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지도자였던 시절의 푸틴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첫 임기였던 2000년대 초반에 푸틴은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지도자였다. 미국과 친분을 쌓으려 노력하며 러시아를 나토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미국 뉴욕에서 테러가 일어났을때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이가 바로 푸틴이었다. 미국이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을 무조건 지지한다면서 러시아 영공을 미군에게 곧바로 열어 줬고, 미군이 러시아와 키르기스스탄의 군 공항을 이용하도록 도왔다.
러시아 국민들의 삶은 거시적으로 보든, 미시적으로보든 이전보다 훨씬 개선되기 시작했다. 푸틴 대통령 첫 임기 때인 2000~2004년 러시아 국내 총생산(GDP) 성장률은연간 평균 7퍼센트대였고, 빈곤률은 절반 이하로 내려갔다.
러시아의 경제 규모는 2000년에 전 세계 23위에 불과했지만, 2007년에는 11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 P141

2004년 대통령 선거. 푸틴의 재선은 기정사실이었다.
실제로 푸틴은 71.3퍼센트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위였던 공산당 후보는 13.6퍼센트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비록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흠집들이 있었지만 국내외언론은 러시아의 선거 과정이 나름 투명했다고 평가했다.
푸틴이 반서감정이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두 번째 임기 때였다. 2007년에 독일 뮌헨에서 열린 유럽 안보회의에서 푸틴은 처음으로 미국에 맞섰다. - P143

 그는 ‘세계의 경찰관‘을 자처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미국이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부하 직원을 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푸틴의 비판 연설에는 배경이 있었다. 2002년 미국이 탄도탄요격미사일협정(Anti-Ballistic Missile Treaty)을 사전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파기한데다, 1990년대에 약속한 나토의 동진 금지 약속을 어기고, 구소련이었던 발트 3개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비롯해 폴란드와 체코 등 동유럽 국가의 나토 가입을 적극 찬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침공을 추진했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위치한 나라들의 국내정치에 개입해 소위 ‘아랍의 봄‘을 부추겼다고 보았다.
푸틴의 미국 비판은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를 환영했다. 강대국 소련이 붕괴되면서 1990년대 내내 국제 사회에서 온갖 망신과 굴욕을 당했던 러시아국민들은 이제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 수 있게 됐다.
- P144

메드베데프는 2008년 5월 대통령 취임식을 치르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푸틴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대통령 메드베데프의 첫 번째 지시였다.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실제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2008년 8월 조지아가 남오세티야를 무력으로 침범해 합병하려고 하자, 이에 대응한 사람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아니라 푸틴 총리였다. 2010년대 초반에 미군이 시리아에 진입했을 때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미군을 지지했다. 하지만 몇 시간도 안 돼 푸틴 총리는 대통령의 말을 뒤집고 미국을 비판했다. 2000년부터 매년 대국민 소통방송은 대통령이 했지만,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총리가 했다. 메드베데프에게는 ‘주머니 대통령(pocket president)‘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011년 러시아는 대단히 큰 정치적인 위기에 휩싸였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에서 친푸틴계인 ‘통합러시아당‘이 승리하자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곳곳에서 투표 부정행위가 발각되어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많은 국민이 스마트폰을 사용한 시대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듬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혹시 푸틴이 다시 출마하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 남오세티아는 러시아와 조지아 북부지역이 있는 자치공화국으로 친러시아파인 남오세티아와 친미파가 대통령인 조지아의 분쟁에 러시아가 끼어들어 조지아를 공격. 프랑스의 중재로 마무리. 2022년 남오세티아는 투표를 거쳐 러시아로의 합병을 결정할 예정 - P147

2013년 러시아의 이웃 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뉴코비치가 민간인 대량 학살 혐의로 형사 입건 위기에 처하자 해외로 도피했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문제는 이 정부가 반(反)러시아 성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 연합 및 나토 가입, 미국과의친선 등을 발표했다. 소련 시절부터 크림반도에 항상 주둔하던 러시아 해군 기지의 철수를 명령했고, 그 자리에 나토의 군사 기지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방송이나 학교 등에서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했다. 상황은 매우 빨리 악화됐고, 두 나라는 단교 단계에까지 갈 뻔했다.
- P148

