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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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토지>의 주인 박경리 작가는 1926년에 태어났다. 자기 인생의 첫 20년을 오로지 일제 강점기하에서 보낸 것이다. 그 시절을 직접 체험한 작가가 하는 말은, 그때는 이러저러했다고 들어서 아는 사람이 하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박력이 느껴진다. 물론 그 역사가 너무 옛날이야기가 된 사람들과, 그것을 배워서 아는 사람들에겐 피를 토하는 작가의 심경이 피상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때문에 종종 피해자들은 가해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민족에게서도 이해할 수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한 건 알겠는데 너무 옛날 얘기잖아. 이제는 미래를 봐야지.'혹은 '뺏기고 짓밟힌 게 뭐 자랑이라고 떠들어. 창피한 줄을 알아.' 같은.


가해자의 입장은 이해한다. 시인하고 사죄하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일 테니까. 솔직히 상상조차 안 될 수도 있다. 설마 우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걸? 역시 한국인들은 과장이 심하고 감정만 앞세운다. 그러나 유린된 역사 앞에서 감정이 아니면 무엇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의 신도에는 스사노오라는 신이 등장한다. 폭풍과 바다를 다스리는 신인데, 한반도 이주민을 신화화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일본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바다처럼 변덕이 심하고 폭풍처럼 거침없이 분노를 쏟아내는, 통제와 예측이 불가한 민족. 이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툭하면 감정 운운하는 그들의 이면에는 실상 자기 인간성의 부재를 숨기려는 속내가 담겨있는 것이다. 할복자살을 고유한 미의식으로 포장하는 민족. 수치를 겪고 두려워 목숨을 끊지 못하는 자식을 부모가 목을 졸라 살해하는 걸 명예를 지켰다고 칭송하는 민족. 그들의 뿌리에는 인간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문화가 자리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일본의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우리 겨레에도 많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부각됐을 때 그 역사를 지우려고 가장 노력한 것은 바로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이었다. 힘이 없어 뺏긴 주제에. 어떻게든 그 수치를 숨기려 자신의 동생과 누나와 언니를 강간의 피해자가 아닌 매춘부로 둔갑시킨 졸렬함. 이 졸렬한 민족은 자신의 형제에게 가해자의 올가미를 그대로 씌워 졸라맸다. 이것이 36년 간 뿌리내린 식민사관의 잔재인지 일본인의 교묘한 언론 전략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의 근본적 결함 때문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됐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본산고>는 오래된 작가의 오래된 글이다. 어법과 단어가 예스러워 의미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문장도 많다. 때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향한 무차별적 비난도 등장한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일 관계를 소 닭 보듯 받아들이게 되는 우리의 가슴에 뜨끔한 일침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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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한국사 - 동아시아를 뒤흔든 냉전과 열전의 순간들
안정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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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학창 시절 주입된 역사 관점이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는 게 문제다. 이런 걸 보면 사람들이 왜 역사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왜곡된 역사 교과서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것 같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국사가 자국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쓰이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한쪽으로 기울어져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이 단군왕검 이래 반만년을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를 주입받았다. 이 탓에 이방인을 배척하고 하대하는 풍조가 만연한데, 특히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얼마 전 발생한 9급 공무원 욕설 사건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외국인을 그렇게 무시하는 민족이 반대로 외국에 나가 인종차별을 당할 땐 그토록 분노하는 게 참 웃긴 일이다.


인류의 기원을 따져봤을 때 단일민족이라는 건 유니콘, 불사조, 해태와 같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환웅이 단군을 낳아 나라를 일으킨 시점부터 배달민족은 끊임없이 사는 곳을 옮겨왔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았다면 유전적 결함으로 민족이 소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환웅과 웅녀의 만남 자체가 이민족과 열심히 합쳐 화목하게 살라는 상징이 아니었나 싶다. 전 세계적으로 순혈 신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민족은 히틀러 치하의 게르만인이나 유대인 정도가 있는데, 그들이 겪었던 환란을 떠올리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정녕 우리의 삶에 행복을 더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간다.


