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겟돈을 회상하며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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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나는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에 빠져 다소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빛이 들지 않는 구석진 서가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질릴 때까지 책을 읽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스스로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게 된 이후에는 더 다양한 작가에 탐닉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포함된 전쟁 3부작을 읽은 뒤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책에 빠졌고 우연히 극장에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뒤에는 코맥 매카시의 번역서를 모조리 사다 읽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도 비슷했다. 나의 존 르 카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끈 이론에 빠져 <우주의 구조>까지 단숨에 내달렸고 이후 그가 쓴 책이라면 따지지도 않고 집어 들었다. 내 서가의 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브라이언 그린이다. 미쳐버릴 정도로 좋아했지만 번역서가 거의 없거나 작품 자체가 많지 않아 몇 권의 책으로 그친 작가도 있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와 <밤의 파수꾼>의 켄 브루언이 그렇다. <밤의 파수꾼>을 펴낸 랜덤하우스 코리아의 편집자를 만나면 나는 언제 어디든 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내게는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가 있다.


썼던 글을 뒤져보니 내가 이 새로운 신을 마음속에 영접한 건 2010년에서 2011년 사이였던 것 같다. 첫 책은 <제5 도살장>이었다. 거의 1~2주 간격으로 커트 보네거트의 책이 올라온 걸 보면 심각한 중독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도저히 잊으래야 잊을 수 없고 떨쳐낼 수 없는 절대자.


한창 소설을 쓰던 시기에 글이 잘 풀리지 않고 벽에 부딪혔다는 생각이 들면 <타임퀘이크>를 꺼내와 필사를 하곤 했다. 그의 글을 옮겨 적는 동안엔 아무 생각도, 아무 걱정도 내 마음을 넘겨보지 않았다. 딩동댕, 딩동댕~


주니어는 1922년에 태어나 2007년에 죽었다. 그의 말마따나 너무 오래 살았고 여기저기 싸질러 놓은 글과 말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살아생전 너무 큰 사랑을 받은 작가는 죽고 난 뒤 남겨진 이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주고받은 편지를 공개한다거나 미발표 원고 또는 연설문을 엮어 책을 내는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이런 걸 너무 끔찍하게 여겨 원고를 전부 불태우거나 공개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재치 넘치고 유머러스한 이 할아버지는 그런 유언을 남기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크 보네거트는 주니어의 아들이었고 그 역시 작가였다.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얼마나 컸을지 이해하고, 주니어의 팬으로서 그의 글을 한 문장이라도 더 읽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겟돈을 회상하며>는 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주니어는 글쓰기로 따지면 뚜벅이 중의 뚜벅이였다.


아버지는 고쳐 쓰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셨다. 고개를 앞뒤로 까닥거리며 방금 쓴 것을 거듭 웅얼거리고, 손짓을 해가며 높낮이와 리듬을 바꾸었다. 그러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몇 자 적지도 않은 종이를 타자기에서 조심스레 빼낸 뒤, 구겨서 던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p.7)


그런 작가에게 스스로 퇴고를 마치지 않는 글을 세상에 내놓는 건 벌거벗은 몸으로 타임스 스퀘어를 달리는 것보다 끔찍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 마음을 가장 흔든 건 아들 마크 보네거트가 쓴 서문이었다. 그의 단어 하나하나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말린 꽃처럼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떠난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그를 회고하는 것이 이토록 따뜻하고 충만한 일이라는 걸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의 추모는 거기서 끝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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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 - 전쟁의 기원에서 미래의 전쟁까지, 한 권으로 읽는 전쟁의 세계사
제러미 블랙 지음, 유나영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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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기존의 전쟁사를 비판한다.


첫째는 기존의 전쟁사가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으로 기술되어 왔다는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만 해도 그렇다. 물론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참전으로 아시아까지 확전 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일부 유럽 국가 + 미국의 전쟁을 세계대전이라 부르다니, 아시아에 사는 작고 노란 나로서는 왠지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저자는 이른바 중심이라고 간주해온 세계에서 한 발 물러나 전쟁사를 기술한다. 아프리카나 중국, 에스파냐 정복 이전의 라틴아메키라, 오스트레일리아 심지어 이순신의 임진왜란까지. 이슬람 전쟁사를 다룰 때도 유럽과 이슬람의 대립에 집중하던 기존의 시선을 거두고 오스만과 페르시아(지금은 다 이슬람 국가지만 페르시아는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이다)의 다툼에 주목한다.


