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가소성 - 일생에 걸쳐 변하는 뇌와 신경계의 능력 DEEP & BASIC 시리즈 3
모헤브 코스탄디 지음, 조은영 옮김, 김경진 해제 / 김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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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의 마지막 신비로 남아있는 뇌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작 몇 킬로그램에 불과한 주름 투성이 해면체에서 초정밀 반도체의 설계도부터 가슴을 두드리는 이야기까지 나온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놀랍고 오묘하다. 지금 원고지 위에 쓰이는 이 글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뇌는 어떤 작용을 거쳐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어떻게 말과 글로 표현되는 걸까?


<신경가소성>은 이 모든 활동이 신경전달물질과 수용체, 그들의 콜레보로 인한 이온의 이동으로 생긴 전기 신호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단순한 화학물질의 결합과 전기 신호가 어떻게 글, 그림, 언어 등으로 출력되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우뇌형 인간과 좌뇌형 인간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좌뇌형은 수리, 추론, 언어에 능한 분석형 인간이고 우뇌형은 미술, 음악 등 예체능에 능한 감성적 인간이다. 이 이론은 우리가 특정 활동을 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가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신경전달물질과 전기 신호는 특정한 경로를 따라 뇌의 정해진 부분을 자극한다.


그런데 이런 동작 방식은 영원불변인걸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그러한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연구가 거듭될수록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유연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신경가소성'이란 신경의 변할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한다. 특정 자극에 대한 신경전달 경로는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개념이 아주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을 달리 먹는 순간 만물을 통제할 수도 있다는 생각. 과학자들이 들으면 기가찰 말이지만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기엔 더할 나위 없이 파격적이다. 그래서 신경가소성은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외치는 성공을 향한 자기 암시나 생각의 힘을 양자물리학과 연결하는 온갖 의사 과학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신경가소성>은 이러한 생각을 경계한다. 이 책은 딱 증명된 만큼의 가소성을 설명한다. 뇌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에게 벌어지는 신경의 변화는 대격변이라 부를 정도로 놀라운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오른팔을 못 쓰게 된 사람이 갑자기 테니스를 친다거나 하는 정도로 유연한 건 아니라는 한계를 명백히 한다. 이 책은 조심스러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토록 많은 발전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우리가 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책은 신경 과학의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글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다 분량도 적당하다. 뇌의 작동 방식과 가소성의 원리를 설명하는 개론서로는 더없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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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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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이걸로 에세이만 두 번짼데, 이 수다쟁이 소설가의 글은 어딘가 지루하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매력이 있다. 소설이라면 당장에라도 다른 책을 집어 들게 하는 텐션이지만 에세이는 그 나른함 자체가 하나의 포인트가 된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은 말그대로 지극히 사적인 그림 이야기에 불과하다. 유명한 사람의 독후감이나 영화, 그림 이야기 등을 읽어본 사람은 잘 알 텐데, 나와는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하는 책이나 영화 이야기만큼 지루한 게 없다.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그 내용이 대단히 '공적'이어야 한다. 언뜻 보면 두꺼운 미술사 책들이 사적 경험담보다 읽기 힘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정은 같이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법. 오타쿠와 매니아들이 왜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어두운 골방에서 만남을 가지겠는가? 그들의 감동은,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저 이해 못할 괴취미에 불가할 뿐이다.


이 책 또한 이런 류의 책이 갖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읽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지금부터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


1. 잘 아는 화가의 글만 읽어라

목차를 훑으며 줄리언 반스가 어떤 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익숙한 이름, 그림 밑에 명찰을 달지 않아도 100% 어떤 그림인지 아는 화가들의 글만 골라 읽어라. 줄리언 반스가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그림에서 무엇을 읽었는지를 확인하고, 당신의 생각과 비교해보라.


2. 그림을 먼저 감상하라

유명한 화가라 할지라도 당신이 그의 그림 전체를 아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화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감상은 그저 보는 게 아니다. 몇 분 혹은 몇 십분을 할애해 천천히 그림을 음미해야 한다. 중심의 인물부터 시선을 뺏는 오브제, 가장자리의 미세한 색변화까지. 아쉬운 건 이 책에 반스가 언급한 모든 그림이 실리진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저작권 때문이었겠지만. 그럴 때면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기술 인터넷을 이용해 보라.