우리가 패왕이라 여기는 고구려도 역사 교과서가 심어놓은 왜곡된 이미지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다. 고구려는 시작부터 멸망까지 엄청나게 많은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던 복잡한 나라였다. 주변국을 오로지 무력으로 제압하는 철기병의 이미지는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지만 오히려 고구려인들의 실력을 폄하하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고구려인들은 동아시아 역사를 통틀어도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외교 감각의 소유자였다. 때로는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이도 저도 안되면 실력 행사를 통해 원하는 바를 쟁취한 똑똑이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장수왕 시절에도 싸움은 최후의 수단일 뿐이었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항쟁도 비슷하다. 우리는 그들을 반몽 민족주의자로 기억하지만 고려를 망친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 그 시작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긍정적 성과가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애초에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군사 조직에 불과했던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대몽 투쟁을 민족의 자부심으로 여기는 건 대단한 착각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섬나라에서 나와 조선과 함께 명나라를 치자고 제안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차 동아시아의 혁명가로 재평가가 필요하다. 김정은은 어떤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핵무기를 만들어 자주국방을 외친 그를 미래의 후손들이 대단한 민족 영웅으로 기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역사적 맥락과 주체의 속내를 따지지 않는다면 역사책에 나쁜 사람으로 기록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에는 '국뽕'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뛰어난 민족이며 세계의 주인공이었다는 자부심.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다. 우리가 왜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은 세상에 중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암묵적 차별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중국보다 먼저 한자를 만들었으면 우리가 더 뛰어난 민족이 되는가?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게 우리가 서양인들의 지적 능력을 압도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남보다 훌륭하다는 걸 증명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학창 시절 드림시어터라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를 무척 좋아했다. 특히 멤버 중에 존 명이라는 한국계 베이시스트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가 어떤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인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인터뷰 때문에 드림시어터가 싫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대한민국인이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나라에도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세계의 주인공, 우주의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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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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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 교수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다. 말투나 표정에선 오만함이 그득한데, 하는 얘기가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주어진 제약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창의력이란 원래 밑도 끝도 없이 상상력을 펼치는 게 아니라 한계를 돌파하여 재정의하는 능력이다. 저자가 하는 얘기들에 무리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선언이 아닌 제안. 충분히 실현 가능한 해결책.


저자가 건축을 통해 추구하려는 사회적 가치는 다양성과 소통이다. 아파트가 문제인가? 가끔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때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모두가 '똑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다. 똑같아서 이득이 되는 경우는 닭장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


얼핏 소통과 건축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2,000년도 전에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그리스를 떠올려보자. 그리스에는 모든 시민이 나와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아고라가 있었다. 아고라는 애초에 민주적 이상을 갖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든 건축물일까, 아니면 아고라라는 '공간'이 그리스인들을 민주적으로 만든 걸까?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이 연립주택단지의 아이들을 만나 노는 걸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분리된 공간은 소통의 단절을 낳는다. 소통의 부재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의 씨앗이 된다.


오늘날 SNS와 메타버스, 게임 같은 가상공간의 힘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혹자는 이런 세태가 우리가 우려하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네트워크로 한정되는 바람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의견을 주고받는다. 내 의견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은 친구고 비판하면 안티다. 20년 지기와 손절하기? 버튼을 한번 누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의견을 나누면 그 생각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기 쉽다. 자신의 생각이 '정상'이고 그 외는 전부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익명성은 사람들의 폭력성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고 있으면 가상공간이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생각에 헛웃음이 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반목은 사실상 인터넷에서 시작해 성장한다.


도시는 원래 다양한 삶과 생각이 모여 융합하는 용광로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생각의 교류가 많아졌고 그로 인해 혁신적인 발전과 발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창조는 같은 생각이 충분히 많이 모였을 때 탄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이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들은 이러한 장점을 대부분 상실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이 생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는다. 그러다 보니 가격과 브랜드, 동네가 중요해진다. 사람들은 똑같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담장을 세우고 차별을 한다.