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국가나 문명권 사이에 군사 역량의 위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에도 비판을 가한다. 로마 대 야만인, 중국 대 오랑캐, 멋지고 점잖은 기사단과 잔인하고 미개한 이슬람의 대결은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 로마의 군사 기술이 더 뛰어났다면 그들은 왜 패배했을까? 왜 한족은 변방 중의 변방에 불과한 만주족에게 그 광활한 영토를 빼앗긴 걸까? 중무장한 채 거대한 군마 위에 올라탄 기사를 보면 가죽 갑옷에 낙타를 탄 이슬람 군대가 하찮고 미개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후와 전략이 달랐기 때문이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유럽의 기사단은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짧은 기간 동안 몇몇 도시를 점령했을 뿐 이슬람 문명의 심장부를 제대로 찔러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지긋지긋한 분쟁 때문이었다.


둘째는 전쟁사가 특정 인물과 전투에 집중하는 경향이다.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한 한니발은 고대 전쟁사에서 전투의 신으로 기록된다. 특히 로마군을 완패시킨 두 번의 대회전에서 구사한 포위 전술은 포에니 전쟁을 기술하는 책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 본토의 상당수를 점령하고서도 결국 전쟁에서 패배한다. 로마는 추가 보급이 불가한 카르타고 군의 약점을 파고들었고 중앙을 내줄지언정 항구만큼은 지켜내는 전략을 구사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한니발은 결국 항구를 확보하기는 했으나 이 전쟁을 지속하느냐 마느냐로 갈등이 폭발한 본국의 정치 상황 때문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질 것 같지 않던 전투의 신은 아프리카에서 완패했고 이후 지중해 역사에서 카르타고는 삭제된다.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건 전투와 전술뿐만이 아니라 전략, 정치, 병참, 통신 같은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다. 전투와 그 전투를 이끈 영웅에 집중하다 보면 그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여러 가지 신선한 대목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를 재미있는 책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나 또한 전쟁과 전략보다는 전술을 기대하며 이 책을 펴 든 것이 사실이다. 이야기를 즐기는 입장에서는 사실 거시적 관점보다는 영웅의 이야기와 뛰어난 전술이 더 재미있지 않은가? 한편 인류 문명의 전쟁사를 핵심만 꾹꾹 눌러 담아 깊이 있게 꿰뚫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39개의 장을 400쪽에 담은 책이다. 각각은 너무 짧고 많은 부분이 생략된 느낌이다.


저자는 오늘날의 전쟁사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몇 층에서 떨어지든 지상의 보행자에게 치명상을 입히고도 남을만한 벽돌 책이 드물지 않다. 하지만 짧은 책은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기 위해 전쟁의 본질을 단순화할 위험성과 전개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 인과적 내러티브를 동원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p.400)


아주 정확한 지적이지만, 그래서 이 책은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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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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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김훈의 소설만 쓴다. 이는 독보적 문체로 이어져 대한민국 소설사에 김훈이라는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지만 그를 오래 읽어온 사람의 입장에선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김훈의 소설에는 캐릭터가 없다. 이순신이 있고 안중근이 있고 우륵이 있고 최명길이 있고 김상헌이 있고 이사부가 있고 어느 초원의 왕이 있고 어느 성의 왕이 나오지만 그들은 모두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속내와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몰락할 것처럼 무거운 고독을 어깨에 이고 있으며, 허무와 의미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한다.


매번 똑같은 인물이 비슷한 사건을 일으키는 게 항상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건 아니다. 탐정 소설처럼 강력한 캐릭터가 서사를 이끄는 경우 이는 오히려 독자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좀 다른 의미로 하루키의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은 거의 전부 재즈와 위스키를 좋아하는 초식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들이 괜찮은 이유는 그 캐릭터들이 전부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그 같은 남자들이 많이 살 테고 그런 남자들의 말과 행동, 벌이는 일도 대개는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나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들에게는 각기 다른 개성이 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개성은 다른 식의 반응을 일으킨다. 김훈은 캐릭터들을 너무 김훈식으로 해석한다. 아니 해석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그 인물에 투사하는 것 같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 하더라도, 픽션을 쓰는 작가에게 '자의적 해석'이라는 비판이 성립할 수 있는지는 물론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더 바람직한 방법인지 또한 고민되는 게 사실이다. 역사 소설 속 캐릭터는 작가를 인물에 투사한 결과여야 할까, 아니면 인물을 작가에게 투사한 결과여야 할까? 작가는 인물의 대리인인가 아니면 주체인가?


