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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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대학을 졸업한 게이타로가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같은 하숙의 이웃의 삶과 친구인 이치조의 삶과 그 친구의 사촌 동생의 삶과 이모부의 삶과 또 다른 삶과 삶들을 모아 담은 것이다. 게이타로는 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마치 한편의 극을 지켜보는 일을 끝내는 것처럼 말하고는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나아간다. 그이 앞으로의 삶이 길할지 흉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갈 거였다.


 <춘분 지나고까지>는 소세키 특유의 절제된 애절함이 게이타로의 친구인 이치조와 사촌 여동생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함으로써 마치 책을 읽는 사람이 책 속에서 그 사연을 풀어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거다. 

 오래 전부터 꿈꾸는 것이 하나 있다. 그 꿈은 나쓰메 소세키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앞에 적은 소세키의 서술방식, 즉 문체에 그 중심이 놓인다. 


 개인적으로 쓰는 말이기에 통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나는 소세키의 문체가 '수채화 같은 문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채화는 유화와는 달리 밑그림 위에 다른 색을 덧칠해도 아래에 있는 색이나 윤곽이 비쳐나오게 된다. 또 하나 어느 곳에 놓는가에 따라 그 색감과 밝기가 무수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 밑그림의 윤곽과 무수한 변화야 말로 '수채화 같은 문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춘분 지나고까지>의 경우 화자가 하나라고 할 수 없다. 게이타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이타로 스스로가 말하기도 하고, 게이타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여럿의 화자 가운데 누구도 이야기의 핵심을 흐리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로 전체의 이야기를 압도하거나 덮어버리지 못한다. 누가 이야기를 하든 그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마지막 순간에 드러날 결심이 깔려 있는 거다. 


 이 이야기는 특별히 비극적이지도 않고 희극적이지도 않다. 소세키가 정말 사랑스러워했던 딸의 죽음을 기리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마쓰모토의 딸의 죽음 에피스드조차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어 감정을 읽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렇기에 비가 오는 날에는 손님의 방문을 받는 일이 없다는 마쓰모토의 결심과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이 더 결연하게 느껴진다. 격렬하지 않은 부분까지 수채화를 닮았다. 


 은은하지만 깊은 사유와 무수한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소세키의 솜씨에 새삼 감동하게 만든 작품이다. 


 제목인 <춘분 지나고까지>는 큰 의미 없이 새해가 시작되고 춘분즈음까지 써서 이야기의 연재를 끝내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런 농담 같은 시시함이 좋다. 시시하지만 진실말고는 다른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 그 마음 씀씀이가 더 좋다. 

 나는 원래 소세키는 편애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므로, 이 감상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을 거라는 걸 지금이라도 밝혀둔다. 


 <춘분 지나고까지>에서는 딱 두 군데에 표시를 했다. 

한 군데는 앞서 두 번이나 적었던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표현이다. 

또 한 군데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346쪽

 돌아보면 게이타로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실제 세상과 접촉해보고 싶다는 뜻을 두고 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은 일은 단지 남의 이야기를 대충대충 듣고 다닌 것뿐이다. 지식이든 감정이든 귀로 전해지지 않았던 경우는 오가와마치 정거장에서 지팡이를 소중한 듯이 짚고 전차에서 내리는 희끗희끗한 외투를 입은 남자가 젊은 여자와 함께 서양 요릿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행한 정도의 일이다. 

(중략)

 요컨대 인간 세상에 대해 게이타로가 가진 최근의 지식과 감정은 모조리 고막의 작용에서 온 것이다. 모리모토에서 시작하여 마쓰모토로 끝나는 몇 자리의 긴 이야기는 처음에는 넓고 얕게 게이타로를 움직이면서 점차 깊고 좁게 그를 움직이기에 이르더니 갑작스럽게 끝났다. 하지만 게이타로는 결국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게이타로에게는 그것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고 동시에 다행스러운 점이다.


 지금의 우리와 다를 것 없이 소세키가 그려낸 인물 게이타로의 시대 일본 역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바로 좋은 직장을 얻어 출세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게이타로는 여기저기에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거다. 그러나 그런 일자리를 알아보는 행동에는 어딘가 절실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세계가 게이타로가 들어갈 수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게이타로는 그저 듣고, 보고, 다시 전해 들었을 뿐 그 안에서 어떤 일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암시하듯이 게이타로는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보통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세상을 머릿 속에 집어 넣는다. 그러나 소세키는 "사물을 머리로 옮기기 위해 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머리로 바라본다는 생각으로 눈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두 가지의 차이를 말로 설명할 수 있을만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로 느낄 뿐이다. 두 가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할 뿐이다. 


 흔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귀에 들리는 말, 소리가 모두라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이 깨달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주파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의 감각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

 체험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삶으로 뛰어들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단순히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미신에 의지한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했으므로 게이타로 역시 자신만의 결론에 닿은 거다.


깔끔하게 정리해내지 못하는 걸 보이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법하다. 

다음에, 조금 더 세상과 삶을 실감하고 난 후에 읽어보면 아주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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