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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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끝났다>, <근대 문학의 종언>,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등의 책들을 보면 그 제목만으로도 무언가 끝나고 있고 아무래도 곧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려는가 싶기도 하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이런 변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기류를 체감하지 못하는 막연함 속에 있다가  책을 읽으면서 그 실체들이 낱낱이 언어화되는 경험은 신선했다. 

제레미는  책 속에서 생산을 지향하던 산업자본주의의 시대는 끝났으며 이제는 마케팅을 지향하는 문화자본주의의 시대라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처음 100년 동안은 물질적 가치와 재산의 축적에 집착하는 시대였다. 당연히 저축, 자본형성, 생산양식의 조직 등에 무게 중심이 주어졌고 사람들은 이런 부의 축적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땅을 소유하려 하였고 부의 척도는 돈이었다.그러나 이런 자본주의의 발전은 무수히 많은 조립 라인과 컨베이어 벨트에서 쏟아져 나오는상품의 재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난제를 만났으며 이 난제의 해결책으로 거대한 소비문화를 창출하려는 새로운 소비지향 자본주의가 등장한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거대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극장에서 경험을 판매한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더이상 소유를 선호하지 않으며 접속을 선호한다. 기업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판매한다. 기업은 고정자산에 대한 투자비용을 줄이고 필요할때마다 사무실과 사무용품들을 빌려쓰는 리스산업을 이용한다. 이러한 형태의 문화자본주의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분류되던 사회계급은 이제 접속자와 비접속자의 형태로 분류된다. 

 
책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내 주변에는 기계치가 더러 있다. 아직도 핸드폰을 끄고 켜고 하는 일을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로 대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화를 걸고 받는 일외에 전전화기에 있는 다른 기능을 아무것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가끔 칠순이 넘은 내아버지가 보내오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장부호는 물론 기호도 들어있고 어떤 날은 아이콘도 들어있었다. 지치지 않는 호기심도 놀랍거니와 이 세계와 끊임 없이 소통하고 있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아버지를 존경하게 만들기도 한다.

요즈음 아이들은 어떤가.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고 받는다. 컴퓨터의 자판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의 기능이 체화되어서 수업시간에 얼굴은 선생님을 보고 있지만 핸드폰의 모니터를 보지 않고도 그들은 책상 밑에서 끝없이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다.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전화나 문자만이 아니다. 아무때나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이빨을 쑤시고, 묶은 머리의 뒷모습을 사진을 찍어 확인하고 친구에게 전송해주고, 마음에 안들면 다시 수정하고.......  인터넷 접속하고...... 게임하고....음악듣고....영어단어 찾고.....아이들은 이미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는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이제 따뜻한 가슴을 가진 엄마보다도 최고의 기능을 가진 핸드폰을 사줄 경제력있는 부모가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접속자로 남을 것인가, 비접속자로 남을 것인가. 이런 이분법적 구도가 물론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내게 접속을 요구해 오고 있지 않는가. 