이 책으론 교양을 쌓을 수도, 미술사를 공부할 수도, 그림을 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유일한 방법은 반스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이해하는 은밀한 덕질 고백. 상상해보자. 덕후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네임드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며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야외 테라스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소음은 기분이 좋을 정도로 잔잔, 차향은 더할 나위 없이 향긋하다. 시간은 물처럼 흐른다. 어느새 어둠이 내린 세상엔 반스와 나 둘만이 남아있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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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 불평등과 고립을 넘어서는 연결망의 힘
에릭 클라이넨버그 지음, 서종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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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물리적 특성이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개념은 매우 흥미롭다. 이런 사례들을 쭉 훑고 있으면 역시 물질이 우선, 관념이 나중이라는 철 지난 유물론이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영화 <매트릭스>를 보자마자 다시 뒤집히긴 하지만.


언젠가 신도시의 도시 계획이 어떻게 인간을 살찌게 만드는지 읽은 적이 있다. 이는 추정과 주장이 혼합된 선언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었다. 현대의 도시 구조는 상업 지구와 주거 지구가 명확히 나뉘어 있다. 대형 마트는 도시 외곽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이런 마트에 매일 가는 건 어려워 사람들은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한다. 1+1 상품은 이득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불필요한 상품 1개를 추가로 얻어온 것이다. 이 상품은 냉장고 안에서 썩거나 당신의 몸으로 들어가 뱃살 축적의 주역이 된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정육점과 채소 가게, 작은 마트가 있다면 사람들은 필요한 게 있을때 마다 걸어 나가 소량만 사 올 것이다. 휘발유를 쓸 일도, 그걸로 공기를 더럽힐 일도, 운동 부족의 될 일도 없다. 옆집, 윗집, 아랫집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얼굴을 익히는 건 덤이다. 현대의 도시 구조는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비하고, 인간을 돼지로 만들고, 파편화시킨다.


도시의 구조를 바꿔 얻을 수 있는 변화는 이밖에도 많다. 동네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 공원, 도서관, 체육관 등을 만들면 범죄율과 주민 간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주차 문제나 층간 소음으로 시비가 붙어 심심찮게 칼부림이 나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이웃이 매일 체육관에서 인사를 나누고,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며 새로운 사료에 대한 정보를 나눈 사람이라면 그의 뱃속에 칼을 찔러 넣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파편화된 인간은 서로를 더 쉽게 증오한다. 증오는 소통을 방해하고 부족한 소통이 증오를 고착화시키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경계가 없는 곳에 서로 모이게 되면, 비록 살가운 대화나 친밀한 감정이 오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계에는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그는 매너 없는 미친 또라이가 아니라 멀쩡하게 생긴 이웃인 것이다.


