 140년의 세월 동안 여러 연구자들이 이 위대한 과학자의 죽음의 원인을 가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진단 내린 병명에는 불안장애의 일종인 광장공포증, 브루셀라증이라 불리는 박테리아 감염증, 만성 비소중독, 만성 불안증후군, 심각한 수준의 만성 신경쇠약, 만성 장 질환인 크론병, 주기성 구토 증후군, 우울증, 극도의 심기증, 위궤양, 통풍, 유당 불내증, 내이의 장애로 발생하는 메니에르병, 공황장애, 미토콘드리아성 뇌근육병증, 젖산산증, 뇌봉중양증상, 모계유전의 신경근계 이상, 정신신체증 피부질환 그리고 동성애 억제 등이 있다.


(274)

이러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의 패션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길고 치렁치렁하게 끌리던 치마는 집 안까지 박테리아를 몰고 들어온다는 이유로 더 이상 입지 않았으며, 코르셋은 혈행을 막는다는 이유로 판매량이 급감했다. 복잡한 속옷 역시 결핵의 증상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남성들의 스타일도 영향을 받았다. 구레나룻이든 턱수염이든 병균이 꼬인다고 생각해서 인기가 시들어졌다.


(314-315)

육류 소비도 증가하고 있다. 세계 전체의 육류 소비량은 지난 50년 사이에 네 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점령하의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순환계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을 비교한 주목할 만한 연구가 있다. 전쟁으로 인해 스트레스는 크게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노르웨이에서는 심장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 환자는 20퍼센트가 감소했다. 왜 그랬을까? 가축을 모조리 독일군에게 징발당하여 육류나 계란, 유제품을 먹을 수 없었던 노르웨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채소, 곡류, 과일 같이 저지방 식품으로 연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심장질환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아빠가 새로 알게 된 작가들 중에 최고는 이혁진이라는 작가란다. <누운 배>를 통해 알게 된 다음, 그의 장편을 다 찾아 읽었단다. ‘라고 해 봤자 데뷔하신 지가 얼마 안 되어 권뿐이더구나..^^ 3권뿐이라서 아쉬웠지. 그런데 두어 달 전에 신간 소식 알림이 떴어. 그 책이 이번에 아빠가 읽은 <광인>이라는 소설이란다. 책 두께가 어마어마 하구나.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인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책은 두께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어. 한 번 잡은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재미가 있었단다. 아빠가 회사를 다니다 보니 평일에는 책을 읽는데 아무래도 제한이 있단다. 이 책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다음날 출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이 들고 했어. 주말이 되자마자 남아 있는 페이지들을 한 자리에 앉아서 읽었단다.

전작들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잘 했는데, 이 책에서도 여전하구나. 그리고 이혁진 님의 소설의 장점은 기억하고 싶은 좋은 문구들이 책에 많이 실려 있다는 거야. 어떻게 그런 공감 가는 글들을 쉼 없이 쏟아낼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따가 몇 개 소개해줄게. 한가지 아쉬웠다면, 소설의 뒷부분에 소설의 제목처럼 광인이 되어가는 등장인물이란다. 그가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는지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단다. 아빠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장면들이 있었어. 사람마다 제각각이니까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튼 평범치는 않았지.

아빠가 이 소설을 너무 극찬한 것 같은데,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점, 알지? 이혁진 님의 그 전에 작품들을 좋아했던 아빠의 관점에 이번 <광인>이라는 소설을 이야기한 것이니까 말이야. 아참, 아빠의 기억력을 위해서 책의 내용은 거의 끝까지 다 이야기를 하는데,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디서 이야기를 끊어야 할지 고민 좀 해야겠구나.

 

1.

주인공은 41살의 싱글남 정해원. 41살의 싱글남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 중에 하나가 결혼이 아닐까 싶구나. 해원도 엄마의 결혼하라는 잔소리에 싫증을 내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들었어. 벽보에 붙은 플루트 레슨 광고를 우연히 보고 무작정 교습소로 갔단다. 그곳에는 권준연이라는 동년배로 보이는(알고 보니 한 살 적은 40) 권준연이라는 이가 있었어. 권준연은 가난한 작곡가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레슨도 한다고 했어. 플루트 배우러 갔다가 플루트 가르치는 여자 선생님과 썸씽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나 싶었는데, 강사는 남자였구나.

