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헤아려 보니 2014년 8월부터네요. 1주일에 한개씩, 한번도 빠짐없이 약 4년간 리뷰를 올려왔습니다. 그 기록이 이번주에 깨질 것 같애요. 이번주는 뭔가 쓸만한 책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정기적으로 이 블로그를 찾는 분은 거의 없을테지만(대략 한두명쯤 될 겁니다) 그래도 알려드립니다.


이번주는 리뷰가 없어요!


왜 글을 쓰냐고 물어보면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 숨쉬는 걸 의식하지 않듯 읽고 쓰는 사람들한텐 이 둘이 마찬가지 일 같습니다. 그냥 읽는거죠 뭐. 읽었으니 해야할 말이 떠오르는 거구요.


네가 깜냥이 되냐? 라고 물어보시면 큰소리로 "네!" 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다년간 꾸준히, 꽤 많은 책을 읽어온 사람으로서 이제 막 책을 읽으려는 분들께 제가 깨달은 것들을 전하고 싶습니다.


첫째,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읽으십시요. 


인생은 짧고, 책 읽을 시간은 더더욱 짧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어지럽고 불편하고 내 입맛엔 맞지도 않는 양서를 읽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요. 책을 읽는다는 건 에너지가 대단히 많이 드는 일입니다. 이렇게 힘든 일이 재미까지 없다면 그걸 왜 해야합니까? 독서는 취미지 절대 의무가 아닙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면 재미있게 본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 소설을 찾아 읽어보세요. 책과 영상이 표현한 장면들을 차근차근 비교하다보면 글의 한계와 영상의 한계, 그 미학의 특성들이 눈에 드러나 꽤 쏠쏠한 재미를 줄겁니다.


나는 드라마도 영화도 안봐요. 솔직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책은 읽고 싶어요. 라는 분이 있다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취향이 없는 분한테 무슨 수로 추천을 하나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사실은 취향이 있습니다. 본인이 잘 모르거나 남들만큼 뚜렷히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이런 분들은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차근차근 떠올려 보십시요. 그때 나를 열광케 했던 게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던가, 나를 까르르 웃으며 손뼉치게 만들었던 건 무엇인가 를 천천히 종이에 적어보십시요. 아마 당신도 잊고 있던 당신을 발견하게 될겁니다.


둘째, 책은 결코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답을 얻기 위해 책을 읽지 마세요. 제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건 스무살 무렵이었습니다. 일종의 에피파니였어요. 다니던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는데 문득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이치,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 인간, 그들의 행동 기타 등등. 그래서 미친듯이 철학책을 읽었고 그렇게 20년을 보낸 다음에야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책은 더 큰 질문으로 이끄는 문일 뿐 결코 해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읽으면 읽을수록 처음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의문이 떠오릅니다. 날적부터 봉사였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눈을 떴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가 봉사였던 시절 인식했던 세상과 뜬 눈으로 맞이하는 세상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인지 구조의 대격변이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읽을수록 의문은 자꾸 커지고, 많아지고, 농밀해지니까요. 그 의문을 해소해보겠다고 또 다시 책을 들지만 몰아치는 바다를 바가지 하나로 퍼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뭔가를 알기 위해 책을 든 분들은 책을 읽을수록 모르는 게 점점 더 많아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책은 저자와의 대화입니다.


책은 절대 권위가 아닙니다. 절대 진실을 말하지도 않고요. 책은 어떤 사람이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해 놓은 종이 뭉치일 뿐입니다. 책을 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분야의 진리를 획득한게 아니에요. 여러분이나 저자나 그저 여행 중일 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글쓴이가 여러분보다 한발 앞서 여행을 떠났거나 여러분과는 다르게 자신의 여정을 정리한 것 뿐이죠.