푸틴 대통령은 2014년 3월 크림반도에 소속 부대 마크를 뗀 러시아군을 진입시키고, 크림반도 독립 여부를 묻는국민 투표 실시를 선포했다.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군사 개입을 부인하면서 서방 세계가 개입을 미루는 사이, 속전속결로 이뤄진 투표에서 크림반도 국민 90퍼센트 이상이 러시아에 속하기를 바랐다. 푸틴은 곧바로 합병 절차를 진행하고, 공식적으로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병합했다.
이 사건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을 비롯한모든 서방 국가들이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고는 러시아정치와 경제 분야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국제 무대에서 러시아가 하루아침에 외톨이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계속 하락하던 푸틴의 지지율이 쭉쭉 치솟았다. 2013년 말, 30퍼센트대로 하락했던 지지율은 2014년 3월과 4월에 89퍼센트까지 치솟았다. 2000년푸틴이 처음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보다 더 높은 지지율이었다. ‘강한 러시아가 미국의 코를 주먹으로 친 사건‘은 러시아 국내 분위기를 축제로 만들었다.
푸틴은 지지율을 의식한 듯 강한 모습을 국민들에게몇 번 더 보여 줬다. 2015년 러시아군을 시리아로 보내고미국이 이기지 못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선언해 지지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2016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해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 P150

러시아 언론은 " 이제 러시아는 무릎에서 일어서고 있다"는 표현을 써 가며, 러시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위대한 나라가됐다는, 친정부 성향의 립 서비스를 아끼지 않았다.
세계와 밀고 당기는 게임에 너무 몰두했을까. 푸틴이러시아 내정에 신경을 덜 쓰는 게 점점 명확해져 갔다. 아니, 국내 지지율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00년부터 연금 수령 나이를 절대 올리지 않겠다고 했던 정부는 갑작스레 연금 수령 나이를 올렸다. 또한 쓰나미처럼 몰려온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 푸틴은 감염병을피해 벙커에 틀어박혔다. 그러고는 코로나19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팬데믹 대응은 각 지자체별로 이루어졌고 결국 셧다운까지 이어졌다. 레바다기관 조사에 따르면, 2020년 5월 푸틴의 지지율은 25퍼센트까지 떨어졌다. 그 이전에 푸틴의 가장 낮은 지지율은 크림반도 점령 이전에 기록된 30퍼센트였다. 반민주주의적 행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반정부 언론에 압력을 가하거나 폐간시켰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인터넷을 통제하는가 하면, 반정부 인사 살해를 시도하는 등 독재적인 성격을 보여 줬다. 또한 2020년 7월에는 자신의 다섯 번째 대통령 출마를 가능케 할 개헌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여기서도 부정행위, 결과 조작, 투표 절차위반 등이 발각됐다. - P151

러시아는 독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법률까지 만들었다. ‘권력비판금지법‘이다. 유신 시절 한국의 ‘국가모독죄‘를 연상시키는 법이 2019년 3월에 러시아에서 만들어진것이다. 이 법은 대중들에게 겁을 주려고 만든 법이라서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 법으로사람들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표면상의 언론의 자유조차 사라져버렸다.
정부에서는 해외 대기업의 로비를 막겠다며 만든 ‘해외 에이전트 금지법‘을 만들었다. 이름만 보면 자본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완벽하게 망가뜨리는 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언론이 해외에서 재정 지원을 받을 경우 보도 때마다 후원받은 사실을 알리고, 이 기사를 읽지 말라는 메시지를 넣어야 한다. 게다가 해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면 아예 러시아 내에서는 광고 수주가 금지되고 국가 지원도 끊긴다. 해외 거주 러시아인이 언론사를 후원해도 해외로부터지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이 법은 인터넷 언론, 심지어 일반인에게도 적용된다.
해외로부터 어떤 명목으로든 100원이라도 입금을 받으면 정부가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아마존에서 물건을 구매해도 이 법의 적용을 받는다. 물건이 해외에서 들어오면, 내가 구매를 했든 아니든 해외에서 지원을 받는 것으로 간주된다. - P157


