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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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일명 특수청소업을 운영한다. 아마도 그런 일을 처음 겪었을, 다급한 요청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에는 집주인이 자신의 집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열쇠 또는 자동키의 비밀번호를 건네준다. 집주인은 떠나고 저자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문 앞에 섰을 때부터 그는 자신이 써야 할 게 방독마스크인지 아니며 방진인지 안다. 죽은 자의 빈방은 구더기들과 냄새가 차지한다. 발견된 시간이 길수록 정도는 심하다. 하지만 아무리 심해도 그건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저자는 장비를 들쳐 메고 하나씩 죽음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고독의 크기만큼 찐득하게 달라붙은 흔적들을, 저자는 어르고 달래 저세상으로 놓아준다.


남의 죽음으로 밥을 버는 일은 얼핏 잔인해 보인다. 타인의 절망으로 이득을 얻는 일이라니. 하지만 누가 죽든 말든 산 자들의 세상은 계속된다. 산자들의 세상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다. 죽기 전엔 이러쿵 저러쿵 할 일 조차 없는 데면데면 무명의 이웃이었지만 죽음 뒤에는 온갖 저주의 대상이 된다. 집주인은 집값이 떨어질까 무섭고 이웃은 냄새 때문에 분노를 참지 못한다. 더럽게 재수 없는 일. 나가서 곱게 죽지 못하고 기어이 방구석에서 뒈져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미친놈. 청소를 시작하는 저자를 향해 이웃이 나와 애먼 소리를 지르고 들어간다.


저자는 오히려 기사 한줄에도 기록되지 않는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배웅하는 유일한 친구다. 아무리 냄새가 지독해도, 현장이 참혹해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가스관 위에 내걸린 빨랫줄과 눌어붙은 짬뽕 국물과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을 통해 죽은 자의 고독을 이해하고 위로한다. 그는 단 한 번도 부잣집에 청소를 간 적이 없다. 살아생전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은 죽어서도 고독하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경찰과 시체를 수거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신을 신고 들어와 건조한 조사를 마친 뒤 방 여기저기에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간다. 저자는 천천히 방안을 돌아보며 죽은 자의 삶을 복원한다. 그들의 남긴 옷가지에서, 책에서, 잠자리에서, 음식에서, 죽기 전 가지런히 쌓아 놓은 분리수거 쓰레기에서.


그는 이 일을 하기전엔 출판 업계에 몸을 담은 적이 있고 시인으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깊은 감정을 담는다. 이 책은 온통 죽음과 그 상실이 가져온 고통으로 빼곡하지만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오히려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설령 내가 그렇게 죽더라도 이 분이 찾아와 내 마지막을 기억해줄 것 같은. 죽은 뒤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만, 아무도 찾지 않을 내 죽음을 떠올리며 외로워지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있는 삶이다. 그러니 이런 위로는 무의미하지 않다.


삶과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고 저자는 그 사실을 매일 실감하고 산다. 죽음과 손을 잡고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늘 서늘한 공포가 뒤통수를 오싹하게 만들까?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닌 것 같다. 어렵고 힘들고, 도저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고난을 맞을 때면 나는 늘 죽음을 떠올린다.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 차분해지면서 힘이 난다.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데 뭘, 하고 생각하면 내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이 하찮아 보인다. 그도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드는 걸지 모른다.


살아생전 고통에 시달리던 인생도 죽음 뒤엔 평온을 얻는다.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는 말은 뼛속까지 잔인해지기로 작정한 인간들의 악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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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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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어보면 유현준 교수가 왜 '알쓸신잡'의 쟁쟁한 입담들 사이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끝없이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는지 알게 된다. 건축은 재료를 쌓아 형태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것보다 왜 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근원을 밝히는데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근원을 탐구하는 사람에겐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건축으로 설명하는 빅히스토리다.


유현준 교수에 따르면 동서양의 공간 차이를 만든 결정적 요인은 바로 '강수량'이었다. 기준은 1,000 밀리미터. 이보다 많이 오는 곳에선 벼를, 그보다 적은 곳에선 밀 농사를 짓게 된다. 그런데 밀과 벼는 재배 방식에 큰 차이가 있어 이를 행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에도 큰 차이를 만든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서양 문화를 '개인주의', 동양 문화를 '집단주의'로 구분하는데 그런 가치관이 형성된 이유는 단순하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선 많은 물을 다뤄야 하기에 다 같이 모여 치수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보, 저수지, 관개수로 등) 진행하기 때문이다. 물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자기 논에 물을 댄 뒤 다시 길을 터 다른 사람의 땅으로 보내줘야 한다. 괜히 아전인수라는(자기 밭에만 물을 대는 행위를 탓하는 말) 말이 생긴 게 아닌 것인가.