도시의 주인이 자동차가 된 것도 문제다. 도로는 점점 넓어져 먼 곳을 가는 것은 쉬워졌지만 바로 옆의 단지와는 더욱 단절되었다. 심지어 인터넷 상거래의 폭발적 성장은 이러한 단절을 심화시키는 주범이 됐다. 사람들은 상업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기회가 생기는데 걸을 일이 없고, 집 앞 마트에서 양파를 살 일이 없으니 다른 생각들끼리 만나 충돌하고 융합하는 기회 자체가 소멸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세상이 바뀌는 걸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이 물질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질이 생각을 지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유현준 교수가 활약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건축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바꿔 우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가.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상을 바꾸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s -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그가 최근에 시작한 유튜브에도 동일하게 소개된다. 책 읽기가 부담이라면 그쪽을 정주행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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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올컬러 특별판) -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 년사 메디치 WEA 총서 4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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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교수의 책들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 든다. 너는 대체 누구의 편이냐는 질문이 얼마나 천박하고 폭력적인지 알면서도 순간순간 그에게 이 말을 묻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2015년에 펴낸 책을 컬러로 다시 찍은 책이다. 그는 이 책의 속지에 친필로 이렇게 새겨 넣었다. '산업화와 민주화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그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는 것 같다. 그 결과 이 책은 참신한 시각을 견지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관점이 대단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진정한 발전의 원동력은 언제나 차가운 자기 인식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대한민국은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그 모든 고대 국가를 단일 민족에 의한 다른 왕조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세계사에서는커녕 동아시아에서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다. 삼국 통일을 고구려가 했다면, 하고 원망할 일도 아니다. 작은 땅 덩어리의 소수 민족들이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던 건 세계사를 통틀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베네치아는 도시 국가에 불과했지만 지중해를 누비며 유럽의 역사를 만들었고 그 거대한 오스만 튀르크와 창칼을 마주했다.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임진왜란, 명청 왕조 교체, 일본 제국주의 등장에 실마리를 제공한 나라는 바다보다 땅이 낮아 마음고생을 하던 네덜란드였다. 한반도가 삼면이 바다라는 기회를 활용한 시기는 삼국시대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심지어 마지막 왕조 500년 동안은 스스로 중국의 속국임을 자처하며 소중화라는 자기기만에 몰두했다.


우리는 늘 힘이 약해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았으나 이는 한반도가 그만큼 중요한 땅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정신 승리로 이어진다. 김시덕 교수는 한반도가 동아시아의 요충지가 된 계기가 임진왜란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전까지는 직접 지배할 필요가 없었던 변두리 땅이었으나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부상으로 그 땅이 대륙 침략의 통로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경험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패 이후 한반도는 다시 짧은 평화를 맞는다. 병자호란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선 임진왜란보다 더 파괴적인 사건이었지만 한반도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재인식하는 사건은 아니었다. 우리 땅이 다시 열국의 각축장이 된 것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본이 다시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만들어 준 일본에게 감사라도 하라는 말인가?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한반도가 세계의 이목을 끄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강대한 세력들이 충돌할 때만 중요한 곳이 된다. 쉽게 말해 일본, 러시아, 중국, 북한, 미국 등 몇몇이 절대악이라는 단순한 역사관으로는 갈등을 제대로 해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본의 파렴치한 군국주의자들은 호시탐탐 평화 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다시 전쟁 국가로 만드려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정말 한반도 침략에 있을까? 이는 사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필요가 맞닿아 발생한 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승인하에, 철저히 그들이 정해놓은 레드라인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대한민국을 미국의 졸개로 폄하하는 중국, 북한의 의도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반만년 한반도 역사의 찬란한 광휘를 가슴에 새겨 넣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반미 정서를 자극하며 진정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고토 회복 등의 혈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한반도가 일본의 먹잇감이 되어 야금야금 잠식되고 있을 때 러시아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 속내는 우리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되면 본인들이 직접 국경을 마주할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자기들이 차지하기엔 청나라,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강대국들 사이에 오고 가는 펀치를 대신 맞아주는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그 어떤 국가도 인류애와 보편적 윤리에 따라 외교 행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는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자신의 외교 행위를 결정한다. 요는 이념이 아니라 실리에 기반해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러 나라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있을 땐 더더욱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 착한 놈은 없다. 외교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악당 중 누구와 언제 손을 잡아야 할지 판단하는 것이다.


