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흑역사 - 인간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톰 필립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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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반해 시작된 톰 필립스 정주행이다. 이 자의 매력은 훅 찌르고 들어오는 농담인데, 그 리듬을 살리려면 번역이 아주 중요하다. 이 부분에선 <인간의 흑역사>가 더할 나위 없는 맛을 보여줬기에 나는 번역가가 동일한지까지 확인하는 꼼꼼함을 보였다. <진실의 흑역사>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톰 필립스', '홍한결' 듀오가 활약한다.


두 책 모두 인간의 뻘짓을 연구하는데 <진실의 흑역사>는 그중에서도 '거짓말'에 집중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인류학과 사학, 과학 철학을 전공한(아니 외국 대학은 도대체 어떤 학제를 갖기에 이 모든 학문을 동시에 전공하는 게 가능한 걸까?) 톰 필립스는 현재 영국의 비영리 팩트체킹 기관 '풀택트'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알고 보니 거짓말에 대해선 완전 전문가였던 것이다.


포스트 모던한 현대를 규정하는 수많은 정의들 중에 가장 거친 기세로 성장하는 놈이 있다면 아마 '탈진실 시대'가 아닐까 싶다. 인터넷 기사에서 SNS, 유튜브까지 순수하게 창작된 거짓말이 진실인양 퍼지는 현상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새빨갛다 못해 조악하기까지 한 거짓말들이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고 여기에 동의하는 댓글들이 수만 개씩 달리는 걸 보면 탈진실 시대의 암울한 미래에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어떻게 저런 걸 믿을 수 있지? 인간은 정녕 똥멍청이에 불과한 걸까?


그러나 탈진실 시대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에 약간 어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대가 정녕 탈진실의 시대라면 과거 어느 시점엔 진실의 시대가 존재했단 말인가? <인간의 흑역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제 이 책이 어떠한 방향으로 주장을 펼쳐나갈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인간 세상은 애초에 진실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은 순 구라쟁이다. 감히 말하건대 언론을 포함한 미디어 산업은 이 구라를 상업화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진실의 흑역사>는 과거의 신문들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거짓말들로 사람들을 홀렸는지 폭로한다. 이 중엔 현대 정론지라 불리는 신문사도 있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볼까?


1833년 뉴욕의 <선>지는 '달에 박쥐 인간이 산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월스트리트를 만든 뉴욕 시민들이 이 말을 믿었냐고? 유명 작가 에드가 알렌 포는 훗날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열명 중 한 명도 되지 않았다'라고 고백했다.


1910년, 76년마다 지구를 찾아오는 핼리혜성의 재등장이 임박하자 <뉴욕 타임즈>(그렇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언론사다)는 혜성의 꼬리에 유독 물질이 가득하며 이 가스로 인해 지구의 생명이 절멸할 수도 있다는 프랑스 천문학자의 견해를 뉴스에 실었다. 그 결과 미국에 종말론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가스를 차단하기 위해 문과 창문을 봉쇄했으며 방독면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일부 사기꾼들은 가스를 마시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알약을 판매했다.


그렇다면 왜 거짓은 진실보다 널리 믿어지는 걸까? 톰 필립스는 그 이치를 크게 일곱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노력 장벽. 쉽게 말해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비전문가들, 게다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할 잡다구리에 지친 사람들에게 모든 분야의 팩트 체킹을 강요하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지 않은가?


둘째, 정보 공백. 진실은 앞서 말한 노력 장벽에 의해 발굴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근거 없는 추측, 거짓 정보의 생산엔 장벽이 없다. 진실은 거짓과 싸우고 싶지만 결투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야 경기장에 도착하는 것이다.


셋째, 개소리 순환고리. 아무리 거짓말 같아도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얘기를 하면 강철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 중에 저명인사 또는 유력 신문이 한 둘이라도 끼어있다면? 신뢰는 본디 정보의 참, 거짓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정보를 믿는 사람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생기는 법이다.


넷째, 진실이라 믿고 싶은 마음. 인간은 진실을 믿기보다는 본인이 믿고 싶은 걸 진실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동기에 의한 추론' 또는 '확증 편향'이라 불리는 데 본질적으론 다 같은 얘기다.


이밖에도 자신이 진실이라 굳게 믿었던 걸 부인하지 못하는 '자존심의 덫', 난무하는 거짓말에 지쳐 판단을 포기하는 '무관심', 우리의 정신을 불안과 망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뇌의 정신건강 보호 프로세스' 등이 있다. 어쩌면 거짓말이 싹트는 가장 안전한 온실은 마지막에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듣는 모든 정보가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피곤할까? 뇌는 극도로 예민해져 조그만 자극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세상의 온갖 거짓말에 맞서 싸우다 탈진해 버린 뇌. 이러한 파국을 막기 위해 우리는 어떤 정보가 '일단 진실'이라고 믿고 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이용해 사람들은 상업적, 정치적,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유희로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 장담하건대 이러한 현상은 인류가 지속되는 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울해하지 말자. 인간은 애초에 거짓말을 하는 동물로 진화해 왔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로, 엄청난 자기비판과 절제가 필요하다.


