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 지금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인생을 얻을 수 있다
러셀 로버츠 지음, 이현주 옮김, 애덤 스미스 원작 / 세계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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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 그에게 또 한 권의 대표적인 저서가 있었으니 그 저서의 제목은 『도덕 감정론』이다. 『국부론』은 몇 년 전인가 도전하려다 도서관에서 훑어보고 다시 꽂아두었던 책이고, 『도덕 감정론』은 그나마도 제목만 알고 있던 책이었다. 이 책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은 『도덕 감정론』을 현대에 맞게 풀어쓴 책이다. 기시미 이치로가 아들러 심리학을 다시 풀어써서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이 책 역시 널리 읽히기를 바라본다.


 국부론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시장의 자율을 외치던 애덤 스미스가 인간의 선함과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에 주목했다는 것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왜 애덤 스미스라는 한 인간의 저술 속에서 상충되는 두 가지 개념이 동시에 발현되어 나올 수 있었는지를 밝힌다. 그다지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기에 여기서 얘기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국부론은 이른바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원리다. 반대로 도덕감정론은 '자주 만나고 접하는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원리다. 그렇기에 이기심과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를 이롭게 하게 되는 가능성을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선순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덕감정론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서로를 이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책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이야기하는데 쓰는 비유란 다음과 같다.

내 손가락에 생긴 종양과 바다 건너 수십 만 명이 자연재해로 죽어가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내 손가락에 생긴 이상이 낯모르는 세계의 수십 혹은 수백 만 명의 희생보다 더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체와 통신 기술의 발달로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순식간에 전해지지만 거의 모든 순간에 그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 혹은 와닿지 않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이라기보다 실감할 수 없는 사고의 구조에 있다. 아무리 슬퍼하려고 해도, 안타까워 하려고 해도 나 자신에게 닥친 것처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고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말을 빌어 이야기한다. 


 사람이 어느 순간에 행복해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스스로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만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스러운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나 착각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 진정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애쓰게 된다는 말이다. 마치 시장이 개인의 이기심의 조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작동하는 것과 닮은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책 속에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 크고 작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의 모습을 여러 일화를 통해 들려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위선을 행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부정하는 '인정의 욕구'와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이야기다. 인정의 욕구의 경우 타인의 잣대에 의해 그 만족도가 달라지지만 애덤 스미스의 사랑스러운 존재는 자기 안의 공정한 관찰자라는 심판의 판단을 통해 만족과 불만이 갈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가지는 꼭 구분되어야만 할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책 속에 현재 우리 나라와 세계의 여러 분쟁의 핵심을 짚어주는 통찰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몇 군데 둘러보자.


 140쪽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부자의 어깨에 들어간 힘 만큼이나 명백하게 감춤 없이 두드러져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갖고 있지 않기에 비참하다는 생각에 몰두하기 십상이다. 가진 사람이 이 말을 하면 자신은 가졌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이 말을 하면 부러우면서 아닌 척한다고 비웃으니 그 마음 어디에 만족이 깃들 수 있을까?

 254쪽

 고급스러운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단기적인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약속을 지키고 책무와 계약을 이행한다. 또한 타인을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욕구도 잘 이겨낸다. 그런 문화가 잘 자리 잡힌 사회는 기막히게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신뢰를 형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사랑스러움의 문화를 만드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사회에서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을 속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만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거짓말, 축소 전달, 태만을 정당화 하는 거다. 그렇게해서 결국 이득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손해 나는 것은 자기 혹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논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또 넓게 생각해보면 모든 손해는 어떤 형태로든 모두에게 돌아오게 된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 그렇기에 신뢰를 형성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만 하게 되는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과 정직한 사람들이 우스운 꼴을 당하고,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회는 너무나 불행한 사회다. 더 고급스러운 사회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살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속이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과 진심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265~6쪽

 『도덕감정론』에서도 밝혔지만 스미스가 가장 경멸한 사람은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었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란, 특정 설계나 비전에 따라 사회를 다시 세우려 하는 지도자를 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비전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그것이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자신이 만든 비전에 파묻힌 그들은, 그로인해 자칫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이나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 역시 보지 못한다.