여러분도 이미 충분히 여행을 경험해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생각이 있겠죠. 책을 읽으며 여러분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을 비교해 보십시요. 그리고 저자의 생각에 의문을 갖고 반론을 펼치고 논쟁을 해보십시요. 책을 읽어 얻게 되는 중요한 자질 하나가 바로 비판적 사고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게 많이 부족한거 같애요. 수천년간 무거운 위계사회를 살다보니 위에서 내려온 말씀엔 토를 달지 않는 성향이 강하게 뿌리를 내린 모양입니다. 유독 한국에서 유행하는 인문학 강연이나 멘토링 같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애요. 현상을 스스로 해석하고 비판하고 자기 생각을 만들기 보다는 어떤 현자 혹은 권위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그 생각을 전수받으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족집게 과외를 기대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어떤 사람이 힘들게 쌓아온 결과를 정답만, 한방에 가지려는 거죠. 다른 나라는 백년이 넘어도 못한 일을 불과 수십년 만에 이룩한 기적적 성장의 기억은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을 모조리 비효율적이고, 바보같은 일로 간주하는 악습이 되버렸습니다.


넷째, 행복해지려면 책을 읽지 마십시요.


책읽기는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읽을수록 몸이 뜨거워지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겪습니다. 생각은 인간의 행복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요. 생각이 있고, 그걸로 미래의 고통을 대비한다고 행복이 올까요? 아니요. 살아있는 동안 고통은 끊임없이 찾아올 겁니다. 그건 그냥 그런 거에요. 아무리 뛰어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살아있다는 그 현실만큼은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여러분의 눈엔 미래에서부터 달려오는 더 많은 고통의 무리들이 보일겁니다.


행복해지겠다고, 이 세계가 주는 고통을 좀 덜어보겠다고 책을 읽는 분들은 진정한 해결책과 가장 먼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할수만 있다면 가지고 있는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두뇌를 포맷하십시요. 1.5키로짜리 주름 투성이 단백질 덩어리에 아무런 생각도 넣지 않는 것. 그게 바로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 이번주에 리뷰를 쓰지 못했냐 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말이 길어졌네요. 아무튼 책읽기에 대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140자든, 1,400자든.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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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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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의 클리셰 중 하나는 대단히 철학적인 어린 아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소년 또는 소녀의 시선으로 세상의 부조리(특히 어른의 허위와 가식)를 파악하고 거기에 촌철살인의 비평을 내놓는다. 깜찍하다. 같은 어른이 말하면 기분이 나쁠 상황도 애들이 말하니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도 클리셰는 클리셰인지라 설령 그 소설이 그런 작법을 세상에서 제일 처음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독자가 항상 동시대에 그 책을 읽는 것은 아니므로 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피로도를 감쇄하기 위해 화자를 동물로 만들 수도 있는데 이 방법도 역시 너무나 많이 알려진 탓에 이제는 변주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참고로 화자가 고양이인 경우 소설은 꽤 잘 먹힌다).


프랑스 소설의 두번째 클리셰는 화자들이 늘 사색에 잠겨있는 탓에 줄거리를 진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잣말에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사색의 결과를 쏟아낸다. 내면의 마음 상태나 생각의 결과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말그대로 그들의 속마음을 낱낱이 '들려준다.' 어떻게보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런 서사 방식의 한계는 엄청나게 센스있는, 만연체의 현학적 문장으로 커버가되는데 그 탓에 소설을 훨씬 더 수다스러워진다.


서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이런건 소설이 아니야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박힌 주옥같은 철학의 편린들을 보면 아무리 서사가 빈약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소설을 쉽게 엉터리라고 매도할 수 없는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문학공모전의 원고를 심사 중인데 자신의 취향과는 맞지 않지만 촌철의 명문을 한 페이지에 한두개씩 발견한다. 당신은 이 사람에게 문학상을 줘야할까?