주말을 이용해 책읽기를 끝내고 싶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292, 293쪽에 글이 없다.  나는 또 내눈이 헛것을 보나 싶어서 듬성듬성 확인해보니 무려 8쪽이나 되는 것이 흰 백지상태였다. 글로 적으려니 또 흥분이 되려고 한다. 뚜껑이 열린다는 말은 이럴때 사용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이 주는 충격도 충격이려니와 내로라하는 출판사의 책이 어떻게 이런 상태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나는 책을 샀던 인터넷 서점에 문의를 했고 판매한 사람보다도 출판사에 울화가 끓어 출판사에도 항의를 했다. 출판사 직원이 책을 보내라기에 새책에다가 밑줄 다시 다그어서 다시보내달라고 했더니 책 뒷장을 팩스로 보내란다. 이전에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책을 낸 출판사와 같은 출판사라는것 때문에 나의 까칠함은 극에 달했다. 이후에 나는 이책을 세권이나 더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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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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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는 영화 <닥터 지바고>, <해바라기>를 통해 남아있는 몇개의 이미지가 고작이다.
지도상에서 볼때 엄청 넓은 땅덩어리를 보며 징키스칸이 내달렸던 환상을 떠올리는것도 하나의 이미지로 첨부된다.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뻬쩨르부르그-표기가 어느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볼쇼이 합창단, 짜르, 눈, 크레믈린 궁전 등 이미지도 없는 몇개의 어휘가 전부이고, 언젠가 영국인 친구에게 '러시아'라는 발음을 아무리해도 못알아 듣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러시아'보다 '러샤'에 더 가깝게 발음해야하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작품을 읽는 것은 솔직히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롤랑바르트의 <현대의 신화>를 읽었을때 내가 프랑스 문화를 알면 훨씬 더 재미있을거라는 생각과 함께 기필코 불어를 배우고야 말겠다는 넘치는 의지로 충만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의지는 물론 며칠 못갔고 대신 프랑스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친구를 하나 만들어두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이번에도 역시 러시아에 대한 기본지식이 너무 없다는 생각 특히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어야 고골의 작품이 훨씬 재미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니꼴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은 까자크 전통이 살아 숨쉬는 우크라이나의 소로친치에서 태어났고 고골례보에서 자랐다. 우크라이나는 한때 폴란드의 식민지였고 12세기 초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으며 징키스칸의 손자 바투의 주거지가 있었던 곳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는 <코>, <외투>, <광인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등 5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고골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찰관>, 러시아판 신곡이라 불리는 <죽은 혼> 등은 다른 책에 실려있는 모양이다.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는 서방진출을 위해 계획도시인 뻬쩨르부르그를 세웠고 관료제를 정비했다. 러시아의 관료는 모두 14등급으로 나누어지는데 고골의 작품은 이 관료들을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만년 9등관인 아까끼 아까끼에비치 바쉬마취킨이 어렵게 장만한 외투를 잃어버리고 죽어 귀신이 된다는 이야기의 <외투>, 어느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다가 코가 사라진 것을 알게된 8급관리 쿄발료프의 이야기 <코> 등을 통해 고골은 교묘하고도 노골적으로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함을 비판하고 있다.

10월 3일의 첫일기로 시작되는 <광인일기>는 12월 8일의 일기까지는 나름대로 시간의 순서를 지키던 날짜가 갑자기 '2000년 4월 43일, 30월 86일 낮과 밤 사이, 며칠도 아니다. 날짜가 없는 날,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다. 달도 없다. 왜그런지 알 수 없다.' 등 주인공의 정신병리학적 상태를 반영하며 전개되어간다. <광인일기>는 에는 당시의 주변국가들의 정치적 상황들이 언급되고 있다. 짜르 체제하에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작가 나름대로의 방책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초상화>는 한 예술가가 가난에 못견뎌 세속적 욕망과 결탁한후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진정한 예술은 무엇이며 타락한 영혼은 종교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고골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어느 시대에나 참다운 예술가의 적은 늘 물질적 욕망이었다. 현대의 이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예술가의 진정한 적은 무엇일까?

표도르 대제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도시 뻬쩨르부르그에는 네프스끼라는 거리가 있다. <네프스끼 거리>는 마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처럼 네프스끼 거리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 거리는 시간마다 각기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붐빈다. 갓 구워낸 빵냄새가 가득찬 아침의 거리에는 남루한 노파와 거지들로 가득차고 12시까지의 거리는 그저 사람들이 지나가는 통로로 활용된다. 또 오후 두시부터 세시까지의 네프스끼 거리는 인간박람회가 열리는 시간이다. 이 거리는 황혼이 깃들면 새로운 활기를 띄게 되는데 사건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삐로고프 중위와 화가 삐스까료프의 이야기이다. 고골은 이 두 주인공의 허황된 욕망을 통해 네프스끼 거리를 영혼 부재의 공간으로 그려낸다. 계획도시로서의 뻬쩨르부르그와 이 도시의 대표적인 네프스끼 거리는 유럽 문화가 지배하는 공간으로서 물질적, 성적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범속한 거리로 묘사되고 있다.