따라서 나의 SNS도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즉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법이지만 이것이지금 러시아의 현실이다. 누구든 마음대로 재갈을 물릴 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시절의 완전한 독재와 1990년대 생지옥과 같은 자유를 경험한 러시아 국민은 작금의이 상황을 최고의 상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보수적인러시아 어르신들은 정부가 언론을 박살내든 정치인을 탄압하든 한 가지만 생각한다. ‘어게인 1991‘은 절대 안 된다고말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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Умом - Россию не понять‘
Умом - Россию не понять
Аршином общим не измерить:У ней особенная стать -В Россию надо только верить.

-Detop Thorue, 1866

‘머리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
머리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 평범한 자로는 러시아를 잴 수 없다.
러시아는 그 자체로 특별하므로 그저 러시아에게 의지해야 한다.

-표도르 튜체프, 1866

한국에서 러시아에 대해 설명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세계관의 차이다. 한국과 러시아는 그야말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 단일 민족, 단일 국가, 단일 언어를가지고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강대국 틈에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남은 대한민국의 세계관과, 거대한 영토와 자원으로 유럽을 위협했던 제국, 한때 미국과 패권을 겨루던 강대국, 다민족·다문화 국가 러시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공통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질적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관계인 개인 관계나 가족 관계부터 다르다. 이런낯선 관계와 문화가 쌓여 러시아와 한국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전혀 다른 세계가 됐다. - P14

뉴스 끝머리에 나오는 일기 예보를 볼 때면 한국이러시아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러시아의 일기 예보에 나오는 지도는 러시아를 한 화면에 다 담을 수 없다. 기상 캐스터는 구글 지도처럼 디자인된 지구본 모양 지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주요 도시의 현재 시간과 날씨를 짚어 준다. 러시아의 일기 예보에 익숙해 있던 나는 처음으로한국의 일기 예보를 볼 때, 한 화면에 나라 전체가 다 나오는 장면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언제 다른 지역이 나오나 보고 있으면 그대로 뉴스가 끝나 버렸다.  - P24

외국인을 혐오하는 정서는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된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2년부터 1991년까지 존재했던 소련에서는 다인종·다민족 국가로서 정체성이 확고했다.
외국과의 교류도 적고 사회 내에서 경쟁도 심하지 않았다.
현재 40대 이상의 러시아 국민들은 외모가 확연히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다 같은 소련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저 출신지가 따를 뿐,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여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소련 해체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해체된 구소련 소속국가 중 그나마 잘사는 나라가 러시아였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나라인 중앙아시아 국가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러 러시아로 넘어왔다. 러시아인들은 중앙아시아 출신 외국인들과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됐다. 여기에 러시아와는 확연히 다른 문화가 혐오 정서에 불을 지폈다. - P47