거짓말을 막을 수 없다면 우리가 걸러 듣는 수밖에 없다. SNS에 좋아요와 공유를 누르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구글에 '검색'을 해보는 것. 아무리 싫어하는 매체, 사람이라도 그 주장을 직접 듣고 판단하는 것. 사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을 거짓말로부터 지키는 일에 대한 방법 치고는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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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 사막의 망자들 잭 매커보이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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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시인>을 읽으며 마이클 코넬리의 위엄에 매료된 적이 있다. 퓰리처상에 노미네이트된 적이 있는 기자답게 세부적인 상황 설정과 반전을 배치하는 기술 등 짜임새 면에선 이 장르의 여타 작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 다시 코넬리를 찾은 이유는, 흠... 아마도 그의 방대한 출간 목록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주인공 미키 할러 시리즈에서 LAPD의 해리 보슈 시리즈, 게다가 이 <시인> 3부작까지,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만 수십 권에 달한다. 이 중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대작가라고 해서 모든 시리즈가 다 훌륭한 건 아니니까. 특히 첫 작품이 좋을수록 큰 실망과 함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될 확률도 높아진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첫 장을 펼쳐보았고, 특유의 간결한 하드보일드 문체가 옛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뜻밖의 우연을 만난 것도 이 책의 선택에 힘을 보탰다. <허수아비: 사막의 망자들>은 <시인> 삼부작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렇다면 읽어볼 수밖에.


사실 <시인>과 공유하는 건 기자 잭 매커보이와 그의 FBI 연인 레이첼 뿐이다. 시인 사건을 담당하던 당시 매커보이가 콜로라도 덴버의 중소 언론사 기자였다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LA타임스의 중견 기자로 일하고 있다. 연봉도, 커리어도 나쁘지 않은 상승이었지만 그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격변하는 언론사의 피해자가 되고 만다. 정리해고 100인 명단에 마지막 100번째로 간택된 것이다.


남은 시간은 2주. 한참이나 어린 신참 기자에게 LAPD 출입 기자로서의 업무를 인수인계해야 한다. '시인' 사건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지만 LA타임스에서의 활약은 기대보다 크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그는 재직 중 단 한 번도 '1면 기사'를 실어본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옛 명성을 야금야금 털어먹고 사는 셈인데, 쉽게 말해 한물 간 고액 연봉자를 정리해고 명단에 올리는 건 사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슬펐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송별 파티에는 세 명만이 찾았는데 셋 모두 파티가 아니었어도 매일 저녁 술집에 출근을 하는 종자들이었다. 저축해둔 돈을 생각하면 여유는 6개월 정도. 그동안 틈틈이 작업해왔던 소설들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일을 열어본 그는 다시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쓸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매커보이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얼마 전 그가 실은 짧은 기사에 허위 사실이 있다며 욕설을 하는 흑인 여자였다. 매커보이는 여자의 말투에서 즉각 그녀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형식적으로 대꾸한다. 여자는 저주와 함께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이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연쇄살인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LA타임스는 마이클 코넬리가 실제 재직했던 언론사다. 그는 잭 매커보이와 마찬가지로 범죄 담당 기자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마이클 코넬리의 홈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그만큼 설정은 세세하다. 대중의 흥미를 저해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깊이를 자랑한다. 하지만 긴장을 쥐어짜는 능력에 있어서 만큼은 확실히 <시인>에 미치지는 못한다. 노쇄한 매커보이가 현실 세계의 코넬리에게까지 영향을 준 걸까?


소설은 애초에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데 그 부분에서 조금 실수가 있지 않았나 싶다. 독자에게 몇 개의 머그샷을 제공하고 그중에 누가 진범일지 쪼는 맛을 제공하거나, 주인공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는 살인마가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생기는 긴장을 확실하게 요리해야 하는데, 범인들의 행동은 최첨단 기술에 능통한 엘리트 치고는 좀 엉성하다. 이제 막 범죄를 시작한 10대들 같다.