프랑스 소설의 세번째 클리셰는 자기 문화에 대한 심각한 불신이다. 이는 사실 문화우월주의의 발로이기도 한데(아이러니하게도) 왜냐하면 이런 불신이 남들은 우리 문화를 우아하고 세련됐다고 칭송하지만 내가 볼땐 거추장스럽고 허위 가득한 위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언제 니들 문화가 우아하다고 말했지?). 이런 태도는 종종 아시아 문화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지곤하는데 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매료가 일반적이다.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다. 생선 한 조각을 요리하는데도 별의별 조리법과 소스, 수많은 식기, 끔찍할 정도의 설명이 등장하는 프랑스 요리에 비해 칼로 한번 쓱, 밥알을 하나, 둘, 셋, 네번 만에 쥐어 완성되는 스시는(게다가 맛도 죽이잖아) 거의 마법처럼 보일 수 있다. 외국 문화를 대하는 태도는 이처럼 피상적이다. 그러다보니 자기들이 보고싶은 겉모습만 쏙쏙 뽑아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궁극의 문화 마냥 이상화 된다. 고개를 숙이는 인사법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겸손을 의미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 정중함에 본인의 영역에 쉽게 타인을 들이지 않으려는 경계심과 에고이즘이 담겨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텐데 말이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대단히 센스있는 문장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엄청난 철학자들이지만 허위와 가식이 충만한 보통 프랑스인들은 이들의 진면목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들을 발견하는건 그들의 아파트에 새로 이사온 한 명의 일본인이다. 이름은 오즈 카쿠로(일본의 미의식을 전세계에 알린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사촌이라는 설정이다). 그는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통해 자기 집에 미닫이 문을 달았고(얼마나 우아한가!) 메밀 소바와 교자를 직접 해먹으며(한번도 본적 없는 음식!) 다양한 분재와(미의식의 극치!) 고양이를(선인은 늘 고양이를 기르지) 기른다. 물을 내리면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나오는 변기를 갖고 있다. 오즈는 마치 야만의 세계 프랑스를 교화하러 온 동방의 진인처럼 그려진다. 만약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한게 독일의 나치가 아니라 일본군이었다면 그들이 이토록 일본을 숭배할 수 있을지,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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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2019-05-1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사람들도 그렇게 프랑스를 흠모했으니, 남의 떡이 커 보이는건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19-05-19 10:46   좋아요 0 | URL
일본은 뭐 자격지심과 사대주의의 왕국이죠. 자기들이 아시아의 백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댓글 감사합니다.
 
[eBook]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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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소설가의 장점이 그대로 드러난 책이다. 한때는 기자였으나 이제는 문학계의 내부자, 그것도 대단히 촉망받는 젊은 작가가 된 탓에 그의 르포는 별다른 견제나 경계없이 핵심을 파고든다. 그의 소설에 실망한 사람이라도 이 르포만큼은 눈여겨볼만하다.


장강명은 이 책에서 등단 제도가(신춘문예 및 장/단편소설 공모) 갖는 장점과 폐해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존재하는 이 제도는끼리끼리 주고받는 안방잔치라든가 공평하지 못한 심사제도, 심사위원단이 원로들로 구성돼 참신하고 젊은 작품이 나올 수 없는 구조라는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사실은 이 제도가 바로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공모가 없던 시절엔 등단하려는 사람은 유명한 소설가 또는 시인의 문하생이 되어 열심히 글을 갈고 닦다가 스승의 추천에 의해 등단해야만 했다. 일종의 도제 시스템이자 길드인 셈인데, 참나, 현대의 등단 제도를 혐오하는 골수 비판자라 하더라도 이런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아가 장강명은 이 등단 제도를 공채 채용과(이 역시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 연결한다. 현대의 공채 제도가 지연, 학연을 이용한 알음알음 취업, 그로인한 파벌 형성을 막기 위해, 또 나이가 어리든 많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고안된 제도라는 점은 등단을 위한 공모 제도와 상당히 흡사하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과거 시험과도 연결된다.


이들 제도의 문제점은 첫째, 사회적 낭비가 심하다는 점이다. 소설가가 되려면, 회사원이 되려면, 관료가 되려면 이 시험을 통과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보니 경우에 따라 아주 오랜 시간(이제는 사라진 사법 시험을 떠올려보자) 여기에만 매달리는 낭인들이 생겨난다. 등단이나 과거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는 일반 기업의 공채 채용 또한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취업이 안돼 휴학을하거나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경우, 다른 회사에서 몇년을 일하다 다시 공채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 등등. 그래서 요즘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나이도 많고 '경력'이 있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런 사람들과 경쟁해야하니 진짜 신입들은 결국 고배를 마셔야하고 그 고배가 후배들에게 전달되는 속도는 가속화된다.