폭압을 일삼는 독재국가가 정보과 국경을 살벌하게 통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외부인을 적으로, 뿔이난 도깨비로 정의함으로써 내국인의 마음에 분노의 씨앗을 심는다. 그 분노는 주민들을 결속시키는 열쇠가 된다. 그런데 외부 사람들이 하나둘 왔다 갔다 하며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고 삶을 공유하면 자기 생각이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계층 간 갈등, 빈부 격차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도시가 빈자와 부자의 도시로 양분화되면 끝끝내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부자 도시 사람들은 막대한 세금을 들여 가난한 도시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삶에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공감할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책 매우 지루하고, 그저 사례를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음에도 주장하는 바가 그렇게 공허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에게 행동의 변화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책은 사람들에게 도서관에 가라거나 공원으로 나오라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가고, 공원에 나갈 수 있도록 도시의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도시 설계를 담당하는 몇몇 입안자들의 생각만 바꿔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지 내에 텃밭이 있고 세대마다 일정한 공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 땅을 가꾸며 이웃과 만나고, 그 땅에서 난 것들을 서로 나누지 않을까?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세요, 만나면 인사를 나누세요 라는 포스터를 붙이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이 책이 아쉬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그 변화를 이끌 공공 혹은 민간 사업자에게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정량적 고찰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금싸라기 땅에 왜 상업용 빌딩 대신 도서관을 지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왜 아파트 한 동을 더 짓는 대신 텃밭을 만들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답을 줘야 한다. 입법으로 강제할 수도 있지만 입법자들의 표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이루는 법이다. 공공의 이익, 민주주의의 발전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는 인간을 바꿀 수 없다. 자본주의 세상에선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더 교활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갖는 가능성을 고찰하지 않는 점도 많이 아쉽다. 최근에 20~30대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의 교류 사례를 본 적이 있는데, 이들은 익명의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혼자 먹거나 쓰기엔 양이 많은 음식물과 물건을 나누고 있었다. 교류를 나눌 물리적 공간이 없음에도 이러한 활동은 활발하게,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 정책을 입안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효과가 크지만 그만큼 느리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은 이러한 제약을 뛰어넘는 잠재력을 지닌다. 아주 작은 물리적 변화만으로도(예컨대 현관 앞에 거주민들만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공용 락커룸을 비치하는 것) 이러한 활동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도시를 바꾸는 일은 다학제적 협업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특정 행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해내는 일은 오랜 시간 어포던스를(affordance) 연구해온 UX 디자이너보다 잘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건축법도 모르고, 어떻게 집을 지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UX 디자이너, 건축가, 엔지니어, 공무원, 입법 전문가 등이 거대한 콜래보레이션을 이루기 위해선 이들의 노력이 시장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 도시가 한두 개 진행될 뿐 전국으로 확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쉽게 말해 이렇게 지어진 도시의 집값이 다른 곳 보다 훨씬 비싸고,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래서 이게 장사가 된다는 판단이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혹자는 이런 생각을 대단히 속물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 좋은 세상 같은 공허한 캠페인으론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인간의 행동은 더 쉽고, 더 편하고,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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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징비록 (패브릭 양장 에디션) - 국보 132호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류성룡 지음, 김문정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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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고르라면 일제강점기와 임진왜란이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 둘 모두 왜의 소행인데,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질투와 야욕은 실로 역사적 뿌리가 깊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책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건 역시 <난중일기>다. 성웅 이순신이 왜란 당시 쓴 일기로 고위 공직자의 삶과 업무를 이보다 더 자세히 알려주는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솔직히 재미가 없다는 데 대부분 동의를 할 것이다. <난중일기>는 일기보다는 일지에 가까운 책이다. 문장은 단순하다. 지나치게 단순하다. 이순신은 한자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문학도보다는 공학도에 가까운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확실히 감정과 소회가 배제된 차가운 책이라는 걸 느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징비록>이 있다.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전격 발탁한 서애 류성룡의 역작.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이 책은 말 그대로 한탄과 후회, 분노와 일갈로 가득하다. 류성룡은 당시 조정의 넘버 2인 좌의정에 있었지만 이순신은커녕 자신의 좌천도 막지 못했다. 낙선한 정치인만큼 비루한 존재가 없는 법인데, 류성룡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전장을 누비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 나간다. <징비록>은 그 과정에서 겪은 울분과 분노를 그대로 쏟아낸다.


그래서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이 정도 흡입력을 갖춘 비문학 도서는 독서 인생을 통털어도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 당시의 조정, 요즘 말로 하면 청와대 내부에서 어떤 말과 결정이 오갔는지를 확인하는 건, 어떤 말로도 그 흥분을 표현할 길이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은 당시 이순신의 천거와 좌천, 활약과 명성에 관해 엄청난 이야기가 있었을텐데 이상할 정도로 기록이 적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천거한 인물인 탓에 그에 대한 평가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칭찬이 과하면 자찬이 되고, 비판이 과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사적 측면에서의 기록들이 부족한 것은 많이 아쉽다. 이는 문관의 한계로 볼 수도 있지만, 전문 영역이 아닌 것에 이러쿵저러쿵 언급하지 않는 겸손함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둘 모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고안한 군사 전술을 딱 한 번 논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군사 전문가의 책을 읽고 자신의 방법이 언급되는 것을 보고 매우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게는 이게 전형적인 아마추어의 기쁨으로 보였다.


역사를 공부하는 내내 임진왜란의 승리는 늘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역사책은 단순히 이순신의 활약으로 퉁치고 마는데, 그게 실제로 어떤 전술, 전략적 효과를 가졌던 걸까? 왜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고 개전 두 달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했음에도 손바닥만한 땅 한 조각 얻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설령 100만 대군이 몰려왔다 해도 한 나라로 치면 많은 수가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수원시의 인구 정도인데, 이만한 인원으로 전 국토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몰려왔지만 그만큼 전선은 길어졌다. 후방을 완전히 점령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은 빠르게 끝나야 했다. 본토와 후방에서 올라오는 보급이 원활했다면 장기전도 가능했겠지만 '이 길목을 이순신이 차단' 한 것이다. 육로 보급은 운반 자체도 힘들고 습격을 막기 위해 상당한 병력까지 투입돼야 한다. 운송 병력을 더 투입하면 안전하게 보급은 가능하겠지만 그 인원이 먹고 쓰는 물자로 인해 효율은 상당히 떨어진다.