김시덕 교수의 모든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냉철한 현실 인식에는 상당 부분 공감이 된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실제 외교 행위가 이뤄질 수 있는지는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우선 인간의 감정은 머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예컨대 진정한 사과가 없는 일본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편을 먹고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는 정부가 지속적으로 정권을 창출하리라 상상하기는 어렵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북한, 중국과 한편을 이뤄 신냉전 체제의 대척점에 선 미국-일본과 맞서는 게 가능할까? 코로나의 창궐이 친중 성향의 정부 정책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찌라시에도 들썩들썩했던 나라인데 말이다. 대한민국처럼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에선 시민의 마음을 얻어야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 소수 권력자만의 의지로 나라가 돌아가는 건 중국, 북한 같은 독재국가나 일본처럼 그 어떤 시민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정치 후진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김시덕 교수가 그렇게 열심히 강연을 하고 책을 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끼인 나라의 생존은 여우처럼 눈치를 보고 박쥐처럼 오가야 한다는 걸 알아주기 바라면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나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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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로 경험을 디자인하라 - 고객 경험을 극대화하는 DCX 혁신의 비밀
차경진 지음 / 시크릿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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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차경진은 현대를 경험의 시대로 정의한다.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하기보다 '의미'를 구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의미를 구매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쉽게는 가심비를 떠올리면 된다. 가격이 얼마든 나에게 만족을 줬으면 타당하다는 것이다. 가성비를 따지는 영역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큰돈은 확실히 가심비의 세계에서 돌고 있는 것 같다.


고객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하려면 필요보다는 욕망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고객은 어떤 맥락에서 우리의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가? 과거에는 포커스 그룹 인터뷰나 기타 사용자 조사를 통해 그것들을 밝혀냈다. 아주 무용한 건 아니지만 이런 방법들은 사용자의 욕망을 본인에게서 들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이상한 일이다. 본인 자신의 욕망을 본인이 아니면 누구에게 듣는단 말인가? 현대 대량 생산 시스템의 기틀을 만든 헨리 포드의 말에 그 답이 있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면 나는 더 빠른 말을 길러야 했을 것이다.' 그는 말 대신 자동차를 만들었고 지금의 미국이 탄생했다.


사람과 사람을 넘어 사람과 기계, 심지어 기계와 기계까지도 연결된 이른바 초연결시대는 고객에게 묻지 않고도 고객을 이해할 수 있는 분석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정교한 센싱 기술들이 탑재된 기계들은 이제 24시간 365일 고객의 행동을 기록하고 전송한다. 예전에는 데이터가 없어서 문제였다면 이제는 너무 많아 문제가 된 것이다.


데이터와 데이터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면 상품과 서비스는 초개인화의 영역에 도달한다. 고객이 20대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당신이' 20대냐, 여성이냐, 어떤 쇼핑몰을 몇 시에 몇 번 방문하여 무엇을 구매했고, 상품 상세 페이지를 끝까지 읽었는지, 매주 주문하는지, 월급날 장바구니에 담았던 상품을 한꺼번에 구매하는지 알아내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여성의 임신 사실을 대형 마트 마케팅팀이 먼저 알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가 특정 물건들을 구매하는 것으로 이어져 이를 종합한 추천 알고리즘이 유아 용품 할인 쿠폰을 보낸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런 세상이 소름 끼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공포를 느끼든 말든 세상은 한동안 정해진 방향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간다. 그건 세상의 잘못이 아니다. 편의와 이득을 따라 흐르는 인간의 본능이 스스로 그 방향을 정한 것이다.


<데이터로 경험을 디자인하라>는 이런 세상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그 방법이 꽤 상세해 단순히 이러이러한 세상이 왔으니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책과는 결이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물론 더 깊고, 넓고, 선명하고, 큰 경험을 기획하라는 이 책의 솔루션과 그 사례들이 그저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저자는 물고기를 잡는 법보다는 낚시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걸 이해하자. 그가 사업가였다면, 그래서 자신의 방법으로 만든 서비스가 세상을 혁신하는 중이라면, 아마 이 책은 그 자신이 아니라 수많은 분석가와 기자들이 대신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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