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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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어보면 유현준 교수가 왜 '알쓸신잡'의 쟁쟁한 입담들 사이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끝없이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는지 알게 된다. 건축은 재료를 쌓아 형태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것보다 왜 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근원을 밝히는데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근원을 탐구하는 사람에겐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건축으로 설명하는 빅히스토리다.


유현준 교수에 따르면 동서양의 공간 차이를 만든 결정적 요인은 바로 '강수량'이었다. 기준은 1,000 밀리미터. 이보다 많이 오는 곳에선 벼를, 그보다 적은 곳에선 밀 농사를 짓게 된다. 그런데 밀과 벼는 재배 방식에 큰 차이가 있어 이를 행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에도 큰 차이를 만든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서양 문화를 '개인주의', 동양 문화를 '집단주의'로 구분하는데 그런 가치관이 형성된 이유는 단순하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선 많은 물을 다뤄야 하기에 다 같이 모여 치수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보, 저수지, 관개수로 등) 진행하기 때문이다. 물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자기 논에 물을 댄 뒤 다시 길을 터 다른 사람의 땅으로 보내줘야 한다. 괜히 아전인수라는(자기 밭에만 물을 대는 행위를 탓하는 말) 말이 생긴 게 아닌 것인가.


반면 밀농사는 파종법부터 다르다. 밀은 혼자서도 충분히 씨를 뿌릴 수 있다. 밀은 맨땅에서 자라고 물이 많이 필요 없으며 집중호우 없이 일 년 내내 골고루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관개수로를 내거나 기타 토목공사를 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같이 모 여살 필요도 없어 개인주의적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벼농사 지역에 비해 밀농사 지역의 이혼율이 높은 것도, 대자연에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유럽의 시골과 여러 집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룬 동양의 시골 풍경 차이도 이러한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는 공간의 모습도 달라진다. 서양 건축의 중심은 벽돌로 쌓은 벽이다. 영역을 구분하기도 쉽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강수량이 많지 않기에 지붕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적당히 경사만 내서 얹어주면 그만이다. 반면 동양에선 여름철에 집중호우가 내려 땅이 물러지기 때문에 무거운 벽돌로 집을 지으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가벼운 목재가 주재료가 되고 방수를 위해 땅에 닿는 면에는 주춧돌을 놓는다. 기둥에 떨어지는 비를 막기 위해 처마도 길게 낼 수밖에 없다.


유럽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서양의 건축물들은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한데 왜 우리의 건축물들은 그렇지 못한 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 역시 벽에 있다. 벽으로 만든 집은 가로로 큰 창을 내면 무너지므로 좁은 창을 세로로 낼 수밖에 없다. 유리가 발명된 것도 한참 뒤라서 창문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닫아 놓으면 바깥의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열어둔다 하더라도 작게 보인다. 그러니 밖에서 건물을 보는 데 중점을 두고 디자인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 건축물은 비를 잘 처리하기 위한 지붕과 그걸 이고 있는 기둥이 중심이다. 기둥 구조는 답답한 벽을 만들어 지붕을 받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니 기둥과 기둥 사이에 뻥 뚫린 개방감을 갖게 된다. 시골집의 대청마루를 떠올려보자. 도대체 이것이 집의 내부인지, 아니면 외부인지 모호한 경계를 이룰 만큼 열려있지 않은가? 비가 오는 날에도 긴 처마 탓에 마루에 앉아 밖을 볼 수 있고 방에서 창을 열어도 비가 들이치지 않는다. 이처럼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동양의 건축물은 안에서 밖이 어떻게 보이냐가 더 중요한 건축 요소가 된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공간은 압축되고 문명의 차이는 줄어든다. 오늘날 전 세계가 서로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는 이유는 발달된 미디어 때문에 압축된 공간이 거의 0에 가깝게 수렴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류는 증기선, 기차,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을 발명했고 이로 인해 동서양 문화의 이종교배는 가속화됐다. 건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히 철근콘크리트의 발명으로 건축계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자유를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동서양 건축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한 위대한 건축가들이 탄생한다. 미스 반 데에 로에, 르 코르뷔지에, 루이스 칸, 안도 다다오. <공간이 만든 공간>은 무려 3개의 장을 할애해 이들이 꽃피운 모더니즘 건축의 탄생을 소개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등에서 익숙히 보아온 개념으로 구성되지만 거기에 '건축'을 더함으로써 내용을 훨씬 미시적으로 만든다. 빅히스토리의 매력은 논리적 상상력과 추론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는데서 오는 쾌감에 있다. 하지만 그 주인공은 지리나 기후, 또는 다 무너진 고대 유적같이 우리가 눈에 그리기 어려운 것들이다. <공간이 만든 공간>은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건축물들이 그 공백을 메운다. 심지어 그중엔 우리가 매일 오가며 보는 한국의 건축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빅히스토리가 어렵게만 느껴졌던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간이 만든 공간>은 그 큰 상상력들에 비해 훨씬 손에 잡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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