어쨌거나 고골의 작품들은 리얼리티를 확보하면서도 인과관계를 무시한 다분히 환상적인 요소들이 소설 전편에 배어있다. 재미있었던 것은 작가가 이야기 중간에 뛰어들어 뜬금없이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었다.
<외투>에서 재봉사의 인물묘사를 하다가 '하기는 이런 재봉사 얘기를 길게 늘어놓을 것까진 없을 것도 같지만, 소설에는 어떤 인물의 성격이건 빠짐없이 묘사해야 한다는 게 이제는 통례로 되어 있으니 부득이 페트로비치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로 하겠다'고 뜬금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코>에서는 아예 소설의 마지막 한 쪽의 전부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객담은 재미도 있지만, 소설 속에서 문득 빠져나와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또 이런 황당무계한 소설을 쓰기는 하지만 작가자신은 이 모든 것을 너무나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고골은 <죽은 혼>의 인물창조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생을 마쳤다고 한다. 문득 글은 그 사람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생각이 든다.

 

고골을 읽으면서 작품을 읽는 시간보다 지도를 들여다보는 시간, 러시아 역사를 훑어보는 시간이 더욱 길었다. 이 작품들을 계기로 러시아 문학에서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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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 - 개마고원신서 26
강준만.권성우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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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은 "한국문학이 돈(Money)과 매스미디어(MassMedia)라는 두 M신(神)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는 김우창 교수의 말을 본문 첫머리에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이어 강준만은 그가(김우창) 개탄만 할뿐 본격적인 비판은 전혀 하지 않고 사색의 세계에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개진해 간다. 그는 계간지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주례비평을 쓰는 평론가와 각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문학상과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는 '동인문학상' 등에 비판의 날을 세운다. 이어서 그는 현재 한국문단의 주류세력인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 등의 정체성과 언론플레이 등 냄새나는 곳곳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다. 김정란, 권성우 등이 그의 날을 세우는데 나름으로의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다.  

 

 

그런 그의 칼날은 예리하고 정확해서 빼어난 검객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가 들이댄 칼이 부패한 곳을 정확히 도려냈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이 칼을 빼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과 사색을 거듭했으리라는 짐작을 해보면서 그의 목적이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위한 칼부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문학이라는 자장 밖의 사람인 그가 꽂은 칼의 상처를 치유할 사람은 정작 칼을 꽂은 사람이 아니라 칼 맞은 자여야 한다는 것. 칼 맞은 자들의 용기 있는 치유를 기대해본다.

강준만의 글은 빠르게 읽힌다. 그는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자신의 논지에 맞게 정리한다. 이런 작업이 끝난 후에 개진되기 때문에 글을 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의 부지런함은 본받을 만하다. 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단지 배설의 욕구로서가 아니라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당연히 해야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로 여기는 그는 성실하다.

<문학권력>은 강준만과 권성우의 공저로 되어있다. 권성우의 글은 이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다. <심미적 비평의 파탄>이라는 제목 하에 -남진우의 반론에 답한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심미적 비평은 남진우의 비평을 말하는 것이니 파탄 역시 남진우의 몫이다. 이 글이 나오기까지 그들 사이에 오고간 글들을 찾아 읽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과 비난과 비판이 혼재하고 있는 글을 보면서 비평가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주먹을 휘두르고 피 터지는 육탄전을 벌리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히려 이런 육탄전 이후에 훨씬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는 건 단지 영화나 소설속의 이야기란 말인가. 주먹에 의한 상처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서로간의 마음의 상처는 남지 않았을 것 같다. 그들 마음의 상처 위에 벚꽃 같은 새살이 돋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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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쟁이 장따민의 행복한 생활
류헝 지음, 홍순도 옮김 / 비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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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비채에서 중국 현대소설들을 기획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자리매김 해가는 중국에 대한 관심 때문인듯한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현대소설가들로는 위화, 쑤퉁, 류헝 등이 대표적인 모양이다. 몇년 전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류헝의 작품도 만만치 않다.

 <수다쟁이 장따민의 행복한 생활>속에는 모두 세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표제작 외에 단편 <빌어먹을 식량>과, 중편 <푸시푸시>가 그것이다. 특히 <푸시푸시>는 장예모 감독의 <국두>라는 영화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다.사실 원작보다 영화를 먼저 보았었는데 기억이 가물거려 이번에 장예모 특선으로 되어있는 DVD를 구입해서 다시 보았다. 영화는 영화대로 수준작이었고 소설은 소설대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류헝은 1954년생으로 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혁명시기에 6년동안 군인으로 지냈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 이 시기의 상황들이 묘사되고 있다. 한끼니를 해결하고나면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가난한 농민, 대지주의 토지를 몰살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던 토지개혁, 너도나도 가담했던 대자보, 산아제한을 하려는 여성의 피임교육 등등이 웃음과 눈물로 버무려져 있다.