 이 부분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비전에 함몰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실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 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자신들만이 옳고, 자기들만이 모두를 위한다는 생각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위험한 기만행위다. 책 속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거라 믿는다. 동시에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어버린다. 다양성이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몹시 위험한 사고의 태도다. 몰락한 권력과 세계는 모두 그렇게 자기만의 이상과 환상에 함몰되어 세상을 살피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가장 재밌는 점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애덤 스미스의 두 저서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완역본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다. 책에서는 현대에 맞지 않는 딱딱한 표현들이 많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또 그것대로 낭만적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닌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진정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다른 것은 어떻든 존경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애덤 스미스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 


 아, 재밌는 오류가 있다.

나심 탈레브의 '이야기짓기 오류'가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짓기 오류란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그 일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들을 내놓는 것을 말한다. 오늘 하락의 원인이었던 사실이 내일은 상승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이야기짓기 오류의 간단한 예다. 경제를 예측하는 사람들,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오류라는 생각에 혼자 웃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그런 예측은 정치나 경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라도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경제적인 이익과 손해를 떠나 나는 나 자신이 판단하기에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싶다. 누가 "너는 참 사랑스럽구나"라고 말해서도 아니고, "너는 참 밉상이구나"하고 말해서도 아닌 나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정당하고 공정하게 '사랑스러운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인 거다. 


 결국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공정한 관찰자는 모두 무게 중심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거나 치우치지 않은 균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공정한 나, 사랑스러운 나로 나아가는데 작은 발판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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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5-12-1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대장물방울님, 이달의 리뷰 수상 축하드립니다 :>

대장물방울 2015-12-10 21:59   좋아요 0 | URL
오오!! 고맙습니닷!!
 
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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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대학을 졸업한 게이타로가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같은 하숙의 이웃의 삶과 친구인 이치조의 삶과 그 친구의 사촌 동생의 삶과 이모부의 삶과 또 다른 삶과 삶들을 모아 담은 것이다. 게이타로는 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마치 한편의 극을 지켜보는 일을 끝내는 것처럼 말하고는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나아간다. 그이 앞으로의 삶이 길할지 흉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갈 거였다.


 <춘분 지나고까지>는 소세키 특유의 절제된 애절함이 게이타로의 친구인 이치조와 사촌 여동생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함으로써 마치 책을 읽는 사람이 책 속에서 그 사연을 풀어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거다. 

 오래 전부터 꿈꾸는 것이 하나 있다. 그 꿈은 나쓰메 소세키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앞에 적은 소세키의 서술방식, 즉 문체에 그 중심이 놓인다. 


 개인적으로 쓰는 말이기에 통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나는 소세키의 문체가 '수채화 같은 문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채화는 유화와는 달리 밑그림 위에 다른 색을 덧칠해도 아래에 있는 색이나 윤곽이 비쳐나오게 된다. 또 하나 어느 곳에 놓는가에 따라 그 색감과 밝기가 무수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 밑그림의 윤곽과 무수한 변화야 말로 '수채화 같은 문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춘분 지나고까지>의 경우 화자가 하나라고 할 수 없다. 게이타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이타로 스스로가 말하기도 하고, 게이타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여럿의 화자 가운데 누구도 이야기의 핵심을 흐리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로 전체의 이야기를 압도하거나 덮어버리지 못한다. 누가 이야기를 하든 그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마지막 순간에 드러날 결심이 깔려 있는 거다. 


 이 이야기는 특별히 비극적이지도 않고 희극적이지도 않다. 소세키가 정말 사랑스러워했던 딸의 죽음을 기리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마쓰모토의 딸의 죽음 에피스드조차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어 감정을 읽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렇기에 비가 오는 날에는 손님의 방문을 받는 일이 없다는 마쓰모토의 결심과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이 더 결연하게 느껴진다. 격렬하지 않은 부분까지 수채화를 닮았다. 


 은은하지만 깊은 사유와 무수한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소세키의 솜씨에 새삼 감동하게 만든 작품이다. 