그래서 수로는 중요했다. 아니, 치명적이었다. 수군을 무시하면 이순신은 병력을 상륙시켜 후방의 육군과 합세해 왜군을 상하로 압박할 수도 있었다. 왜군의 빠른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군대가 강했던 이유도 있지만 대부분이 싸움도 하기 전에 도망을 쳤기 때문이다. 믿을만한 장수가 있다면 흩어진 군대와 국민은 쉽게 뭉쳤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개전 초기의 허무한 패배들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고위 관리들의 무능력이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관리들은 전쟁이 나자마자 도망쳐 숨었다. 말을 버리고 평민의 옷을 훔쳐 입은 뒤 험한 산길을 걸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단 병사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명망 높은 장수들도 별 게 없었다. 조선의 장수들은 대부분 북방의 여진족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거친 북쪽의 오랑캐를 상대하던 내가 고작 왜놈들을 못 이기겠느냐는 자만이 왜군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신립은 좁은 산길에서 왜군을 맞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드넓은 평야에 진을 친다. 아마 태어나서 조총의 위력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의 마지막 희망은 그렇게 충주에서 사라져 버린다. 신립은 패배한 장수답게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대장군다운 기개를 떨친 그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까?


이러한 사실들은 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준다. 훌륭한 전략과 완벽한 전술은 두번째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이 믿을 수 있는 능력 있는 리더다. 선조는 왜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기 무섭게 피난을 갔다. 자식들은 전장으로 뛰어 들어가 군대를 모집하고 포로로 잡혔음에도 말이다. <징비록>을 보면 당시 땅에 떨어진 왕명의 하찮음을 읽을 수 있다. 국민의 마음 한편에는 조선이나 왜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이 들만했다. 누가 점령을 하든, 우리의 삶은 그대로일 것이다라는. 이런 나라에선 어떤 국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순신의 존재는 우리 민족의 큰 복이 아니었나 싶다. 이순신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우대했다고 한다. 말단 병졸이라도 누구나 장군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을 보면 상벌에 대한 아주 명백한 기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양반이, 그것도 삼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최고위 장군이 평민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건 같은 양반들이 보기에 우매하고, 상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 파격들이 결국 그를 두 번이나 백의종군하게 만든 이유가 아니었을까?


<징비록>에는 배우고, 또 배울 것들로 가득하다. 연말을 이 책과 함께하면 새로운 다짐과 깨달음이 당신의 새해를 밝게 비출 것이다. 아무튼 우리 세대의 삶은 위기가 아닌 적이 없고, 늘 패배의 공포로 가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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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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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할 사람은 다음 두 가지 사례로 구분된다. 아래 이야기를 읽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읽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일말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다면, 절대적 믿음을 갖고 일독해 보길 권한다.


A는 인공지능 스타트업의 CTO로 재직 중인 30대 청년이다. 평소 스마트한 일처리로 명망이 높고, 유쾌한 성격 탓에 조직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없어서는 안 될 직원으로 여겨졌다. 그의 회사엔 3명의 인도인 직원이 있다. 어느 날 그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인도인 중 하나가 '청국장'을 먹자고 했다. 그러자 A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한국인 다 됐네.' 하며 웃었다.


B는 자기계발서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장애로 걷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게 됐다. 평소처럼 멋진 강연을 마친 뒤 그는 청중을 향해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


자, 어떤가? 당신은 이 책을 읽어야 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겠는가?


차별의 가장 큰 특징은 당하는 사람만 존재하고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겐 너무 예민하다거나, 피해의식이라거나, 자격지심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차별을 인지시키는 건 늘 어렵고 고된 일이다. 어쩌다 그 일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결국엔 다수의 가해자들이 그 사실을 '수용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 될 때가 많다. 그게 차별이라면 OK, 내가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차별금지법은 다수의 인내와 관용이 베푼 일종의 '시혜'로 여겨진다. 차별은 명백히 존재하고, 그것의 피해가 발생하며, 마땅히 사라져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쪽은 그 철폐를 구걸해야만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우리의 일상에는 차별이 만발해 있다. 일분이 아까운 출근길, 버스 한 대가 휠체어에 탄 사람을 태우기 위해 5분 동안 정차한다면 사람들은 기함을 일으킬 것이다. 저 사람 하나 태우자고 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겪는다면 그게 정말로 '합리적'인 법인지 묻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행복의 조건을 1초만에 버스에 뛰어오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휠체어에 타고 올라야 하는 사람에게 맞춰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세심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나 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지치고 짜증을 낸다. 그럴때면 존 롤스의 정의관에 입각하여 세상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 바란다. 당신, 아니 당신의 자식이 장차 어떻게 태어날지 모르는 어둠의 장막 뒤에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상인' 혹은 '주류인'으로 태어날 걸 확신하고 기울어진 세상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모두를 위한 평편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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