러시아인들이 왜 이렇게 무뚝뚝하고 잘 안 웃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러시아 속담을 꼭 알려 준다. ‘이유 없는 웃음은정신병자의 증상이다. (CMex Ges puUUHD MP3HAKAYPALMHL.)6e3 mpuunHblпризнак дурачины.)‘
조금 과한 말 같지만 러시아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속담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웃음=진심‘이다. 웃음은 항상 진실한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웃어도 되지만 별 이유 없이 웃으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본다. 웃음은 실용적인 감정 표현 이다.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방법인 것이다. 마음이 불편한데도 웃으면서 말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 P80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방법인 것이다. 마음이 불편한데도 웃으면서 말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웃음이 마음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리, 예를들어 공항 출입국 관계자, 마트 판매원, 은행 직원처럼 일하는 내내 고객과 소통하는 이들은 웃음기를 쏙 빼고 상대를 대한다. 공항 출입국 관계자라면 매우 무뚝뚝한 태도로 외국인을 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내가 왜 외국인을 보고 웃어야 돼?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닌데? 내 친구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인데, 내가 왜 이 사람에게 내 마음의 일부를 줘야해?" 냉정하다 못해 무정하게 들릴 지경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웃음이 내 마음의 일부‘라는 점이다. 마음은 나의 소유이고, 이를 업무에 투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나는 러시아에서 일을 한 적이 없어서 주변 지인들을 통해 다시 확인했는데, 러시아인들이일할 때와 개인 시간일 때의 모습이 확연히 다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니 러시아에 가서 공항 출입국 관계자가, 마트 판매원이, 은행 직원이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무섭게 말을 해도 겁을 먹거나 기분 나빠할 필요가 전혀 없다. 상대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 P81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러시아인이
‘무뚝뚝해 보이는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20세기 러시아의 역사는 고난과 공포 그 자체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전역은 최악의 내전 상태에 빠졌다.
1930년대에는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탄압을 받았다. 칼끝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공포가 일상이 됐다. 194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무려 3,000만 명이 희생됐다. 1960년대에는 냉전이 절정에 달했고 경제 위기로 인한 생필품 부족으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푹 가라앉았다. 1980년대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은 혼란과 빈곤을 불러왔고, 소련은 무너져 버렸다. 1990년대에 러시아가 처음으로 경험한 민주주의는 혼돈 그 자체였다. 러시아의 정치와경제,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고 여유를 찾을 수 있게된 때는 2000년대 이후다. 간단히 살펴봐도 러시아의 역사는 양강 체제의 일원이었다는 허울 좋은 한 조각의 영광말고는 모조리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무리 봐도 웃을일이 없었다.
소련의 권위주의 정권은 러시아인의 얼굴에서 웃음을날려 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절에는 웃는 얼굴을 곱지 않게 봤다. ‘웃어? 뭐가 그리 행복하지?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이런 분위기에 혼자 싱글벙글하고 있으면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 P84


내가 태어난 1982년, 1964년부터 18년 동안 소련공산당 주석으로 재임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JICHILEipexHea, 1906~1982)가 사망하고, 유리 안드로포프(OputAipomon, 1914~1984)가 주석이 되던 해였다. 역사학자들은 이Андропов,
즈음부터 소련이 망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공식적으로 소련이 사라진 해는 1991년이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다. 환자가 사망한 후 의사가 사망진단을 하는 것처럼, 1991년에는 러시아 · 벨라루스 • 우크라이나지도자들이 모여서 소련에 사망 선고를 내린 것뿐이었다.
실질적인 몰락은 소련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7년에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선언하면서부터였다. 엄마가 나를 유치원에 보내기 1년 전이었다.
소련 초등학생들은 ‘피오네르(moRep)‘라는 단체에 가입해야 했다. 영어의 ‘개척자(pioneer)‘에서 이름을 따온 이 단체는 소련판 보이 스카우트였다. - P103

세상은 확실히 변했다. 우리 학년부터 학교 수업 내용이 바뀌기 시작했다. 소련 시절의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산주의 입문과 철학, 레닌 및 스탈린의 명언, 공산당회의 기록 같은 이데올로기 관련 수업이 필수 과목이었다.
하지만 우리 때부터는 70년간의 소련 역사를 비판적으로바라보는 수업으로 확 바뀌었다. 바로 직전해까지 언급 자체가 금기였던 소련의 만행, 스탈린에 대한 비판, 공산주의의 실패 원인을 배웠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과 탄압 정책, 정치범 수용소 운영, 스탈린과 히틀러가 야합한 독소 불가침 조약 같은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련의 치부가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했다.
불시착같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소련에서 러시아로 국가명뿐만 아니라 체제까지 바뀐 1990년대는 자유와 혼돈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여태까지 누려 보지 못한 자유를 만끽했다. 신문과 방송의 검열이 사라져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이동의 자유가 허락되어소련 시절에는 거의 다른 나라 취급을 받을 정도로 잘사는곳이었던 모스크바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부 기관의통제 없이 개인 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다. 현재 러시아의 유명 대기업들은 대부분 1990년대에 만들어졌다.  - P106