둘째, 이런 제도가 정말로 혁신적인 인재를 뽑는데는 대단히 취약하다는 점이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핏'을 갖춰야만한다. 사실 이런 제도는 한쪽으로 특출나게 뛰어난 천재(또는 괴인, 또는 괴물)를 뽑는다기 보다는 그 집단과 맞지 않는 사람을 걸러낸다는 성격이 더 강하다. 대단한 창의력과 개성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학계와 영화계에서도 '공모전용 작품'이라는 말은 이미 널리 통용된지 오래다. 제도는 최대한 많은 고기를 잡겠다고 그물코를 조이고 더 넓게 펼치고 더 빠르게 달려보지만 배보다도 빠르고 그물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는 똑똑한 고기는 모두 놓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은 필연적으로 역동성이 떨어지고 그 안에서 파괴적 혁신을 일으키는 인재가 나오기는 요원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을 왜 유지하는걸까? 단점만 보면 마치 지옥의 대마왕처럼 보이는 이 제도들에는 사실 꽤 많은 장점이 있다. 앞서 말했지만, 우선 누구나 도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꽤나 공평하다. 고시 낭인을 없애겠다고 도입한 로스쿨 제도가 실제론 엄청난 등록금으로 인해 있는 집 자제만 갈 수 있다는, 그래서 현대판 음서제도가 됐다는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두번째는 이런 제도를 통해서 배출된 인재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렇게 뽑은 인재들을 데리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성장을 이뤄왔다. 장편소설공모전이 한때 문학계에 르네상스를 몰고온 적도 있었다. 이런 제도들이 극소수의 아주 훌륭한 인재를 뽑는데는 미숙할지 몰라도 상당수의 우수 인재를 걸러내는데는 꽤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장강명은 결국 '입단 제도'의 개선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제도를 전부 없앤다고 각계각층에서 진정한 인재들이 발굴될까? 문제는 들어가기는 어려우나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신변의 안전과 미래가 '영원히' 보장되는 그 집단 자체에 있는 것이다. 문예지나 칼럼, 책을 소개하는 TV쇼의 패널엔 오로지 등단 작가만이 참여 가능하다. 등단 이후 단 한 편의 작품도,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못한 작가더라도 말이다. 등단과 사법, 의사 고시 등은 한번만 합격하면 평생 그 자격이 유지된다. 한번 등단한 작가는 등단 작품이 표절이 아닌 이상 영원히 그 자격이 유지된다. 온갖 범법 행위를 저질른 저지른 변호사나 성추행으로 징역을 받은 의사라 할지라도 변호사 협회나 의사 협회에서 제명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시험 방법을 바꾸는 건 이 집단으로 들어가는 문을 고작 동쪽에 낼 것이냐, 서쪽에 낼 것이냐 하는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단들의 속성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장강명의 주장은 간단하다. 그들의 능력을 투명하게 알 수 있는 조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문학의 경우 질 좋고 방대한 리뷰들)예컨대 심장병 수술을 가장 잘 하는 의사가 누구인지, 어떤 변호사가 명예훼손과 관련된 재판 승률이 가장 높은지, 어떤 작가가 추리 소설을 가장 재미있게 쓰는지 명명백백하게 알아볼 수 있다면 왜 사람들이 의사나 변호사의 출신 학교, 그들이 현재 어떤 병원과 로펌에 속해있는지, 그들이 거기서 어떤 직급을 갖는지, 그 작가가 어디서 등단을 했는지, 그가 어떤 문학상을 받았는지를 따지겠는가? 정말로 이런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시험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험은 그저 자격을 검증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모든 건 자격을 얻은 뒤 그 바닥에서 발휘하는 실력을 토대로 결정된다. 이게 안되니 각 단체는 자신의 성벽을 높이는데만 집중하고,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이 사고를 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숨기고(그래야만 성벽의 공신력이 인정되니까) 사람들은 '아 저렇게 높은 기준을 통과했으니 그들을 믿어도 되겠구나'하는 근거없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장강명이 제시하는 대안이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의 분석 능력과 취지에 대해선 대단히 공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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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
대니얼 코일 지음, 박지훈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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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소수의 천재가 세계를 이끌어나간다는 신화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세상의 복잡하고 괴로운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하는 천재가 나타나길 기대하기도 하고. 그래서 서번트 증후군이라든가 최연소 나사 연구원이 된 천재 소년, 셜록같은 초천재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열광시킨다최근에는 이런 천재들을 한데 모으면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을 엔터테인먼트로 포장한 이야기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나도 광팬 중 하나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 천재들을 한 팀으로 묶으면 우주를 파괴하려는 신의 손에서 세상을 구하는 일도 가능할까?


