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 어게인 - 모르는 것을 아는 힘
애덤 그랜트 지음, 이경식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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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는 일관성을 신뢰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는 직장상사나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최악의 인간상에는 이렇듯 태도나 의견을 손바닥 뒤집듯 태연하게 바꾸는 사기꾼들이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그 자체가 목적이 돼버리는 순간 정신을 옭아매는 굴레가 된다. 예컨대 자신의 의견이 명명백백 틀렸다는 증거가 사방에서 쏟아지는데도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옥을 향해 돌진하는 답답이들을 본 적 있지 않은가? 뚝심 있는 예술가, 장인, 사업가는 늘 존경의 대상이지만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그 뚝심 때문에 인생을 조진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Think Again>의 핵심 주제는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나 의견을 버림과 동시에 사고에 유연성을 기르자는 것이다. 확실히 새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다시 생각하기가 중요하긴 하다. 그 누구도,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 문제들은 사실 접근 방법 자체가 문제인 경우가 많다. 항상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겠는가? 저자는 말한다. 지혜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도구들, 자기 신념의 가장 소중한 것들 중 하나를 버릴 시점을 아는 것이라고.


이 책은 흥미로운 사례도 많고 글도 쉬워 술술 읽히지만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결론의 공허함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우리가 운동이 좋다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Think Again>은 책 뒷부분에 무려 10페이지를 할애해 다시 생각하기 행동지침을 적어두긴 했다. 급한 사람이라면 이 부분만 발췌해 가이드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특히 직장에서 각각이 처한 입장별로, 내 짧지 않은 회사 생활을 돌아보며, 두세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우선 당신이 뭔가를 결정하는 입장에 있다면 당신의 주장이 특정 데이터에 근거해 추론된 가설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애초에 틀릴 수 있음을 깔고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 가설과 데이터의 오류를 밝히자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반론에 상처 받지 않고 건전한 회의를 이끌어갈 수 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기 의견을 펴는데 부담도 덜하고. 동료들이 돌아가며 레드팀을 구성하는 것도 좋다. 레드팀은 이유를 막론하고 일단 반론을 제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무조건 안 되는 이유만 찾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 레드팀이 특수 목적을 위해 임의로 구성됐다는 걸 알기 때문에 토론이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개인적 감정은 끼어들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팀 구성원이라면 잘못 생각했다고 인정하는 리더가 결코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같이 일하다 보면 리더는 결코 틀려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 가설을 세우고 시도해보는 사람을 '헤맨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하, 참, 우리가 개미 새끼인가? 여왕개미의 똥꾸멍만 보고 기어가는 졸개냔 말이다.


카리스마를 겸비한 천재가 꼼짝달싹 못할 논리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한치의 오류도 없는 계획으로 구성원들을 목표지점까지 '가장 빠르게' 인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내 머리는 비었소, 나는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노예요,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는 걸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논의가 너무 평행선을 걷고 있으면 상대방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참 희한하게도 설득은 논리로 달성되지 않는다. 반박을 당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방어적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논리가 촘촘할수록 성벽은 오히려 더 두꺼워진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할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기 의견의 허점을 눈치챌 수 있도록. 유용한 질문을 던져 상대방으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한발 떨어져 자기 의견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상이 내가 다시 생각하기를 실생활에 접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물론 안다고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책 한 권 읽고 변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서서히 스며들 수 있는지 고민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제가 최근에 <Think Again>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서...라고 시작하면 아마 될 일도 안 될 테니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기를.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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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16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한깨짱 2022-01-16 09:20   좋아요 0 | URL
저도 고맙습니다!
 
재인, 재욱, 재훈 (리커버 에디션)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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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은 히어로 소설이다. 치밀하게 엮인 이야기가 시공간에 걸쳐 가지를 뻗으며 다차원 우주의 흥미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풀어낸 전우주 대하소설이라고 하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정세랑 특유의 사소함이 겉면을 살살 핥으며 일상에 둥지를 트는 '평범한 초인'들의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리 진지하고 거대한 주제라도 정세랑의 손에만 들어가면 탈탈 털려 빨랫줄에 걸린 무릎 나온 츄리닝이 되는 것 같다. 씹덕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게 모에화 된달까? 물론 근사한 곳에 이 바지를 입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을 입을까 옷장을 연 순간 거짓말처럼 손이 가는 게 바로 이 츄리닝이다. 입은 것 같지 않게 편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과한 세제 냄새 없는 피부 같은 옷.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강박증 환자라도 정세랑의 소설에서는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읽다가 졸아도 상관없고, 두 페이지를 잘 못 넘겨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대단한 문장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요가로 치면 첫 장부터 끝줄까지 사바사나인데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완독의 추진력을 제공하는 건지, 전 우주를 통틀어도 이런 능력을 가진 건 정세랑 하나뿐일 것이다. 우연히 내가 우주를 구원했고, 그 대가로 신이 내려와 내게 인피니티 스톤 5개가 박힌 파워건틀렛과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래미안 블레스티지 75평 중 하나를 선물로 고르라고 한다면 그냥 정세랑의 능력이나 하나 달라고 할 생각이다. 그만큼 이 작가의 능력은 귀하고 신기하다.