준연은 상담 온 해연에게 대뜸 위스키를 하자고 해서 처음 만난 자리에 술을 같이 하고 금방 절친이 되었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해연은 준연이 자신과 잘 맞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어. 그 이후 본격적으로 플루트 레슨을 받으면서 둘은 더 친해졌어. 준연이 엄마가 자궁암에 걸리셨는데 돈이 없어 걱정하는 모습에 해원은 선뜻 1000만원을 빌려주기도 했어. 해원은 그동안 직장 생활이 잘 풀려서 스톡옵션 등으로 큰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단다.

어느날 준연은 고향 친구가 위스키를 직접 만들어 올 거라면서 같이 마시자고 했어. 고향 친구라고 하니, 그리고 위스키를 만든다고 하니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위스키를 들고 온 조하진이라는 사람은 여자였단다. 플루트 강사는 여자일 줄 알았는데 남자이고, 고향 친구는 남자일 줄 알았는데 여자이고.. 약간의 비틀림을 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갖게 했단다.

해원은 첫눈에 하진에 반했단다. 하지만 하진은 준연의 친구였고, 옆에서 보니 준연도 하진을 여자로 대하는 느낌이었어 해원은 준연을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하진이 처음 보는 그 자리에서 그 완벽한 친구의 금이 가는 것이 느껴지더구나. 하진인 위스키 사업 때문에 당분간 서울에 머물러서 가끔씩 셋이 술자리를 했단다. 해원은 하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그랬어.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점 하진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단다. 하진은 위스키 사업 설명 PPT를 만들었는데, 해원이 도와주었단다. 해원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PPT는 많이 만들어봤거든. 하진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해원은 퇴근하고 하고 PPT에만 매달렸지. 하진은 고맙다면서 술을 사겠다고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해원은 하진과 단 둘이 만났단다. 하진은 정말 스스럼 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다 했단다.

이 만남 이후 해원의 머릿속은 온통 하진뿐이었단다. 하지만 하진은 절친 준연이 좋아하는 친구라는 것에 해원을 괴롭혔어. 몇 번을 고민하던 해원은 결국 하진에게 고백을 했단다. 그리고 하진도 해원을 좋아하고 있었다면서 그 고백을 받아주고 둘은 사랑을 하기 시작했어. 해원은 이 사실을 준연에게도 이야기했고 준연도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축하해준다고 했단다. 하진에게 준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진에게 준연은 세상에서 가장 친한,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죽마고우. 그건 하진이 해원과 사랑을 시작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단다. 이것이 앞으로 이야기에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란다. 지금까지는 왜 소설 제목이 애인이 아닌 광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단다. 하지만 앞으로는

 

2.

해원은 하진이 운영하는 시골에 있는 증류소를 찾아가 일도 도와주었단다. 시간 날 때마다 하진의 증류소를 찾아가고 가지 못할 때는 매일 전화하고….

그러던 어느날 암에 걸렸던 준연의 어머니가 결국 돌아가셨어. 준연의 어머니는 치료가 호전되어 시골집으로 내려가시고 얼마 후 돌아가신 것이라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단다. 알고 보니 준연의 어머니는 처방해 간 약을 하나도 드시지 않았어. 준연은 충격을 받고 무척 힘들어했단다. 장례식을 마치고 해원, 하진, 준연과 술을 먹었는데 힘들어 하는 준연은 자해까지 했단다. 그런 그를 하진은 자신이 옆에서 보살펴주겠다고 했어. 해원은 자신의 여자친구가 밤새 다른 남자와 함께 하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 몇 번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냐고 물었고, 하진 대신 자신이 준연 옆에 있겠다고 했지만, 하진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진에게 준연은 둘도 없는 친구이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해원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 때는 하진을 믿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장례식을 마친 준연은 어머니의 시골집에 내려갔어. 준연이 없어지자 해원은 하진과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아했단다. 하진은 위스키 투자자와 미팅도 가졌는데 큰돈을 대면서 사업하겠다고 하는 투자자도 있었어. 해원도 그 투자자의 제안을 들어보니 정말 좋은 계획이었어. 하지만, 하진은 그 투자자의 제안을 거절했단다. 이유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다는 거였어. 오랜 회사 생활로 인해 실적을 중요시 생각하는 해원에게 그 투자자의 제안은 둘도 없는 기회였는데 그것을 거절한 하진을 이해할 수 없어서 또 티격태격했어. 금방 화해를 하긴 했지만, 점점 부딪히는 일들이 많아졌어.

