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 새로운 세계를 꿈꾼 인간, 그들의 삶과 생각을 다시 찾아서
박노자 지음 / 나무연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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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얘기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를 언급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배경과 진실을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결국 무지로 점철된 매도와 마녀사냥의 먹잇감이 되는데, 나는 대체로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우리와 국경을 마주한 가짜 사회주의 국가 때문이다. 삼대 세습을 완성한 이 나라는 사회주의의 'ㅅ'도 꺼낼 자격이 없는 무능력한 독재국가다. 이 나라에 사상이란 없다. 오로지 더러운 권력욕과 그걸 포장하려는 뻔뻔함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지만.


둘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근대사 탓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부역자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사회적 지위와 부를 보전받은 이들은 그대로 대한민국의 지배층이 됐고 과거를 지우기 위한 수단으로 '반공'에 운명을 건다. 그 세뇌가 얼마나 강했는지 전쟁의 참상과 북한군의 만행을 실제로 목격해, 이유를 막론하고 빨간 거라면 무조건 혐오하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오늘날에도 사회주의라면 치를 떨게 된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를 연구하는 건 말 그대로 쓸데가 없는 일이다. 먹고 살 일이 모두 해결되어 아무도 하지 않는 희소한 행위를 고급 취미로 발전시키려는 사람이거나(중세 귀족들이 종종 그랬다) 대단한 사명감이 있지 않은 이상,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하겠는가?


우리가 현재 기억하는 사회주의자는 대개 '독립운동가'로 통칭된 몇몇 이름들 뿐이다. 그 유명한 약산 김원봉조차,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는 급진적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월북을 했다는 이유로 영화 <암살>이 발굴하기 전까지는 거의 무명의 인물이지 않았는가.


따라서 한때 러시아인이었던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책을 썼다는 건 놀라운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티베트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극심한 경쟁률 탓에 조선 사학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던 남자. 그는 자유롭게 평양을 드나들 수 있었고,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사료들을 많이 보고 익혔다. 일명 박노자로 불리는 이 아웃사이더는 그 보물을 들고 2001년 한국으로 귀화한다.


단언컨대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이 각 장을 할애한 인물들 중 당신이 들어본 이름은 단 하나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박노자는 당연하게도 박헌영과 여운형 같은 인물들을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인물을 망각의 바다에서 건져 올렸고 여기엔 당연히 가장 깊은 바닥에 묻혀있던 여성 사회주의자들도 포함된다.


이 책을 읽으며 역사를 지우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실감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걸 되살리는 게 또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는 쓰거나 쓰지 않는 것, 혹은 읽거나 읽지 않은 것만으로 간단히 사라지거나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이 선택한 건 모든 시민이 남녀노소 차별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사는 무계급 사회였다. 심지어 그들은 오늘날의 가짜 사회주의 국가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하기도 전에 거의 전원이 숙청되기까지 했다.(이런 걸 보면 가짜들에겐 자신이 가짜임을 알아보는 자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는 대다수의 독립운동가가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어깨에 지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인간의 평등이라는 대의를 하나 더 메고 있었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던 영웅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유교적 질서가 뿌리를 내린 계급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독립된 조국이 다시 봉건주의 사회로 돌아가 대다수의 백성이 노예가 된다면 도대체 독립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이런 사람들과 협력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주의자는 조국의 독립에 반대하는 매국노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는 일제 강점기엔 일제에게, 해방 후에는 보수주의자에게(사회주의자를 암살하는 백색 테러를 자행했다. 독립의 아버지 김구조차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찾아간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독재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안타깝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는 이 기구한 삶을 보상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책은 그 죽음에나마 경의를 바칠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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