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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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김훈의 소설만 쓴다. 이는 독보적 문체로 이어져 대한민국 소설사에 김훈이라는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지만 그를 오래 읽어온 사람의 입장에선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김훈의 소설에는 캐릭터가 없다. 이순신이 있고 안중근이 있고 우륵이 있고 최명길이 있고 김상헌이 있고 이사부가 있고 어느 초원의 왕이 있고 어느 성의 왕이 나오지만 그들은 모두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속내와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몰락할 것처럼 무거운 고독을 어깨에 이고 있으며, 허무와 의미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한다.


매번 똑같은 인물이 비슷한 사건을 일으키는 게 항상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건 아니다. 탐정 소설처럼 강력한 캐릭터가 서사를 이끄는 경우 이는 오히려 독자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좀 다른 의미로 하루키의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은 거의 전부 재즈와 위스키를 좋아하는 초식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들이 괜찮은 이유는 그 캐릭터들이 전부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그 같은 남자들이 많이 살 테고 그런 남자들의 말과 행동, 벌이는 일도 대개는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나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들에게는 각기 다른 개성이 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개성은 다른 식의 반응을 일으킨다. 김훈은 캐릭터들을 너무 김훈식으로 해석한다. 아니 해석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그 인물에 투사하는 것 같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 하더라도, 픽션을 쓰는 작가에게 '자의적 해석'이라는 비판이 성립할 수 있는지는 물론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더 바람직한 방법인지 또한 고민되는 게 사실이다. 역사 소설 속 캐릭터는 작가를 인물에 투사한 결과여야 할까, 아니면 인물을 작가에게 투사한 결과여야 할까? 작가는 인물의 대리인인가 아니면 주체인가?


김훈은 안중근이 오랜 시간 마음속에 담아왔던 짐이었다고 토로한다. 혈혈단신 하얼빈으로 날아가 수많은 경비병 사이로 세 발의 총탄을 발사한 남자. 그는 국가조차 그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사방이 온통 적으로 뒤덮인 곳에서, 대의를 위해 사적 이해를 모두 잘라내고, 말 그대로 목숨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짊어졌다. 안중근은 김훈의 눈에 밟히지 않는 게 어려울 정도로 전형적인 김훈형 인물이다.


김훈은 시간을 뒤적이며 자기감정을 온전히 이입할 인물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그는 상상이 아니라 취재를 한다. 이는 역사를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해 왜곡할 가능성을 경계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 결과 <하얼빈>의 대사는 초창기 AI끼리의 대화처럼 어색하다. 그 단정하고 가라앉은, 무색무취의 세계도 마찬가지. 이러한 시도들이 <칼의 노래> 이후 언제 또 성공했는지,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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