김훈은 안중근이 오랜 시간 마음속에 담아왔던 짐이었다고 토로한다. 혈혈단신 하얼빈으로 날아가 수많은 경비병 사이로 세 발의 총탄을 발사한 남자. 그는 국가조차 그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사방이 온통 적으로 뒤덮인 곳에서, 대의를 위해 사적 이해를 모두 잘라내고, 말 그대로 목숨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짊어졌다. 안중근은 김훈의 눈에 밟히지 않는 게 어려울 정도로 전형적인 김훈형 인물이다.


김훈은 시간을 뒤적이며 자기감정을 온전히 이입할 인물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그는 상상이 아니라 취재를 한다. 이는 역사를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해 왜곡할 가능성을 경계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 결과 <하얼빈>의 대사는 초창기 AI끼리의 대화처럼 어색하다. 그 단정하고 가라앉은, 무색무취의 세계도 마찬가지. 이러한 시도들이 <칼의 노래> 이후 언제 또 성공했는지,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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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성상인과 인삼업 한국 근대 산업의 형성 2
양정필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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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은 조선 제1의 수출품이었다. 요즘 인삼 하면 다들 재배 인삼을 떠올리지만 당시에는 삼남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인삼을 재배하는 곳이 없었다. 거의 산삼을 캐다 팔았는데, 그 약효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알려져 중국과 일본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18세기 전후 조선의 인삼은 중국의 비단, 일본의 은과 함께 동아시아 삼각무역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인삼은 일본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그러나 그 삼각무역의 대호황으로 산삼은 씨가 마르게 된다. 상인들은 조선 제1의 수출품을 되살리기 위해 대규모 인삼 재배를 계획한다.


인삼 재배는 많은 자본이 필요한 일이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 수확하여 매출로 생산 비용을 메꿀 수 있는 다른 곡물들과 달리 인삼은 최대 6년은 길러야 하는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시작하면 6년 동안 내리 비용만 투입되는 농사. 비록 이문이 다른 작물과는 비교 불가할 정도로 컸지만 이토록 긴 시간 동안 농사를 짓기 위해선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했다. 게다가 돈이 들어갈 구석은 또 얼마나 많은지. 1년을 키운 모종을 구입하고, 밭마다 해가림막을 설치하고, 적어도 4년 근부터는 몰래 캐가는 도둑들을 막기 위해 매일 밤 순찰을 돌아야 했다. 삼업은 웬만한 자본으로는 시작 자체가 불가한 고난도 농사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에서 삼포를 경영할 수 있는 건 장사로 대자본을 축적한 상인들 밖에 없었다. 조선의 상인이라 하면 우선 수도 한양의 경강상인,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 그리고 개성의 송상을 꼽을 수 있다. 경강상인은 수도 서울이라는 조선 최대의 수요처를 등에 업었고 평양은 뱃길로 중국과 가까워 예부터 무역로의 중심이었다. 의주의 만상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점을, 동래는 일본과 가깝다는 이점을 활용했다.


이처럼 자본과 경험을 소유한 상인 집단은 꽤 있었는데 어째서 송상이 조선의 인삼 무역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개성은 고려시대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선초에 개성 주민들 상당수를 한양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신왕조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로 찍혀 상당한 불이익을 받았다. 지역 수요만으로는 성장이 어려웠던 이들은 당연 해외로 눈길을 돌렸고 일부는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하는 행상으로 활약했다. 조선의 차별정책 때문이었는지 이들의 내부 결속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본의 규모만으로는 첫 손에 꼽기 어렵지만 조직력만큼은 다른 지역 상인들과 궤를 달리하는 송상이었다.


송상의 힘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차변과 대변을 함께 적어 외상거래를 가능하게 한 복식부기를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계발한 뛰어난 상인이었다. 또 반드시 다른 점포에서 수년간 수습을 마친 뒤 가업을 잇거나 유능한 점원을 전문경영인으로 발탁하는 차인제도를 운영했다. 이는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는 근대적 경영 방식이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신용만으로 돈을 꾸고 갚을 수 있는 시변제도가 아니었나 싶다. 시변제도는 중개인을 통해 거래하기 때문에 돈을 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이 서로를 전혀 몰랐다. 금전거래가 인정에 따라 이뤄지면 자본은 비효율적으로 분배되기 마련이다. 개성상인들은 이처럼 일찍부터 근대적인 경영, 금융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사관은 스스로 근대화를 이룰 수 없었던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배가 도왔다고 주장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근거들을 송상의 역사에서 찾는다.