그래도 실망할 건 없다. 코넬리의 시리즈는 아직 죽기 전에 그의 책을 다 읽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남았다. 잭 매커보이에겐 작별의 인사를 건네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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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흑역사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톰 필립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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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진짜 웃음이 터져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피식하는 웃음이 아니라 '우하하하'하고 찐웃음이 터진다. 예상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이 정도로 맛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떠올려보지만, 흠... 쉽지 않다. 한 해가 아직 한 달 반이나 남았지만 <인간의 흑역사>가 올해의 책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인간의 흑역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우리의 역사를 통찰한다. '흑역사'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로 인간이 저지른 뻘짓들을 나열한다. 그 기막힌 사기극과 헛발질들을 읽고 있으면 우리가 동물들 중 지능이 가장 발달한 영장류라는 사실에 헛웃음이 난다. 지능은 개뿔.


진심으로 말하건대 인간은 똥멍청이다. 왜냐고? 멸종을 자초하는 유일한 종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인간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이산화탄소가 쌓여 남극의 얼음과 북극의 동토를 녹일 일이 있을까? 인간은 현재 마지막 화산 대폭발 때보다 10배나 넘는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중이다. 이 세상에 침팬지와 고릴라와 종달새와 뻐꾸기와 고래와 참돔 기타 등등 지능이 떨어지는 종들만 존재했다면 지구의 생명은 영원했을 것이다. 각종 병치레로 몇몇 종이 자연적으로 멸종하고 운석 충돌이나 대지진, 화산 폭발 같은 게 지구 상의 생명들을 지워버릴 순 있겠지만, 그건 그 종들이 자초한 일이 아니니 넘어가자.


이 책은 인간이 왜 엉망진창인지를 미시적으로 돌파해 나간다. 구체적 역사,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기이한 웃음거리들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나는 평소에 농담의 길이와 재미는 반비례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스탠딩 코미디 한 시간을 정신도 못 차리고 즐긴 기분이다. 이 책을 흔히 말하는 '빅 히스토리' 장르에 놓기엔 좀 애매한 감이 있지만 대중 역사서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반적인 논조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곧 신이 될 거라 예언하는 유발 하라리가 희망의 최전선이라면 중간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있고 저 밑 똥통에 인간을 씹고 조롱하는 톰 필립스가 있다고.


혹자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인간이 멍청한 걸 조롱하는 인간이라니, 이 무슨 위선인가? 너는 인간 아닌가? 이 책의 가치는 그저 농담, 딱 거기까지다. 현실을 타개할 해결책도,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경종도 울리지 못한다. 사실 나는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평가하기엔 이 책의 진심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정도랄까?


독자 여러분도 최근에 한 번쯤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신조를 막론하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원 참, 세상이 어쩌다 이 꼴이 됐지?"(p.11)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확실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 세상은 늘 이 꼴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놀랍게도 <인간의 흑역사>는 인간의 똥멍청이짓들을 통해 우리를 위로한다. 톰 필립스는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다.


진짜 큰 바보짓을 저질러본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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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지음 / 파람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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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너머로 달리는 말>은 가상의 국가 '초'와 '단'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초'는 말이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유목민족이다. 글자는 존재하지 않고, 풀밭에 천막을 치고 살며, 말과 사람이 먹을 것은 뺏어 먹는다. '단'은 성벽을 쌓고 그 안에 무리를 지어 사는 족속이다. 글자가 존재하며 먹고사는 방편으로 농사를 짓는다.


늙은 초의 왕은 어느 날 단의 성벽이 초원을 침범해 흉물스러운 돌덩이들이 세상을 뒤덮을까 걱정이 된다. 그는 아들에게 눈 앞에 보이는 모든 돌무더기들을 치우라는 유언을 남긴 뒤 스스로 나룻배 한 척을 타고 강 하류로 나아간다. 그 끝엔 인생을 마친 자들이 기거한다는 명도가 있었다. 때가 되어 스스로 명도로 향하는 풍습을 '초'는 돈몰이라 불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덧없는 인생을 지고 사는 인간과 그런 인간에게 붙들려 사는 말이다. 인간과 말은 교감을 하는데 말이 힘센 인간의 말에 복종하는 건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연민해 태워주는 건지 알 수 없다. 말은 인간만큼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어 스스로 이빨을 뽑아 고삐를 풀기도, 좋아하는 암말을 따라 국경을 넘기도 한다. 말의 생은 인간의 생에 종속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종속은 그저 말의 선택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건 나라를 떠나 미물과 대화하는 법을 깨우친 미친 왕자 연(초왕의 둘째 아들)과 말들 뿐이다. 나머지는 왕의 명령에, 나라의 풍습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강요하는 도리에 따라 살아간다. 김훈은 그 모든 것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공멸을 택한다.