은행나무 출판사의 노벨라라는 출판 기획도 정세랑의 능력을 절묘하게 뽐내준다. 양장본 책이 200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건 한때 시대를 주름잡은 열린책의 아멜리 노통 시리즈나 가능했던 기획인데, 전반적으로 긴 글이 장문충으로 폄하되고 진지함이 씹선비로 전락한 현대 사회에서는 훌륭한 셀링 포인트가 된 데다, 이 나른한 오후의 낮잠 같은 소설과 찰떡 케미를 보여준다. 솔직히 편안함도 200페이지가 넘어가면 슬슬 지루함과 함께 졸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 텐션이 사라지기 전에 <재인, 재욱, 재훈>은 아쉬움까지 남기며 완벽한 이별을 고한다. 질척대는 법 없이 쿨하게. 166페이지 만에 끝. 웹툰처럼 스크롤하듯 읽으면 한 시간 컷도 가능할 듯. 고작 그 정도를 투자해 대한민국 성인 1년 독서량의 반을 채울 수 있다면 뿌듯함까지 챙겨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진정 시대를 읽을 줄 아는 기민한 사람들이다.


정세랑의 소설은 워낙에 많아 작품별로 편차가 좀 있는데 이 책은 10점 척도로 7~8 사이를 오간다. 지금까지 나온 단행본이 한 11권 정도고 나는 그중 5권을 읽었다. 참고로 <보건교사 안은영>이 9였고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7, <덧니가 보고 싶어>가 3, <지구에서 한아뿐>이 4다. 워낙에 달달한 건 좋아하지 않아 마지막 두 권에 유독 낮은 점수를 매겼으니 그 점은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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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리더십 - 합의에 이르는 힘
케이티 마튼 지음, 윤철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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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계에서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정치인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신념, 한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원천. 신념이 없는 사람이 어떤 큰 일을 해내리라 상상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신념만 가진 사람이 큰 일을 해냈을 땐 예외 없이 인류사에 재앙이 닥쳤던 것도 사실이다.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조지프 매카시,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메르켈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합의와 소통이다. 이는 반드시 연정을 해야 하는 독일 정치의 특성상 불가피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해석하기엔 앙겔라 메르켈이 무려 16년이나 독일 총리로 재임했다는 사실을 충분이 설명할 수 없다.


아마도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과학자에 가까웠던 그의 정체성이 가장 큰 힘이 아니었다 싶다. 신념과 과학적 사실의 가장 큰 차이는 유연성이다. 기존의 믿음과 완전히 다른 사실이 목격됐을 때 신념은 기존의 믿음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후퇴한다. 부정의 방패와 음해의 칼을 들고 새로운 사실을 무찌르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다. 반면 과학적 사실은 어디까지나 잠재적 사실의 위치를 고수한다. 과학은 새로운 사실을 잘근잘근 씹어 기존의 체계를 수정하거나 수용 가능한 임계치가 넘어가면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 만든다. 메르켈은 경쟁자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높은 지지율로 압살 해서 미움을 받지 않았다. 그는 경쟁자의 정책이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족족 자신의 정책으로 끌어안아 미움을 받았다. 기존의 정치 문법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합의와 소통이 메르켈의 16년을 지켜온 정치 도구였다면 겸손과 실용주의는 통치의 뿌리이자 기둥이었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명실공히 유럽을 이끄는 리더였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엠마뉘엘 마크롱이고 이탈리아의 총리는 마리오 드라기이고 영국의 총리는 보리스 존슨이지만(브렉시트 했지만) 유럽의 총리는 메르켈이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그런 사실에 우쭐해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독일이 유럽의 왕으로 추앙받는 것이 협치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하이라이트를 적절히 피함으로써 파트너들이 들러리나 패배자처럼 보이는 것을 막았다. 주인공이 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하나의 유럽이라는 대의를 지켜냈는데. 특히 과거사에 관한 한 그는 조건 없이 무릎을 꿇어 피해국의 존경을 받았다. 뻔뻔함을 넘어 추악한 섬나라를 이웃으로 둔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심지어 그는 그 추악한 국가에 반성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 모든 성공에 독일 정치의 특수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꼽히는 살인마를 자기들 손으로 직접 뽑아 열렬히 지지했다는 사실. 독일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겨준 이 역사는 결론적으로 현대 독일에 실보다 득이 더 많았다. 독일인은 말이 번드러진 정치인을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화려한 언변은 오히려 과거의 악몽을 되새기는 트라우마가 됐으니까. 이 같은 문화는 빈말을 못하고, 웅장한 연설로 국민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메르켈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다 주었다. 예컨대 부동산 대책을 묻는 국민을 향해 '그것은 무척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며 오랜 시간에 걸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과연 독일 외의 다른 나라에서 당선될 수 있을까? 1년 안에 반값 아파트를 만들겠다는 경쟁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한편 메르켈이 펼친 강력한 재정 긴축 정책의 그림자도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긴축 재정으로 쌓인 독일의 부는 결론적으로 난민 구제와 팬데믹 사태 해결을 위해 요긴하게 사용됐지만, 평상시였다면 이로 인해 교육, 의료 같은 보편 복지에 구멍이 생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 재정이 흑자를 냈다는 건 국민에게 그만큼 불필요한 세금을 거뒀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메르켈은 국민의 고통으로 성과를 챙긴 나쁜 정치인일까? 게다가 그는 금융 위기를 맞은 이웃 국가에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긴축 재정을 강요하기까지 했다. IMF가 한국에 강요해 수많은 실업자와 노숙자를 양산한 것처럼 말이다.