팀의 능력은 결코 개개인 능력의 합이 아니다. 팀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 저마다의 능력과 개성을 갖는다. 어떤 팀은 개개인의 능력에 마이너스를 가하는가 하면 어떤 팀은 각자의 능력을 곱하기도 하고 또 어떤 팀은 구성원들이 어떠한 결과물을 창조해도 거기에 0을 곱해 결국엔 모든 것을 꽝으로 만들기도 한다(한 명의 또라이가 어떻게 팀을 망치는지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최고의 팀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이 책은 그 방법이 결국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을 구성원들의 마음 속에 어떻게 뿌리내리게 하느냐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래와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생각해보라. 식물이고 동물이고 사람이고 결국은 앉을 자리가 있어야 다리를 뻗는 법이다. 이곳이 내가 속할만한 곳인가? 이곳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곳인가? 사람들은 집단에 속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런 판단을 내린다. 그런 판단에 Yes라는 신호를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소통이다. 소개팅을 떠올려보자. 비록 첫인상은 나빴지만 앉아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의외로 말이 통한다. 말이 통하니 두번, 세번 만나게 되고 어느덧 나빴던 첫인상은 편견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소속감이란 구성원간의 신뢰에서 나오고 신뢰는 지속 가능한 관계에서 형성되며 지속 가능한 관계는 결국 말이 통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명심하자.


한편 좋은 말만 하는것, 서로의 비위를 맞추는 게 소통은 아니다. 소통은 한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진행됐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당신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내부 사정에 의해 이번 채용은 어렵게 됐다는 채용 거절 메일의 문구를 보자. WTF!! 내가 떨어진 이유에 대해서 솔직하게 밝히는 거절 메일이 온다면 어떨까? 나의 문제점을 세세하게 까발리는 그 메일이 원망스러울까? 나라면 엄청 고마울 것 같다.


물론 비판을 다루는 데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건, 무엇보다 상호 비판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들이 자주 하는 말,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유롭게 말해보세요. 이때 정말로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자유롭게 말해봐 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 팀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른바 피드백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지는 리더들의 일방적 비판은 소통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만약 당신이 리더라면 이거 한가지만 기억하자. 당신의 역할은 듣는 것이다. 당신은 듣고 듣고 또 듣고 들은 내용을 분석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말을 끌어낼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설령 당신을 비판하는 말이 나온다하더라도 놀라거나 노여워하지 말아야 한다.


소속감을 키우는 또 하나의 방법은 커다란 재난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사람들은 고통을 공유했을 때 커다란 소속감을 맛본다. 재난의 생존자와 희생자의 가족들이 끈끈한 연대를 이뤄 살아나가는 걸 본적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UDT나 네이비씰같은 특수부대는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의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다. 신입사원 교육도 종종 이런 과정을 벤치마킹하곤 한다.


그렇다면 일반 업무 상황에선 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싸이코같은 팀장이 하나 있으면 아주 좋다. 구성원들이 팀장 뒷담화에 똘똘 뭉치곤 하니까. 응? 팀이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정한 뒤 몇 년 동안 정진해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본 구성원들은 설령 그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팀웍을 유지할 확률이 높다. 목표는 일의 성공이 아니라 훌륭한 팀을 만드는 것이다. 역사상 최강의 MLB나 NBA 팀도 전승으로 리그를 우승한 적은 없다.