송상의 현대적 상업 제도는 삼포 경영을 위한 일종의 플랫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딘가에 돈이 있는 사람은 있다. 어딘가에는 인삼을 재배할 줄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서 인삼을 재배할 줄 아는 사람은 적다. 송상은 이 둘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소비자의 needs도 파악할 줄 알았다. 송상은 인삼을 쪄 홍삼으로 가공했다. 이는 습도가 높은 지역에서 보관이 힘들었던 인삼의 단점을 메꿈으로써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근대와 현대 상업을 가르는 차이가 수요를 따르느냐, 그것을 창출하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와 일제를 거쳐 홍삼은 전매제도가 실시됐고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는 일 년에 생산할 수 있는 홍삼의 양을 조절했다. 장사치에게는 더 벌 수 있는데 못 버는 것만큼 답답한 상황이 없을 것이다. 송상은 그동안 쩌리 취급을 당해오던 백삼에 주목했다. 홍삼에 비해 질 낮은 제품으로 인식되던 백삼을 팔기 위해 송상이 시도한 브랜딩, 마케팅 기법들은 현대의 기술들을 무색해할 정도로 화려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돈을 벌기 위한 욕망만큼 인간의 창의력을 자극하는 요인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근대 개성상인과 인삼업>은 논문이다. 남보다 부족한 조건을 타고난 개성인이 굴레를 박살내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기보다는 수치와 사료로 걸러 차갑게 식힌 말들을 주된 서술 방식으로 취한다. 건조하고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만큼 객관적이라는 장점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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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수학 - 수학에 미치는 6가지 이유
나가노 히로유키 지음, 김찬현 옮김 / 동아시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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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언어다. 실험 결과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한 말이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는 "우주는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있다." 고 말했다.


세상에 단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만 남기라면 나는 수학을 고를 것이다. 말이나 글에는 늘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숨어 있다. '밥 좀 먹어라!'라는 말의 '밥'은 지금 당장의 한 끼를 의미할 수도, 음식 전체를 뜻하는 걸 수도 있다. 그러나 1, 1, 2, 3, 5, 8, 13으로 이어지는 수열에는(피보나치) 다른 의미가 끼어들 틈이 없다. 심지어 중간의 여러 수를 빼버려도 보는 사람은 그 공백을 완전히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학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안에 추상성과 구체성이 동시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수학은 실재를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 표시하지만 그 기호들을 풀어내면 늘 같은 실재가 도출된다. 수학은 이 세상을 추상화하는 수단인데 그 수단의 해가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 현실이라는 게 늘 놀랍다.


이런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질색이라면 수학이 가진 실용성에 초점을 두는 것도 좋다. 인간이 최초로, 수학을 실생활에 대규모로 적용한 사례는 건축이 아니었을까 싶다. 높은 수준의 수학 개념이 없었다면 고대의 그 위대한 건축물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 수학은 점점 더 중요해져 우리 실생활 곳곳에 끼어들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최근에 등장한 AI 기술들은 최신 수학으로 무장해 이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수학은 인터넷에 종종 돌아다니는 구글 입사 시험 따위를 풀어내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하루에 몇 번이나 겹칠까?', '서울에 이발사는 몇 명이나 존재할까?', '대한민국에는 머리카락 개수가 정확히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나는 사실 이런 류의 퀴즈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추론 능력을 평가하려는 의도와는 다르게, 사실 이런 문제는 한 번이라도 풀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를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이라면 구글 입사시험 모음집 같은 걸 구해 달달달 외운 뒤 대단히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진정 수학적 사고가 발달한 사람이라면 아주 작은 가정들을 조금씩 포개어 결국 진실에 가까운 답을 낼 거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마어마한 수학>은 이 같은 수학의 가치와 매력을 쉽게 전달하려 노력한다. 유명한 수식이 탄생한 계기부터 천재라 불린 수학자들, 수학에 담긴 예술성과 영향력,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계산력까지. 나는 학창 시절 수학이 너무 어려웠고, 그 때문에 결국 입시도 망쳤는데, 이렇게 수학을 좋아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의 수학 교육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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