독일의 막대한 무역흑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무역흑자란 결국 자기 물건을 팔기만 하고 다른 나라의 물건은 사지 않았다는 의미다. 미국이 아무리 양아치 같아도 그들의 무역적자가 사실상 세계 경제를 돌게 하는 심장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나의 유럽이란 결국 독일만 살찌고 나머지는 배를 곯는 허울 좋은 구실이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모든 나라가 독일처럼 벌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면 유럽의 경제가 어떻게 될까? 서로 관련 있는 단어를 짝지으라는 질문에 소비와 적자는 아마 탕아나 베짱이 흥청망청과 짝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말 못된 의도를 가진 세뇌의 결과물이다.


사실 <메르켈 리더십>은 이처럼 메르켈의 성공을 다각도로 분석하기엔 한계가 많은 책이다. 애초에 메르켈의 그림자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냐 보다는 '어떤' 문제를 해결했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도 문제다. 실제 그의 성공에서 배움을 얻으려면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퇴임식을 한지 이제 고작 1주일도 지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더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이 책은 그때를 위한 가이드북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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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의 한국현재사 - 역사학자가 마주한 오늘이라는 순간
주진오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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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해왔다. 은은한 망각의 향은 순식간에 역사를 채워 냄새나는 과거를 깨끗이 세탁한다. 앞선 세대가 기록한 역사적 범죄가 늘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사람들에 의해, 똑같이 행해지는 이유다. 이 바보 같은 연극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눈을 번쩍 뜨고 늘 과거를 주시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특히 더 중요하다. 역사를 지우려는 세력과 기록하려는 이들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고개를 과거로 돌리는 것도 힘든데, 돌아봐야 깨끗하게 지워진 백지뿐이라면 무엇을 보고 반성할 수 있을까? 범죄자들은 우리를 어두운 극장 속에 가둬 휘황찬란하게 미화된 역사를 방영한다. 우리의 눈이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는 동안 진실은 불타고 있다. 이건 아니야!라고 소리를 치는 관객에게 옆에 앉은 관객이 정숙을 지키라며 점잖은 훈계를 한다. 여기서 진짜 무서운 점은 극장의 정숙이 범죄자의 강제가 아닌 관객들의 자발적 참여로 지켜진다는 점이다. 역사는 조용한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아니라 광장의 토론 주제가 돼야 한다. 틈날 때마다 읽고 토론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는 매끈하게 편집된 이야기가 되어 우리를 망각의 IMAX로 이끌 것이다.


<주진오의 한국현재사>는 역사학자 주진오가 대한민국의 근현대, 더불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역사 문제를 논평한 칼럼 모음집이다. 대개 이런 책들은 핵심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구성이 어려운데, <주진오의 한국현재사> 역시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다음 몇 가지 부분에선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


첫째,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지나친 우상화가 갖는 문제점이다. 우리는 굵직한 역사를 기록한 인물들을, 특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어떤 초월적 존재로 그려내려 하는데, 이런 점들이 오히려 역사를 움직이는 건 우리와는 다른 '특출한 인간'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길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한두 영웅의 슈퍼파워로 기록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다양한 얼굴의 보통 사람들이 써나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삶 전체를 볼 것인가, 아니면 결과를 따질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오늘날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로 그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인물이지만 조국을 배신한 건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단지 한 명은 미국을, 한 명은 일본을 택한 것뿐이다. 서재필은 생의 대부분을 미국인으로 살았고 한국인으로 불리는 걸 거부했다. 윤치호는 완전한 친일파였지만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그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했던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과가 함께한다는 생각은 얼핏 공평한 것처럼 들리지만 친일파의 면죄부로 활용되기에 딱 좋은 논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깊이 생각해 볼만한 주제다.