둘이 깊이 사랑할수록 둘은 서로 더 많이 알게 되어가고 그러면서 실망하는 모습도 보일 텐데,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해원은 그때마다 이해하지 못하고 하진과 말다툼을 하는구나. 하진도 자존심이 세어서 해원의 말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맞부닥치고둘 다 나이가 마흔 살이 넘었는데 사랑도 여러 번 해봤을 텐데, 사랑의 초짜처럼 구는 것이 안타까웠단다. 그래서 그 때까지 혼자였던가, 싶기도 하고아무튼 해원은 하진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성 들여 편지와 꽃을 준비하여 하진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단다. 그럴 줄 알았어. 하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위스키 사업이었거든. 타이밍이 좋지 않았지. 하지만 해원은 굽히지 않고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결혼하자고 설득을 하려고 했어. 하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단다. 해원이 아직 하진을 잘 모르고 있구나. 하지만 나이 사십에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놓치고 싶지 않은 해원의 마음도 이해는 가는구나.

 

3.

준연은 시골집에서 돌아와 교습소를 그만두고 배달일을 했어. 준연이 다소 대책 없이 일을 관두고 또 다른 일은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또한 해원은 좀 이해가 가길 않았단다. 오토바이에 익숙하지 않던 준연이 배달을 하다니.. 얼마 못가 교통사고가 났어. 이 일이 있자 곧바로 하진이 서울로 올라왔단다. 하진의 남자친구해원은 속이 끓겠지. 이젠 준연이 친구로 보이지 않으려고 했어. 그런데 며칠 뒤 하진이 이야기 하기를 준연이 자신의 증류소에게 일하기로 했다는구나. 해원은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어. 하지만 하진의 뜻을 꺾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어. 아빠 생각에는 하진이 이건 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애인이 있는데, 아무리 둘도 없는 친구라지만 이성인데, 단 둘이 그 시골집에서 지낸다고 하면 괜찮다고 할 남자친구가 얼마나 될까. 남자친구 생각도 좀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진의 뜻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해원은 준연의 뜻을 꺾어보려고 준연을 찾아갔어. 해원은 준연에게 자신이 돈을 대 줄 테니 교습소를 다시 차려 보라고 했어. 제발 증류소에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설득했단다. 하지만 준연도 뜻을 굽히지 않았어. 준연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같은 남자로서 해원이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해원이 그렇게 애원하고 설득을 해도 준연이 하진의 증류소를 가겠다는 뜻은 증류소의 일보다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랑 똑같다고 생각해. 결국 해원은 큰 소리를 치게 되었고, 해원과 준연은 크게 말다툼을 했단다.

준연은 하진의 증류소에 내려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준연과 하진은 증류소를 배경으로 악기 연주도 하고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인기를 끌게 되었단다. 위스키와 듀엣 연주이 동영상들이 인기를 끌면서 대중들의 위스키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단다. 하지만 해원이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갔어.

그렇지.. 아빠가 해원이라면 이쯤에서 끝냈을 것 같구나. 하진이 아직 해원을 좋아하고 남자친구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구나. 해원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의 제거하려고 했단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고 그런 것은 아니야. 해원이 생각하기에 하진의 시골 증류소만 없어지면 될 것 같았어. 증류소야 자신이 다시 지어주면 될 거라 생각했지. 그것도 시골이 아닌 서울 근처에 말이야. 해원은 다음 완전 범죄를 하려고 눈이나 비오는 날에 몰래 가서 증류소만 불태워 없애려고 했단다. 괜히 맑은 날 일을 벌였다가는 증류소 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산과 집까지 다 탈 수 있으니

하지만 해원이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런 일을 해봤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벌어졌지. 눈이 많이 온 날 밤에 몰래 아무도 없는 증류소에 가서 불을 냈. 예상치 못한 증류소 폭발에 해원은 당황했단다. 증류소가 알코올 등 발화물질이 엄청 많았으니 그런 폭발이 있었던 거야. 해원은 당황하여 여기저기 증거물들을 다 떨어뜨리고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단다. 증류소의 폭발과 강한 바람으로 인해 눈이 왔지만, 불은 무섭게 번져나갔단다. 인근 집들과 산이 모두 화마에 휩싸였어. 증거물을 남기고 온 해원은 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단다. 화마가 다 쓸고 갔으니화재로 증류소를 잃어버린 하진은 망연자실하고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 해원은 하진에게 그 증류소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사랑에 눈에 멀었는데 그 사랑을 잃을까 봐 이성을 잃어버린 모습이 해원의 모습이었어.

 

4.

아빠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서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는다고 했는데, 이쯤 그만 해야겠구나. 해원과 준연과 하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원은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완전범죄가 되었을까? 과연 누가 광인인가? 초반부의 잔잔한 우정과 사랑은 끝으로 갈수록 극단적인 전개가 이어진단다.