국경통제가 사라져 외국 제품의 수입이 허락됐고, 금지됐던 물건을 동네 마트에서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1990년대는 야생 자본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러시아국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무엇인지도 몰랐던 시장 경제를접했다. 시발점은 화폐가 바뀌는 것이었다. 당시 엄마는 우체국에서 근무했다. 우체국은 공기업이라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바로 다음날 아침에 명령서가 내려 왔다. 이제 소련 화폐는 사용할 수없고, 오늘 밤 12시부터 새롭게 발행한 러시아 루블만 사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새벽에 새로 찍은 화폐를 각도시의 우체국에 배달했다. 방송에서는 소련 화폐를 가지고 우체국으로 가면 새 화폐로 환전해 주겠다고 알렸다. 당황한 시민들은 좀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체국으로 몰려들었다. 1억 4,000만 명이 한꺼번에 도시마다 몇 군데 있지도 않은 우체국으로 몰려가는 그림을 상상해 보라.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러시아 우체국 직원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건장한 남성들이 빨리 환전해 주지 않는다며 분노에 휩싸여서 삽을 들어 유리창을 깨고 고함을 질러댔다. 단순히 사람이 갑자기 몰려서 혼란이 생긴 것만은 아니었다. 조폐창에서 우체국까지 배송할 트럭이 턱없이 부족했고, 운전할사람도 많지 않았다. 전 국민이 일시에 모든 돈을 환전할 시설과 시스템도 없었다. 당시에 죽은 이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디록하지 않았다. 너무 많아서 였다. - P107


식료품도 턱없이 부족했다. 정부가 바뀌어서 관리 주체가 불분명해지자 제품의 생산 및 공급 과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돈이 있어도 아무것도 살 수 없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러시아산 식료품이 하나도 없었다. 우유, 초콜릿, 통조림, 과자,
밀가루, 고기 등은 모두 외국산이었다. 러시아에서 생산하는야채와 과일 정도만 암시장에서 구할 수 있었다.
식료품을 제공받을 곳은 해외밖에 없었다. 미국은 러시아의 생명 줄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부시의 다리‘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미국에서 수입되는 닭다리를 일컫는말이었다. 미국산 닭다리는 당시 러시아에서 구할 수 있는유일한 고기였다. 이 닭다리는 누구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아니었다. 동사무소에서 식권을 받은 사람만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배급받을 수 있었다. 사람은 많고 고기는 적다 보니 며칠 동안 줄을 서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엄마 말씀으로는 어린 나를 데리고 줄을 서야 했다고 한다. 두 명이 줄을 서야 2인분(닭다리 4개)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 P109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이행은 불시착하는 비행기 같았다. 1990년대는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러시아 사회의 혼란, 무질서, 높은 범죄율, 극도로 부족한 식료품, 급여 체불, 연이어 터지는 파업 등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돌이켜 보면, 그때가새로 태어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것 같다.
무능한 정부, 각자도생(各自圖生)할 수밖에 없는 일반 시민들, 체첸 전쟁으로 터진 민족 갈등. 결코 살기 좋은 시기가아니었다. - P110

러시아 안의 다른 나라,모스크바

모스크바는 소련 시절부터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모든 특혜와 인프라가 모스크바에 집중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를 러시아의 일부로 생각하지않는 경향이 있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이런 말로 모스크바를
표현하기도 한다. "모스크바의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라기보다는 미국 대도시와 비슷하다. 러시아의 다른 지역과의 격차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 간의 격차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모스크바 사람들은 "모스크바 밖에도 삶이 존재하는 거야?"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모스크바도 러시아의 일부이므로 상당 부분 낙후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큰 착각이다. 모스크바는 한국 - P112

2021년 러시아 최대 설문 조사 기관인 레바다 센터(LevadaCenter)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중
"소련 해체를 후회합니까"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놀라운결과가 나왔다. 러시아 국민의 63퍼센트가 "소련 해체를 후회한다"고 대답했다. 사회주의의 폐해를 조금이나마 겪어봤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인간의 기본 권리를 박탈했던 소련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러시아 밖의 사람들이 보면 소련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도록 의도적으로 문항을 설계했거나, 아예 조사 자체를 조작했다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 P115

사후적 해석이지만 현재 푸틴을 지지하는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가 미국에 나라를 팔아먹을 작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고르바초프의 대명사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기존 시스템을 파괴한 뒤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세우자는 의미였는데, 고르바초프의 아무 대책 없는 개혁과 개방은 경제와 사회질서를 붕괴시키는 결과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본다. 소련과 사회주의가 아무리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선택은 나라를 미국에 헌납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에 맞섰던 인물인 옐친이 러시아의 초대대통령이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 P118