셋째, 무능한 남성 지배층이 망가뜨린 역사의 대가를 치르는 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이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남성 지배층이 얼마나 무능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인데, 결국 청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건 조선의 여자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돌아왔을 때 사대부들은 '환향녀(화냥년의 어원)'라는 낙인을 찍어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억압하기까지 했다. 위안부 문제도 똑같았다. 대한민국에서 조차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한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론화됐을 때 다수의 여론은 '나라 망신을 시키지 말고 조용히 뒈지라'는 것이었다. 여자의 얼굴을 한 역사는 진정 어디에도 없다는 말인가?


<주진오의 한국현재사>가 완성도 높은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몇몇 근현대사의 논쟁 거리를 깊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읽기가 쉬운 데다 관심 없는 부분은 건너뛰어도 무방한 책이니 부담 없이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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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 새로운 세계를 꿈꾼 인간, 그들의 삶과 생각을 다시 찾아서
박노자 지음 / 나무연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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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얘기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를 언급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배경과 진실을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결국 무지로 점철된 매도와 마녀사냥의 먹잇감이 되는데, 나는 대체로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우리와 국경을 마주한 가짜 사회주의 국가 때문이다. 삼대 세습을 완성한 이 나라는 사회주의의 'ㅅ'도 꺼낼 자격이 없는 무능력한 독재국가다. 이 나라에 사상이란 없다. 오로지 더러운 권력욕과 그걸 포장하려는 뻔뻔함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지만.


둘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근대사 탓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부역자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사회적 지위와 부를 보전받은 이들은 그대로 대한민국의 지배층이 됐고 과거를 지우기 위한 수단으로 '반공'에 운명을 건다. 그 세뇌가 얼마나 강했는지 전쟁의 참상과 북한군의 만행을 실제로 목격해, 이유를 막론하고 빨간 거라면 무조건 혐오하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오늘날에도 사회주의라면 치를 떨게 된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를 연구하는 건 말 그대로 쓸데가 없는 일이다. 먹고 살 일이 모두 해결되어 아무도 하지 않는 희소한 행위를 고급 취미로 발전시키려는 사람이거나(중세 귀족들이 종종 그랬다) 대단한 사명감이 있지 않은 이상,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하겠는가?


우리가 현재 기억하는 사회주의자는 대개 '독립운동가'로 통칭된 몇몇 이름들 뿐이다. 그 유명한 약산 김원봉조차,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는 급진적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월북을 했다는 이유로 영화 <암살>이 발굴하기 전까지는 거의 무명의 인물이지 않았는가.


따라서 한때 러시아인이었던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책을 썼다는 건 놀라운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티베트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극심한 경쟁률 탓에 조선 사학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던 남자. 그는 자유롭게 평양을 드나들 수 있었고,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사료들을 많이 보고 익혔다. 일명 박노자로 불리는 이 아웃사이더는 그 보물을 들고 2001년 한국으로 귀화한다.


단언컨대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이 각 장을 할애한 인물들 중 당신이 들어본 이름은 단 하나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박노자는 당연하게도 박헌영과 여운형 같은 인물들을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인물을 망각의 바다에서 건져 올렸고 여기엔 당연히 가장 깊은 바닥에 묻혀있던 여성 사회주의자들도 포함된다.


이 책을 읽으며 역사를 지우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실감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걸 되살리는 게 또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는 쓰거나 쓰지 않는 것, 혹은 읽거나 읽지 않은 것만으로 간단히 사라지거나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이 선택한 건 모든 시민이 남녀노소 차별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사는 무계급 사회였다. 심지어 그들은 오늘날의 가짜 사회주의 국가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하기도 전에 거의 전원이 숙청되기까지 했다.(이런 걸 보면 가짜들에겐 자신이 가짜임을 알아보는 자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는 대다수의 독립운동가가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어깨에 지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인간의 평등이라는 대의를 하나 더 메고 있었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던 영웅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유교적 질서가 뿌리를 내린 계급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독립된 조국이 다시 봉건주의 사회로 돌아가 대다수의 백성이 노예가 된다면 도대체 독립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이런 사람들과 협력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주의자는 조국의 독립에 반대하는 매국노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는 일제 강점기엔 일제에게, 해방 후에는 보수주의자에게(사회주의자를 암살하는 백색 테러를 자행했다. 독립의 아버지 김구조차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찾아간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독재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안타깝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는 이 기구한 삶을 보상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책은 그 죽음에나마 경의를 바칠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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