반면 밀농사는 파종법부터 다르다. 밀은 혼자서도 충분히 씨를 뿌릴 수 있다. 밀은 맨땅에서 자라고 물이 많이 필요 없으며 집중호우 없이 일 년 내내 골고루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관개수로를 내거나 기타 토목공사를 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같이 모 여살 필요도 없어 개인주의적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벼농사 지역에 비해 밀농사 지역의 이혼율이 높은 것도, 대자연에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유럽의 시골과 여러 집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룬 동양의 시골 풍경 차이도 이러한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는 공간의 모습도 달라진다. 서양 건축의 중심은 벽돌로 쌓은 벽이다. 영역을 구분하기도 쉽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강수량이 많지 않기에 지붕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적당히 경사만 내서 얹어주면 그만이다. 반면 동양에선 여름철에 집중호우가 내려 땅이 물러지기 때문에 무거운 벽돌로 집을 지으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가벼운 목재가 주재료가 되고 방수를 위해 땅에 닿는 면에는 주춧돌을 놓는다. 기둥에 떨어지는 비를 막기 위해 처마도 길게 낼 수밖에 없다.


유럽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서양의 건축물들은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한데 왜 우리의 건축물들은 그렇지 못한 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 역시 벽에 있다. 벽으로 만든 집은 가로로 큰 창을 내면 무너지므로 좁은 창을 세로로 낼 수밖에 없다. 유리가 발명된 것도 한참 뒤라서 창문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닫아 놓으면 바깥의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열어둔다 하더라도 작게 보인다. 그러니 밖에서 건물을 보는 데 중점을 두고 디자인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 건축물은 비를 잘 처리하기 위한 지붕과 그걸 이고 있는 기둥이 중심이다. 기둥 구조는 답답한 벽을 만들어 지붕을 받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니 기둥과 기둥 사이에 뻥 뚫린 개방감을 갖게 된다. 시골집의 대청마루를 떠올려보자. 도대체 이것이 집의 내부인지, 아니면 외부인지 모호한 경계를 이룰 만큼 열려있지 않은가? 비가 오는 날에도 긴 처마 탓에 마루에 앉아 밖을 볼 수 있고 방에서 창을 열어도 비가 들이치지 않는다. 이처럼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동양의 건축물은 안에서 밖이 어떻게 보이냐가 더 중요한 건축 요소가 된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공간은 압축되고 문명의 차이는 줄어든다. 오늘날 전 세계가 서로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는 이유는 발달된 미디어 때문에 압축된 공간이 거의 0에 가깝게 수렴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류는 증기선, 기차,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을 발명했고 이로 인해 동서양 문화의 이종교배는 가속화됐다. 건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히 철근콘크리트의 발명으로 건축계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자유를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동서양 건축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한 위대한 건축가들이 탄생한다. 미스 반 데에 로에, 르 코르뷔지에, 루이스 칸, 안도 다다오. <공간이 만든 공간>은 무려 3개의 장을 할애해 이들이 꽃피운 모더니즘 건축의 탄생을 소개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등에서 익숙히 보아온 개념으로 구성되지만 거기에 '건축'을 더함으로써 내용을 훨씬 미시적으로 만든다. 빅히스토리의 매력은 논리적 상상력과 추론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는데서 오는 쾌감에 있다. 하지만 그 주인공은 지리나 기후, 또는 다 무너진 고대 유적같이 우리가 눈에 그리기 어려운 것들이다. <공간이 만든 공간>은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건축물들이 그 공백을 메운다. 심지어 그중엔 우리가 매일 오가며 보는 한국의 건축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빅히스토리가 어렵게만 느껴졌던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간이 만든 공간>은 그 큰 상상력들에 비해 훨씬 손에 잡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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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
아마릴리스 폭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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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비밀 첩보원의 일상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언더커버>를 읽자. 법이 허용하는 한에서, 이 책은 엘리트 첩보원이 경험한 훈련, 임무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전략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형식은 에세이지만 내용은 소설을 방불케 한다. 영화에서만 보던 비밀 접선과 암약하는 무기 밀매상, 테러 단체의 요인들이 바로 우리 옆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모를 스릴이 느껴진다. 허름한 건물 2층에 버젓이 차려놓은 무역회사가 실은 정보부의 공작 본부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은 뒤로 나는 주변의 것들에 한층 의심 어린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다.