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정부가 이전 체제에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무엇을 하든 소련 시절과 달라야 한다는 듯 미국을 우러러봤다. 옐친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과 친목을 과시했다. 둘이 낚시를 하거나, 즐겁게 춤을 추며 안고 안기는 모습이 뉴스에 노출됐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리스본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공간‘이라는말이 유행이었다.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포르투갈의수도 리스본부터 러시아의 맨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제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통일된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러시아 시장은 아무런 제한 없이 외국 자본에 개방됐다. 법이나 규제를 최대한 완화해서 미국보다 사업하기 더 편한 환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옐친 대통령이 기대했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세금 장벽이나 규제가 없어져서 외국 자본이 러시아 시장에 대거 들어온 바람에 러시아 기업들은 완전히망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시장을 경험한 적도 없고 자본도 없는 상황에서 돈과 노하우가 넘쳐나는 미국과 유럽기업들과 어떻게 맞설 수 있겠는가.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까지 모두 망하자 러시아정부는 세금을 제대로 거둘 수 없었다. 나라의 빚은 천문학적인 속도로 증가했다. 공무원들이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우체국에서 일했던 우리 엄마도 7개월 동안 월급을 못 받은 적이 있었다. - P121


이런 상황은 1990년대 중반 절정에 달했다가 1990년대말에야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사회 혼란이 가라앉았고,
러시아산 식료품, 가구, 생활용품 등이 서서히 마트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소련의 흔적이 희미해질 무렵, 새로운 러시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문제들이 겹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생 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다. 불법 또는 탈법적인 방법으로 국가 재산을 사유화해서 하루아침에 많은 부를 갖게 된 옐친 대통령 측근들,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효과가 사라진 개혁들, 정치 세력들의 투쟁 때문에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하락한 사회 구조, 말로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겠다면서 실제로는 비리를 저지르고 국가 예산을 횡령하기 바쁜 정치인들. 러시아 국민들의 머릿속에 ‘민주주의‘와 ‘비리와 부패‘는 동의어였다.
- P123

혼란은 푸틴이 정권을 잡고 나서야 조금씩 나아지기시작했다. 여기에 2000년대 초중반은 세계 경제가 호황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특히 석유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급격히 올랐다. 산유국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석유 판매가 러시아 GDP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였다.
유가 상승 덕분에 러시아는 하루아침에 아랍에미리트(UAE)같은 세계 최대 산유국과 엇비슷한 수준의 돈을 벌어들이게 됐다.
2000년대 러시아 경제는 역사상 최고의 호시절을 보냈다. 정치인들이 국가 예산을 아무리 횡령해도 돈이 넘쳐나서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금요일 밤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스키를 타다가, 일요일 밤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는 일상. 이게 모스크바 시민의 루틴이 됐다. 루이비통,구찌, 페라가모, 돌체앤가바나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는 모스크바에서 지점을 열기 위해 줄을 섰고, 미쉐린 가이드는 모스크바의 유명 레스토랑에 별점을 쏘기 바빴다.
러시아식 민주주의가 탄생한 배경러시아가 부유해진 이후, 그러니까 2010년대에 들어서자
‘주체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 P125

러시아는 문화도, 역사도, 경제도, 사회도 다른 세계와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 힘으로 새로운 체제, 즉 ‘주체 민주주의‘를 세우자." 언론은 1990년대의 혼란과 현재를 비교하면서 현 정부가 어떤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를 ‘카오스‘와 연결했다. 국영 방송은
"1990년대와 같은 카오스를 다시 원하세요? 지금은 이렇게잘살고 있는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게 결국 잘못된 거예요. 현 정부가 만든 이 새로운 체제가 러시아에 가장 잘 맞아요"라고 선동했다. 그러고는 과거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13년 푸틴 대통령은 국회 앞 연설에서 외국에서 러시아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허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러시아 역사 교육에 문제가 있다며 올바른 역사교육은 국가만이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존재하던 수많은 역사 교과서를 폐지하고, 국가가 만든 단 하나의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자고 했다.
처음에는 러시아 시민 단체와 대학 교수 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다시 소련 시절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했다. 반발이 격해지자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철회를 발표하고, 한 발자국 물러서는 듯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의 뜻에 부합하는 교과서에 ‘국가 추천‘이라는 딱지를 붙여 우회적으로 ‘국가 공인 교과서‘를 만들었다. - P126