 제목인 <춘분 지나고까지>는 큰 의미 없이 새해가 시작되고 춘분즈음까지 써서 이야기의 연재를 끝내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런 농담 같은 시시함이 좋다. 시시하지만 진실말고는 다른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 그 마음 씀씀이가 더 좋다. 

 나는 원래 소세키는 편애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므로, 이 감상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을 거라는 걸 지금이라도 밝혀둔다. 


 <춘분 지나고까지>에서는 딱 두 군데에 표시를 했다. 

한 군데는 앞서 두 번이나 적었던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표현이다. 

또 한 군데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346쪽

 돌아보면 게이타로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실제 세상과 접촉해보고 싶다는 뜻을 두고 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은 일은 단지 남의 이야기를 대충대충 듣고 다닌 것뿐이다. 지식이든 감정이든 귀로 전해지지 않았던 경우는 오가와마치 정거장에서 지팡이를 소중한 듯이 짚고 전차에서 내리는 희끗희끗한 외투를 입은 남자가 젊은 여자와 함께 서양 요릿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행한 정도의 일이다. 

(중략)

 요컨대 인간 세상에 대해 게이타로가 가진 최근의 지식과 감정은 모조리 고막의 작용에서 온 것이다. 모리모토에서 시작하여 마쓰모토로 끝나는 몇 자리의 긴 이야기는 처음에는 넓고 얕게 게이타로를 움직이면서 점차 깊고 좁게 그를 움직이기에 이르더니 갑작스럽게 끝났다. 하지만 게이타로는 결국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게이타로에게는 그것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고 동시에 다행스러운 점이다.


 지금의 우리와 다를 것 없이 소세키가 그려낸 인물 게이타로의 시대 일본 역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바로 좋은 직장을 얻어 출세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게이타로는 여기저기에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거다. 그러나 그런 일자리를 알아보는 행동에는 어딘가 절실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세계가 게이타로가 들어갈 수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게이타로는 그저 듣고, 보고, 다시 전해 들었을 뿐 그 안에서 어떤 일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암시하듯이 게이타로는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보통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세상을 머릿 속에 집어 넣는다. 그러나 소세키는 "사물을 머리로 옮기기 위해 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머리로 바라본다는 생각으로 눈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두 가지의 차이를 말로 설명할 수 있을만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로 느낄 뿐이다. 두 가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할 뿐이다. 


 흔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귀에 들리는 말, 소리가 모두라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이 깨달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주파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의 감각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

 체험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삶으로 뛰어들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단순히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미신에 의지한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했으므로 게이타로 역시 자신만의 결론에 닿은 거다.


깔끔하게 정리해내지 못하는 걸 보이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법하다. 

다음에, 조금 더 세상과 삶을 실감하고 난 후에 읽어보면 아주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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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 처음 만나는 스페인의 역사와 전설
서희석.호세 안토니오 팔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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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전에 앞면과 뒷면이 있는 것처럼 세계의 모든 역사에는 그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역사가 있는 모양이다. 역사교과서 문제로 떠들썩한 지금 이 시대의 우리가 후대의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되게 될지 궁금해지는 이유는 앞면에 남을지 뒷면에 남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정사니 야사니 하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신빙성이 있으며 진실 혹은 사실에 가까울 지는 그저 추측해볼 뿐이라 역사 역시 편협하지 않게 두루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한 것 아닌가 싶다. 

 결국 E. H. 카의 유명한 말처럼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가 아닌가. 


 이 책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의 가장 특징적인 점을 꼽으라면 저자가 한국인과 현지인의 공저라는 거다. 그 나라의 역사는 꼭 그 나라의 사람이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쉬운데, 오히려 역사의 속성 상 어느 거울에 비춰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기에 외국인이 기록하고 해석한 역사서가 있는 편이 폭넓은 견해를 제공 받을 기회를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도 좋겠지만 스페인에도 독이 되지 않을 책이라는 거다. 

