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아마릴리스 폭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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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비밀 첩보원의 일상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언더커버>를 읽자. 법이 허용하는 한에서, 이 책은 엘리트 첩보원이 경험한 훈련, 임무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전략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형식은 에세이지만 내용은 소설을 방불케 한다. 영화에서만 보던 비밀 접선과 암약하는 무기 밀매상, 테러 단체의 요인들이 바로 우리 옆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모를 스릴이 느껴진다. 허름한 건물 2층에 버젓이 차려놓은 무역회사가 실은 정보부의 공작 본부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은 뒤로 나는 주변의 것들에 한층 의심 어린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다.


저자 아마릴리스 폭스는 어린 시절 친했던 친구를 테러로 잃으며 세계의 위협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른이 된 후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을 도우며 아웅산 수치 여사의 비밀 인터뷰 영상을 BBC에 전달할 정도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깊이 개입한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와 9.11 테러를 목격하고, 세상에 난무하는 폭력을 막기위해 테러를 연구하는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거기서 써낸 논문 하나가 CIA의 눈에 띈다.


처음엔 사무직이 되어 입수한 정보를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오래지 않아 CIA 요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될 수 있는 공작원으로 발탁된다. 훈련 성적이 우수했던 그녀에게 배정된 지역은 당연히도 '중동' 이었다. 그녀는 테러의 심장부에서 무기 밀매상을 회유하고 테러 단체 수장들과 담판을 벌인다.


흥미진진한 영화 시나리오 같지만 사실 이 책은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CIA 공작원으로서 겪어야 하는 심리적 압박과 도덕적 딜레마를 밀도 높게 그려낸다. 내 아이의 안전을 위해 시작한 일이 다른 나라의 무고한 아이들을 죽일 수도 있는 현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속여야만 하는 비밀 첩보원의 일상.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로 채워진 '나'는 수많은 위장 신분 사이에서 자아를 잃고 방황한다.


공작이 거듭될수록 폭스는 폭탄 테러를 제압하는 드론 공습으로는 테러를 종식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찾은 해답은 화해였다. 그리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선 신뢰가 필요했다. 신뢰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데서 시작된다. 어느날 그녀는 폭탄 테러 첩보를 입수한 뒤 네팔로 떠난다. 테러 단체의 수장과 담판을 벌인 장소는 먼지 가득한 아파트였다. 그는 기침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폭스는 천식이냐고 묻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항상 들고 다니던 정향유를 꺼내 건넸다. 그맘때 아이들은 종종 천식을 앓았고 정향유는 폭스의 아이에게 잘 드는 약이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꽃잎을 몇 개 뜯어 폭스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몇 개를 더 뜯어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꽃잎은 기침에 쓰는 그 지역의 민간 약재였다. 둘 다 총과 폭탄을 들고 있지만 폭스도 남자도 결국 자기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두 부모의 행동은 무언의 공감으로 이어진다. 복수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 무고한 희생자들 속에 자신의 아이들도 포함될 수도 있다는 생각. 다음날 폭스는 신문을 통해 네팔에서 어떠한 테러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물론 폭스의 고백들에서 미화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원인을 따져보면, 테러를 막기 위해 미국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사실상 미국이 존재해 테러가 벌어진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다 이제는 그게 잘못임을 깨달았다는 히틀러의 고백을 우리는 잠자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컷 때려놓고 이제는 그게 부질없음을 깨달았다며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미국을 편견 없이 바라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깨달음과 변화의 의지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다. CIA를 관둔 폭스는 난민촌을 돌며 자신이 구상해온 화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언젠가 먼지 가득한 아파트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원수들이 동그랗게 앉아 서로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설령 이런 노력이 세계를 삽시간에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변화는 원래 그런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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