저자 아마릴리스 폭스는 어린 시절 친했던 친구를 테러로 잃으며 세계의 위협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른이 된 후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을 도우며 아웅산 수치 여사의 비밀 인터뷰 영상을 BBC에 전달할 정도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깊이 개입한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와 9.11 테러를 목격하고, 세상에 난무하는 폭력을 막기위해 테러를 연구하는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거기서 써낸 논문 하나가 CIA의 눈에 띈다.


처음엔 사무직이 되어 입수한 정보를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오래지 않아 CIA 요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될 수 있는 공작원으로 발탁된다. 훈련 성적이 우수했던 그녀에게 배정된 지역은 당연히도 '중동' 이었다. 그녀는 테러의 심장부에서 무기 밀매상을 회유하고 테러 단체 수장들과 담판을 벌인다.


흥미진진한 영화 시나리오 같지만 사실 이 책은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CIA 공작원으로서 겪어야 하는 심리적 압박과 도덕적 딜레마를 밀도 높게 그려낸다. 내 아이의 안전을 위해 시작한 일이 다른 나라의 무고한 아이들을 죽일 수도 있는 현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속여야만 하는 비밀 첩보원의 일상.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로 채워진 '나'는 수많은 위장 신분 사이에서 자아를 잃고 방황한다.


공작이 거듭될수록 폭스는 폭탄 테러를 제압하는 드론 공습으로는 테러를 종식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찾은 해답은 화해였다. 그리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선 신뢰가 필요했다. 신뢰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데서 시작된다. 어느날 그녀는 폭탄 테러 첩보를 입수한 뒤 네팔로 떠난다. 테러 단체의 수장과 담판을 벌인 장소는 먼지 가득한 아파트였다. 그는 기침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폭스는 천식이냐고 묻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항상 들고 다니던 정향유를 꺼내 건넸다. 그맘때 아이들은 종종 천식을 앓았고 정향유는 폭스의 아이에게 잘 드는 약이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꽃잎을 몇 개 뜯어 폭스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몇 개를 더 뜯어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꽃잎은 기침에 쓰는 그 지역의 민간 약재였다. 둘 다 총과 폭탄을 들고 있지만 폭스도 남자도 결국 자기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두 부모의 행동은 무언의 공감으로 이어진다. 복수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 무고한 희생자들 속에 자신의 아이들도 포함될 수도 있다는 생각. 다음날 폭스는 신문을 통해 네팔에서 어떠한 테러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물론 폭스의 고백들에서 미화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원인을 따져보면, 테러를 막기 위해 미국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사실상 미국이 존재해 테러가 벌어진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다 이제는 그게 잘못임을 깨달았다는 히틀러의 고백을 우리는 잠자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컷 때려놓고 이제는 그게 부질없음을 깨달았다며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미국을 편견 없이 바라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깨달음과 변화의 의지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다. CIA를 관둔 폭스는 난민촌을 돌며 자신이 구상해온 화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언젠가 먼지 가득한 아파트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원수들이 동그랗게 앉아 서로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설령 이런 노력이 세계를 삽시간에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변화는 원래 그런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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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카노 시리즈
요시다 슈이치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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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특징은 작위적 구성과 빈약한 캐릭터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도 큰 관점에서 이와 같은 한계를 공유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케일이다. 주요 인물만 거론해도 신장 위구르 독립 무장 단체 수장 샤마르, 일본의 국회의원 이가라시, 한국의 정보부 요원 데이비드 김, 중국 국영 석유 회사 CNOX의 사원 지미 오하라, 홍콩 금융계의 거물 앤디 황, 중국 공산당 당무자 궈젠, 아시아의 인기 가수 이전펑,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보를 구석구석 움켜쥔 일본 사설 정보업체 AN의 다카노 가즈히코가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다카노가 몸 담고 있는 일본 정보회사 AN이다.


여기까지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게 분명하다. 이야기는 방대하지만 정작 내부를 들여다보면 빈 곳이 많다. 인물은 B급 영화에 등장하는 나쁜놈과 착한 놈, 수상한 놈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야기에 깊이 빠져 몰입하기엔 눈이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몰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이야기의 중심이 일본의 사설 정보 업체라는 점이다. 표면상 정밀한 첩보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제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안 따져볼 수가 없는데, 사실상 아시아에서 고립되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본이, 그것도 일개 사설 업체가, 위구르 무장 단체의 폭탄 테러를 막으려 하고 중국 공산당을 움직여 우주 태양광 사업을 이끌어간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황당한 것이다. 이는 마치 외계인의 침략을 맞은 지구 최후의 보루가 상하이인 것만큼(실제로 이런 영화가 있다)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일본인의 로망을 반영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섬에서 나와 대륙을 뛰놀고 싶은, 그 대륙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열망. 평화 헌법을 고쳐서라도 기어이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원하는 아베 신조와 비록 그 목적은 다르겠지만 비슷한 열망을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희망은 희망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 간격을 넘기에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나 크다.