 다음 가는 특징은 이 책이 일종의 역사의 뒷이야기, 야사를 담은 책이라는 거다. 형식과 규율에 구속되기 쉬운 정사는 솔직히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는 하겠지만 읽는 재미는 덜한 게 사실이다. 스페인 사람들도 모르고 있을 역사 속 이야기를 수천 킬로 밖의 우리가 알게 되었다는 것, 놀랍지 않은가?


 21세기 인종의 용광로가 미국이라면 고대에서 중세까지 인종의 용광로 역할을 맡았던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었다.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의 잠재력이 '다양성'이라면 현재의 미국이 100년 넘게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과 과거 스페인이 영국 이전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역사도 납득이 간다. 반대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규제와 통합, 흡수와 배제의 노선을 선택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한 역사는 어떤 나라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몰락하게 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스페인은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헤라클레스의 전설에서 시작해 로마의 역사와 이슬람의 역사까지 품고 있는 파란만장한 과거를 품고 있는 나라다. 포르투갈 역시 스페인 역사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이나 다름 없는 나라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덧붙여 신대륙 탐험을 나섰던 콜롬버스의 만행 또한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콜롬버스의 만행이란 자신의 욕심만큼 황금이 발견되지 않자, 원주민의 손발을 자르는 등 학대를 거듭한 거였다. 위대한 항해자이자 탐험가로 알려졌던 콜롬버스 역시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황금에 눈이 멀었던 폭군에 불과한 가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제국주의 또다른 그늘처럼 비쳤다.

 콜롬버스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로 콜롬버스의 유언인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어기지 않으면서 스페인에 콜롬버스의 관을 가져온 방법은 기발하기 짝이 없으니 책 속에서 꼭 찾아볼 것을 권한다.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콜롬버스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할까 싶을 정도다. 


 스페인은 대표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 그만큼 다툼이 많고 또 잦았다는 거다. 다툼이 잦았다는 것은 그 대지가 머금고 흘려야 했을 피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타오르듯 한 정열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하나의 민족도, 하나의 종교도 아니었기에 지배자들의 이익에 따라 언제 어떤 처지에 놓일 지 예상할 수 없었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은 적이 되었으며, 친척끼리 피를 흘리며 싸웠고, 어느날 갑자기 가진 것 전부를 빼앗기고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런 혼란을 이겨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정열을 불살랐던 건 아닐까?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보면 같은 스페인 안에서 언어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장면이 여러 번 거듭된다. 무식한 소년 병들이 전장으로 뛰어들어 죽어나간다. 무엇을 위한 희생인줄도 모르고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용병이 된다. 고대, 중세, 근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까지도 스페인은 그랬다. 다툼과 불통, 가난에 시달렸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우리의 역사도 들여다보지 않는데 다른 나라의 역사를 읽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지 아마 다들 알 것이다. 역사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비슷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반복은 흔히 단일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만 한다. 


 스페인을 여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관광 가이드만큼이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거다. 

다만, 문장이 유려하지는 않으니 그 부분은 감안하고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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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라디오
모자 지음, 민효인 그림 / 첫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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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방구석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옛 고향집을 떠올리게 한다. 

고향집에는 다락방도, 다락방 속의 라디오도, 도심의 야경도 없었지만 밤 하늘에 가득한 별빛 만큼은 부족하지 않았다.

 이제는 어쩐지 자주 찾아가기도 어려워지고 말아서 더 그리워지는 고향, 향수를 불러 오는 그런 빛깔의 책이다.


 작가의 이름이 모자라니.

모자를 좋아해서 모자라니. 

왠지 겸손할 것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왠지 복잡할 것 같은.


 이야기들은 작가의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설계되고 구축되어 세상에 나온 것들이다. 

아버지와의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고 느꼈는데, 모자 씨가 남자라서였을까?

아니면, 나 역시 아버지가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었을까?

 얼핏 복잡해질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이 책은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담백하게, "그랬지"하고 생각을 그칠 수 있는. 

마침표를 찍듯 하나 하나의 생각들에 조금은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려주는 게 오히려 편했달까.