사실 소설 제목이 광인이었기 때문에 앞 부분에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이어질 때도 계속 불안감이 있었단다. 해원과 하진과 준연이 조금씩만 상대방을 이해해 주었다면 소설의 제목을 광인이라 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야. 지은이 이혁진 님께서 사랑의 극단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 같구나. 그 부분은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아빠로서는 좀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 부분에서는 최고였단다. 이혁진 님의 전작 <사랑의 이해>가 이미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이 소설 또한 영상화가 되지 않을까 싶구나. 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지면 꼭 한번 봐야겠구나.

이 책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음악을 하다 보니 음악도 많이 소개되었단다. 아빠가 처음 들어보는 음악들이 대부분이었어. 아래 세 곡은 제목을 적어 두고, 유튜브로 들어보기도 했단다. 좋은 음악들도 알게 되어 좋았어.

‘Chega de Saudade’

‘Skating In Central Park’.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아참, 아빠가 이 책에 좋은 문구들이 많아서 소개해 준다고 했지? 아빠가 발췌기를 통해 따로 정리한 것이 있는데 거기를 봐도 되긴 하는데 특히 좋은 구절은 여기에도 세 개 정도 소개해 보련다.

===================

(178-179)

친구와 연인이 다른 것 같지만 진실한 의미일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인이란 내가 이성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란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는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연인은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

===================

(346)

사랑은 인정이고 긍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죽음에 반항하는 방식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 단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을 열렬히 실감할 때, 죽음은 단지 침묵에 불과해진다. 하진의 연주가 끝났을 때 들였던 그 의심도 두려움도 없고 외로움마저 없는 침묵. 사랑은 환상이나 감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 없이도 사랑은 이미 사랑이었고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만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할 때 죽음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 자식들이 커 간다는 그 실감 속에서 부모들이 다 그런 거지, 한마디로 자신들의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듯. 그 긍정, 인정이 슬프면서도 기쁜 것이듯 사랑도 기쁘고 그래서 슬펐다. 모두, 모든 것이.

===================

===================

(566)

마음이라는 건 세면대 같아요. 거기엔 뭘 붓든 모두 한곳으로 흘러 들어가죠. 우리 자신이라는 그 구멍으로요. 하지만 그 구멍이 이어지는 곳은 결국 하수구, 하수도예요. 썩어 가고 악취를 풍기고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토악질 나는 것들밖에 없죠. 거긴 우리한테 묻은 더러운 걸 씻어 내는 데지 우릴 욱여넣어서 더러워지는 데가 아니에요.

===================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제가 왜 이별은 싫어하면서 이별 노래는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책의 끝 문장: 노래는 끝난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막걸리라면 그걸 그린 자화상은, 그나마 볼 만한, 증류식 소주 같은 거고 역사가 보리로 담근 발효주라면 소설은 그걸 증류한 위스키라고 할 수 있을 테죠. 히치콕이라는 영화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극(劇)이란 지루한 부분을 오려 낸 인생이다. 영화가 인생을 그대로 옮겨 놓기만 한 거라면 사람들이 왜 그걸 보고 있겠어요? 더럽게 지루한데다 매일 신물나게 보고 겪는 게 그건데요. 저처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죠. 창밖의 소리가 아무리 싱그럽고 청량해도 그걸 그대로 옮겨 놓은 건 음악이 아니라는 걸요. 반대로 아무리 비싼 악기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낯설고 기이하기만 한,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무관한 소리들 역시 음악이 아니죠. 그건 그냥 악기로 만들어 낸 소음일 뿐이니까요. - P8

좋은 사람이란 그 한 사람만 있어도 살 만하다 생각이 드는 사람이죠. 싫은 사람이란 그냥 생각하기도 싫은, 결국엔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일 뿐이고요. 제 생각에, 분명한 건 이거예요.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 수는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잘, 열심히 살 수는 없어요. 그게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에게도 자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밑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싫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봐야 좋은 사람이 왜 좋고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요. 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싫은 사람은 대가고 좋은 사람은 목표죠.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란 글자 수만 같을 뿐 사실 그렇게나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 P27