그러고는 초등학교, 중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립학교에서 ‘국가 추천‘ 교과서를 사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국가공인 교과서‘ 사용이 국립 학교에서 어느 정도 이뤄지자, 이번에는 국가 지원을 받는 사립 학교에서도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그 결과 현재 러시아 학생들이 배우는 소련의 역사는 내가 학교를 다닐 때 배웠던 내용과 다소 다르다. 소련 시절의 만행이 누락됐고, 그 시절과 체제를 찬양하며, 논쟁적인부분은 소련에 유리하게 해석한다. 설문 조사 기관 레바다센터는 5년마다 ‘러시아 역사 속 최고 인물‘이라는 주제로설문 조사를 실시하는데, 2021년 5월에 발표한 결과를 보면 1위가 스탈린(39퍼센트)이었다. 2위는 레닌(30퍼센트)이었고,
푸틴은 5위(15퍼센트)였다. 더 놀라운 것은 스탈린이 2012년에도 1위(42퍼센트), 2017년에도 1위 (38퍼센트)를 차지했다는것이다.
스탈린은 소련 시절에도 큰 비판을 받은 지도자다. 그가 1953년에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공산당 주석이되자 전임자였던 스탈린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치명적인 실수 등을 지적했다.
‘어쩔 수 없는 악이었지만 어쨌든 악은 악이다‘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평가는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 더욱 더 심해졌다
- P127

러시아 내에서 처음으로 ‘독재자‘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푸틴은 첫 대통령 임기 때부터 스탈린에 대한 평가를 자제했다. 스탈린에 대한 질문을 항상 회피했고 직설적인 답을 내놓은 적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픈 역사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스탈린의 애국심,
나라를 위한 위대한 결단력은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스탈린을 ‘사악한 독재자‘가 아닌 ‘성과가 높은 매니저‘로 보는 여론이 형성됐다. 스탈린을 조심스럽게 방어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스탈린은 농업마저 후진적인 나라를 레닌에게 물려받았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이겼고,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최강대국으로 만든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래, 대숙청이나 사회에게 공포를 줬던 나치식 수용소를 만들어서 수백만 명을 학살한 지도자였지만, 나라를 시궁창에서 꺼내고 전 세계의 꼭대기에 자랑스럽게 설 수 있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잖아. 그 정도 희생은 감내해야지. 지금 우리가 사는 나라의기반은 스탈린이 깔아 준 거야." 현재 러시아에서는 이런입장으로 스탈린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생각보다 많다.
푸틴은 스탈린 시절의 소련을 찬양하면서 ‘질서‘라는 키워드를 뽑아냈다. 그는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 시절을
‘좋은 국가‘의 원형쯤으로 선동했다. 사회의 모든 면이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과 틀 안에서 잘 살아가면 큰 문제가 없었다고 말이다. - P129

