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이걸로 에세이만 두 번짼데, 이 수다쟁이 소설가의 글은 어딘가 지루하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매력이 있다. 소설이라면 당장에라도 다른 책을 집어 들게 하는 텐션이지만 에세이는 그 나른함 자체가 하나의 포인트가 된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은 말그대로 지극히 사적인 그림 이야기에 불과하다. 유명한 사람의 독후감이나 영화, 그림 이야기 등을 읽어본 사람은 잘 알 텐데, 나와는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하는 책이나 영화 이야기만큼 지루한 게 없다.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그 내용이 대단히 '공적'이어야 한다. 언뜻 보면 두꺼운 미술사 책들이 사적 경험담보다 읽기 힘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정은 같이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법. 오타쿠와 매니아들이 왜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어두운 골방에서 만남을 가지겠는가? 그들의 감동은,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저 이해 못할 괴취미에 불가할 뿐이다.


이 책 또한 이런 류의 책이 갖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읽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지금부터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


1. 잘 아는 화가의 글만 읽어라

목차를 훑으며 줄리언 반스가 어떤 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익숙한 이름, 그림 밑에 명찰을 달지 않아도 100% 어떤 그림인지 아는 화가들의 글만 골라 읽어라. 줄리언 반스가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그림에서 무엇을 읽었는지를 확인하고, 당신의 생각과 비교해보라.


2. 그림을 먼저 감상하라

유명한 화가라 할지라도 당신이 그의 그림 전체를 아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화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감상은 그저 보는 게 아니다. 몇 분 혹은 몇 십분을 할애해 천천히 그림을 음미해야 한다. 중심의 인물부터 시선을 뺏는 오브제, 가장자리의 미세한 색변화까지. 아쉬운 건 이 책에 반스가 언급한 모든 그림이 실리진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저작권 때문이었겠지만. 그럴 때면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기술 인터넷을 이용해 보라.


이 책으론 교양을 쌓을 수도, 미술사를 공부할 수도, 그림을 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유일한 방법은 반스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이해하는 은밀한 덕질 고백. 상상해보자. 덕후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네임드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며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야외 테라스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소음은 기분이 좋을 정도로 잔잔, 차향은 더할 나위 없이 향긋하다. 시간은 물처럼 흐른다. 어느새 어둠이 내린 세상엔 반스와 나 둘만이 남아있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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