그래도 장르 소설을 쓰는 아시아 작가 중에 이런 스케일을 엮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싶기는 하다. 일전에 SF 작가 배명훈의 에세이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는 한국 작가로서 SF 소설을 쓰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아직 로켓 발사 능력도 갖추지 못한 한국인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자기를 비롯한 수많은 SF 작가들이 그 일을 꾸준히 해왔고,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정도를 봤을 때 스스로 '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런 걸 볼 때 중요한 건 결과보다 과정인 것 같다. 이 소설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도 이 한 권을 끝으로 작가 생활을 마감한 게 아니잖은가? 비록 이번엔 원하는 성과를 충분히 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세계를 구축하는 덴 큰 토대가 됐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한 권의 소설로 모든 걸 평가하기보다 다음, 또 다음 소설을 읽으며 충분히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세상엔 읽을 책이 너무 많아, 언제 또 기회가 올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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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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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서 긴장을 만드는 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인물을 알고 있는 것과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를 모르는 상황 속에 놓는 것이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둘 모두 확실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야심한 시각 당신이 누군가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고 하자. 당신은 그의 얼굴이 낯익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 당신은 올라가야 할 층을 누른다. 같이 탄 남자는 자신의 층을 누르지 않는다. 문이 닫히자마자 당신은 그가 얼마 전 뉴스를 도배한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이 긴장을 만드는 첫 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는 좀 더 간단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태어나서 처음 본 모텔이다. 당신은 나체로 누워 있고 옆에는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침대에 토사물을 쏟아 놓은 채 엎드려 있다. 온 몸에 흐릿한 핏자국이 새겨져 있고 바닥엔 찢긴 옷가지들이 널려 있다. 머리는 몽롱하다. 지난밤의 기억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순간 쾅쾅, 누군가 모텔의 문을 두드린다.


편혜영 이야기의 매력은 어둡고, 축축한 긴장이고 이는 모두 미지에서 나온다. 현재 활동중인 소설가 중 이 분야에서 그녀만큼 압도적인 족적을 보여주는 작가는 없다. '호러 퀸'이나 '엽기의 여왕' 이라는 수식은 오히려 그녀에게 누가 되는 찬사라고 생각한다. 자극적 단어로만 포장하기에 그녀가 그리는 어둠은 깊고 풍성하다. 공포는 깜짝 놀라게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피부에 달라붙어 부단히 파고든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감히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혹은 온 힘을 다해 무시하고 있는 미지의 공포를 향해 자꾸만 고개를 돌려세운다. 마음속 깊은 곳에 굳게 닫힌 철문이 있는데, 그 철문을 누군가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미지를 구현하는 방식이 <저녁의 구애>에서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든다. 내가 읽어온 그녀의 최근작들은 구체적인 사건과 음모 또는 불가해한 상황을 통해 미지의 공포를 형상해왔다. <저녁의 구애>는 그 자리를 '일상'이 차지한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반복되는 하루. 너무나 익숙해 그 차이를 느낄 수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작가는 우리가 이 일상의 공포를 잘 모르고 있다는 듯 그것을 불가해한 것으로 규정하고 낯설게 만들기를 시도한다. 따지고보면 우리가 숲 속에서 길을 잃는 이유가 사실 사방이 똑같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 아닌가? 길을 잃었다는 공포는 똑같은 시간이 줄지어 늘어선 우리 일상에서야 말로 가장 강력히 드러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저녁의 구애>는 편혜영 월드이 '낮' 버전이 아닐까 싶다. 다른 작품이나 여기서나 인물을 위협하는 건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다. 하지만 '밤' 버전에서 우리는 그게 축축하고, 어둡고, 불길한, 그래서 필시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거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낮' 버전에선 그게 무엇이냐를 떠나 심지어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지 조차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저녁의 구애>에 실린 단편들이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편혜영의 이야기에 비해 긴장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물론 해석하는 능력에 따라 '낮' 버전이 '밤' 버전 보다 더 큰 공포를 자아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잡은 앵글에선 그저 망망대해를 떠가는 보트 한대가 보일 뿐이지만 시야가 넓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트 뒤에서 일고 있는 산더미 같은 해일이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그녀의 이야기에서 좋아하는 건 끈적하고 어두운 뭔가가 눈 앞에서 꿈틀대는 것이다. 손에 잡힐 듯이 가득한 불길함. 아무래도 <저녁의 구애>는 그런 요소들이 훨씬 추상적으로 표현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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