사람들은 깨달음을 구하지만 정말 커다란 깨달음은 어디선가 느닷 없이, 혹은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조금씩 적어나간 이야기 속에 담긴 무수한 깨달음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그 공감이 늘어나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 마음의 한 군데에 가서 닿을 것이고, 다음 순간 "아,"하고 느끼게 되는 것. 그런 게 깨달음 아닐까.


 사람이 사람에게, 가족에게, 회사에, 연인에게, 친구에게 기대하고 기대는 많은 것들은 어디까지 '자의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문제가 되면 객관성을 잃어버린다. 

 "왜 나에게만."

"너는 어쩌면 그렇게."

원망하고 탓하는 말이 늘기 쉬운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애초에 믿음을 가진 건 나였으니까."


내가 만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시작했으니, 내가 끝내는 게 옳은 것이다.


작가는 마치 자기만의 주파수로 방송을 계속하듯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누구에게 동정이나 공감을 호소하는 일도 없이 담담하게.


요즘에도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많은지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라디오가 단순한 방송의 하나가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고 신해철 님은 방송에서 '마왕'으로 군림했었다. 

 새벽의, 이르다고도 늦다고도 하기 어려운 시간. 

깨어 있는 사람이 아마도 가장 적은 시간에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더란다. 

라디오란 그런 것이 아닌가 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누는 동시에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그런.


<방구석 라디오> 역시 그런 방송을 닮아 있다.

나는 모자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에게 돌아와 나의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모두가 잠들었을 거라고, 외로운 것은 나 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라디오는 다른 사람의 사연을 전해준다. 

같은 시간에 깨어 귀기울이고 있을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말이다.


조용한 새벽, 아마도 홀로 깨어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시간에 읽으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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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장물방울 2015-10-27 18:09   좋아요 1 | URL
^^ 정말요. 그 말씀대로 된다면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해질텐데요.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린다짱 님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
 
세계사 브런치 - 원전을 곁들인 맛있는 인문학, 국립중앙도서관 선정 "2016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 브런치 시리즈 2
정시몬 지음 / 부키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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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서양의 역사 혹은 중국, 일본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더 많이 읽는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죄스러움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역사책들을 들춰보게 되는 까닭은 '역사' 고유의 공통성을 발견하는 기쁨이 작지 않기 때문이며 타국의 역사 혹은 우리와 무관한 세계의 흐름이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언제나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첫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단추를 전부 풀어서 다시 끼우기 시작하지 않는 한 단추와 단추 구멍은 짝을 이루지 못한다. 설사 첫단추를 잘 끼웠다고 해도 중간에 하나나 둘쯤 잘못 끼운다면 마찬가지로 짝이 맞지 않게 된다. 역사는 말그대로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다. 또한 사실인 동시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때로는 사실과 전혀 다른 거짓이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역사를 대할 때 정말 중요해지는 것이 균형 감각이 아닐까 한다. 

 개인 혹은 집단이라고 해도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균형이라고 적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태생적으로 한계를 품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균형 감각이 더 중요해진다. 역사가는 때로는 누구보다도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역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E. H. 카의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나라의 역사도 한 권의 책에 담기에는 그 지면이 너무나 부족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세계사를 한 권에 담는다는 것은 무수한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닌 이들의 역사서는 그 신뢰성에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전문가가 비전문가보다 낫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세계사 브런치>의 저자 정시몬은 자칭 '간서치'다. 책을 읽는 것을 통해, 당연히 뒤에 따라올 사유를 통해 자신만의 관점과 기준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확립한 사람처럼 보인다.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성과물들을 내놓는 독서가들에게는 늘 감탄하게 된다. 이미 읽어본 경험이 있기에 뒤에 읽게 될 사람들에게 조금은 더 수월하고 편안하게 느껴질 저작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구성도 흥미롭다. 지금까지 읽었던 서양사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이 번역서였다. 번역서를 내면서 굳이 원전의 본문을 영어나 한자, 일본어로도 적어두는 경우는 많지 않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번역을 미심쩍어하는 이들에게 확인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고, 번역된 문장의 느낌과 원서의 느낌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며,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표현을 오히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역시 고대 문명부터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인도를 두루 순회한다. 고대 문명의 특징은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아닌 서양에서 동양 혹은 동방이라 부르는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문명이 우월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늘 날카로운 일침을 가하는 '사실'이 바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다. 

