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카노 시리즈
요시다 슈이치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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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특징은 작위적 구성과 빈약한 캐릭터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도 큰 관점에서 이와 같은 한계를 공유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케일이다. 주요 인물만 거론해도 신장 위구르 독립 무장 단체 수장 샤마르, 일본의 국회의원 이가라시, 한국의 정보부 요원 데이비드 김, 중국 국영 석유 회사 CNOX의 사원 지미 오하라, 홍콩 금융계의 거물 앤디 황, 중국 공산당 당무자 궈젠, 아시아의 인기 가수 이전펑,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보를 구석구석 움켜쥔 일본 사설 정보업체 AN의 다카노 가즈히코가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다카노가 몸 담고 있는 일본 정보회사 AN이다.


여기까지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게 분명하다. 이야기는 방대하지만 정작 내부를 들여다보면 빈 곳이 많다. 인물은 B급 영화에 등장하는 나쁜놈과 착한 놈, 수상한 놈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야기에 깊이 빠져 몰입하기엔 눈이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몰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이야기의 중심이 일본의 사설 정보 업체라는 점이다. 표면상 정밀한 첩보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제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안 따져볼 수가 없는데, 사실상 아시아에서 고립되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본이, 그것도 일개 사설 업체가, 위구르 무장 단체의 폭탄 테러를 막으려 하고 중국 공산당을 움직여 우주 태양광 사업을 이끌어간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황당한 것이다. 이는 마치 외계인의 침략을 맞은 지구 최후의 보루가 상하이인 것만큼(실제로 이런 영화가 있다)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일본인의 로망을 반영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섬에서 나와 대륙을 뛰놀고 싶은, 그 대륙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열망. 평화 헌법을 고쳐서라도 기어이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원하는 아베 신조와 비록 그 목적은 다르겠지만 비슷한 열망을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희망은 희망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 간격을 넘기에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나 크다.


그래도 장르 소설을 쓰는 아시아 작가 중에 이런 스케일을 엮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싶기는 하다. 일전에 SF 작가 배명훈의 에세이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는 한국 작가로서 SF 소설을 쓰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아직 로켓 발사 능력도 갖추지 못한 한국인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자기를 비롯한 수많은 SF 작가들이 그 일을 꾸준히 해왔고,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정도를 봤을 때 스스로 '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런 걸 볼 때 중요한 건 결과보다 과정인 것 같다. 이 소설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도 이 한 권을 끝으로 작가 생활을 마감한 게 아니잖은가? 비록 이번엔 원하는 성과를 충분히 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세계를 구축하는 덴 큰 토대가 됐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한 권의 소설로 모든 걸 평가하기보다 다음, 또 다음 소설을 읽으며 충분히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세상엔 읽을 책이 너무 많아, 언제 또 기회가 올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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