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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리더십 - 합의에 이르는 힘
케이티 마튼 지음, 윤철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10월
평점 :
정치 세계에서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정치인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신념, 한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원천. 신념이 없는 사람이 어떤 큰 일을 해내리라 상상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신념만 가진 사람이 큰 일을 해냈을 땐 예외 없이 인류사에 재앙이 닥쳤던 것도 사실이다.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조지프 매카시,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메르켈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합의와 소통이다. 이는 반드시 연정을 해야 하는 독일 정치의 특성상 불가피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해석하기엔 앙겔라 메르켈이 무려 16년이나 독일 총리로 재임했다는 사실을 충분이 설명할 수 없다.
아마도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과학자에 가까웠던 그의 정체성이 가장 큰 힘이 아니었다 싶다. 신념과 과학적 사실의 가장 큰 차이는 유연성이다. 기존의 믿음과 완전히 다른 사실이 목격됐을 때 신념은 기존의 믿음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후퇴한다. 부정의 방패와 음해의 칼을 들고 새로운 사실을 무찌르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다. 반면 과학적 사실은 어디까지나 잠재적 사실의 위치를 고수한다. 과학은 새로운 사실을 잘근잘근 씹어 기존의 체계를 수정하거나 수용 가능한 임계치가 넘어가면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 만든다. 메르켈은 경쟁자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높은 지지율로 압살 해서 미움을 받지 않았다. 그는 경쟁자의 정책이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족족 자신의 정책으로 끌어안아 미움을 받았다. 기존의 정치 문법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합의와 소통이 메르켈의 16년을 지켜온 정치 도구였다면 겸손과 실용주의는 통치의 뿌리이자 기둥이었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명실공히 유럽을 이끄는 리더였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엠마뉘엘 마크롱이고 이탈리아의 총리는 마리오 드라기이고 영국의 총리는 보리스 존슨이지만(브렉시트 했지만) 유럽의 총리는 메르켈이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그런 사실에 우쭐해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독일이 유럽의 왕으로 추앙받는 것이 협치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하이라이트를 적절히 피함으로써 파트너들이 들러리나 패배자처럼 보이는 것을 막았다. 주인공이 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하나의 유럽이라는 대의를 지켜냈는데. 특히 과거사에 관한 한 그는 조건 없이 무릎을 꿇어 피해국의 존경을 받았다. 뻔뻔함을 넘어 추악한 섬나라를 이웃으로 둔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심지어 그는 그 추악한 국가에 반성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 모든 성공에 독일 정치의 특수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꼽히는 살인마를 자기들 손으로 직접 뽑아 열렬히 지지했다는 사실. 독일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겨준 이 역사는 결론적으로 현대 독일에 실보다 득이 더 많았다. 독일인은 말이 번드러진 정치인을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화려한 언변은 오히려 과거의 악몽을 되새기는 트라우마가 됐으니까. 이 같은 문화는 빈말을 못하고, 웅장한 연설로 국민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메르켈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다 주었다. 예컨대 부동산 대책을 묻는 국민을 향해 '그것은 무척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며 오랜 시간에 걸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과연 독일 외의 다른 나라에서 당선될 수 있을까? 1년 안에 반값 아파트를 만들겠다는 경쟁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한편 메르켈이 펼친 강력한 재정 긴축 정책의 그림자도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긴축 재정으로 쌓인 독일의 부는 결론적으로 난민 구제와 팬데믹 사태 해결을 위해 요긴하게 사용됐지만, 평상시였다면 이로 인해 교육, 의료 같은 보편 복지에 구멍이 생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 재정이 흑자를 냈다는 건 국민에게 그만큼 불필요한 세금을 거뒀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메르켈은 국민의 고통으로 성과를 챙긴 나쁜 정치인일까? 게다가 그는 금융 위기를 맞은 이웃 국가에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긴축 재정을 강요하기까지 했다. IMF가 한국에 강요해 수많은 실업자와 노숙자를 양산한 것처럼 말이다.
독일의 막대한 무역흑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무역흑자란 결국 자기 물건을 팔기만 하고 다른 나라의 물건은 사지 않았다는 의미다. 미국이 아무리 양아치 같아도 그들의 무역적자가 사실상 세계 경제를 돌게 하는 심장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나의 유럽이란 결국 독일만 살찌고 나머지는 배를 곯는 허울 좋은 구실이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모든 나라가 독일처럼 벌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면 유럽의 경제가 어떻게 될까? 서로 관련 있는 단어를 짝지으라는 질문에 소비와 적자는 아마 탕아나 베짱이 흥청망청과 짝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말 못된 의도를 가진 세뇌의 결과물이다.
사실 <메르켈 리더십>은 이처럼 메르켈의 성공을 다각도로 분석하기엔 한계가 많은 책이다. 애초에 메르켈의 그림자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냐 보다는 '어떤' 문제를 해결했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도 문제다. 실제 그의 성공에서 배움을 얻으려면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퇴임식을 한지 이제 고작 1주일도 지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더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이 책은 그때를 위한 가이드북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