 그러다 그리스와 로마가 세계사의 주무대가 된다. 물론 그리스와 로마가 주목 받게 된 것은 현재 세계 정세의 주도권이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에 있다는 시각에서 볼 때다. 

 고대 문명과 그리스, 로마를 돌아 저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다. 현재 중국의 위상은 주목할 수밖에 없을만큼의 위치까지 떠올랐다. 

 중국을 돌아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프랑스와 영국, 아메리카의 혁명까지를 훑어 내려오면 거의 지금에 이르게 된다. 

 고대부터 근대까지를 돌아보며 여러 원전을 담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 저자는 현대에 주목할만한 역사서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고대 문명이나 그리스, 로마의 이야기. 거기에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가볍게 읽어내려왔다. 고민도 없었고,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러다 현대의 역사서 가운데 인도의 초대 총리인 네루가 썼다는 『세계사 편력』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비로소 찾았다고 생각했다. 읽어볼만한 책을 소개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브런치'란 가벼운 식사다. 이 책에서 체계적이고 자세한 역사의 기술을 기대한다면 애초에 번짓수를 잘못 찾아온 셈이니 다른 책을 찾아 읽기를 권한다. 가볍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다는 의미다. 앞에서부터 읽어도 좋고, 뒤에서부터 읽어도 좋은 책이기도 하다.

 앞에서부터든 뒤에서부터든 상관없이 관심 있는 부분만 훑어가며 원전을 찾아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테니 취향껏 취할 일이겠다.


 무겁지 않게, 익숙한 말로 읽는 세계사 책은 분명 신선했다. 하지만 읽는 동안 어떤 것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려서 풀리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서문에서 저자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고 적었다. 적어도 내게 이 말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 상고사》에 적은 말로 기억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처칠이 한 말이라고도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마음에 걸렸던 건 다른 게 아니라 저자가 읽었을 무수한 역사서 가운데 '조선 상고사'는 들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해도 사실 억측에 가까운 뉘앙스의 문제이기에 고작 "좋으나 싫으나 중국의 변방국으로서 삶과 문화를 일궈 온 한국을 비롯한"이라는 표현때문에 그랬다는 식의 말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가 언제나 중국의 '변방국의 위치'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비록 지금은 작고 작은데다 그나마도 갈라져 있지만 하나의 도시국가가 유럽을 지배하기도 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상상할 수 없다고는 못하겠다. 

 

 역사에 크게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 작다고 과거에도 작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에는 늘 의문을 품고 있다. 서양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우월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집트나 인도의 유물들이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미국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적었지만 그것은 약탈이고 도둑질이지 유산의 보호와 같은 허울 좋은 명분으로 온전히 정당화될 수도 없다. 

 이 책은 상당부분 대세, 혹은 기정사실이라는 측면에서 쓰여졌다고 본다. 그런 시점 혹은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론을 내놓을 생각은 없다. 분명 그것이 현재의 정세이고 사실이기에 현재의 관점에서 봤을 때 틀렸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백해야겠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불편함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리말로 쓰였기에 더 이해하기 수월해야 할 내용이 종종 더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다양한 어휘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방대한 독서의 증거이고, 나름의 체계와 이론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사고의 결과물이다. 그 점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틴에이저 시절'과 같은 표현은 사실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인 정시몬 씨는 '곤두박질'과 '곤두박이'를 구분해서 쓸 정도의 국어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나로서는 사전을 찾아보기 전까지 두 표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시쳇말부터 외래에까지 때로는 외계어까지 등장하는 역사서가 낯설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했음을 토로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외국인이 쓴 책들보다 더 외국인이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을 떠나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원전들은 한 번씩은 읽어보고 싶은 것들이다. 잘 쓴 세계사 책을 볼 때마다 우리 역사의 공백을 더 깊이 실감하게 된다.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씁쓸하게 읽힌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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