 류헝의 소설속 주인공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이다. <수다쟁이 장따민의 행복한 생활> 속 주인공 장따민의 경제상황은 심각하다. 그는 세상에는 암컷과 수컷이 그렇게도 많은데 왜 돈은 암컷과 수컷이 없는가를 생각하다가 "돈도 암컷과 수컷이 있다. 돈이 만일 암컷과 수컷이 없다면 이자는 어디에서 나오는가"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빌어먹을 식량>의 텐콴은 자식의 이름을 큰 콩(大豆), 작은 콩(小豆), 붉은 콩(紅豆), 푸른 콩(綠豆) 등으로 부른다. 이름만 봐서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아할 집안이었다. 그러나 텐콴의 아내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관계를 가질 때 절정을 향해 치달리는 남편을 향해 "내일은 뭘먹죠?"라고 물어 이후 그가 관계를 가질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만든다. 식량배급표를 잃어버린 아내가 너무 상심한 나머지 목숨까지 놓아버리게 되면서 마지막 내뱉는 말이 '빌어먹을 식량'이다.

 <푸시푸시> 역시 돈때문에 팔려온 여자 '국두'가 주인공이다. 원래 '푸시푸시'는 몸은 뱀이고 머리는 사람의 형상을 한 중국 전설상의 제왕 '복희'를 일컫는 말이다. 위의 두 소설이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의 소시민의 생활상을 그렸다면 <푸시푸시>는 거기에 性을 더 보태고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네살 차이가 나는 조카와 숙모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인간의 욕망과 그 한계를 향해 치밀하게 내달리고 있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 <국두>는 주인공의 주업을 염색업으로 바꾸어서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슬프고 아름답고 안타까운 모습들이 곳곳에 펼쳐진다. 어쩌면 추앙받는 전설상의 신이 불륜에 의한 태생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비판의식이 담겨있다고도 할수 있겠다. 

 중국의 문학은 러시아 문학에서도, 일본 문학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과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중국의 생활상과 우리의 생활상이 크게 유리되지 않은 탓일게다. 건전한 낙천성을 확보하고 신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작가의 언어능력도 단단한 몫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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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6-23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국현대문학을 전공합니다. 류헝(劉恒)을 비롯해 현역 작가 가운데도 좋은 작품을 써내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중국 소설하면 촌스럽고 재미없다 다들 말하는데 재미있게 보셨다니 이 소설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제가 괜히 반갑습니다.
한 여성의 삶을 다룬 <복사꽃 피는 날들>(꺼페이 지음, 창비, 2009)이란 아름다운 소설이 있습니다. 3부작인데 1부만 번역되어 있구요. 저는 읽어보고 한동안 소설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위화도 그렇고 중국엔 좋은 작가들이 많답니다. 개인적으론 왕멍을 무척 좋아합니다.

반딧불이 2010-06-23 23:43   좋아요 0 | URL
중국문학전공이셨군요. 저는 비평에 마음두고 계신줄 알았어요. 오래되어 탈색된 기억이지만 영화 <국두>의 화면들이 아직도 눈앞에 떠오릅니다. 중국의 문학작품들을 거의 읽어보지 못했지만, 루쉰부터 차근차근 읽어볼 생각이에요.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 같아요. 저도 반갑습니다. 닥나무님.

파고세운닥나무 2010-06-24 09:03   좋아요 0 | URL
대학 때는 비평을 공부했어요. 현재 하는 공부와는 좀 멀어지긴 했지만 비평은 계속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제 지도교수님이 루쉰을 전공하셨는데, 대학 때 루쉰 강의에 반해 전공할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국 영화도 보시는가봐요? 지금은 대가로 불리는 장이머우와 쳰카이거의 습작들을 보면 꽤 재미나요. 지금처럼 자본이 흘러넘쳐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지만 담백한 즐거움이 영화에 있습니다.
리뷰 기대할게요~

반딧불이 2010-06-25 01:01   좋아요 0 | URL
이런저런 책을 들여다보지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문학이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추천해주신 책들은 꼭 읽어보겠습니다. 여러가지 조언 늘 고맙습니다.
 