또 개인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국가는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해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소련이 붕괴된 1990년대는 무질서 그 자체로 봤다. 소련 시절의 잘 구축된 사회복지 시스템을 모두 포기하고 국민들이 각자도생하도록 내팽개쳤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현재 러시아가 조우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1990년대 러시아는 정말 큰 실수를 했다.
좋은 것을 모두 파괴했다."
결론적으로 푸틴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이제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따라서는 안 된다. 질서를 지키려면 미국식이 아닌 우리만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서방 국가를 보라. 사회는 무질서하고, 경찰의 권력 남용에 사람들은 희생되고 있다.
인종 차별, 금융 불안전, 이민자 난입, 동성끼리 결혼하는도덕적 타락・・・ 문제가 없는 게 하나도 없다. 이게 다 민주주의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전통적인 가치를 그대로 보존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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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셔: ......
자신이 가르친 교훈을
스스로 따르기는 무척 힘들 거야.
이성은 열정을 제어하게 될 방도를 찾아내겠지만,
뜨거운 열정은 차디찬 계율을 뛰어넘는 법이지.
청춘은 마치 미친 토끼와 같아서,
둔한 절름발이 지혜가 쳐놓은 그물을 뛰어넘어 버리지.
하지만 이렇게 이론을 늘어놔 봤자남편을 고르는 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아.
아 ‘선택‘이라는 말!
내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도,
싫은 사람을 거절할 수도 없다니.
살아 있는 딸의 의지가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언에 매여 있다니.
너릿서, 내 처지가 정말 너무하지 않니?
내가 누굴 택할 수도 없고 거절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너릿서: 아씨의 아버님은 참으로 덕이 많은 분이셨지요.
성인들은 임종의 자리에서 영감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금, 은, 납으로 된 세 개의 상자 중에서
그분의 뜻이 담긴 상자를 고르는 사람이
아씨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제비뽑기를 생각해내신 거죠.
분명히 아씨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만이
올바른 상자를 고를 수 있을 것입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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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토니오: 그래쉬아노,
난 세상일을 있는 그대로 볼 뿐일세.
세상은 모두가 각자의 역을 맡아연기를 해야 하는 무대지. 내가 맡은 역할은 슬픈 역이야.

그래쉬아노: 그럼 난 어릿광대역이나 맡겠네.
늙으면 당연히 찾아오는 주름살이니,
웃고 즐기면서 살아야지.
속을 태우는 신음소리로 심장의 피를 말리느니
술이라도 마시면서 간을 덥히는 게 낫겠지.
몸속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 뭣 때문에
할아버지 석상처럼 앉아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눈을 뜨고 잠을 잘 텐가?
그리고 까다롭게 굴다가 황달병에 걸리면 어떡할 건가?
내 말해 주지, 앤토니오.
난 자네가 좋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세상에는 물이 고여 썩은 냄새가 나는 늪처럼
생기 없고 딱딱한 표정을 한 자들이 많이 있다네.
그런 자들은 일부러 과묵한 체하는데,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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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름, 금요일마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현재 이스라엘 영토이지만 1948년에 그들의 가족이 살았던 곳으로 ‘돌아갈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가자지구의 울타리를 급습하려 했고, 그때마다 폭력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국경 너머에서 실탄을 발사하여 수십 명의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고, 수천 명은 부상을 입었다. 몇몇 하마스 지도자들은 시위에 참가했고, 시위 참가자들에게 순교자로 죽을 준비를 하도록 요구했다. 사망자와 부상자 다수는 하마스 전사들이었는데, 몇몇은 무장하고 있었으며 울타리에 구멍이 뚫린 곳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자는 비무장 상태였으며 원거리에서 발사된 총에 맞았는데, 이는 힘을 사용하는 데 심각한 불균형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제기하게 한다.  - P133

현대 이스라엘은 폭력 속에서 건국되었으며, 이스라엘인들은건국 이후 10년마다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동안 이스라엘이 끓는 가마솥의 중심에 있다고 인식된 반면, 현재는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점점 더 격변을 일으키는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오아시스 같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전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락Ehud Barak 은 이스라엘을 ‘정글에 위치한 저택‘이라는 다소 공격적인 용어로 묘사했으며, 부분적으로는 장벽이많이 늘어나는 것에 기여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는데, 적어도 중동의 나머지 지역과 비교할 때는 그렇다. 최근에는 아랍 세계가 혁명과 분쟁으로 흔들리고 있기에 이스라엘은 주목받지 않고 있다. 그러나이스라엘인들은 현재의 상황이 바뀌리라는 점을 안다. 헤즈볼라와 하마스, 그 외의 많은 집단과 조직이 아직 이스라엘과 마무리를 짓지 않았다. 2017년 말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해당 지역 전체에서 불만이 폭발했듯이, 현 상황은 취약하며 분쟁을 재점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당분간은 모든 측면이 미래를 위해 구축하고 있다. 장벽은 폭력을관리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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