소속감을 키우는 마지막 방법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완벽한 사람들 끼리는 의외로 끈끈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혹여나 실패가 약점이 될까봐 성공할 일들만 골라 한다거나 실수를 숨기기 위해 위험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특히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팀장, 업무 능력이 탁월하다고 인정받는 팀장 밑에선 의외로 구성원들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기보단 팀장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역시 세상은 소수의 천재가 이끌어 나가는 거라고? 자신의 약점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는 건 대단한 용기고 그 과정에서 명백한 신호가 생긴다. 너도, 나도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대화와 협동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 우리는 팀으로 일하고, 팀으로 성공한다.


자, 이제 팀을 만들었으니 그 팀을 굴릴 방향을 정해야 한다. 어떻게? 다 뻔한 말이지 뭐. 모두를 자극하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걸 잘게 쪼개 우선순위를 만들고, 그 목표가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우리 스스로 만든 것임을 상기시키는 것. 이중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직접 우리의 목표를 설정했다는 믿음이다. 누군가가 만든 목표라면, 특히 그게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만든 거라면, 토론과 협력보다는 명령과 지시가 앞설 수 밖에 없다. 명심하자. 위대한 도전과 혁신은 모두 자발적이었다. 그런건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정 위대한 결과물은 모두의 마음 속에서 시작해 모두의 손끝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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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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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쓰인 장르 소설을 읽는 건 언제나 곤욕이다. 그 당시에 이런 이야기라니, 바로 이 이야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장르의 시작이다, 라며 그 가치를 상기시키는데 솔직히 나는 셰익스피어나 호메로스 등 이른바 전설이라 불리는 작가들의 책에서조차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나에겐 고전적 가치를 판별하는 심미안이 눈꼽만큼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전설이다>는 두 번이나 영화화가 됐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두 번 다 엉망이었다고 한다. 두번째 영화는 나도 직접 봤다. 윌 스미스 주연에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 <콘스탄틴>의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좀비 영화 매니아라면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좀비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만 빼면.


감정을 가진 좀비라...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그건 좀비에 대한 모독이었다. 웨스턴 컬쳐를 대표하는 두 괴물은 뱀파이어와 좀비라고 생각한다.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지만 사실 한 쌍으로 읽을 수 있는데, 그건 뱀파이어가 몸은 죽었지만 정신이 살아 있는 존재고 좀비는 몸은 살아있지만 정신이 죽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뱀파이어에겐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그들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반면 좀비는 그저 식욕에만 충실한 괴물로 그려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좀비가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쌩뚱맞다는 말이 딱 이 때를 위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원작 <나는 전설이다>를 읽으며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은 '좀비'가 아니었다. 그들은 뱀파이어였다. 낮에는 어두운 건물 속에 들어가 잠을 자다 해가지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마늘과 십자가, 거울을 무서워하고 사람과 대화도 나누며 도구를 사용하기 까지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온 몸에 썬크림을 바른채 낮의 거리를 활보한다. 이 이야기를 계승한건 영화 <나는 전설이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블레이드>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영화는 원작의 뱀파이어를 좀비로 바꿨지만 감성과 지능 등 일부 설정은 그대로 옮겨왔다. 나는 그게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더 좋았냐고 물어보면 그래도 역시 영화쪽이 아닐까? 감정을 가진 좀비를 받아들이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이상한 좀비 정도로는 인정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배경도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음침한 세상보다는 좀비 아포칼립스에 더 가깝다. 황량한 도시. 텅빈 거리. Nobody else? 라고 소리쳐도 바람에 나뒹구는 신문지만이 답하는 세계. 그런면에서 원작 소설의 주인공에겐 그닥 절망적인 고립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매일 밤 그의 집 앞을 찾아와 그를 감염시키려 안달이 난 뱀파이어는 인간이던 시절 주인공의 절친이고, 둘 모두 그 시절의 기억을 여전히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밤마다 주인공을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에게서 끔찍함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로버트 네빌의 집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나와라 네빌!


이거 참, "알았어 금방 나갈게"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끔찍한 괴물이라기보다는 약간 거친 매너를 지닌 야만인 정도로 느껴지는 뱀파이어들에게 둘러쌓여 로버트 네빌은 오늘도 세상을 파괴한 원인을 찾아 낮의 거리를 질주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 홀로 남은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나는 전설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그가 왜 전설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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