압도적인 풍경을 볼 때 풍경과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아주 작은 자신을 함께 지각하게 되는 것처럼, 침묵과 그 침묵을 드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전에 준연이 말했던, 음악이 끝나고 달라진다는 침묵이 바로 이런 것임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무음이 아닌, 음악에 빗질이 된 것처럼 정갈하고 가지런한 고요함. 거긴엔 침묵이 주기 마련인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오직 파고들 듯 깊숙이 간직되는 환희만이 있었다. 연주회장에서 우리를 포효하듯 환호하게 하고 열렬히 박수치게 만드는 환희. 어쩌면 우리는 이런 침묵을 듣기 위해 음악을 듣는 건지도 몰랐다. - P67

하진의 말대로 그때는 몰랐다. 어렸기 때문에 모르는 건 많고 아는 건 적었지만, 생각은 늘 반대였다. 다 안다고, 내가 아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사람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것이었는데, 뭔가를 안다는 건 나만 안다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안다는 뜻에 불과한데도. - P127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준연이 말했다. 꿈과 이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요. 현실과 반대라거나 동떨어진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꿈이나 이상이 없다면 현실은 점점 더 시궁창이 될 수밖에 없고 또 현실이 온전하지 않으면 꿈이나 이상도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가난하고 못살았기 때문에 다들 희석식 소주밖에 마실 게 없었고 그래서 술이라고 하면 그런 소주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요. 더 나은 건 늘 있어요. 현실에 아직 없기 때문에 꿈이나 이상이라는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을 뿐이죠. - P195

맞아. 배부른 소리야. 하지만 배가 부르니까 해야 하는 소리지. 배가 부르다고 만족할 수 없는 게 우리니까. 인간이란 먹고 살기 위한 존재에 그쳐지지가 않으니까. 우리한텐 좋은 술이 필요해. 좋은 집, 좋은 차, 외식도 하고 드레스도 입어야 돼. 그래야 ‘살았다’가 아니라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먹고 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걸 먹고 마실 때니까. 물론 없어도 먹고사는 데아무 지장 없지. 하지만 그것뿐이면 우리가 먹고살기만 하는 존재 같아지는 거야. - P270

이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흔히 <월광 소나타>라고 하는 곡이에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준연이 말하며 비장한 느낌의 셋잇단음표를 연주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유명한 곡이었다. 준연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이건 죽음의 선율이에요. 다가오는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이죠. 제 마음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서 빌려 온 선율이에요. 모차르트 오페라에 그렇게 나오거든요. <돈 조반니>에서 기사단장이 살해당할 때 거의 똑 같은 선율이 현악으로 연주되죠. 그리고 베토벤도 이 곡을 쓸 무렵 청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어요. 그런 음악가로서 죽음을 의미했죠. 역시나 다가오고 피할 수 없는, 억울하고 비통한 죽으미요. - P293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만사 다 길이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다들 이렇게 길을, 누가 봐도 아무 쓸 데 없는 길을 뚫어 놓으니까. 이렇게 뚫어야 알뜰살뜰 여기저기서 기름칠해 주는 사람이 생기거든. 시키지 않아도 똥 치워 주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우습지. 크고 빳빳한 기름종이들 살랑살랑 흔들어 주면 다들 혓바닥 내밀 듯 손을 내밀지. 아버지는 나를 봤다. 인간이란 다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죄 한두 개쯤은 지어 가면서 사는 거다. 어느 자리쯤 올라서면 짓지 않을 도리도 없고, 짓지 않을 이유도 없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감당이 되면 죄가 아니니까. 감칠맛이 돌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지키라는 거 지켜 가면서 남들 안 볼 때 한번씩 혀를 낼름, 낼름해서 핥아 보는 그맛이 혀에 감겨서 잊히질 않거든. 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 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 P488

무엇을 사는지(購買)가 어떻게 사는지(生活)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톡톡 시가를 떨어 재떨이에 떨어진 재를 시가 끝으로 부쉈다. 그러고는 끄트머리를 세워 내게 보였다. 여기 있는, 요 타고 있는 까만 재, 이게 우리 인간이야. 그 가운데에 빨갛고 뜨거운 불이 세상이지, 불가에서 말하는 아수라. 아버지가 깊게 한 모금을 빨자 빠직거리며 담뱃잎이 타 들어갔다. 가운데가 빨갛게 환해졌다. - P500

사랑의 본연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다른 사랑과 비교당하지도 평가당하지도 않았다. 가장 좋은 것, 값비싼 걸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니니까, 최악을 지워 주고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모든 수고를 다해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의미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된다는 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늘 하진에게 해 주지 못한 것, 그래서 매번 틀리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사랑한다면서도 이해하는 만큼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만큼만 믿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그건 이해도 믿음도 아니었다. 알던 만큼만 아는 건 앎이 아니니까, 모르던 걸 아는 앎이니까. - P6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