나는 그가 늘 고통받는 인간을 관망할 뿐 거기에 간여하는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는데, 이 소설은 어쩌면 그가 세상에 내놓는 최초의 목소리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간 김훈이 써온 역사 소설은 사실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기에 거기에 뭔가 더하고 빼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동안 이런 논지로 김훈의 소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 왔다. 하지만 애초에 '그 역사'를 관망하기로 결정한 그 자체에 작가의 강력한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김훈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결말과 가장 흡사한 역사적 사실을 찾아 그것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은유해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은 내가 읽은 김훈의 소설 중 처음으로 사실에 얽매이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의 주장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은 그간 김훈이 써온 소설 중 그 어떤 것보다도 난해하다. 같은 말이 반복되거나 중언부언 흩어진다는 느낌. 처음으로 적나라한 주장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그것이 너무 적나라한 것에 대한 반감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던 걸까?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는 사실 뒤에 숨어 교묘히 주장을 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일 뿐이다 라고. 김훈은 이 쪽 지평선 끝이 저 쪽 지평선 끝과 이어져 몸을 가릴 돌덩이 하나 밟히지 않는 달빛 아래 초원에 서 있다. 나 따위가 이런 대작가에게 할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곳에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훈은 책 뒤에 '세상을 지워 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라고 썼다. 그는 인간이 걸어가는 자리마다 쌓이는 난잡함에 망연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를 가장 괴롭히는 건 이런 난잡한 세상에서 살아보겠다며 어지러운 글들을 토해내 밥을 벌어야 하는 자기 자신의 비루함일 것이다. 그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이렇게 무거워진 걸까? 나는 그가 이 소설에 내놓은 의견에 절대적으로 공감하지만, 아직은 그게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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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밤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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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테일러만큼 시니컬한 경찰이 나오는 소설이라면 안 보고 배길 방법이 없다. 쉽게 말해 싸가지가 없는 캐릭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 악을 통해 선을 추구하는 아이러니. 무식할 정도로 저돌적이지만 책 꽤나 읽는 독서광. 항상 혼자 일하고, 친구 보단 적을 더 많이 만든다. 동료로서는 최악이지만 멀리서 구경하기엔 꽤나 멋있는 사람이다.


할런 코벤의 <사라진 밤>은 매력적인 캐릭터와 미지의 줄거리가 공존하는 추리 소설이다. 주인공은 뒤마. 경찰이다. 학창 시절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했고 쌍둥이 형제와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뒤마는 사랑하는 두 사람을 동시에 잃는 비극을 맞이한다. 형제는 피 속에 다량의 마약을 함유한 채 기차에 치여 갈가리 찢겼다. 여자 친구 모라는 그날 밤 사라져 영영 자취를 감춰버린다. 이 날의 사건은 뒤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뒤마는 쌍둥이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여자 친구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했다. 그가 경찰이 된 이유?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사라진 밤>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흘리는 재주가 뛰어나다.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독자들은 정신없이 그 흔적을 좇아 헤맨다. 다른 곳에 시선을 팔지 못하도록 짧고 담백한 문장이 쉴 새 없이 몰아친다. 몰입감이 대단하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윤곽과 분위기는 작가의 말에 함축되어 있는데, 반전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두고두고 곱씹을 가치가 있어 여기에 그 전문을 옮겨 적는다.


뉴저지주 교외에서 살던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괴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철제 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무장 경비원들이 지키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에 악명 높은 마피아 두목이 살고 있으며, 그 저택 뒤뜰에 소각로가 있는데 거기서 시체를 태운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을 쓰게 된 영감을 받은 두 번째 괴담은 마피아 두목의 저택 근처 초등학교 인근에 '출입 금지' 표지판이 있고 가시철조망이 둘러진 지역이 있는데,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한 나이키 미사일을 발사하는 관제소가 있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 후에 나는 두 괴담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7).


그러나 400페이지짜리 추리 소설이 350페이지가 넘어서까지 뚜렷한 몸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슬슬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마어마한 진실을 꺼내 놓기에 50페이지는 너무나 부족하다.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비약을 감행하고 길고 길었던 터널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끝이 난다. 어둠에 적응이 되었던 눈은 강렬한 햇빛 아래 오히려 실명하고 만다. 설마설마했던 게 진짜였을 때 느꼈던 실망감은 아쉽다는 말로는 부족한 갈증을 남긴다.


그래도 최근에 이만큼 몰입해서 읽었던 소설이 있었나 싶기는 하다. 할런 코벤. 내게는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이미 수많은 책이 번역된 인기 작가였다. 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을 여태껏 모르고 지내왔다는 것도 참 신기하다. 비록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지만 <사라진 밤>은 할런 코벤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나는 올해 안에 그의 책을 서너 권 더 읽어볼 생각이다. 넷플릭스에 있다는 그의 드라마들도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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