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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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도대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책표지 안쪽에 있는 짧막한 소개글에서 그의 학력과 경력을 간단한게 소개받을 수 있었는데, 1998년  <화가 이중섭>론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미술 평론가로 데뷔하였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또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가 궁금해서 네이버 검색창에 '전인권'을 쳤다. 그랬더니 1년정도의 분량을 뒤진 후에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전인권' 검색어는 "인권이 라이프~"를 외치던 가수 전인권만 미친듯이 불러내고 있었다.  산발한 그의 모습을 꿈에 나타날까 두려워하게 될만큼 지겹도록 보았다. 99.8%이상이 가수 전인권이었고 나머지0.02%는 어처구니 없게도 토막난 말 '전 인권(위원장)'의 전 인권이었다. 어렵게 한겨레 뉴스에 실린 그의 사진과  소개글을 만날 수 있었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2년전 암으로 작고했다는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자는 자신의 유년기를 토대로 한국의 남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해부하고 있다. 가정 내에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분리되어있는 어머니의 공간과 어버지의 공간이 있다. 작가는 이런 공간에서 자라나면서 자신이 알게 모르게 습득해온 여성과 남성의 세계, 모성과 부성, 맹목적 사랑과 권위 의식 등을 용의주도하게 파헤쳐서, 그것이 한 아이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해내고 있다. 그는 이런 환경속에서 태어난 한국사회의 남성을 '동굴 속 황제'로 명명한다. '동굴 속 황제'는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말하는 '동굴의 우상'에서 따온 말이다. 베이컨은 <신기관>이라는 저서에서 네가지 우상론을 정리하는데 그중 하나가 '동굴의 우상'이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이 갖기 쉬운 우상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갖게 되는 우상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우상론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향한 절규다.  대학 교수처럼 지식이 많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세계의 명저를 읽으면, 지혜가 넓어져야하는데  오히려 이런 곳에서 '동굴의 우상'이 생겨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자신의 유년을 더듬어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이 만든 동굴의 우상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선하며 훌륭한 사람이라는 우상,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우상, 이 세상은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져야 한다는 우상 등이다. 그는 이 동굴 속에서 황제로 자라나 이제 동굴 속 황제를 분석하고 있다. 동굴 속 황제는 허영심도 있어서 그저 남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선미의 화신' 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주지시키려한다. 또 자신의 심리적 영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넓히려 하는 특징도 있다.  이런 특징을 감안해보면 스스로가 진선미의 화신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무시하면서 자기 주장을 집요하게 펼치는 사람은 대부분 동굴 속 황제이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신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신분적 인간일 확률이 높다.

저자는 글의 첫머리에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동굴 속 황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것이다. 가장 작은 사회단체인 가정에서 만들어진 '동굴 속 황제'는 보다 큰 사회인 학교, 군대, 직장 등을 경험하면서 연쇄적이고도 중층적인 권위구조 속에서 성장한다. 우리는 이렇게 자라난 '동굴 속 황제'들에게 둘러 쌓여 살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기도 한다. 나도 저자가 말하는 '동굴 속 황제'와 동거하고 있다. 동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래 함께 살다보니  나름대로의 처방도 생겨난다. 시쳇말로 '쌩까'거나 극약처방이 동거의 비결이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니, 동굴 속 황제가 반드시 남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닌듯 하다. 내게도 동굴 속 황제의 징후들은 농후하지 않은가.

이 책의 표지는 독특하다. 책 표지에는 6혹은 8포인트 정도 크기의 글자들이 절반정도를 포진하고 있다. 나는 이 글자들이 어떤 형상을 나타내는지 모르는 채로 책을 읽었고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이미지를 삽입하려다가 저자의 얼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책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스스로 책읽는 이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뜻을 담은 것은 아니었을까? 저자의 의도대로 놀아났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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